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위와 동맹>
- 용감왕 볼레슬라프의 초상 -
볼레슬라프는 967년 폴란드 대공 미에슈코 1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인질로 신성로마제국에 가기도 했고, 마이센 변경백의 딸과 결혼하기도 했으나 곧 이혼하고 헝가리의 공주와 결혼을 했다. 그러다 992년 부친인 미에슈코 1세가 죽자 폴란드의 대공이 되었다. 그러나 권력 기반은 불안했다. 최소 두명 이상의 친척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계모도 불안불안했다.
그래서 즉위하자마자 그는 위협이 될 수 있는 계모와 계모의 두 아들을 쫓아냈다.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오토 3세에게 지원을 요청해 친척들을 제압하고 대공이 되었다. 이후 그는 신성로마제국과 동맹을 맺고 왕권 강화에 주력했다. 이 와중에 그는 아달베르트(1)의 주검을 자신의 영토로 가져와 묻었고 이 일로 교황에게 신뢰를 받게 된다.
- "그대의 행동은 짐의 맘에 쏙 드는 구려." -
또한 그는 황제 오토 3세와 우호관계를 다지려고 노력했는데 오토 3세의 루사티아(2) 원정을 도와주었고 1000년에 황제가 폴란드를 방문할 때 그의 재물을 보여주면서 그의 호의를 사려고 애썼다. 감격한 오토 3세는 볼레슬라프를 황제의 친구로 선언했다. 이것이 주군과 신하의 관계에서 맺은 것인지(3), 아니면 동등한 자격으로 맺은것인지는 논란이 있지만 어찌 되었든 볼레슬라프의 권위를 보장해주었다.
<제국과의 전쟁>
- "네 이놈! 짐이 아닌 말고 딴 놈 편 들었단 말이지?" -
그러나 이 좋은 관계는 1002년 파탄나고 말았다. 오토 3세가 죽고, 그의 친척 하인리히가 하인리히 2세란 이름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것이다. 하필 볼레슬라프는 하인리히 2세의 경쟁자(암살당했다.)를 지원한 경력이 있던데다가 마이센과 루사티아의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하인리히 2세의 심기를 거슬리게 한 것이었다. 일단 하인리히는 루사티아를 신성로마제국의 신하 자격으로 소유할 수 있게 해주었지만 마이센은 불허했다. 여기까지는 참 좋았지만 문제는 하인리히가 뒤에서 볼레슬라프 암살 음모를 꾸몄고, 이것이 들통났다는 것이었다.
- "도와주었다가 빼앗다가 이게 뭐냐!" -
이제 눈치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볼레슬라프는 은근슬쩍 루사티아뿐만이 아니라 마이센까지 점거했다. 공물은 더 안 바치기로 했다. 더군다나 그가 후원했던 보헤미아 왕 볼레슬라우 3세의 폭정에 지친 보헤미아 귀족들의 지원 요청을 받자 바로 보헤미아로 진격하여 1003년 자신이 보헤미아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헝가리를 공격해 이슈트반에게서 슬로바키아 지역을 뜯어내었다.(4)
기겁한 하인리히 2세는 슬라브계 루티치 족과 동맹을 맺고 폴란드를 침공했다. 이 군대는 괴멸당했다. 하지만 그는 1004년에 다시 군대를 일으켰다. 이 원정은 나름 성과를 보아서, 보헤미아에서는 나름 성과를 봐서, 볼레슬라프가 1년만에 보헤미아 왕위에서 물러나게 만들었고 마이센과 루사티아를 다시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보헤미아 왕국의 영토였던 모라비아 지역은 여전히 그의 손아귀 안에 있었다. 덤으로 이 때 미에슈코가 정복했던 포메라니아에서 반란이 일어나 독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볼레슬라프는 역시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1007년 마이센과 루사티아를 재점령했고, 포메라니아에 대한 지배권도 어느정도 회복해냈다. 신성로마제국도 반격을 개시했지만 그 반격은 슐레지안만 좀 깔작대다 마는 수준이었다. 결국 1012년 5년간의 휴전협정이 체결됬다. 하지만 그걸로 만족할 볼레슬라프가 아니었다. 불과 1년후 협정이 깨졌다. 결국 하인리히 2세는 그에게 제국의 봉신 자격으로 마이센과 루사티아를 소유하는 걸 인정해야했다.
