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궁은 진규 부자에 대한 의혹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진규 부자는 점점 더 노골적으로 아부를 하면서 여포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진궁은 몇 차례나 그들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 말했지만 오히려 핀잔만 받을 뿐이었다. 진궁은 성격이 솔직하여 바른 말을 잘하는 통에 여포의 부장들과도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답답한 심사를 풀 수 없던 진궁은 소패 근처로 사냥을 나갔다가 파발마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의심스럽게 여겨 붙잡았다. 밀봉되어 있던 서신을 읽은 진궁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 조정의 명을 받들어 여포를 치는 것은 신(臣)이 항상 잊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신이 거느린 군사의 수가 적어 가볍게 움직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조정에서 대군이 움직인다면 신은 마땅히 선봉장이 되어 시석을 두려워하지 않고 앞장서서 싸우겠습니다.
진궁은 즉시 여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여포는 불같이 화를 냈다.
“조조와 유비 이 두 놈이 감히 내게!”
여포는 잡혀온 사신의 목을 단칼에 베고 큰소리로 말했다.
“좋다! 가만히 앉아서 당하진 않겠다. 진궁, 장패! 너희는 태산의 도적들을 알고 있겠지? 그들과 힘을 합해서 연주를 습격하도록 해라.”
태산의 도적이란 손관(孫觀), 오돈(吳敦), 윤례(尹禮), 창희(昌稀)의 무리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들은 장패와 친분이 있어서 여포와 연합하고 있었다.
“고순과 장료는 즉시 소패를 쳐라! 가서 유비의 목을 가지고 와라! 송헌과 위속은 여남으로 나가서 영천을 공격해라. 조조 녀석이 그래도 유비를 구해줄 수 있는지 어디 두고보자!”
여포는 조조보다 유비가 더욱 증오스러웠다.
“유예주가 어쩔 수 없이 조조의 뜻에 따랐을지도 모릅니다. 유예주와 힘을 합해 조조에게 대항하는 것이 더 좋은 방책이 아닙니까?”
장료가 여포에게 말했다.
“뭐야? 네 놈이 관우와 가깝게 지냈다는 말을 들었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내 명령에 토를 다는 거냐?”
“유예주는 본래 서주에 있을 때부터...”
“듣기 싫다! 네 놈이 감히 무슨 말을 하려는 게냐!”
여포가 칼을 뽑아들 기세였다.
“간단히 말해라! 내 명을 따를 것이냐, 따르지 않을 것이냐?”
“명을 받듭니다.”
장료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고순과 장료가 서주에 도착하자 현덕은 깜짝 놀랐다.
“여포가 눈치를 챘구나.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나?”
손건이 말했다.
“허도에 빨리 이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능히 그 일을 해낼 수 있을까?”
“내가 다녀오겠네.”
다녀오겠다는 말을 한 것은 간옹이었다.
“헌화(憲和=간옹의 자), 다녀올 수 있겠나?”
“걱정말아. 나 아니고야 누가 이 일을 해내겠느냐고?”
간옹은 넉살좋게 히죽 웃었다. 간옹은 역리(易理)에도 밝고 임기응변에 능하기 때문에 허도에 사신으로 보내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기도 했다.
“헌화, 부탁하네. 꼭 원군을 청해와야 하네.”
“걱정말라고. 내가 한번 한다면 꼭 해낼 것이니.”
현덕은 손건을 북문으로 보내고, 관우는 서문을, 장비는 동문을 지키게 했다. 미축과 미방 형제에게는 중군을 거느려 식솔들을 보호하게 한 뒤에 그 스스로는 남문으로 갔다. 그곳에 고순이 나타났다. 현덕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고순과 장료는 여포가 거느린 부하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고순은 청렴하면서도 강직한 사람으로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입에서 나온 소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켰다. 그의 병사들도 군기가 엄정했다. 이 때문에 그가 병사들을 이끌고 나가면 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세간에서는 그를 ‘함진영(陷陣營=진영을 함락시킨다)’이라 부를 정도였다. 여포는 행동거지가 조변석개라 늘 결정한 것을 뒤집고는 했지만 고순은 원망한 적이 없었다.
“나는 여포 장군과 원한이 없는데 그대는 무슨 일로 군사를 이끌고 여기까지 온 것인가?”
“네가 조조와 결탁한 것이 이미 백일하에 드러났다. 헛된 저항을 그만두고 포박을 받아라!”
