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 멸망 후 금나라 여진족들은 중원으로 들어왔습니다.
종묘와 사직도 모조리 중원으로 옮겼지요.
자신의 본토인 생여진 땅에는 상경회령부 정도만 설치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여진족은 깡그리 끌어 모아도 50만 전후밖에 안된 것으로 추측이 되는데요.
이들 대다수가 화북을 다스리기 위해 중원으로 진입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금나라 시절 여진인은 600만이 절대 아닙니다. https://cafe.naver.com/booheong/137564
1.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금나라 여진족들
그렇다면 금나라 멸망 후 본토로 돌아간 여진족이나 본토에 남아 있던 여진족들은 얼마나 될까요?
게다가 본토에 여진족이 남아 있었다면 지배 계층이던 여진족외에도
이들이 부리던 노예층인 한족과 맹안모극의 거란족/해족도 있었을 가능성도 있는데
이들은 금나라 멸망 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금사를 살펴보면 이미 태종 오걸매(우키마이)조에 생여진 본토의 여진족을 다수 중원으로 이주시킨 기록도 있습니다.
금사 식화지 中
천보 5년(1121년)에 국토가 이미 개척되었고 예전에 살던 곳의 대부분이 메마르고 황무지였기 때문에
장차 그 백성들을 태주로 이주시키려고
(중략)
이에 여러 맹안모극 중에 1만호 남짓을 선발하여 종실 파로화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여 태주에서 거주하며 곡식을 심도록 하였다.
(중략)
천보 6년(1122년)에 이미 산서의 여러 주가 평정되어 상경이 내지가 되자 백성들이 옮겨와 이 지역을 채우게 되었다.
(중략)
천회 원년(1123년)에 예전부터 윤주, 습주 등 4주에 모여 살던 백성들을 심주의 경내로 이주시켰으며
금사 지리지에 따르면 생여진 본토에 해당하는 상경로와 회령부의 호구수는 대략 3만호 정도입니다.
즉 금이 중원으로 진입한 이후에도 어느 정도 인구는 생여진 땅에 계속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러나 마침내 몽고 칭기스칸의 침략이 시작되고 금은 수도인 중도(북경)이 위험해지자
생여진 본토로 돌아가는 대신 남쪽 개봉으로 수도를 옮기게 됩니다.
그러다 1215년 5월 북경이 함락되자 마침내 요동을 잃게 되었고
자신들의 원래 본거지인 생여진 땅으로 돌아갈 길이 완전히 막히게 됩니다.
물론 이전인 1212년에 몽고의 제베가 이미 요동의 동경요양부를 공격하기도 하였지요.
금사 완안승휘 열전中
승휘가 몰래 사람을 보내 꽃을 그린 그림을 바치며 말하길
<칠근이 이미 항복하였고 성중에는 굳은 뜻이 있지 않으니 신이 비록 죽음으로써 지키고자 하나
어찌 오랫동안 버틸수 있겠나이까?
엎드려 생각하건대 중도 하나를 잃게 되면 요동과 하삭이 모두 우리의 것이 아니게 되니
여러 군사가 서둘러 길을 재촉하여 구원해 주길 바랄 뿐이옵니다.>
(중략)
이날이 저무르자 진충이 성을 탈출하여 달아났고 끝내 중도를 지키지 못하였다.
1215년 5월 2일이었다.
→ 요약.
1. 금이 건국하자 여진족의 상당수는 고향을 버리고 중원으로 이동하였다.
2. 몽고가 침략하자 중원 여진족 대다수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2. 명 개국후 몽고 부족들의 공격에 떠도는 여진족들
금나라 멸망 후 생여진 본토에는 여전히 여진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금나라 여진족들은 모두 맹안모극에 편성되어 서로간의 빈부격차는 있었을 망정
나라의 지배 민족으로 노비를 최소1~2명 정도는 보유했던 것으로 기록에 나타납니다.
또한 생여진 땅에 살고 있던 이들은 여진어를 쓰고 있었고 금나라에서 만든 여진문자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즉 생여진 땅에도 한족들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여러 세대가 지난후에
생여진 땅에 남은 사람들은 대부분 여진어를 쓰고 있었습니다.
또한 금 멸망후 원나라에 종속되고 명이 개국하자 여진족의 생활 터전은 이전 생여진 본토에 국한되게 됩니다.
게다가 고려와 조선의 국토 확장 정책으로 갈라전(함경도) 마저 잃게 되지요.
엎친데 덮친격으로 몽고에서 치열한 부족간 전쟁이 발발하고 이 여파는 여진족 땅까지 미치게 됩니다.
본디 생여진으로 분류되지 않던 생여진 동북부 오국부(순자 아이만) 지역에
원나라는 매 조공로를 위해 5성 만호부를 개설합니다.
