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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조 미 경
풀옵션 원룸텔. 호텔급 최신시설. 역세권 지하철역 도보 5분 거리, 보증금 무, 단기 임대 가능. 한 달 35만부터, 식사제공 편리한 시설 여기까지 읽었을 때 답답했던 가슴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 계속해서 화면을 클릭하자 이번에는 배고픈 사람을 더욱 군침이 돌게 하는 '라면 김치 제공'에, 깔끔한 인테리어와 주방 그리고 방의 시설들이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까지 컴퓨터 화면을 읽었을 때는 이미 피로감이 쌓여, 컴퓨터 화면의 글씨가 희미하게 보였다. 며칠째 이어지는 오피스텔 임대료 독촉 전화에 신경이 곤두서 있던 차에
마침 시간을 때울 겸 들른 P.C 방에서 옆자리에 앉아서 고스톱을 치던 추레한 남자의 전화
통화를 우연히 듣게 되어 호기심으로 클릭한 ‘고시원’이라는 글자를 치자 나타난 문구였다.
남자가 말한 고시원 정보를 네이버에 치고 나서 한참 클릭하면서 배운 것은 딱 한 가지였다. 고시원은 보증금이 없이 미리 선금을 주고 들어가서 살 만큼만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렵게 얻은 일자리는 고금리와 물가 상승으로 하루하루 버티던 사장이 가게 문을 닫고 잠적을 하게 되자, 그동안 일했던 월급도 받지 못하고 말았다. 쥐 꼬리 만 한, 알량한 돈 몇 푼에 나를 팔려고 일자리를 찾았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무일푼의 내가 기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 동네에서 여기처럼 가성비가 좋은 곳은 없다면서, 시설이 이 동네에서 제일 좋으며 시끄럽지 않아 혼자 조용하게 보내기에는 전혀 부담이 없다고 말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요즘같이 어려운 시기에 손님 한 명이라도 더 받으려고 꼬드기는 거겠지. 안 봐도 뻔하네’ 약 2분 정도 고시원 직원과 통화를 하고 거리로 나왔다.
아침을 굶어서 그런지 슬슬 시장기가 밀려온다. 지갑에는 달랑 만 원짜리 두 장이 들어있다. 이 돈을 쓰고 나면 당장 내일부터 담배도 아껴야 한다. 담배마저 없다면 이 세상 살아갈 이유가 없으니까. 만약 얻어 피워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생각하기도 싫다.
며칠째 일감을 찾지 못해 라면으로 하루 두 끼를 해결하고 있다. 술자리에서 친구들이 말했다. ‘나이 들면 마누라 손을 놓치는 순간 거지가 따로 없다고’ 그런데 나는 억지로라도 붙잡고 놓지 말아야 할 소중한 사람을 보냈다. 전문대를 졸업 후 논현동 가구대리점에 취직해 손님들에게 가구를 팔았다. 눈썰미가 좋아 손님들이 원하는 취향을 금방 파악하는 재주가 있던 나는 짧은 시간에 승진을 할 수 있었고, 돈과 함께 사람들도 따라왔다.
아내를 만난 것은 어느 비 오는 저녁이었다.
가게 문을 닫고 퇴근하려는데 급하게 물건을 찾는 아가씨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한수진. 약 1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해 첫딸을 낳았다.
수진은 가구대리점 직원으로 머물려는 나에게 지금 일하고 있는 사장에게서 독립하자고 설득했다. 그동안 모은 돈으로 임대료가 비교적 싼 수원에 대리점을 내고 영업을 시작했다.
난생처음 내 이름으로 가게를 내고 영업허가증을 받았다. 가게 한쪽 벽에 사업자 등록증을 내걸었다. 직원을 채용하고 사장이 되었다. 아침에 출근하면 벽에 걸린 사진을 보며 흐뭇했다. 그곳에 내 이름 석 자가 씌어 있었다. 김동철…몇 번을 바라봐도 좋았다.
관리실에서 관리비 독촉 전화가 걸려 왔다. 얼마 전 일하던 직장에서 잘린 후 관리비를 연체 중이다. 그동안 단기 일자리를 알아보았지만, 흔한 주유소 일도 경쟁이 치열해서 밀려났다. 뉴스는 경기가 어렵다 보니 데리고 있던 직원을 줄여 비용을 아끼는 사장님들의 한숨만 높아지고 있다는 암울한 소식만 들려왔다. 외출하려 우편함을 확인하니 우편함에 관리비 체납고지서가 빼꼼히 나를 보고 있고, 오피스텔 주인한테서 월세가 밀려 있으니 당장 나가 달라는 내용이 적힌 우편물이 등기로 왔다.
며칠째 이어진 휴대폰 메시지에는 좋은 소식은 없고 그동안 친구들에게 빌린 돈을 언제 갚을 거냐는 내용이 메시지 함에 들어 있었다. 당장 이 집에서 쫓겨나지 않고 사는 방법은 밀린 관리비를 일부 입금하고, 집주인에게 사정해서 밀린 월세를 송금하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전기도 끊기고 도시가스도 끊겨서 추운 겨울에 난방도 되지 않는 집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덜덜 떨면서 보내야 하는 것이다. 휴대폰을 열어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아 이번에는 문자를 남겼다.
‘누나 미안하지만 돈 있으면 500만 원만 빌려줘’ 이렇게 쓰고 나서 전송을 누르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였다. 그동안 누나에게 빌려 쓴 돈이 꽤 되었다.
3개월 전에도 누나에게 1,000만 원을 빌려 친구에게 빌린 급전을 갚고 나머지는 생활비로 쓰고 나니 다시 갚을 길이 없었다. 못난 동생 때문에, 마음고생할 것을 생각하니 미안함이 앞섰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 돈이 필요한 나는 체면 따위는 잠시 잊고 철면피가 되기로 했다. ‘이번에 일 잘되면 꼭 갚을게. 제발 부탁이야’라고 쓰고 나서 전송을 눌렀다.
