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주로 떠난 이회영, 국내에 잠입해 고종황제 망명 시도하다
조선 최고의 명문가 집안을 독립운동의 최전선으로 끌고 간 우당 이회영. (사진=역사의 아침 제공)
1918년 11월 말. 만주로 망명했다 조선에 다시 돌아온 이회영은 중대한 비밀공작에 착수했다.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당한 뒤 덕수궁에서 칩거생활을 하고 있는 고종 황제를 망명시키는 일이다. 만일 고종이 중국으로 망명해 항일투쟁에 나선다면 일제의 조선 지배는 일대 위기를 맞을 수 밖에 없었다. 이회영은 고종을 북경으로 망명시킨 뒤 개전조칙을 발표하도록 해서 양반 지배층 전체를 항일투쟁으로 이끌 계획이었다. 그러나 일제가 고종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어 기회를 잡기 어려웠다. 그래도 이회영은 포기하지 않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말년의 고종 황제. 신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함녕전에서 내려오고 있다.
이회영은 은밀히 고종의 시종 이교영을 통해 고종에게 망명 의사를 타진했다. 예상대로 고종은 선뜻 망명 계획을 승낙했다. 당시 고종은 강제로 퇴위당한 뒤 나라마저 뺏기고 일본에 끌려간 황태자 영친왕을 일본의 왕족 이방자와 혼인시킨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에 차 있었다. 순종이 후사가 없는 판국에 그 후계자마저 일본 여자와 결혼한다면 조선 왕실의 혈통은 완전히 끊어지는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내부대신으로 일하다 을미사변 때 사직한 민영달이 그 얘기를 듣고 선뜻 나섰다. "황제의 뜻이 그렇다면 분골쇄신하더라도 뒤를 따르겠소" 그러면서 5만 원의 거금을 이회영에게 거사자금으로 전달했다. 이회영은 이 자금을 북경에 있던 동생 이시영에게 보내 고종이 거처할 행궁을 빌리도록 했다. 거사만 남겨놓은 시점에서 예상하지 못한 사태가 발생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당사자인 고종이 급작스럽게 서거한 것이다.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회영과는 별도로 상해임시정부는 고종의 다섯번째 아들 의친왕을 상해로 망명시키려는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다.
의친왕 이강. 임시정부 등 여러 단체에서 의친왕의 해외 망명을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번번히 실패했다. (사진=역사의 아침 제공)
의친왕은 황실 가족 가운데 가장 항일의식이 강했다. 1919년 11월에 제작한 제2차 독립만세운동 선언서에 의친왕 이강의 이름으로 참여한 적도 있었다. 임시정부 안창호 내무총장은 국내에 있는 대동단 총재 전협과 협의해 의친왕을 상해임시정부로 망명시킬 계획을 짰다. 의친왕은 일본경찰을 속이기 휘해 수염을 붙이고 중절모자를 쓴 채 기차를 타고 중국의 안동역(지금의 단둥)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러나 의친왕이 사라진 것을 안 일본경찰은 신의주나 부산 등 국경지대로 형사대를 급파해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그러다 안동역 부근에서 의친왕을 몇 차례 본 적이 있는 형사의 눈에 띠어 체포되고 만다. 국내로 압송된 의친왕은 훗날 임시정부로 친서를 보냈다. "임시정부에 합류해서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는 동시에 조국의 독립과 세계평화에 헌신하겠다" 그러나 망명실패 후 일본의 엄중한 감시에 놓이면서 울분에 찬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는 1940년부터 시행한 일제의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며 저항했다. ◈ 이회영과 그 형제들, 일제와 무력항쟁을 벌이기 위해 만주로 망명하다 일제가 한반도를 무력으로 점령한 직후인 1910년 가을. 백사 이항복의 10대 후손인 이회영의 형제 6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조선 최고의 명문가 집안인 이회영 일가의 가계도. 이들 모두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의 최전선에 나선다. (사진=우당기념사업회 제공)
