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위 기방을 이끄는 큰어머니인 단양은 동경을 보며 머리단장을 세심하게 했다. 오늘은 아무리 화려하게 꾸며도 모자란 감이 있었다. 값비싼 떨잠을 머리에 꽂고, 금은옥과 산호로 장식된 뒤꽂이도 가채 위에 다채로이 장식했다.
주름을 가리기 위해 희디 흰 분을 바르고, 입술에는 연지를 칠하고, 유일하게 세월을 빗겨간 것 같은 고운 손등 아래 자리한 손가락에 가락지 를 끼웠다. 넓게 퍼진 치맛자락 위에 노리개와 기생의 신분과 등급을 알려주는 기패를 매다니 준비는 끝났다.
단양은 자신의 기패를 만지작거렸다. 고위관료의 문지방은 물론이요 기방어미로 불릴 수도 있다는 동패(銅牌)였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것 이, 어젯밤 수고를 들여 기름먹인 천으로 닦은 보람이 느껴졌다.
단양은 곁에서 시중드는 이에게 물었다.
“손님은 아직 오시지 않았는가.”
“채홍 준사께서는 해가 진 뒤 오신다 하였습니다.”
“아이들의 준비는?”
“이미 단장을 마치고 정자 안으로 향했습니다.”
“부엌데기는?”
“밥 할매에게 일러두었으니 오늘은 정자 근처에 얼씬도 못할 겁니다.”
단양은 자꾸 찜찜한 마음이 들었다. 어딘가 석연치 않은 이 기분은 대 체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모든 것은 완벽하다. 이제 채홍 준사 앞에 애기기생들을 앉혀 놓고 고운 자태와 뛰어난 재주를 선보인다면, 적어도 한 명은 궁기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아직 해가 저물기에는 멀었으니 잠깐이라도 어린 것들 주의라도 줘야 겠다.”
“주의라면 오늘 새벽에도, 정오에도 주셨습니다. 충분할 겁니다.”
“겉으로야 반반하니 얌전해 보이겠지. 하지만 곧 기생이 될 아이들이 네. 제 치마폭에 남자 하나 끌어들여 손짓 하나, 눈웃음 한번으로 재산 과 사람의 인생까지 쥐락펴락 하려는 계집들이지. 한 사내의 인생을 농 락하는 것에 무서움은커녕 즐거워하는 새끼독사들이란 말일세. 겉과 달리 속이 그리 순순할 리가 없지.”
단양은 진심으로 걱정되었다. 이번에 단양이 가르친 애기기생들은 모 두 뛰어난 재주를 가졌다. 그러나 그처럼 재주 많은 애기기생들도 단점 이 있었으니, 대가 세어도 너무 세었다. 사내 맛도 안 본 것들이 벌써부 터 채홍 준사의 기를 꺾으려 들려고 벼르고 있다. 그렇게나 주의를 줬 건만 아까 보았을 때는 부족한 듯싶었다. 겉으로는 곰살궂게 예예 거렸 지만 속으로는 딴생각을 품은 것이 훤히 보였다.
“그래도 다들 궁기가 되고 싶어 하니, 도는 넘지 않을 겁니다.”
“-그렇긴 하지. 제아무리 난다 긴다 해도, 이 남자 저 남자 품에 떠도는 것보다야 왕의 승은을 입는 것이 훨씬 낫겠지. 모든 남자 물리치고 비 구니처럼 살아도 칭송받는 옥패를 받지 못했으니.”
단양은 거기까지 말을 하고 입을 다물었다.
* * *
기패(妓牌).
기생의 신분을 증명하는 그 패를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패 시험을 치 러야 했다. 애기기생이 열여섯이 되면 기패 시험을 치르게 되고, 재주 와 능력에 따라 기패를 받게 된다. 아예 기패 조차 받지 못한 애기기생 은 관에도 기방에도 적을 올리지 못하고 창기가 된다.
간신히 적을 올릴만한 가장 아래의 등급은 목패였고, 한 기방의 으뜸이 라 불리는, 기방어미가 될 만한 재목이라 여겨지는 애기기생에게는 동 패가 주어졌다. 그리고 이번에 단양이 가르친 다섯 명의 애기기생 중 한 명이 동패를 받았다. 그것도 옥패를 두고 경합한 애기기생 중 한 명 이라는 표식으로 홍띠까지 둘러졌다.