고순은 곧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현덕은 성문을 굳게 잠그고 싸움에 응하지 않았다. 관우가 지키고 있는 서문으로는 장료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타났다. 관우가 성루에서 큰소리로 말했다.
“문원(장료), 그대와 같은 비범한 사람이 왜 여포 밑에서 수모를 겪고 있는가? 그대는 정건양(정원)을 잊었는가? 과연 여포가 목숨을 걸만한 사람이란 말인가?”
장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장료는 정원 밑에 있을 때 여포와 알게 되었다. 여포는 정원을 죽이고 동탁한테 투항했으므로 관우는 그 옛 주군의 의리를 들먹인 것이다. 장료는 정원에게서 하진 밑으로 자리를 옮겼기에 여포가 정원을 배반할 때는 같이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일이 관우의 입에서 나오자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관우는 장료가 부끄러움을 알고 있는 것을 보고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성문을 굳게 닫고 출전하지도 않았다. 몇 차례나 말을 달려 성문 앞으로 나오던 장료는 관우가 끝내 상대하지 않자 군사들을 이끌고 동문으로 달려갔다.
동문을 지키고 있던 장비는 장료를 보자 분기탱천하여 달려나갔다. 싸움이 붙은 것이 알려지자 관우가 동문으로 와서 전황을 살폈다. 장비가 기세가 등등하여 창질을 하고 있는데 장료는 자꾸만 밀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관우가 징을 울려 장비를 들어오게 했다. 장비가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들어왔다.
“대체 무슨 연유로 퇴각의 영을 내린 겁니까?”
“장문원의 실력은 너나 나에 못지않다. 이미 내 쪽으로 왔다가 내가 일러주는 말을 듣고 부끄러워 이쪽으로 옮겨온 것이야. 문원은 군자야. 함부로 핍박하면 안 돼.”
장비도 장료를 몇 차례 만나본 적이 있으니 관우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장비도 성문을 닫고 더 이상 나가서 싸우지 않았다. 소패성이 모두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는데다가 고순과 장료도 있는 힘을 다하지 않으니 성은 일시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조조의 원군이 도착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간옹은 허도에 도착하여 조조에게 여포의 침입을 알리고 원군을 요청했다. 조조는 급히 참모들을 모아 대책을 논의했다.
“본래 여포를 치려고 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여포가 아래 위로 모두 소란을 일으키고 있으니 내가 직접 움직일 수는 없다. 더구나 허도를 비우기만 하면 유표와 장수가 준동을 하니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
순욱이 말했다.
“유표와 장수는 불과 얼마 전에 크게 패하였으니 쉽게 움직이지는 못할 것입니다. 태산의 도적떼는 큰 일이 아니며 여남으로 들어온 송헌과 위속은 군을 움직이지 않고 사태를 보고 있을 뿐입니다. 서주를 공격당하면 곧바로 돌아갈 것입니다. 여포와 원술이 손을 잡는다면 문제가 커지게 됩니다.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잡아놓아야 합니다.”
곽가도 말했다.
“지금 여포를 방치하면 각처에서 반란의 무리가 기세를 올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전에 여포를 처치해야 합니다. 지금은 9월이니 겨울이 되기 전에 여포를 잡아내도록 신속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조조는 하후돈, 하후연, 여건, 이전에게 5만의 군사를 주어 소패성을 구원하게 했다. 조조 자신은 다시 대군을 거느리고 후군으로 출발했다. 간옹은 조조를 수행하여 같이 출정했다. 조조 군이 출정한 사실은 고순을 통해 여포에게 알려졌다. 여포는 후성, 학맹, 조성에게 기병 이백을 주어 고순에게 가게하고 자신도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소패성 밖 30 리 지점에 나와 조조 군을 기다렸다.
고순은 후성 등이 와서 소식을 전하자 조조 군을 요격하기 위해 소패성의 포위를 풀고 떠나갔다. 현덕도 소식을 듣고 손건에게 성을 맡긴 뒤 관우와 장비를 거느리고 조조 군을 영접하러 성을 나왔다.