약 1시간 후 답장이 왔다. 반가운 마음에 문자를 확인했는데 딱 한 문장이었다.
‘더 이상 너에게 줄 돈 없어. 땀 흘려 일해’
어린 시절부터 누나는 나에게 엄마 같은 존재였다.
부모님을 대신해서 아침이면 반찬을 만들어서 도시락을 챙기고 나와 형들을 살뜰하게 챙겨주던 고마운 사람이었다. 학교에 다녀오면 씻기고 먹여 주며 마치 친아들처럼 나를 키워주었다. 집안에서 막내로 자란 나는 부모님의 사랑은 물론 형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집안에서 귀여움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내가 학교에 다녀오면 누나는 언제나 간식을 다른 형제들 몰래 숨겨두었다 꺼내 주곤 했다. “우리 동철이, 오늘은 학교에서 말썽부리지 않고 공부 잘했지?” “누나. 그런데 이것 말고 또 없어?” 내가 이렇게 물으면 누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거 우리 막둥이에게만 주는 거야.” 하고 대답했다. 그런 누나가 변했다. 누나는 친구들처럼 고교에 입학하지 못하고 부모님을 대신해서 우리 형제들을 돌보다가 중매가 들어와서 대전으로 시집을 간다고 했다.
매형은 대전에서 작은 가게를 한다고 아버지가 말해 주었다.
앞으로 누나는 돈 잘 버는 집에 시집가서 배고픔은 면하고 살 거라고 엄마는 한숨을 쉬며
나에게 말했다. 누나가 시집을 갈 때 나는 매형과 함께 떠나는 누나 치맛자락을 붙잡고 울며불며 떼를 썼다. 어리광 부리는 나를 달래는 엄마 뒤에서 한참 눈물을 훔치던 누나는 나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동철아. 누나가 나중에 우리 동철이 보러 올 테니까, 아버지 엄마 말씀 잘 들어. 알았지.” 그리고 몇 달에 한 번씩 편지가 간간이 오더니 연락이 끊겼다.
누나는 명절에도 고향 집에 내려오지 않았다.
명절이면 친구들은 객지에 나가 돈을 버는 형들이, 누나들이 선물을 사 와서 자랑하는데, 나에겐 하나밖에 없는 누나가 고향 집에도 오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 마을 당산나무에 서서 누나가 오기를 학수고대했지만, 단 한 번도 다녀가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 후 누나의 정갈한 글씨가 배달되었다. 누나는 아이를 낳았다고 했다. 나에게 드디어 조카가 생긴 것이다.
처음에 엄마는 바쁜 농사일을 제쳐두고 금방이라도 누나 산바라지를 위해 대전으로 떠날 것처럼 하더니,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농사일만 했다. 부모님 말씀으로는 누나는 시집살이 때문에 집에 올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누나가 너무 보고 싶었다.
그 시절 나는 마당에 칸막이를 만들어 염소와 토끼를 길렀다.
염소를 길러서 새끼가 태어나면 동네 아저씨에게 팔았다. 그리고 그 돈을 농협에 저축했다. 공부에 취미가 없던 나는, 친구들과 꼴을 베러 들판으로 뛰어다니고 아버지의 농사를 도와주면서 차츰 누나를 잊어갔다. 그리고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었다.
중학생이 되어 염소 판 돈을 가지고 누나가 사는 대전으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탔다. 손에는 누나의 주소가 적힌 종이쪽지를 꼭 안고 있었다.
대전역에서 내려 누나가 사는 동네에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서 여러 사람을 붙들고 물어보았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내린 나는 공중전화로 누나에게 전화했다.
급한 일이 아니면 절대 전화하면 안 된다는 엄마의 말이 생각났지만, 주소를 들고 찾아다니다 공중전화 부스 앞에서 다이얼을 돌렸다. 한참 심호흡을 한 나는 몇 번을 망설인 끝에 누나를 바꿔 달라고 말했다. 상대방은 내가 전화를 건 것이 무척 불쾌하다는 듯이 무어라 몇 마디 하더니 기다리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그리운 목소리를 들었다. “여보세요, 누나야? 진짜 우리 누나야?” 내가 감격에 겨워 말을 하자 누나는 깜짝 놀라며 “네가 어쩐 일이야 편지도 없이…” 누나는 다짜고짜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나는 당황했지만, 골목에 있는 간판과 집의 구조를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가방을 들고 골목을 걸어가는 내게 누군가 ‘동철아’ 하고 부르는데 나는 그만 모르는 사람이 나를 부르는 소리로만 들렸다. 내가 기억하는 누나는 호기심이 가득하고 늘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나를 보살펴 주었는데, 몇 년 사이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누나의 등에서는 아기가 울며 보채고 있고, 비쩍 마른 계집아이가 누나 손을 잡고 칭얼거리고 있었다. 내가 “누나 맞아?” 하고 묻자 예의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밝게 웃어 주던 누나는 어디에도 없고 삶에 찌들어 말라비틀어진 담배꽁초 같은 초라한 아낙네가 서 있다.
나는 순간 누나가 가엾다는 생각이 스치면서 마치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마음이 쓰라렸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 항상 우리 막둥이가 보고 싶었는데, 누나가 사는 게 바빠 전화도 못 하고 말았어.” 누나는 나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누나를 따라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꼬불꼬불한 길을 한참 동안 걷자, 낡은 집들이 나타나고 공터에서 사내아이들이, 딱지치기하면서, 놀고 있었다. 아이들의 옷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어린 시절 동네 어귀에서 놀던 생각이 났다.
등에서는 아기가 배가 고픈지 계속 칭얼대고 있는데 누나는 아기를 어르지 않고 잠자코 걷기만 한다. 대문 밖에 연탄재가 수북이 쌓여 있는 집 앞에 멈추더니 누나가 말했다.
“여기가 내가 사는 집이야.” 대문은 칠이 벗겨져 본래의 색이 사라지고 없었다.