이회영은 여섯 형제 중 넷째로, 위로는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이 있었고, 아래로 이시영과 이호영이 있었다. 이회영은 형제들에게 전 가족이 만주로 이주해 일제와 싸우자고 설득했다. "이것이 왜족과 혈투하시던 백사 이항복 공의 후손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형님들과 아우님들은 나의 뜻을 따라주시기를 바랍니다" 모두 이회영의 뜻에 동조하자 곧바로 가산 정리에 나섰다. 급하게 정리해 마련한 자금은 약 40만 원의 거금으로, 지금으로 치면 600억 원에 달했다. 1910년 12월, 대륙에서 불어오는 차디찬 바람을 무릅쓰고 이회영 형제 일가는 압록강을 건넜다. 배를 타고 건넌 뒤 이회영은 뱃사공에게 원래 배삯의 두 배를 지불하며 "일본 경찰이나 헌병에게 쫒기는 독립투사가 돈이 없어 헤엄쳐 강을 건너면 나를 생각해 배에 태워 건너게 해주시요"라고 부탁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안동현에 도착한 이회영 일가 40여 명은 마차 10여 대에 나누어 타고 1차 집결지인 북쪽의 횡도촌으로 향했다. 사전에 모의한 대로 횡도촌에는 이회영 일가 뿐 아니라 안동의 대표적인 유학자 석주 이상룡의 일가와 이상룡의 처남인 김대락 일가, 안동의 황호, 김동삼 일가가 속속 도착했다. 이 곳에는 먼저 도착한 강화학파의 정원하, 이건승, 홍승헌 등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에서 고관대작들이 일본이 하사한 작위와 은사금에 취해 있는 동안,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들이 모든 재산을 들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100여 명의 이주민들은 길림성 통화현에 있는 합니하에 정착했다. 이석영이 거금을 쾌척해 이 일대의 토지를 사들여 1912년 3월부터 독립군 양성을 위한 학교 신축공사를 시작했다.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이 훈련받는 모습이다. 생도들은 전문적인 군사이론과 전술을 배우고, 체계적으로 군사훈련을 받았다. (사진=역사의 아침 제공)
3달 후 드디어 새로운 교사가 완성됐다. 문을 연 신흥무관학교에는 본과와 특별과가 있었다. 본과는 4년제 중학교 과정이었고, 특별과는 3개월, 6개월 과정으로 군인을 양성했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는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김산의 생생한 수기가 실려 있다. "학교는 산속에 있었으며 18개의 교실로 나뉘어져 있었다. 18살에서 30살까지의 학생들 100명 가까이가 입학했다. 학과는 새벽 4시에 시작하고, 취침은 밤 9시에 했다. 우리들은 군대 전술을 공부했고, 총기를 갖고 훈련을 받았다. 가장 엄격하게 요구했던 것은 산을 재빨리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이었다. 게릴라 전술과 한국의 지세, 특히 북한의 지리에 관해 주의깊게 공부했다. 봄이면 산이 아름다왔다. 다들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으며, 기대로 눈이 빛났다. 자유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신흥무관학교에는 훗날 독립운동을 이끌 쟁쟁한 교사가 거쳐갔고, 1919년 11월 안도현 삼림지역으로 이동할 때까지 약 3,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던 통화현 합니하에는 현재 학교 터만 쓸쓸하게 남아 있다. (사진=역사의 아침 제공)
1920년 10월 청산리에서 일본군 1,200명을 몰살한 전투에는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대거 가담했다. 만주지역에 흩어져 있는 모든 항일무장단체는 물론, 의열단, 광복군, 공산당이 이끄는 조선의용대에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주축을 이뤘다. 신흥무관학교는 그야말로 무장 항일투쟁의 젖줄이었다. ◈ 이회영, 아나키스트들과 손 잡고 일본에 대한 테러에 나서다 1931년 10월 말 상해로 근거지를 옮긴 이회영은 한·중·일 세 나라의 아나키스트를 규합해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했다. 그 산하에는 '흑색공포단'이라는 직접행동대를 조직했다. 흑색공포단은 제일 먼저 국민당에서 노골적으로 친일행위를 하고 있는 외교부장 왕정위를 저격했다. 이어 천진에 군수물자를 싣고 입항한 11,000톤급의 일청기선에 폭탄을 던져 선체 일부를 파손하고 많은 사상자를 냈다. 천진과 복건성 하문에 있는 일본 영사관에도 잇따라 폭탄을 던져 건물을 파괴했다. 이들의 뒤에서 이회영은 거사계획을 짜고 자금과 무기를 제공했다.