후에 3성으로 축소하였고 이중 훠르하 만호부 수장이 바로 아하추(건주위 수장 이만주의 조부),
오돌이 만호부 수장이 먼터무(누르하치의 6대조)였습니다.
이들이 생여진 땅의 여진족이었다가 오국부로 이동한 것인지
여진족의 일파로 분류되지만 생여진에는 포함이 안된 오국부 철리족의 후예인지는 불명확합니다.
단지 이들이 여진어를 쓰고 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들 아하추와 먼터무(혹은 그 아버지 휘호)는 해서여진으로 분류되는 훨운 우디거(우적합/올적합)의 공격을 받아
부족을 이끌고 남하를 개시하여 1367년경에 아하추, 1372년경에는 먼터무가
조선 국경인 두망강 일대로 오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이 무렵 아하추와 먼터무는 이성계 부하노릇을 시작하였고요.
누르하치의 선조 먼터무가 이성계 부하질하던 년도 추정 https://cafe.naver.com/booheong/110554
건주위 그 시작에 대해서 https://cafe.naver.com/booheong/155383
해서여진도 괜히 오국부를 공격한 게 아닙니다.
이들도 몽고 부족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원이 멸망하고 명이 개국하자 몽고지역에서는 치열한 부족간 전쟁이 시작됩니다.
1430년대에 서몽고 오이라트가 동몽고 타타르의 아루타이를 대대적으로 공격하게 됩니다.
이에 밀린 아루타이는 동진하여 해서여진을 대규모로 공격 약탈, 학살을 자행하였고요.
1450년대에는 역시 오이라트의 팽창에 밀린 몽고 우량카이 3위(오지예트, 옹리우드, 우량칸)도
동진하여 해서여진을 공격합니다.
또한 같은 시기 몽고 톡토부카 칸의 공격도 받았지요.
즉 몽고의 내전이 여진족의 이동을 유발한 것이었지요.
금나라와 원나라 멸망 후 당시 여진족들은 한 곳에 뿌리박고 사는 게 아니라
이곳저곳 상황에 따라 계속 거주지를 옮겨 다닐 수밖에 없는 기구한 운명이었지요.
누르하치의 6대조 먼터무도 해서여진을 피해 남진, 조선을 피해 서진, 다시 몽고부족을 피해 동진하는 등 약 5번이나 거주지를 옮겨 다녔고요.
→ 요약.
1. 생여진 땅의 여진족들은 외부 침략으로 말미암아 계속 거주지를 옮겨 다녔다.
2. 명대 여진족의 혈통은 불명확하나 여진어와 여진문자를 쓰고 있었다.
3. 누르하치대 여진 5국의 본류
외부의 충격과 내전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던 여진 부족들은 16세기 중후반을 거치면서 여진 5국으로 재편됩니다.
그렇다면 누르하치대 여진5국의 본류에 대해 잠시 알아보겠습니다.
누르하치 당시 여진족은 크게 건주여진, 해서여진, 동해여진(야인여진)으로 구분됩니다.
동해여진은 소규모 부족들이 난립해 있어 1만 명 이상의 원정군을 보유하고 있었던 여진5국
이중에 누르하치의 만주와 부잔타이의 울아의 먹잇감이 되었을 뿐이었지요.
건주여진이야 누르하치가 1588년에 통일시켰고요.
그럼 나머지 여진 4국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우선해서 여진의 본류는 울아입니다.
여진 5국의 계보도(누르하치의 선조 포함) https://cafe.naver.com/booheong/155870
를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고요.
최근에 발견된 울아 족보 <오랍(烏拉) 합살호(哈薩虎) 패륵(貝勒) 후배(後輩) 당책(檔冊)>에는
울아의 시조 <나치불우>가 금나라 완안부 완안씨의 후손이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울하, 하다의 공통 시조가 바로 이 <훨운 나라씨 나치불우>(생몰년 1367~1427 추정)입니다.
호이파도 훨운 나라씨 일족으로 포함되지만 본래는 사하랸 니마차 부족 출신의 <잌더리씨 싱워리>로
훨운 나라씨에 편입된 경우입니다.
예허의 경우가 가장 독특한데 이들의 시조는 몽고 투머트 부족의 <싱언 다르한>입니다.
싱언 다르한이 휘하 부족을 이끌고 훨운 나라씨를 공격해 이들을 학살하고 훨운 나라씨를 자칭한 경우입니다.
자신들이 자리를 잡은 예허강을 부족명으로 쓰기 시작하였지요.
이들 역시 몽고의 내전에서 쫒겨나 동진하여 여진족을 학살하고 여진땅에 정착한 경우라고 추측이 됩니다.