마당에는 수도가 놓여 있고, 마당을 빙 둘러서 작은 마루가 이어져 미닫이문을 열면 방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오래된 집이었다. 누나는 창고 같은 문을 열더니 그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문을 열자 부엌이 있고 좁은 부엌은 한 사람이 서 있기에도 좁아 보였다.
세간살이는 어린 내가 보아도 볼품없이 찌그러져 있고, 그것마저도 남이 쓰다 버린 것을 주워다 놓은 듯, 차마 눈 뜨고 볼 수조차 없었다. 방안에는 부업을 하다 나왔는지 구석에 일감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방 안에는 제대로 된 살림이 하나도 없었다.
누나가 부엌으로 나가 밥을 챙겨 오는 동안 나는 찾아오지 말아야 할 사람을 찾아온 것처럼 미안함이 앞섰다.
손이 시려 바지 호주머니에 손을 넣자, 몇 개비 남아 있지 않은 담뱃갑이 손에 잡힌다.
답답한 속을 달래기에는 그래도 이것만 한 것이 없어… 허공에 하얀 연기를 ‘후’ 내뿜으며 길가에 서 있으니 길을 걷던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함께 있던 아가씨에게 무어라 속삭인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도로에 서서 담배 냄새를 풍긴다고 욕하는 소리가 내 귓가에 들린다. 내가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었나. 날마다 쓰레기통을 뒤져서 꽁초를 주워서 피우는 일이 얼마 전까지 부끄러웠는데, 오늘은 어찌 된 일인지 머쓱하지도 않고 예전에도 그렇게 살아왔다는 듯이 담담하다. 전봇대 옆에 있는 벼룩시장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얼른 한 장을 꺼내어 집으로 부리나케 가지고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이 볼까 봐, 반으로 접어 엘리베이터를 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구인난을 먼저 들여다보았다. 3D업종이라 부르는 주물 공장에서는 구직자를 뽑는 곳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광고 문구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지는 글자를 읽어 보니 ‘나이 55세 이하 신체 건강한 남자’
내 나이 이제 60이다. 이력서를 가지고 가면 막일 하는 곳에서도 나이가 많다고 써 주지 않는다. 서글프다. 언제 이렇게 나이가 들었을까. 친구들은 환갑을 맞이해서 마누라 데리고 여행을 간다는데 나는 여행은커녕 일자리도 없어 빈둥거리다 집에서도 쫓겨나 갈 곳이 없다.
2호점을 낼 계획을 세울 때만 해도 모든 일이 너무 잘 풀려 자만심이 들었다.
통장에 돈이 쌓이자 번쩍거리는 자동차를 사서 밤이면 동창들을 불러 모아 술을 샀다.
동창들은 내가 전화만 하면 거절하지 않고 약속 장소로 나왔다.
얼마 전 동창회에서 만나 명함을 주고받았던 녀석 중에서, 보험 영업하는 김석민이 제일 먼저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석민과 나는 사무실 근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식사를 같이했다. 밥을 먹으면서 석민은 뭔가 할 말이 있는지 내 눈치를 보고 있어 먼저 선수를 쳤다.
“너. 왜 그래? 무슨 할 말이 있어서 나를 찾아온 것 같은데…”
“할 말은…” 석민이 말을 못 하고 있어 내가 먼저 툭 터놓고 이야기했다.
“뭔데 그래? 너, 보험 영업한다면서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도와줄게.”
그제야 석민은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친구야, 동철아. 정말 고맙다. 사실 이번 달 마감이 며칠 남지 않았는데, 지점장은 실적 올리라고 쪼아대지, 정말 미치겠다. 그래서 너를 찾아온 거야.” 석민에게 화재 보험과 생명보험을 들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동창들에게 소문이 났는지 초등 동창과 중학교 동창들까지 찾아와 부탁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들의 부탁을 들어 주었고 어느 날은 건강식품을 500만 원어치나 현금으로 사서 집에 갔더니 수진은 노발대발 화를 냈다.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거 당장 현금으로 바꿔 와. 이런 거 필요 없어. 당신이 성
공 했다고 하니까 친구들이 호구로 보는 모양인데, 이러면 안 되지…”
수진은 어이없다는 듯이 내가 가지고 온 물건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무조건 교환 이야기만 한다. 그렇지만 나는 친구 한번 도와주는 셈 치고 건강에 좋다고 아내를 설득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잊었다.
멋을 모르고 오로지 돈을 버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던 내가 백화점에 가서 비싼 명품 양복을 걸치고 다니면서 우쭐했다. 명절이면 부모님을 찾아뵙는 대신 가족들과 해외여행 가서 흥청망청 즐겼다. 그렇게 해도 매장에 물건을 쌓아 두면, 날개 돋친 듯이 팔려 직원들도 덩달아 신나서 영업했다.
동종 업계 다른 사장님들의 입에서는 손님이 없다, 구매력이 떨어지는 진상손님 때문에, 장사 망쳤다는 하소연을 들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내 수진도 처음에는 아이들 뒷바라지 신경 쓰느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관심도 없었는데, 생활에 여유가 생기자 동네에서 학부모들과 어울리면서 백화점에서 명품 한 개씩 사는 재미가 들렸는지 생활비가 모자란다고 하소연이다.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면, 옆집 누구네 엄마 집에 놀러 갔는데 그 집은 아파트 평수가 넓어서 도우미 아줌마가 청소하고 밥도 한다며 부러워한다.
우리 부부는 어렵고 힘든 시절을 점점 잊게 되었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소원했던 누나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매형이 일하다 다쳐서 급하게 수술해야 한다는 말에 그제야 힘들게 사는 누나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그때까지도 누나는 매형 울타리에서 조카들을 키우고 건사하느라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살고 있었다. 처음 누나를 찾아갔을 때의 참담함을 잊지 못한 나는 무슨 방법으로도 꼭 누나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것이 나를 자식처럼 돌봐준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찾아간 후 누나는 매형 몰래 내가 대학물을 먹을 수 있도록 등록금을 지원해준 고마운 은인이었다. 그런 누나가 자립할 수 있도록 누나가 작은 편의점을 계약할 때 아내는 아예 머리를 싸매고 누워서 나하고는 말도 하지 않으려 했다.