이회영과 아이들. 맨 왼쪽 아이인 이규창의 나이로 미루어 1920년경 북경에서 활동하던 시절로 추정된다. (사진=역사의 아침 제공)
상해마저 일본군이 점령하자 이회영은 다시 만주로 가서 원래의 망명 목적이었던 항일무장투쟁을 조직해 나가기로 결심했다. 이때 나이가 환갑이 훨씬 지난 65세였다. 이회영은 만주에 도착하면 이 지역의 실권자인 장학량과 연대해 유격대를 조직하고, 암살단도 만들어 일본 천황을 제거할 계획이었다. 1932년 11월 초, 달빛이 환한 밤이었다. 이회영은 아들 이규창과 함께 상해의 황포강 부두에서 영국 선적인 남창호에 올랐다. 허름한 중국옷을 입은 이회영이 자리잡은 곳은 제일 밑바닥인 4등 선실이었다. 이규창은 부친이 안착하기를 빌며 큰 절을 올린 후 배에서 내렸다. 이규창은 만주에서 도착 편지가 오기를 기다렸으나 편지는 오지 않았다. 마침내 전보가 왔으나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 이은숙이 아들에게 보낸 전보였다. 전보에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11월 17일 부친이 대련 수상경찰서에서 사망"
안중근 의사 등 수많은 항일투사들이 거쳐간 여순감옥. 이회영은 대련 수상경찰서가 아니라 여순감옥에 투옥된 후 순국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진=역사의 아침 제공)
이회영을 맞이하러 대련항 부두로 나간 동북의용군사령부 요원 4명은 이회영이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들은 다방면으로 이회영을 구하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며, "반도(반역자)가 팔아넘겼다"고 사령부에 보고했다. 만 65세 노인 이회영은 혹독한 고문에도 끝내 함구했다. 본적지마저 밝히지 않았다. 누구보다 무장투쟁의 속살을 알고 있는 그로서 젊은이들을 지키기 위한 외로운 투쟁을 벌인 것이다. 가혹한 고문 끝에 이회영이 숨지자, 일본 경찰은 '삼노끈으로 자살했다'고 발표하고 서둘러 화장을 해서 흔적을 지웠다.
순국 당시 이회영이 착용했던 옷. 독립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다. (사진=역사의 아침 제공)
이회영을 따르던 아나키스트들은 복수를 다짐했다. 이들은 이회영의 만주 출발을 일본 경찰에 알린 밀정 이태공과 연충렬을 일본 경찰이 찾고 있는 김구 선생을 만나게 해주겠다고 유인했다. 접선 장소에 나타난 이들 밀정 두 사람은 죄상을 자백하고 벌판에 끌려가 처단됐다. ◈ 조국은 해방됐지만 6형제 중 이시영만 살아 돌아오다 상해에서 발행되던 <한민>에는 1936년 5월 25일자로 '이석영의 공'이란 글이 실렸다. "이석영이 수많은 재산을 신흥무관학교 운영에 모두 쏟아붓고도 나중에는 지극히 곤란한 생활을 하면서도 일호의 원성이나 후회의 개식이 없고 태연하여 장자의 풍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또한 이석영이 2년 전 상해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났고, 그의 부인도 상해의 조카 집에서 유명을 달리했다고 전했다. 셋째 이철영은 1925년에 이미 사망했으며, 여섯째 이호영은 1933년에, 첫째 이건영도 1940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다섯째 이시영을 제외한 다섯 형제 모두 독립운동을 하다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시영(오른쪽에 중절모를 쓰고 눈물을 닦고 있는 분)과 김구 주석(가운데 안경쓴 분). 그 눈물의 뜻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맨 앞의 소년이 국가정보원장에 오르는 이종찬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선 지배층이 있는 반면, 이렇게 자신과 가족의 모든 것을 던진 지배층도 있었다. 망국과 동시에 만주지역에서 조직적인 독립운동이 가능했던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지배층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회영 일가는 명예 대신 모든 것을 다 잃었지만 그 후손들은 꿋꿋하게 살아 남았다. 형제 중 유일하게 귀국한 이시영은 초대 부통령에 취임했다가 1951년 이승만의 독재가 노골화되자 미련없이 부통령 자리를 내던진다. 이회영 선생의 손자 중 이종찬은 국회의원에 이어 민주화가 되자 국가정보원장을 지냈다. 또다른 손자 이종걸은 현재 새정치민주연합의 국회의원이다.
서울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묘지에 있는 이회영 선생의 묘. 평생을 조국 독립운동에 바친 이회영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최근 <이회영과 젊은 그들>이란 평전을 발간한 역사학자 이덕일 박사는 이렇게 이회영 선생의 인생을 평가했다. "황포강 부두에서 이회영을 마지막으로 배웅한 아들 이규창은 자서전 <운명의 여진>에서 '나의 부친은 참으로 불쌍한 분이다'라고 썼다. 물론 이회영의 일생은 개인적으로 대단히 불쌍한 삶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인생은 과정이고 그런 과정의 총합이 역사다. 역사도 과연 이회영을 불쌍하다고 규정하고 있는가? 일제로부터 자작이니 백작이니 하는 벼슬을 받은 수작자들의 일생과 이회영의 일생 중에 어느 쪽이 더 불쌍한지는 역사가 말해준다. 그리고 그 역사는 현재 우리의 삶은 올바른 것인지를 이회영의 인생을 통해 반문하고 있다"
http://www.nocutnews.co.kr/news/40644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