선봉으로 나선 하후돈이 먼저 고순과 부딪치게 되었다. 하후돈이 창을 휘두르며 달려들자 고순이 직접 상대에 나섰다. 하후돈이 맹렬하게 창을 찔러댔으나 고순도 만만찮은 장수여서 쉽게 꺾이지 않았다. 하후돈은 호승심이 크게 일면서 가진 바 재주를 모두 드러내게 되었다. 창끝이 무지개 빛으로 변하며 사방이 창날로 변하니 고순도 더 이상 당해내지 못했다. 고순은 한번 하후돈의 창을 세게 밀어낸 뒤 그대로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하후돈이 재빨리 쫓아갔지만 고순은 기막힌 기마술로 갈짓자로 말을 달리니 쉽게 잡을 수가 없었다.
고순이 도망치는 것을 보던 조성이 활을 손에 들었다. 신중하게 겨냥을 한 뒤 시위를 놓자 하후돈이 으악하는 비명과 함께 얼굴을 감싸쥐었다. 용케 낙마를 면한 것을 보니 죽이지는 못한 모양이라 조성이 혀를 끌끌 찼다.
하후돈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손을 더듬어 화살을 손에 쥐고는 그대로 잡아뽑았다. 화살 끝에는 눈알이 따라나와 있었다. 왼쪽 눈에서는 쉴새없이 피가 뿜어져 나왔지만 하후돈은 지혈을 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자신의 눈알을 뚫어져라 들여다 보았다.
“이것은 내 아버지의 정기이고 어머니의 피다. 내가 버릴 줄 아느냐!”
하후돈은 이를 악물고 말하더니 자신의 눈알을 한 입에 삼켜버렸다. 하후돈을 쏜 조성도 그 장면에 등골이 서늘해져서 넋을 잃고 하후돈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하후돈은 그대로 말을 달려 조성에게 달려들었다.
“네 놈을 살려두지 않겠다!”
조성은 마치 남의 일을 보는 것처럼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를 못했다. 얼굴이 온통 피범벅이 된 하후돈의 얼굴에서 외눈만이 분노의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달아나던 고순이 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피칠갑을 한 하후돈이 조성에게 달려드는 것을 보고 말을 돌렸다.
“피해라!”
조성은 고순의 외침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말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놈! 어디를 가느냐!”
하후돈의 고함 소리에 조성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순간 하후돈이 날린 창이 그대로 얼굴에 꽂히고 말았다. 조성이 거꾸러지자 하후돈은 울부짖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고순이 창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하마터면 하후돈이 불귀의 객이 될 찰나에 창 하나가 튀어나와 고순의 창을 걷어냈다.
“형님을 모셔라!”
하후연이 어느 틈에 달려와 하후돈을 보호한 것이다. 이전이 하후돈을 호위해서 도망쳤다. 하후연이 고순을 막아서긴 했지만 이미 싸울 마음이 아니었다. 기회를 보아 몸을 빼자 고순의 병사들이 일제히 돌격해 들어왔다. 조조 군은 대패해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고순은 조조 군을 뒤쫓지 않았다. 등 뒤로 현덕 군이 다가올 것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순은 쉬지 않고 군을 정비해서 현덕 군을 향했다. 이미 여포가 중군을 거느리고 현덕 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조조 군이 일거에 물러설 만큼 대패를 당할 줄 짐작도 못한 현덕은 성밖으로 나와 위기를 자초한 셈이 되었다.
현덕은 관우, 장비에게 각각 군사를 주어 삼군 체제로 여포와 맞서고자 했으나 여포의 기세 앞에 소용없는 일이었다. 여포는 고순과 장료가 도착하자 이들을 뒤로 돌려 현덕 군의 배후를 공격하게 했다. 앞뒤로 적을 맞은 현덕 군은 수습을 하지 못하고 붕괴되어 버렸다.
현덕은 수하 수십기만을 거느린 채 허겁지겁 소패로 도망을 쳤지만 여포가 그 뒤를 바짝 추격했다. 현덕이 쫓기는 것을 보고 소패 성에서는 적교를 내리고 성문을 열었다. 하지만 여포가 너무 바짝 뒤에 따라오고 있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활을 쏘고 싶어도 도대체 현덕이 맞을까 염려되어 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결국 현덕의 뒤로 여포마저 성 안으로 돌입하고 말았다. 어떻게든 성문을 닫아보려 했으나 여포의 창질을 당해내지 못했다. 그러나 여포가 성문을 확보하는데 시간을 끈 덕택에 달아날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현덕은 상황이 너무나 다급해서 처들을 보러 갈 틈도 없이 서쪽 문으로 달아났다. 성 안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성을 지키던 손건만이 현덕을 쫓아왔을 뿐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주공, 기다려 주십시오!”