아내의 마음을 모르지는 않지만 힘들게 사는 누나를 여유 있는 동생이 도와주면 좋을 것 같아 그렇게 결정했는데, 그동안 고생해서 저축한 돈을 누나에게 쏟아붓는다, 생각하니 아내는 속상하고 억울한 모양이다. 그렇지만 누나의 도움으로 이만큼 성장을 했기 때문에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부부 사이가 나빠지는 결과를 낳았다.
공장과 직거래를 통해 물류비와 인건비 등을 아꼈고 어음이 아닌 현금을 선호한 나는, 업체 사장님들에게 귀한 손님 대접받으며 가게를 확장했다.
처음 가구점을 낼 때는 작은 공간에서 사람들이 손쉽게 구매하는 저렴한 중. 저가를 선호하다가 나중에 가게를 이전하면서 마진 폭이 좋은 혼수 가구를 주력 품목으로 하게 되었다.
봄과 가을에는 일산 킨텍스에서 열리는 혼수 가구 페스티벌을 다녀와서 유행하는 가구를 꼼꼼하게 담아 매장에 선을 보이면, 직원들은 고객을 놓치지 않으려 대폭 할인해서 팔았다. 더 많은 물건을 전시하기 위해 옆에 비는 가게를 임대로 얻었다. 장사는 잘됐다. 가게를 확장하고 나니, 모든 비용이 불어 나갔다. 나는 주말과 휴일에도 쉬지 않고 일했다.
매주 월요일 회의 시간이면 전국 대리점에서 집계한 판매왕을 선발해서 그들을 본받으라고 직원들을 압박하며 매출 올리기에 혈안이 되어있었다. 동종 업계에서 사장들은 누구나 한 가지 욕심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만의 공장을 세워서 자신이 원하는 가구를 디자인해서 시장에 내놓는 것이었다. 또 한 가지는 공장 자리는 땅값이 오르게 되면 자연스럽게 가치가 올라 떼돈을 벌 수 있는 찬스가 올 수도 있어 부동산으로 큰돈을 버는 것이었다.
가구 회사 사장이 되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니 어디에 가서도 당당하게 명함을 내밀 수 있어 내심 사업 확장에 대한 꿈을 접을 수가 없었다.
그때도 수진은 한사코 반대했다. 가구 회사를 설립하면 빛 좋은 개살구처럼 겉보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실속이 없다는 것이었다. 회사를 설립하고 원가 절감을 위해 부지 매입하고 기계 설비를 하자면 많은 투자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은행에 빚을 떠안게 되고 금융 부담이 크게 되면 골머리를 앓을 수도 있고 직원들이 인건비 문제로 속을 썩일 것이라 예상했다. 그렇지만 나는 가구대리점 사장에 만족하지 못하고 주식회사 사장 자리에 앉아 세상을 바라보고 싶은 꿈이 있었다. 남들이 기획한 밥상에 상을 차리는 것이 아닌, 내가 직접 디자인한 가구를 납품하면서 나의 숨결이 담겨 있는 물건을 대한민국의 주부들에게 저렴하게 선보이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가구 회사 한 곳에 공동투자 했다.
넓은 집무실과 회의실이 있는 곳에서 매일 회의 하고 납품단가를 낮추기 위해 연구소 직원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밤늦게까지 일에 몰두했다. 또한 국내에 입점해 있는 이케아와 경쟁하기 위해 신제품 출시에 앞서 품질과 디자인을 비교하면서 소비자 마음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값싼 원재료를 찾아 중국 출장길에 올라 국내에서 생산되는 원목 등을 비교 분석하는 것도 나의 일이었다. 그렇게 회사는 조금씩 성장을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회사로 달려가서 일하고 집안일에는 무신경으로 일관하면서 아파트를 시공하는 건설사에 가구를 납품하기 위해 건설사 임원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대형 건설사에 가구를 납품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메이저급 건설사들은 아파트에 기본 옵션에 포함되는 붙박이장 같은 가구는 실용성보다 가격이 저렴한 것을 선호했다.
아파트 건설 현장에 찾아가 현장 소장을 만나 계약을 따내기 위해 봉투를 건네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자연스레 회사에는 따로 관리할 비자금이 필요했다.
비자금이 있어야 영수증 없이 수의 계약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만들 수 있어서 세무서의 눈을 피해 교묘하게 이중장부를 쓰는 등 회계 감사에 걸리지 않을 모든 준비를 하면서 일을 진행했다.
회사를 키우기 위해 직영점을 운영하면서, 한편으로는 소비자에게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강남 한복판에 복합 인테리어 공간을 꾸미려 시장조사도 했다.
사업성을 알아보기 위해 강남 논현동 가구 거리를 쏘다니며, 그들이 어떤 가구에 끌리는지 직원들의 입과 귀를 통해서 전해 들었다.
회사 규모가 커지자 늘 긴장해야 했고, 만기가 돌아오는 어음 때문에 밤잠을 설쳐야 했다. 현금 확보를 위해 어음을 발행했다. 영업이 되지 않으면 고스란히 빚으로 돌아오기에 일 잘하는 직원들에게는 인센티브를 지급하고 영업력이 떨어지는 직원은 과감하게 잘라 냈다.
소비자의 눈을 사로잡기 위해 지역 방송국에 연예인을 광고 모델로 내세워 광고를 냈다.
그리고 고층 빌딩에 광고탑을 세워 운전자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생산한 제품을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렇게 회사는 승승장구 하며 연일 최고가 매출을 올리게 됐고 일간신문에 자랑스러운 중소기업인이라는 타이틀로 당당하게 지면을 채우기도 했다.