분명 뛰어나다. 동패를 가진 기생은 고위관료의 문지방을 드나들 수 있 고, 훗날 기방을 스스로 차려도 된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그 혜택이 과 연 옥패만 할까.
옥패(玉牌). 기생들이라면 한 번쯤 꿈 꿔볼 패다.
각 도(都)마다 열리는 기패 시험에서 꼭 한 명씩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기패가 바로 그 옥패다. 기생이라면 모두 탐을 내는 그 기패의 주인은 평생 머리를 올리지 않아도 되었다. 아무도 옥패를 받은 기생에게 하룻 밤을 권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큰 실례였다. 옥패쯤 받은 기생이라 면 그 학식과 품격이 실로 뛰어나, 양반들조차 예의를 차린다. 옥패를 갖게 되는 기생의 혜택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실상 다른 기생들이 옥패를 탐내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정당한 첩지다.
기생은 양반의 첩으로 들어가는 경우도 왕왕 있는데, 대부분 기생 첩이 라 하여 첩 취급도 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옥패를 받은 기생이 첩으로 들어갈 경우 정식으로 첩지를 내려주는 것은 물론이요 그 자식은 족보 에도 번듯하게 오르게 된다. 이쯤 되면 천민이 아니라 양인이라 봐도 무방했다. 기생이라도 여자다. 한 남자를 섬기고 그 아이까지 낳았는 데, 주변에서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그보다 비참할 수 없었다. 그러니 어찌 옥패를 탐내지 않을쏘냐.
이번에 단양이 가르친 그 애기기생들도 옥패 한 번 받아보겠다고 이를 악물었으나 실패했다. 한 명은 막판까지 가 경합을 벌였지만 시원하게 미끄러졌다. 그러니 이번에 궁기를 뽑는다는 방을 보고 독이 바짝 올라 있을 것이다.
“해가 저뭅니다.”
“내 직접 마중을 나가겠네.”
단양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뿐한 걸음으로 밖으로 나섰다. 아직 산 너머 는 붉은 기운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곱게 자수가 놓인 신을 신고 마 당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기방의 문 앞에 서서 채홍 준사를 기다렸다. 한 때 정(情)을 주었던 사내를 기다린 것처럼, 허리를 곧게 세우고 입가 에는 초승달 같은 웃음을 지었다. 뺨에 닿는 바람이 쌀쌀해질 무렵이 다가오자, 그토록 단양이 기다리던 이가 왔다.
순간 단양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오랜 시간 다져온 연륜으로도 지금의 당혹스러움을 완벽하게 감추기는 어려웠다.
“채홍준사, 윤재민일세.”
단양은 채홍 준사가 나이가 많을 것이라 예상했다. 왕이 새로이 만든 채홍 준사라는 직책은 본디 자리하고 있는 관직에게 또 다른 감투를 씌 워준 것에 불과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왕의 신임을 받는 관직 을 가진 자라면 당연히 나이가 많은 자일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이 당연 하지 않은가.
헌데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 * *
윤재민.
자신의 이름을 윤재민이라 밝힌 채홍 준사는 놀랍게도 젊은 사내였다. 심지어 코밑에는 수염조차 나지 않았다. 보송보송한 얼굴을 보고 있자 니 단양이 다 아찔해졌다.
‘이거 큰일 나겠구나.’
불안감의 근원은 이거였다. 가뜩이나 사내라면 다 치마폭에 쌀 수 있다 고 믿는 기고만장한 계집아이들인데, 채홍 준사가 이리 어리고 잘생긴 청 년이니 얼마나 얕잡아 볼까? 단양은 식은땀이 다 났다.
“이 기방을 이끄는 단양이라 합니다. 오랜 걸음으로 피로하실 터이니 어서 들어오시지요.”
단양은 재빨리 뒤로 손짓하였다. 눈치 빠른 종은 뒷걸음질로 자리에서 벗어났다. 오늘 만남은 텄다. 제대로 주의를 주지 않으면 애기기생들이 뭔가 하나씩 사고를 칠 것만 같았다. 그러니 오늘 밤은 그냥 윤재민을 재우고 내일 애기기생을 보여주는 것이 낫겠다 여긴 것이다.