손건이 외치기를 몇 번이나 한 끝에 현덕이 알아듣고 말을 세웠다.
“운장과 익덕의 행방도 모르겠으니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소?”
“지금은 조조에게 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조조에게 가서 대책을 논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심한 처지였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대로로 가다가는 여포 군에게 잡힐까 두려워 산길로 접어들었다. 다행한 것은 현덕의 어진 정치가 산골 깊은 마을까지 전해져 있어 가는 곳마다 후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흉년이 몇 년을 계속 되고 있었던 탓에 기름진 음식을 볼 수는 없었지만 정성을 다한 음식은 그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깊은 산중을 지나게 되었을 때였다. 하루 종일 민가를 발견하지 못하다가 간신히 허름한 초가를 발견했다. 산속의 화전을 일구는 가난한 농부의 집인 모양이었다.
“누구 있습니까?”
손건이 부르자 한 사람이 나와 인사를 했다.
“유예주께서 난을 당해 지나가던 길에 하룻밤 신세를 지었으면 합니다.”
“유예주라니요? 유현덕 공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저기 계신 분이 유예주십니다.”
유안(劉安)이라는 청년은 화들짝 놀라 기뻐하면서 현덕을 집안으로 안내했다. 현덕의 어진 정치는 백성들에게 하나의 희망으로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그는 막강한 군대를 거느릴 수는 없었지만 더욱 강력한 인심을 거두는 데는 성공했다.
유안은 현덕의 초췌한 안색을 보고 어떻게든지 고기를 대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깊은 산골에서 창졸간에 고기를 만들어낼 재간이 없었다. 유안은 자기의 아내를 죽여 그 고기를 대접했다.
“이 산골에 웬 고기요?”
현덕이 묻자 유안이 눈길을 피하며 말했다.
“덫에 걸린 이리 고기입니다.”
현덕은 더 묻지 않고 고기를 배불리 먹었다. 포식을 하고 자리에 누운 현덕은 오랫만에 단잠을 잘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말을 가지러 갈 때 현덕은 부엌에 자빠져있는 여자 시체를 보게 되었다. 놀라서 살펴보니 어깨살이 칼로 베어져 있었다. 현덕은 그때서야 어젯밤에 먹은 고기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현덕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이 큰 빚을 어떻게 갚을 것인가?”
현덕이 말에 오르자 유안이 달려와 인사를 했다.
“의당 유예주 나리를 모시고 가야하겠지만 제게는 늙으신 어머니가 있으니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네 정성에 무엇으로 내가 보답해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구나.”
“유예주 나리는 난세에 저희들이 기대는 희망이십니다. 부디 신체를 보중하십시오.”
현덕은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하고 그곳을 떠나 양성(梁城)을 향했다. 대로에 들어서자 멀리 흙먼지가 이는 것이 틀림없이 대군이 이동하는 모습이었다. 조조 군이라 생각하고 달려가보니 역시 조조가 그곳에 있었다.
“현덕 공이 이곳에 어쩐 일이오?”
“제가 불민하여 소패를 잃고 여기까지 도망쳐 오게 되었습니다.”
“원양(하후돈)이 싸움에 졌다고 해서 안 그래도 걱정이 되어 속도를 높이던 중이었소만 이미 늦었구려. 그렇다면 이를 어쩐다?”
“대군이 이미 떠났으니 이번 기회에 여포를 잡지 않는다면 큰 후환이 남을 것입니다.”
“그건 그렇소.”
조조는 현덕에게 도망친 이후의 일들을 묻고 그 고생을 위로했다. 유안의 이야기를 듣고는 혀를 찬 뒤 손건에게 금 백냥을 내려 유안에게 전해 주게 했다.
조조는 소패로 가던 길을 바꿔 하후돈이 후퇴한 제북(齊北)으로 갔다. 하후돈은 아직도 중태였다. 하후연에게 하후돈을 허도로 보내 치료를 받게 했다. 조조는 진궁, 장패와 손을 잡고 있는 손관 등의 무리부터 치기로 마음먹었다. 소패에서 원군이 오지 못하게 조인에게 병사 3천을 주어 소패를 견제하게 한 뒤 대군을 직접 이끌고 태산을 향했다.
