"도원수와 부원수는 아직 해서 산성(海西山城)에 있습니다. 적병이 잇따라 오므로 도원수가 황해 감사와 함께 병사를 보내어 요격하여서 동선(洞仙)에서 깨트렸습니다. 경상 병사 민영(閔栐)은 어영군(御營軍) 8천과 본도의 병마(兵馬)를 거느리고 23일에 충주(忠州) 수교(水橋)에 도착하였습니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30일 경자 5번째기사
어영군이라 칭하며 별도로 편성되어있는 8천의 병력 + 수효를 알 수 없는 경상도 병력.
정말 불분명한 기술이다. 일단 '어영군'이라 칭하며 일반 병력과 별개로 편성된 8천이 눈에 들어오는데, 당시 지방군 대다수가 숙련도와 전투력 면에서 떨어지는 속오군이었음을 생각해 볼 때, 이 8천의 병력은 '어영군'을 칭할 만큼 일반 속오군보다 정예한 전력이었을 거라 추정할 수 있다.
이 8천에 경상도 속오군이니 불확실하나마 경상좌병사 허완과 경상우병사 민영이 이끌었던 삼도근왕군 전체 병력은 최소 1만에서 수만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문제는 이 전력 전부가 쌍령 전투에 직접적으로 투입되었나인데,
인조 15년 정축(1637) 9월 9일(갑술) 맑음
이홍망이 비변사의 말로 아뢰기를,
“전일 좌기(坐起)할 때에 경상 병사(慶尙兵使) 허완(許完)의 아들 허장(許嶈)이 올린 정장 내에, ‘본영(本營)은 쌍령(雙嶺)과의 거리가 1천여 리인데, 변고를 들은 날은 바로 12월 19일이었고, 군병을 수합할 때에도 5, 6일은 족히 걸렸습니다. 그런데 1월 2일에 이미 쌍령에 도착하였으니, 열흘이 걸리지 않아 이미 적의 진영에 접근한 것입니다.
도로의 원근을 가지고 따진다면 근왕(勤王)에 앞장선 것이 진실로 여러 도(道) 가운데 으뜸이었습니다. 처음에 진을 칠 때에 망부(亡父)는 적병이 높은 곳에서 내려올까 염려하여 정예의 포수 300명과 사수 200명을 산 위로 보내어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였습니다.
해가 뜰 무렵에 수백이 되는 적의 기병이 진영 앞으로 말을 달려왔고, 수천여 기병은 산성으로부터 엄습해 와서 바야흐로 산 위에 있던 포수ㆍ사수와 서로 접전을 벌였습니다. 가장 뒤에 있던 안동(安東)의 군인이 함부로 고함치기를, 「화약(火藥)이 다 떨어져가니, 서둘러 가지고 오라.」 하니, 적병이 이 말을 듣고는 즉시 죽음을 무릅쓰고 앞으로 돌진하였습니다.
중군(中軍) 이인남(李仁男)이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달아나자, 여러 군사들이 이로 인해 뿔뿔이 흩어져 막을 수 없는 형세였는데, 망부는 오히려 친애하고 신임하는 휘하 수십 인을 이끌고 적과 싸웠습니다. 군관(軍官) 성응천(成應天)과 창순생(唱順生) 등이 망부에게 말하기를, 「대세가 이미 기울어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속히 말을 타소서.」라고 하니, 망부는 말하기를, 「어찌 차마 살기를 꾀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성응천이 이어 즉시 부축하여 말에 오르게 하니, 망부가 마침내 성응천에게 거짓으로 말하기를, 「네 말이 일리가 있으니 내가 장차 빠져나가겠다. 그렇지만 너희들은 모두 보병(步兵)이니 속히 먼저 빠져나가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성응천과 창순생 등이 그 말을 믿고 진문(陣門)을 향해 달려가 고개를 돌려서 보니, 이미 칼을 뽑아 자결한 뒤였습니다.
망부가 눈물을 흘리며 길에 오르고 사지(死地)에 나아가기를 안락한 곳에 나아가는 것처럼 여겨서 반드시 죽어야 할 곳에 스스로 몸을 던져 끝내 자결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패군(敗軍)한 죄는 비록 면하기 어렵더라도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결단코 다른 마음이 없었던 것은 옛날 사람에게도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사실대로 입계하여 다른 전례에 따라 포록(褒錄)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당초 경상 감사 심연(沈演)이 올린 장계 내에, ‘민영(閔栐)은 스스로 분신하여 죽었고, 허완은 간 곳을 모르겠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민영에 대해서만 추증(追贈)하였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허완도 진중(陣中)에서 죽었다. 그의 아들이 어지러운 시체더미 속에서 유골을 찾아냈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이 말이 기재되어 있는 문서가 없어 감히 계청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허장이 정장한 내용이 진실로 사실과 다르지 않으니, 민영의 예대로 추증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바로 승정원일기의 기록에서 자세한 투입 병력이 기술되는데, 여기서 기술되는 조선군 병력은 포수 300에 사수 200, 겨우 500명에 불과하다.