“먹을 것, 잘 곳, 입을 것 모두 준비해 두었습니다.”
“배려에 고맙네.”
“당연한 것을요. 일단 여독을 푸신 뒤, 내일 저희 기방의 애기기생들을 데리고 찾아 뵙겠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단양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럴 필요는 없네. 오늘 보고 바로 결정할 것이니.”
“-허나 채홍 준사. 이미 날이 저물었습니다. 지친 몸과 마음으로는 그 어떤 꽃도 향기롭게 느껴지지 않으실 테지요.”
거기까지 말한 단양은 제 입을 손으로 가리고 익숙하게 몸을 낮췄다. 할 말을 다 하되 때를 맞추어 허리를 숙여야 해가 돌아오지 않기 때문 이었다.
“혹여 무례하였다면….”
그에 윤재민이 고개를 저었다. 단양은 제 뜻에 따라줄까 그를 보았지 만, 윤재민은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윤재민 은 애기기생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하였고, 단양은 타 들어가는 속을 감추며 발걸음을 돌렸다.
불안한 마음이 그득그득 차올라 손끝이 차게 식었을 무렵, 환하게 등을 켜 놓은 정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 기방의 가장 큰 자랑거리인 정취가 좋은 정자에는 색색의 고운 비단옷을 입은 애기기생들이 다소곳하게 앉아 있었다. 머리를 올리지 않고 곱게 땋아 내려 댕기를 하고 있으니, 얼핏 보면 애기기생이 아니라 양반의 적녀 같다. 낯짝도 저 정도면 그 럴싸하고 재주는 말할 것도 없으며 척 보기에도 영특해 보이니, 단양은 저 중에 한 명은 꼭 궁기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망아지처럼 날뛰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저 아이들입니다. 이번 기패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이루었지요. 한 아이는 홍띠 두른 동패도 받았으니, 다들 재주가 상당하답니다.”
은근슬쩍 밑밥을 깐 뒤 단양이 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정자 안 에 앉아있던 애기기생들이 이쪽을 본다. 앉아있던 애기기생들이 모두 일어서니 그 자태 정말 고와라, 단양의 입매가 슬쩍 올라갔다.
“어서 채홍 준사께 인사 올려라.”
정자에 올라선 단양의 말에 애기기생들이 일제히 절을 했다. 흠 잡을 곳 하나 없어 단양의 마음이 흡족했다. 단양의 걱정이 기우였다는 듯이 모두 얌전한 모습들이다. 하지만 만족스러운 단양과 달리 윤재민의 표 정은 아주 미세하게 찡그려져 있었다. 애기기생들을 쭉 한 번 훑어 본 뒤, 윤재민은 입을 열었다.
“없군.”
“예?”
“궁기가 될 자가 이중에는 없다는 뜻일세.”
윤재민의 말에 단양은 물론이요 애기기생들까지 쩡하니 굳어버렸다.
* * *
부엌데기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다. 절대 오늘은 밖으로 나오지 마라며 밥 할매가 밖에서 문고리에 숟가락을 걸어놨기 때문이었다.
“나쁜 밥 할매.”
잔뜩 동할 이야기를 던져놓고는 이리 가두는 것은 못되었다. 물론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아는 것도 싫지만, 이건 이거대로 괴로웠 다.
‘나도 보고 싶은데…….’
궁기로 들어갈 애기기생을 뽑는다 했으니, 분명 성대하게 잔치를 벌이 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이 기방에서 가장 좋은 장소인 정자를 통째 로 잡고 애기기생들이 재주를 펼치고 있을지도 모르고. 부엌데기는 안 타까워 한숨만 푹푹 나왔다.
분명 어떤 것이든 멋질 것이다. 비록 머리를 올리지 못한 애기기생들이 지만 그 재주 하나는 성깔만큼 대단하다는 것이 주변의 평이기 때문이 다. 실제로 부엌데기도 그렇게 생각한다. 전에 수학하는 애기기생들을 잠깐 봤지만 모두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몰래 볼 수 있는데.”
해가 저물었으니 몰래 보는 것은 더 쉽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가둬놓았다는 것은 분명 기방의 큰어머니인 단양이 그리 말해놨다는 것이 된다. 부엌데기는 한숨을 푹푹 쉬고는 손에 쥔 주걱을 빙그르르 돌렸다.