수진은 아이들이 중.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자 자신도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해 달라고 졸랐다. 집안에서 조용하게 살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 탓에 밖에서 사람들과 만나 대화하고 무엇인가에 집중하는 것을 흥미 있어 하는 수진에게는, 프랑스에서 생산한 고가의 소파와 침대 등을 오퍼 회사를 통해 들여와서 대한민국 최고의 가구를 주력상품으로 파는 대리점을 열게 해주었다. 그녀 특유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한국에 없는 특별한 가구를 원하는 사모님들이 주 고객이 되었다. 이런 고객들은 편리함보다는 비싼 값을 치르더라도 자신만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추어 집을 단장하고 침실을 꾸미고 싶어 했다.
주부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빠르게 돌더니 청담동 사모님들이 한 명씩 매장을 찾아 물건을 사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연예인들까지 찾아와 구경하는 숍이 되었다.
그 즈음 수진은 자연 모임이 잦아져서 집안 살림은 도우미에게 맡기게 되고 요즘은 성형외과 바람이 불었는지 어느 날엔가는 눈에 반창고를 붙이고 들어오고, 눈에 부기가 빠지는가 싶으면 또 어느 날은 코에 붕대가 감겨 있다.
내가 잔소리하면 수진은 남들도 다하는 성형이라고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젊은 시절에는 부모님이 주신 얼굴에 칼자국을 내면 안 된다고 펄쩍 뛰더니, 요즘 식탁에서 마주치면 예전 얼굴이 아니라 낯설다. 우리 가족은 점점 대화가 줄었다.
아이들은 각자 방에서 나오질 않고 주말이면 수진은 지인들과 라운딩 가느라 아침에 일어나면 집안에 없다.
5년 후에는 품목을 확대해서 주방용품 일체를 수입해서 새로운 사업장을 오픈했다.
지금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지만 나는 한 가지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것은 날마다 황금알을 낳아 주는 거위의 고마움을 잊고 돈과 명예를 한꺼번에 쥐려고 무리하게 은행 대출까지 받아 가상 화폐에 거액을 투자한 것이다.
누구나 처음에는 안전하게 돌다리도 두드려 걷는 심정으로 투자했다.
언론과 영상매체에서는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달러가 아닌 가상 화폐로 편리하게 결제할 수 있다고 연일 보도 했다. 젊은이들, 특히 대학생들도 여기에 힘을 보태서 일확천금을 노리고 가상 화폐로 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 일들이 일어났다.
내가 투자한 가상 화폐는 다른 종목에 비해 원금의 2배의 수익을 올렸다.
그동안 탄탄대로만 걷던 나는 이번에도 나의 운명을 믿었다. 회사에서 중역들과 몇 번의 회의 끝에 내린 결정이었지만, 모두 거액 배팅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수진은, 반대 의사를 밝혔다. 가상 화폐는 불확실성에 투자하는 것이라면서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지만 나는 돈에 눈이 어두워 동전의 뒷면을 보지 못한 우를 범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가상 화폐를 발행했던 주체가 구속되면서, 한순간에 거액을 잃고 회사는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한순간의 판단 실패로 크나큰 실책을 범한 후 회사는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모든 상여금을 동결시키고 조기 퇴직자에게는 대리점을 운영할 수 있는 권한을 주면서 인원 감축을 단행했다. 회사를 키우느라 동고동락한 직원들을 내 손으로 자르는 것은 괴롭고 힘든 일이었다.
저녁마다 혼자 소주를 마시며 지난 일을 곱씹어 보며 후회했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뒤였다. 회사는 연일 술렁거렸고, 업계에서는 부도설이 나돌면서 은행에서는 대출 상환 요구 전화가 걸려 오기 시작했다. 경리부 자금 담당 상무는 결재 서류 대신에 은행 지점장 전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물었다. 그러나 나는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답 외에는 뾰족한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은행은 담보물이 없으면 대출을 승인하지 않는다.
물류 센터를 짓기 위해 용인에 땅 3,000평을 계약할 당시만 해도, 전국에 물류 센터를 착공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렇지만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부동산을 매각을 할수 밖에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19는 소비자들의 지갑을 닫게 하고, 사람들을 집안에 갇혀 있게 만들었다. 경기에 민감한 주부들은 이사 철이 되어도, 계절이 바뀌어도, 더 이상 가구를 교체하려 들지 않았다. 회사가 어려워지자 협력업체에서는 선금이 아니면 물건을 줄 수 없다고 통지를 해왔다. 직영점을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었다. 끝까지 회사를 살리기 위해 대부업체에 남아 있는 집까지 담보로 제공하면서 회사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나중에는 본사 직원들이 급여까지 밀리자 사장 퇴진 운동까지 벌이게 되었다. 나는 회사 대표이사직을 억지로 사임하고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그때 아내 수진은 밀려드는 채권자들에게 온갖 수모를 겪어야 했다.
아내는 1년 후 내가 숨어 지내던 곳에 찾아와 이혼합의서를 내밀었다.
이미 세상의 온갖 멸시와 야유로 인해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폐해진 아내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는 정식으로 합의 이혼에 서명했다. 아내와 이혼 후 살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했지만 나를 찾아다니는 빚쟁이들 때문에 길게 일하지 못했다.
당장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했지만 나를 받아 줄 회사는 없었다.
고민하던 끝에 숙식을 제공한다는 소갈비를 파는 가든에서 숯불을 피우는 알바를 시작했다. 낮에는 혹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가 됐지만,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곳이라 그럴 걱정은 거의 없었다. 일은 힘들었지만 먹고 사는 것만 해결되면 된다고 생각하고 지냈다. 휴대폰 번호를 바꾸고 나서도 어떻게 알았는지 찾아오는 채권자의 험한 소리도 듣지 않으니, 살 것만 같았다. 채권자들은 빌린 돈을 갚지 않으면 하나밖에 없는 딸을 찾아가겠다는 협박과,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을 찾아가서라도 돈을 받아 내겠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나를 몰아세웠다.
