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국이 지는 저녁
- 이지수
돋보기 없이는 글자가 문드러져
폭폭한 능선 위 저녁놀만 읽습니다
아무리 더듬어봐도 모르겠는 점자들
이만큼 흘러왔는데 또 얼마나 가아 할까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건 그대만은 아닌 듯
수국이 돌아선 자리 별빛 저리 글썽입니다
삶은 끝끝내 풀지 못할 수수께끼여서
내가 왜 하필이면 전생에 무슨 죄로
물음표 가득한 오늘이 속수무책 집니다
ㅡ 《다층》( 2024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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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순국선열의 날', 1937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날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열망과 울분이 응어리진채 광복을 맞이하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 모든 것을 기억하시던 아흔 여섯 장모님는 조금전의 일은 더러 깜박깜박하시지만
자식들이 모르는 먼 기억은 아직도 간직하고 계십니다
아들 하나 딸 다섯을 키우시며 혼자만의 여러 애증을 간직하셨을 텐데...
모처럼 모인 아들딸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하는 게 서글프다시며 지청구를 쏟아냅니다
말끝마다 '건강해라'고 당부를 남기시면서 맏딸 집을 떠나 외아들네로 거처를 옮기실 준비에
며칠전부터 분주하시더니 모처럼 함께 모인 아들딸을 보시고는 '웬일이냐?"고만 자꾸 웃으십니다
전생에 지은 죄를 알아보기 전에 그저 오늘을 어떻게 보낸 것인지만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수국처럼 맑으신 장모님의 고운 얼굴에 근심걱정이 머물지 않기만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