이들이 언제부터 여진어를 쓰게 되었는지는 불명확하나
분명한 것은 누르하치 대에는 이들도 여진어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다른 4국과는 달리 유달리 몽고 부족과 지리적이나 혈연적으로 많이 가까웠습니다.
또한 해서4국, 쉽게 훨운국은 모두 나라씨를 자칭했는데
이들이 상당 기간동안 혼인동맹으로 통혼하였기에 나라씨를 자칭해도 크게 이상할 것은 없었습니다.
즉 여진 5국 중 울아, 하다는 자칭 금나라 완안씨 후예
호이파는 사하랸 지방의 여진족의 후예
예허는 몽고 부족의 후예
만주(건주)는 오국부(철리족)의 후예?로 추정됩니다.
누르하치의 건주가 오국부/철리족의 후예라고 가정하기도 뭐한게
만주실록 시조 설화에 따르면 만주의 시조 부쿼리 용숀 또한 본디 3성 만호부 사람이 아니고 타지인입니다.
이들의 기록을 살펴보면 누르하치의 시조는 하늘에서 내려와서 어릴 때 오돌이 부족에 왔고
부족민들이 시조를 추장으로 삼았다는 내용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왔든 땅에서 솟아났든 여하튼 누르하치의 시조가 본디 3성 만호부 사람이 아니란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즉 누르하치의 본류는 명확하지 않다는 게 팩트라고 생각됩니다.
게다가 1593년 예허와 울아를 필두로한 누르하치 포위망 전쟁에서 전쟁의 명분이 바로
<신분이 미천한 누르하치 놈이 대대로 국주 출신인 자신들과 같이 놀려한다>는 것이었지요.
→ 요약.
1. 누르하치대 여진 5국의 본류는 대부분 생여진 후예를 자칭하고 있다.
2. 예허는 몽고족의 후예다
3. 누르하치는 오국부/철리족 후예로 추정되나 매우 불명확하다.
4. 여진어와 만주어
금나라 시기 여진족이 쓰던 여진어와 명대의 여진어, 후금의 만주어 거의 유사합니다.
거의 사투리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비슷합니다.
기초어휘 또한 대부분 유사하고요.
여진어와 만주어 간략 비교 https://cafe.naver.com/booheong/129677
거란어/몽고어/여진어/만주어 비교 https://cafe.naver.com/booheong/100288
여진문자 1부[부수一](1) https://cafe.naver.com/booheong/133835
여진어를 배워보자 1부~40부 https://cafe.naver.com/booheong/167296
언어적으로는 누르하치대 여진족은 금나라 여진족의 후예라고 단정해도 될 정도로
언어적 유사성이 매우 높습니다.
물론 개고기를 좋아했던 생여진과 개고기를 극도로 혐호하던 만주족의 문화와 풍습 등
몇몇 상이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풍습이나 문화를 대체적으로 보면 금나라 여진족의 후예가 후금 만주족이다 봐도 무방할 정도지요.
개 생피에 밥 말아 먹는 여진족 https://cafe.naver.com/booheong/111791
개고기를 먹지 않는 만주족 http://cafe.naver.com/booheong/111737
→ 요약.
1. 금나라 여진어와 후금 만주어는 사투리 차이 정도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유사하다.
길공구의 종합결론
1. 아골타 생여진 여진족과 누르하치 만주족의 혈연적 관계는 불명확하다.
2. 언어, 문화적으로는 후예라 봐도 무방하다.
-끝-
첫댓글 여진족의 금나라가 몽골족에게 완전히 몰살된 걸로 알고 있었는데..1234년에 금나라 망하고 누르하치가 청나라를 세운 1618년까지 400년 정도 오랜 세월이 지났죠..과연 만주족은 여진족의 후예라고 주장할 수 있을지..
사족으로 페르시아 제국(아케메네스 왕조)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멸망한 해(bc330년)부터 사산 왕조가 파르티아 제국을 몰아내고 새로운 페르시아 제국(사산 제국)을 건국한 해(ac224년)까지 550년 흘렀는데..
이란인은 같은 페르시아 민족이라고 하겠지만 사산 왕조는 500년 전의 지배층과 혈연관계도 없고, 왕실의 직계 자손도 아니죠..
엄밀히 말하면 아케메네스조때에는 이란의 정체성은 안 보인 듯 싶습니다.
자신들의 나라를 크샤샤(일단 제국으로 번역합니다.)로 칭했고 왕중왕들도 자신을 만국의 왕으로 칭했습니다.
후계 여부는 왕조층의 혈통과 직계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아골타 생여진족과 누르하치 만주족의 혈연적 관계가 불명확하고 언어 문화적으로는 후예라 봐도 무방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