직원들에게 밀린 급여와 퇴직금 등을 해결할 방법이 없는 나는 거리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누나와 매형, 그리고 다른 형제들에게 일터를 마련해 주고 이런 상황이 됐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60이 넘은 남자가 집도 절도 없이, 떠돌다 보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당장 머물 곳도 마련하지 못한 나는 허름한 싸구려 모텔에 짐을 풀었다. 배낭에서 짐을 꺼내어 세탁하면서 초라한 내 모습에 자꾸만 한숨이 나온다.
얼마 전부터 새벽 인력시장에 나가 하루 일당을 받았다. 소개비와 점심 식사비를 제하고 손에 쥔 돈이 10만 원이다. 오랜만에 손에 쥐는 거금이라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날마다 하루 일당을 받아서 저축하면 웬만한 고시원 한 달 방세를 제하고도 식비 등도 충분히 될 것 같아 몸은 힘들어도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려 했다.
일당벌이로 3일째 일했더니 밤이면 어깨가 쑤시고 결려서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이렇게 돈 버는 일이 힘든 것을 처음 알았다.
장마가 시작되자 하루하루 일당으로 일하는 현장도 일이 없다고 한다.
멍하니 텔레비전 화면에 눈길을 주다 담배를 피웠다. 가족들에게 더 이상 돈 이야기를 하지 못하게 된 나는 찜질방을 전전하다 용산역에서 노숙자 생활을 며칠 동안 했다.
신불자가 된 나는 통장을 만들 수도 없고 신용카드를 발급받을 수도 없어, 무기력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낮에는 공원에서 시간을 죽이다가 저녁이면 용산역으로 신문지 한 장을 들고 달려갔다. 좋은 자리는 이미 고참, 노숙자들이 차지하고 신참의 경우에는 바람을 피할 수 없는 노면이 가까운 곳이 그나마 한 몸을 누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용산역에는 근처 교회에서 무료 급식 봉사차가 왔다.
따끈한 밥 한 그릇을 얻어먹기 위해 식판을 들고 너도나도 줄을 서서 기다렸다.
주머니에 잔돈푼이라도 있는 날에는 무료 급식소의 멀건 국물이 싫었지만, 두 끼를 굶고 나니 텅 빈 위장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나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이 식판을 들고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은 처량해 보였지만, 강한 식욕 앞에서 체면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맛있는 음식 냄새에 내 발걸음도 자연스레 급식 차량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앞에서는 때에 전 옷을 입은 늙수그레한 남자 둘이서 서로 먼저 줄을 섰다고 싸우고 있었다. 따가운 햇볕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등에서는 연신 땀이 흐른다. 밥과 국, 그리고 밑반찬이 굶주린 사람들의 위장을 채워 주었다.
식판에 남은 국물까지 깨끗하게 핥아 먹었지만 여전히 배가 고팠다.
다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점심을 얻어먹은 나는 별로 할 일도 없어 용산역 근처를 배회하다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으로 들어서니 나무 위에서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대고 있다. 여름이 깊어 가는 모양이다. 플라타너스 밑에는 그늘이 있어 시원했다.
그곳에 앉아있으니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그동안 나를 찾는 전화는 한 통도 오지 않았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속담이 있는데, 나의 경우에 틀린 말은 아니었다.
먹고 살기 위해 주유소에서 주유원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낮에는 아는 사람을 만날지 몰라 해 질 녘부터 새벽까지 주유원으로 일할 때 새벽 1시가 넘은 시간에 하필 그 사람을 만났다. 사회에서 일하게 되면서 알게 된 임 사장은 끝까지 나를 믿어 주고 기꺼이 거금을 빌려준 사람인데 그 사람의 신뢰를 저버리고 신용불량자가 되어 거리를 떠돌게 되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임 사장은 나로 인해 자신이 살던 집이 경매로 넘어가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고 들었다. 그는 나를 한 번에 알아보고, 자동차에서 내려 “김 사장, 어떻게 이런 데서 일하고 있어?”라고 말을 건넸다. 그의 말에 나는 고개도 들지, 못 할 만큼 미안하고 할 말이 없었다. 그와 나는 동종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인데 나는 단 한 순간의 실수로 회사와 집도 날리고 가진 재산을 모두 빼앗겨 살아도 산 사람이 아닌 마치 산송장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그 후 어떻게 알았는지 채권자들이 내가 일하는 주유소에 찾아와 돈을 언제 갚을 것인지 협박하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다른 동료들 보기 부끄러워 주유소에 이야기 못하고. 야반도주하듯 도망쳐 용산역에서 노숙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헤어진 아내에게서 몇 차례 전화가 걸려 왔다. 다시는 얼굴은커녕 목소리 들을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다짜고짜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이제는 남남이 된 마당에 확 뒈져 버리든, 노숙하든 당신 맘대로 해도 되지만, 왜 하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용산역이야. 다른 곳에 가서 조용히 죽던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어떻게 사는지 먼저 안부를 물어야 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수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의 체면을 구긴 것과 아직도 자신의 눈앞에서 알짱거리며, 자신과 자식의 인생에 끼어들어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하게 된 것 때문에 화가 난 모양이었다.
저녁에 잠을 자려고 누우면 그날의 일이 떠올라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나로 인해서 우리 가족은 해체되고 풍비박산 나서 한국에서 고개 들고 살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살을 맞대고 산 세월이 있는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묻고 싶었다.
수진의 말처럼 벌레처럼 사람들에게 손가락 받고 사느니 차라리 이 세상을 등지고도 싶었다.
그러나 이미 한번 죽었다 태어난 몸이라 생각하니 쉽게 이번 생을 마치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답게 다시 살아보려 근처 인력시장에 갔다.