볼레슬라프의 반항 기질은 이걸로 사라진게 아니었다. 조약이 체결되고 1년 정도 된 1014년, 그는 보헤미아와 연계하여 황제에게 저항하려고 시도했고, 황제의 군대 징발 요구도 거부했다. 전쟁이 재개되었는데 이 때 볼레슬라프는 신성로마제국을 가지고 놀았다. 신성로마제국의 침공 시도가 보이자 모라비아인들을 동원해 제국의 영토를 공격해 침공군을 회군시키고, 마구잡이로 여러 곳을 약탈하는가 하면 보헤미아가 제국 편에 붙자 보헤미아로 다시 군대를 몰고 갔다. 결국 신성로마제국은 1018년 바우첸 조약을 맺어 폴란드가 마이센과 루사티아를 신성로마제국의 봉신 자격이 아닌 독립국으로써 소유하게 하였다. 즉 신성로마제국 권역에서 마이센과 루사티아가 제거된 것이었다.
<용감왕의 말년>
- 스뱌토폴크를 새긴 키예프 루스의 동전 -
그러나 그에게 쉴 틈은 없었다. 자신의 사위인 키예프 공 스뱌토폴크가 동생 야로슬라프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도망쳐온 것이었다. 사위를 복귀시키기 위해 그는 신성로마제국과 평화조약을 맺고 얼마 안 되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키예프로 진격했다.
야로슬라프는 그를 막기 위해 버그강에서 전열을 갖추고 기다리고 있었다. 볼레슬라프는 이 군대를 야로슬라프의 예상보다 빨리 기동시켜서 기습을 통해 격파해냈다. 야로슬라프는 도주했고, 키예프 성문은 스뱌토폴크를 위해 활짝 열렸다. 볼레슬라프와 스뱌토폴크는 키예프로 입성했다.
- 키예프에 입성한 볼레슬라프 -
그곳에서 볼레슬라프는 환대받으며 6개월간 머물렀다. 동시에 그는 스뱌토폴크의 부친 블라디미르가 빼앗아갔던 붉은 루테니아를 다시 폴란드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이런 일련의 작업을 마무리한 뒤 그는 폴란드로 돌아갔다. 그러자마자 다시 키예프에서 반란이 일어나 야로슬라프가 복귀했고, 스뱌토폴크는 페체네그족에게서 군대를 끌어모아 다시 한번 키예프 탈환을 기도했지만 실패하고 죽었다.
이렇게만 보면 볼레슬라프가 확장에만 신경쓴 것 같지만 사실 그는 내정에도 신경을 썼다. 그는 폴란드 최초의 제대로 된 교회를 건설하고, 경제에 관심을 가졌으며, 법을 정비하며 왕권을 강화했다. 나름대로 영토도 넓히면서 폴란드의 기반을 닦은 것이다. 실제 미에슈코와 볼레슬라프의 치세 동안 폴란드의 영역은 상당히 넓어졌다.
- "이 빨간 선 안의 땅이 모두 폴란드의 강역이니라!" -
그러던 와중 1024년 하인리히 2세가 죽었다. 이 쯤 되자 눈치볼 것도 없어졌던 볼레슬라프는 바로 폴란드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리고 최초의 '폴란드 국왕'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하고 얼마 안 되어 죽었다. 그의 아들 미에슈코가 뒤를 이어 폴란드 왕이 되었다. 하지만 그 동안 억눌렸던 귀족들, 아직 슬라브 신앙을 믿던 폴란드 내부 이교도 부족들, 포메라니아인들, 볼레슬라프에게 쥐어터지기를 반복했던 신성로마제국과, 키예프 루스, 헝가리, 보헤미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미에슈코를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결국 폴란드는 혼란 상태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1) 키예프 루스로 떠난 적이 있던 그 인물이 맞다. 그는 981년 볼레슬라프의 지시에 따라 프로이센으로 선교활동을 갔다가 그 곳 토착민들에게 살해되었다.
(2) 현재의 독일-폴란드 접경지역
(3) 이 무렵 신성로마제국은 폴란드에 대해 종주권을 행사하려고 애썼다.
(4) 전설에 따르면 1000년 경에 교황이 볼레슬라프를 폴란드 왕으로 임명하려고 왕관까지 만들어놓고는 꿈 속의 계시에 따라 그에게 주기로 한 왕관을 헝가리 대공 이슈트반에게 주어 그가 왕이 되게 하였다고 하는데 이렇게 되면 1003년에 볼레슬라프는 보헤미아의 왕이 되고, 헝가리를 패배시킴으로써 어떤 의미에서는 복수한 셈이 되었다.
첫댓글 나름 크고 아름다운 폴란드
문제는 금방 붕괴됩니다.
폴란드와 헝가리 선교를 통해 영향력행사하려고 했고.. 실제로 교황과 알력 + 부실한 계승만 아녔다면.. 저둘은 진즉에 제국에 편입됐을지도 ㅡㅡ;;
뭐 그렇겠죠. 근데 폴란드도 계승이 개막장이라는게 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