이 기술은 전사한 허완의 아들 허장의 증언에 따르는 것으로 아비의 공을 부풀리기 위해 병력을 축소했을 수는 있으나, 임금에게 직접 보고가 올라가는 건에 있어서 비변사의 관리들까지 허위보고를 그대로 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 기술이야말로 쌍령 전투에 직접 참여한 조선군 병력에 대한 가장 '사실에 가까운' 기록일 것이다.
여기에 쌍령 전투 당시 직접 전투에 투입된 병력의 규모를 추정해볼 수 있는 또 다른 기록이 하나 있다.
충청 감사 정태화(鄭太和)가 치계하기를,
"남한 산성과 금화(金化)에서 전사한 군사들에게는 모두 급복(給復)하고 모조(耗租)를 주었습니다. 본도의 험천(險川)·쌍령(雙嶺)·강도(江都)에서 전사한 자들이 도합 2천 6백여 명이니, 똑같이 휼전을 시행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또한 전사한 군사 중에 부모가 있는 자는 마땅히 조정의 분부에 따라 모조를 지급해야 하는데, 수량이 부족합니다. 원곡(元穀)을 첨가해 각각 2석씩 지급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 인조실록 36권, 인조 16년 1월 15일 기묘 1번째기사
정확한 전사자 수치가 언급되는 기록인데, 여기서 충청 감사 정태화는 험천 전투, 쌍령 전투, 강화도에서 전사한 숫자가 모두 합쳐 2천 600명이라고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이 기록 이전에 조선 조정은 험천과 쌍령에 흩어져있는 조선군 시신을 수습하는 작업을 시행했는데, 그 과정에서 상당히 정확한 수치를 집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러 기록들에서 '쌍령 전투에 투입된 조선군 병력은 전몰했다.'라고 통일되게 기술한다.
마찬가지로 격전이었던 험천 전투와 강화도 전투의 전사자를 제하고 나면 쌍령에서의 전사자 규모, 곧 전투에 직접 참여하여 전멸할 때까지 맞서 싸웠다는 조선군의 규모는 아무리 높게 쳐줘도 2천 이하로 뚝 떨어진다.
즉 많이 쳐 줘봤자 쌍령 전투에는 수만에 이르는 삼도 근왕군 본대 전부가 투입된 것이 아니고 최소 수백, 최대 천여명 정도의 병력만 선봉으로 투입된 것이다.
이를 정리해보면.
1) 삼도근왕군 총 병력은 최소 1만이 넘어가는 수만의 대군이었다.
2) 그러나 쌍령 전투에는 따로 차출되어 선봉으로 고지 하나를 점령했던 선봉대만이 투입되었다.
3) 쌍령 전투에서 주요 지휘관들과 함께 전몰했던 이 선봉대의 규모는 5백명에서 최대한 후하게 잡아봤자 1천여에 불과했다.
4) 조선군 선봉대와 교전해 무너뜨린 청군의 규모는 조선군과 비등했거나 역으로 오히려 우위에 있었다.
5) 이 전투에서 차출된 조선군은 주요 지휘관들과 함께 전몰했다.
6) 마찬가지로 본대에서 차출되어 쌍령 부근에 진을 치고 있던 청군은 주요 지휘관 2명 중 1명 부상, 1명 전사에 부대 전열이 무너지는 난전 끝에 진지마저 밀리고 본대로 전면 패퇴라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청태조 실록)
결론 : 4만이 300한테 돌격 한번에 쌉털렸다는 개졸전의 전설은 야사나 2차 사료들에서나 나오는 얘기고, 가장 공신력있는 실록과 승정원일기의 1차 사료 기록들을 조합하면 병력면에서 오히려 청군과 비등하거나 열세였던 조선군 선봉대를 상대로 청군이 개난전 끝에 간신히 판정승 거둔 격전이었다.
고로 조선군이 쌍령에서 이기려고 했으면 혼자 고지에서 적에게 앞뒤로 둘러싸인 선봉대를 본대가 죽기살기로 올라가서 제때 구원을 했던가, 아니면 선봉대 자체의 규모가 좀 더 컸던가 했으면 됐을 거 같다.
아니면 최소 주요 지휘관 일부는 후방 본대에 남아 있었던가. 선봉대가 혈전 끝에 적에게 궤멸적인 피해를 입히면서 전몰했는데 하필이면 거기에 주요 지휘관들이 다 모여있다가 죽어서 본대가 붕 뜨는 아이러니라니.
첫댓글
마찬가지로 김자점도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포위당했는데 대응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최대한 병력을 끌어모아 구원하러 갔다가 타이밍 안맞아 인조가 항복한 뒤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