새벽 5시, 아직 하늘에는 달이 환하게 거리를 비추는데, 현장 사무실 앞에는 나이가 지긋한 남자들이 두꺼운 작업복에 장갑을 끼고 불안한 듯 서성거리고 있었다.
곧 추운 겨울이 되면 건강한 사람도 면역력이 떨어져서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염려 섞인 말이 주변에서 들려왔다. 며칠 전 현장 잡부를 구한다는 소식을 근처 교회 목사님께 들었다. 목사님은 며칠 동안 무료 급식소에 나와 급식 봉사하면서, ‘노숙을 하는 것보다는 바람을 막아 주는 쪽방이라도 가서 있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목사님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수중에 땡전 한 푼 없는 거지가 되었어도 여전히 자존심은 살았는지 목사님의 말이 무시하는 말로 들렸다.
며칠 뒤 거리를 쏘다니며 쓰레기통을 뒤져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잠자리로 돌아왔을 때 누군가 시비를 걸었다. 자신이 자리 잡은 자리를 내가 누워 있으니 자리를 비켜 달라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 더 이상 그곳에 갈 수 없는 나는 누더기가 된 이불을 걸치고 맨바닥에서 밤을 새웠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은 뼛속까지 냉기가 파고들어 쑤시고 아팠다.
어깨가 결려 잠을 제대로 잘 수조차 없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나서 그길로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는 수염을 깎지 않아 마치 짐승처럼 변한 노인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순간 나는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한참 동안 거울 앞을 서성거리고 있는데 환경미화원이 나를 발견하고는 귀신이라도 본 듯이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갔다. 역 광장 벤치에서 햇볕을 쬐다 언제나처럼 무료 급식을 먹은 후 공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날 저녁 역 화장실에서 면도하고 머리도 감았다.
그리고 한 가지를 결심했다. 과거의 나를 잊기로 …
잡부들은 현장 기술자들이 일할 수 있도록 현장 곳곳에 설치된 곳에 불을 피우고 추위를 피할 수 있도록 먼저 잡일을 시작했다. 아침 7시가 지나자 현장에서 일하는 기술자들과 회사관계자들이 하나둘씩 출근했다. 나는 이것저것 현장에서 자질구레하게 쌓여 있는 자재들을 한군데로 모으고 있었다. 현장 소장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다가오더니 레미콘 쪽으로 가서 보조 역할을 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나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라 멀뚱히 서 있으니 저쪽에서 큰 소리가 들린다. ‘어이, 형씨. 첫날부터 그렇게 눈치가 없으면 현장 밥 어디 먹을 수 있겠어.’ 하는 반말이 들렸다. 나는 삽을 들고 레미콘에서 시멘트가 바닥으로 부어질 때 삽으로 평평하게 고르는 일을 했다. 시멘트는 무게가 무거워서인지 몇 삽 뜨지도 않았는데 어깨가 아프다. 하루 일용 잡부로 받은 일당은 십삼 만원.
인력사무소에 소개비를 떼고 내 수중에 들어온 돈으로 저녁을 사 먹었다.
내게는 너무나 큰돈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밤에 어깨가 결리고 쑤셔서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힘든 노동의 양에 비해, 너무나 적은 돈…
나는 그동안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는지 새삼스럽게 나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며칠 동안 내린 폭설과 한파로 공사장은 곳곳에 땅이 얼어붙어 어려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장갑과 양말을 두 켤레나 끼고 신었지만 발은 금방 시리고 온몸은 얼어붙을 듯이 춥기만 했다. 삽질하다 말고 모닥불에 몸을 녹였다. 점심에는 추위를 피해 막걸리 한 잔씩을 걸치고 일했다. 알코올이 몸속으로 알싸하게 퍼지니 온몸에 온기가 도는 듯하다.
며칠째 파스를 붙이고 끙끙대고 앓았다. 아무래도 몸살이 난 듯하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면 피로가 풀릴 듯해서 찜질방 이용권을 끊었다.
그동안 씻지 못해서 더러운 몸을 씻고 온탕에 들어가니 살 것 같았다.
이렇게 노숙하다가는 죽을 것 같아 다음날은 한기를 피해 쪽방을 알아보았다.
쪽방은 한 사람이 누우면 물건을 둘 공간도 나오지 않았다.
종일 돌아다닌 끝에 얼마 전 상담 받은 고시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루 세끼 무료 식사와 함께 방안에는 샤워 시설이 있어 더러운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더 이상 방치하지 않고 지낼 수 있어 당장 계약했다.
밤이나 낮이나 옆방에서 켜 놓은 TV가 가뜩이나 예민한 내 신경을 건드려서 순간순간 짜증이 나지만, 입실한 지 며칠도 안 된 사람이 총무에게 무어라 말 못하고, 끙끙거리며 일주일을 버텼다. 잠자리가 편안해지자 게으른 습관이 생겼다.
한 달 방값을 선불로 지급하고 나니, 손바닥에서 피가 나도록 일했던 일용직 일은 더 이상 할 수가 없다. 그렇게 20일이 흘렀다.
그날은 잠에서 일찍 깨어 부엌에 있는 쓰레기통에서 어느 방에서 피웠을지 모를 담배꽁초를 주워 들고 몰래 방으로 들어왔다. 순간, 부끄러움도 모르고 당당하게 담배꽁초에 불을 붙이고 담배 연기를 내뿜으니 가슴에 맺혔던 응어리가 풀리는 것만 같다.
일하려 해도 교통비조차 없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고시원 건물 일식집에서 주차 관리하는 남자와 안면을 트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대리운전 일을 시작했다. 대리운전 첫날은 운이 좋았는지 7만 원의 수입을 올렸다. 새벽까지 이어진 일은 몸을 축나게 했다. 방으로 돌아와 라면 한 봉지를 끓여 먹고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주말은 술자리가 없는지 공치는 날이 생겼다. 어떻게라도 돈을 벌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지만, 쉬운 일자리는 없었다.