“역시 안 되려나.”
처음으로 기생을 봤던 적이 언제더라. 부엌데기는 기억을 더듬어 올라 갔다. 부엌데기는 이름이 없다. 이름이 없는 까닭은 천애고아였기 때문 이었다. 지금에야 부엌데기라 불리지만 이 기방에 거둬지기 전까지는 거지였다. 사람의 동정심과 측은지심에 기대어 밥을 빌어먹던 거지.
그 거지가 기생을 처음 본 것은 지지난 해였다. 그 전에도 물론 먼발치 에서 보긴 했으나, 제대로 본 것은 그 날이 처음이리라.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그 날이, 기패 시험의 마지막 날이었다. 옥패를 두고 애기기생 다섯이 경합하며 재주를 펼치던 날, 잔치 밥이나 좀 얻 어먹으려 굴러들어왔던 거지의 세상이 바뀌었다.
너울거리는 남색의 치맛자락, 번뜩이는 칼날, 꺼덕거리는 전립, 그리고 이 세상에 없을 것처럼 춤추는 애기기생.
춤추는 이는 마치 선녀와도 같아서, 한낱 거지는 저도 모르게 꿈을 품 어버 기생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던 거지는 결국 연위 기방에 거둬졌다. 기생 들이 일하는 것에 방해 말라며 기방에 거둬져서는, 이렇게 밥 할매에게 밥 짓는 법을 배우고 부엌데기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엌데기는 기생이 놀음판을 뛰면 졸졸 쫓 아다녔다. 단지 예전과 다를 바가 있다면 눈에 뜨이지 않게 몰래 갔다 오는 것이지만 말이다.
부엌데기는 주걱을 들고 허공에 선을 그었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것이 사뭇 예리했지만, 이미 그 화려한 검무를 봤었던 부엌데기의 마음에는 차지 않았다. 그때였다. 밖에서 덜그럭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문이 열렸다.
“밥 할매?”
허공을 휘저었던 주걱을 재빨리 뒤로 감췄다. 그러나 이미 밥 할매는 본 모양인지 혀를 끌끌 찼다.
“이 년아, 얼른 나오지 않고?”
주춤하며 부엌데기가 슬슬 문가로 다가왔다. 그러자 밥 할매가 문고리 에서 뺀 숟가락을 들어 부엌데기의 이마를 따악 때렸다.
“어이쿠!”
“누누이 말했지만 주걱은 주걱이다. 기생 년들이 추는 무구(舞具-춤출 때 쓰는 도구)가 될 수는 없는 게야. 기껏 밥을 푸기 위해 만들어진 주 걱이 칼질에나 쓰이고 있으니 불쌍하지도 않냐!”
“밥 할매!”
“왜!”
“…잘못했어요.”
밥 할매의 서슬 퍼런 눈빛에 부엌데기가 고개를 푹 숙였다. 밥 할매는 늘 옳은 말을 했다. 그것이 너무 직설적이라 가끔 욱 하게 만들지만. 부 엌데기가 수그러들자 밥 할매는 콧방귀를 한 번 끼고는 입을 열었다.
“이럴 것이 아니라 얼른 밥상 치워야 한다.”
“벌써요?”
밥상이 나가자마자 수저를 떠도 아직 다 먹을 시간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술까지 곁들이면 판이 끝날 때까지 치우지 않는다. 밥상을 치운 다는 것은, 기생을 물리고 돌아간다는 뜻이기도 했다.
“수저도 뜨지 않고 끝났다.”
“예?”
“더 재미난 것은 뭔지 아느냐?”
“뭔데요?”
“채홍 준사가 그 년들 재주 한 번 보지도 않고 퇴짜를 놨다는 게야.”
그 말이야말로 믿기지 않았다. 연위 기방의 단양이 손수 뽑아 가르친 애기기생은 성깔 빼고 부족한 것이 없었다. 겉모습도 반반하고 재주도 뛰어났다. 헌데 재주도 보지 않고 퇴짜? 지금 애기기생들 초야권을 놓 고 신경전을 펼치는 바깥양반들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저 아무것도 모르든가, 뭔가 꿍꿍이가 있거나. 혹은,”
밥 할매의 백태 낀 눈이 가늘어졌다.
“그 안목이 너무도 높던가.”
- 2화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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