조조는 허저를 선봉으로 내세워 손관의 무리를 한번의 접전만에 패퇴시켰다. 조조는 서주로 내려가는 관문인 소관(簫關)으로 향했다. 소관은 진궁이 지키고 있었다. 진궁은 여포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여포도 소관이 함락되면 곤란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진등과 함께 소패를 지키러 떠나며 서주성은 진규에게 맡겼다.
진규는 아들 진등이 여포와 함께 출전하는 것이 위험해 보여서 몸을 빼내라고 조언을 했다. 그러나 진등은 웃으면서 말했다.
“제게도 생각이 있습니다. 아무 걱정 마십시오. 여포는 이번에 반드시 패해서 서주성으로 달아날 것입니다. 그때 미자중(미축)과 함께 성문을 굳게 닫고 여포를 들이지 않으시면 됩니다. 저한테는 저 나름대로 몸을 빼낼 계책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여포의 식솔들도 있고 그의 심복인 송헌과 위속도 있지 않느냐? 그들을 제압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모두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두고만 보십시오.”
이때 미축은 유비의 가족들과 함께 서주성에 있었다. 소패가 함락되었을 때 여포가 현덕의 집으로 찾아온 바가 있었다. 그때 가족들을 지키고 있던 미축이 나가 여포를 영접했다.
“자중(미축), 이렇게 보게 되니 유감일세. 현덕의 가족들이 여기 있는가?”
“대장부는 적이라 해도 그 처자는 해치지 않는 법입니다. 유예주께서는 조조의 위세에 눌려 억지로 협력하는 척 했을 뿐 장군과 대적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유예주께서는 늘 기령이 쳐들어왔을 때 장군이 원문에서 은혜를 베푼 일을 되새기셨는데 어찌 배반하실 수 있겠습니까? 깊이 헤어려 주시기 바랍니다.”
여포는 미축의 말에 헤벌죽 입이 벌어졌다.
“그런가? 현덕은 군자라 은혜를 잊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 잘 알고 있지. 나는 현덕과 오래 사귀었는데 어찌 그걸 모르겠는가? 자중은 아무 걱정말고 여길 잘 보살피록 하게.”
여포는 미축과 현덕의 가족을 모두 서주성에 가 있게 했다. 미축의 노력으로 현덕의 가족들은 적의 소굴에서도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고순과 장료는 소패를 지키고 있었지만 여남을 치러갔던 송헌과 위속은 이때 이미 서주로 돌아와 있었다. 진규가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진등은 여포를 찾아가 말했다.
“서주성은 평지에 세워져 있어 지키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조조는 있는 힘을 다해 공격해 올 것이니 자칫하면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하비에 먼저 양곡을 옮겨놓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서주성이 위태로워지면 하비에서 버틸 수 있게 됩니다.”
여포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오. 그럼 아예 내 식솔들도 그곳으로 옮겨놓는 것이 좋겠어.”
여포는 송헌과 위속을 불러 군량과 식솔들을 호위해서 하비에 가 있도록 명령을 내렸다. 진등은 이렇게 해서 간단하게 아버지의 고민을 해결한 다음 여포와 함께 소관을 향해 떠났다.
소관이 가까워지자 진등이 여포에게 말했다.
“제가 먼저 가서 현재 상황을 살피고 오겠습니다.”
여포가 허락하자 진등이 홀로 소관을 찾아갔다. 소관에 들어선 진등은 진궁을 만나 거짓 명령을 전했다.
“주공께선 공대(진궁) 공이 나가서 적과 싸우지 않는다고 역정을 내고 계십니다. 제게 그 죄를 문책하라고 먼저 보내셨습니다.”
진궁이 마땅찮은 눈으로 진등을 보며 말했다.
“조조의 군세는 산을 허물고 강을 메울 정도인데 어떻게 나가서 접전을 하겠소? 소관은 튼튼한 요새이니 이곳에서 장기전을 벌인다면 조조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소. 원룡(진등)은 주공께 소패를 지키는데에만 전력해 달라고 말씀 올려주시오.”
“알겠습니다.”
진등은 순순히 진궁의 말을 들었다. 진궁은 진등이 최근 여포에게 계속 아부와 아첨을 늘어놓아 그의 말을 여포가 잘 따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격이어서 기분은 씁쓸했지만 따지고보면 자신도 여포 집단에 뒤에 들어와 고순과 같은 고참 부장들과 그리 사이가 좋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설령 진등이 어떤 꿍꿍이가 있다해도 자신이 소관을 지키고 있는 한 문제가 일어날 리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