옛일은 아무리 되돌리려 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때늦은 후회의 눈물을 흘려야 아무 소용이 없다. 그날은 전날부터 머리도 아프고 어깨가 뻐근해서 일을 쉬려 했다.
하지만 마음을 추스르고 일하기로 마음먹었다. 하루 쉬면 다음은 게으른 내면의 꼬임에 빠지면 며칠 동안 모아 둔 돈을 편의점에 소줏값으로 날려야 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오후 4시에 기상해서 일할 준비를 하고 방을 나왔다.
대리 호출받기 위해 술집이 많은 골목길을 서성이고 있었지만, 끝내 호출은 울리지 않았다. 휴대폰을 보면서 담배 한 대를 피우며 길가는 행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자기들끼리 희희낙락 웃고 떠들고 있었다.
순간 가슴속에서는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한 집에 두고 온 딸아이 생각에 잠시 울컥했다.
그때였다. 무엇인가에 부딪힌 느낌이 있은 후,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정신이 들어 보니 어느 낯선 방안에 누워 있었다. ‘정신이 들어요?’ 누군가 물었다.
나는 무의식 속에서 “여기가…어딥니까?” 물으니 “기억이 나지 않으세요?” 하는 답이 돌아왔다. 이야기하는 내내 몸이 쑤시고 아팠다.
내가 길거리에 서 있을 때 10대 청소년들이 나를 공격했다는 말에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내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그날 그들에게 아무런 잘못한 일이 없는데 얻어맞아서 온몸이 푸른 멍이 들어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이다. 서글픔이 몰려온다. 잠시 혼자 멍하게 누워 있으니 경찰관이 나에게 몇 가지 물어볼 말이 있다고 한다. 나는 그날 일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경찰은 청소년들의 부모들이 합의금 명목으로 나에게 돈을 줄 것이라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들은 집을 나와서 술 한 잔을 마시고 돌아다니다 자신들을 기분 나쁘게 쳐다본다는 이유로 나를 공격했다고 경찰관이 친절하게 말해 주었다.
며칠 동안 병원에서 치료받은 후 퇴원했다. 그 일이 있은 후 밤에 불을 끄고 누우면, 젊은 애들이 나를 공격하는 악몽에 시달렸다. 잠을 자려 해도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하다 보니, 입안이 마르고 체중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일을 하러 거리로 나서다가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면 괜히 움츠러들고 무서웠다. 합의금으로 받은 돈은 점점 줄어들고 일하지 못하니 정신이 점점 피폐하게 말라 갔다. 결국은 남은 돈을 들고 새로운 곳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내가 살던 고시원 근처는 너무나 무섭고 끔찍해서, 방값이 비교적 저렴한 용산역 근처 쪽방촌으로 이사를 했다.
쪽방촌으로 이사하고 보니 뜨거운 물을 쓰기도 불편하고 공용화장실은 늘 막혀 있어 지내기가 불편했다. 그러나 내가 가진 돈으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몸이 아파 며칠을 죽은 듯이 방안에 누워 있었다. 일거리를 찾아 어슬렁거렸지만, 쉽사리 일은 잡히지 않았다.
몸은 점점 메말라 가는데, 병원비가 무서워 병원에 가지도 못하고 약국에서 진통제로 버티는 날이 길어졌다. 몸이 아파도 일을 쉴 수가 없어 건설 현장에 일용잡부로 일하기 위해 새벽길을 나섰다. 어둑어둑한 거리에는 인적이 드물고 낮이면 늘 북적거리던 카페도 침묵 속에 잠겨 있다. 인력사무소 앞에는 두꺼운 옷과 장갑으로 온몸을 감싸고 서서 몸을 웅크린 사람들이 일당을 벌기 위해 추위 속에 오들오들 떨고 있다.
그들의 입에서는 허연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는데 표정에는 간절함이 짙게 배어 있다.
며칠째 식사다운 식사를 하지 못해 어지럼증이 생기고 뱃속에서는 꾸르륵 소리가 난다.
어제저녁 라면 한 개를 끓여 먹고 아직 공복이다. 뜨거운 믹스커피 한잔이 간절하게 마시고 싶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레미콘에서 시멘트를 부으면 삽으로 고르게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잠시 쉴 틈도 없이 레미콘은 계속해서 들어왔다. 저녁 5시 작업이 끝나고 옷을 갈아입었다. 갑자기 몸이 휘청거리며 기우뚱거리는 것을 느낀다. 눈앞이 흐릿해지고 기운이 하나도 없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체감 온도는 영하 10도가 넘는데 여기 길바닥에 쓰러지면 안 된다. 어떡하든 집까지는 기어서라도 가야 한다. 의식은 점점 희미해지면서 점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때 아버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동철아, 너, 거기서 뭐 하고 서 있어…이쪽으로 와 하는 손짓에 그만 눈물이 났다.
얼마 만에 만나는 아버지인가. 말을 하려 해도 혀가 굳었는지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달려가려고 했지만 내 발은 허공을 걸을 때처럼 몸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버둥거리기만 했다. 건너편에서 아버지는 내 이름을 자꾸 불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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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누나는 언제나 엄마같은 존재였지요
배고픈 시절 쪽방촌은 참으로 많은
애환이 숨어있었던 것 같습니다
잔잔한 감동의글 잘 보고 갑니다
노동자의 삶
고된 하루를 다루는 백수의 건달
요즈음 현실을 담은 이야기 늪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아마 단편소설인 것 같아요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의 일대기를 그려낸
과거의 이야기가 묻어나오고 그에게는
사랑하는 누나의 인물도 등장하고요 누나라는
존재는 엄마와 같은 존재이지만 아마도 이 소설에서는
누나의 많은 도움을 받고 자라온 것 같습니다
늪에 대한 단편소설 잘 읽었습니다
늪
사업을 하다 보면
확장은 필수고
성장과 더불어
모험심도 커지지요
경험 부족으로
한번에 날리는 일도 다반사
리얼하게 보고나서
나에 시절도 돌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