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晩秋)에 떨어진 낙엽들 발 밑에서 서걱거리던 그 어느 날, 우리들이 사랑했던 동기 용익군이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그때 나는 미타찰에 이르는 길에선 생(生)과 사(死)의 경계가 따로 없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을 노래한 신라시대 고승 월명사의 「재망매가(祭亡妹歌)」를 문득 떠올렸다.
동기 중 유일하게 용익군의 발인에 참가한 승옥군의 글이 바늘로 찔러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매마른 나의 가슴을 적신다. '친구도 없이 너무 쓸쓸히 그는 캐딜락을 타고 떠났습니다.' 그래, 어차피 인생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지만, 뭘 타고 떠나든 우리 모두는 피안(彼岸)의 아미타불이 반겨주는 미타찰에 이르고 말 것을, 캐딜락을 타고 가든 롤스로이스를 타고 가든 무에 상관이랴.
학교 재학 때는 내가 워낙 존재가 없었던 몸이라- 지금도 그렇지만- 용익군이 누구인진 몰랐다. 졸업 후 수십 년이 흐른 후 수도권에 올라와서 택교군이 회장으로 봉사하는 이일회의 등산 모임에 가서 용익군을 처음 만났다. 뚜렷한 이목구비(耳目口鼻)에 서글서글한 눈매, 그리고 약간은 느린 말투에 세상사 달관한 듯한 온화한 미소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아! 우리 동기 중에 이런 친구도 있었구나 하는 마음에 순간 하릴없이 지나간 세월이 원망스러웠지만 어쩌랴, 이미 지나간 날들인 걸... 외롭고 불쌍한 내게도 이런 따뜻한 마음씨에 세상사 두루 헤아리는 넓은 가슴의 친구가 있을 수 있었음에도 그 기나긴 질곡의 삶을 나 홀로 허위허위 살아왔었으니...부디 용익군이 피안에서는 아픔 없고 행복만이 가득한 삶이 함께하기를 다시 한 번 빌어본다.
내가 아는 '승옥'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둘인데, 그 중 한 사람은 소설 『무진기행(霧津紀行』의 작가 김승옥 선생이요, 다른 한 사람은 우리 동기 한승옥군이다. 이 두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안개'와 '버들잎'이란 단어가 생각나는데, 뭔 뜬금없이 안개와 버들잎이라니...
김승옥 선생의 『무진기행』에 나오는 주인공 윤희중은 제약회사에 다니면서 부단히 이상향을 그리워하지만, 현실은 늘 제약회사 사장인 장인과 그의 딸인 자신의 아내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다. 희중은 승진을 앞두고 오랫만에 자신의 고향인 무진(霧津)을 찾았는데, 거기서 그곳 시골을 벗어나 서울로 가고 싶어하면서 모교의 음악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하인숙을 만나 꿈에서나 그려왔던 플라토닉한 사랑을 하지만...희중은 다시 서울로 올라가면서 꼭 하인숙을 서울로 불러 올리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하지만, 그는 결국 현실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 인간일 수밖에 없었으니...인간이기 때문에 허무하니 그게 또한 인간의 숙명이려니, 무진이란 지방 소도시가 지도 어느 곳을 살펴 봐도 없는 것과 매 한가지이리라. 그렇게 삶은 안갯속으로 우릴 떠나간다.
동기 한승옥군 역시 수도권에 이사 와서 처음 만났다. 학창시절에 당연히 한 번도 같은 반에 소속된 적도 없는 데다 당구 모임인 세월회에서 몇 번, 등산 모임인 이일회에서 한 번 만난 게 전부였지만 그는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언제나 웃는 상(像)을 가진 데다 약간은 느리면서 허스키한 목소리는 보는 이들에게 편안한 인상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힘 들이지 않는 친화력이란 그렇게 타고 난 천복이자 자랑이리라.
나는 승옥군을 보면 문득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첫째 부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를 떠올린다.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말을 타고 산길을 달리다 갈증이 생겨 어느 마을의 우물가에 있는 처녀한테 물 한 모금 달라고 청했더니, 아가씨는 물 한 바가지에 버들잎을 한 웅큼 띄워 건넸다는데, 뭐 급히 물을 마시다 체할까 봐 그랬다나 뭐래나...
청주 한씨는 뭐 다 그런가? 그 동안 나는 몰랐지만 승옥군은 동기회 총무로 장기 집권(?)하면서 많은 동기회 회장을 보좌하는 가운데 오늘날까지 반 세기를 동기회의 활성화에 기여한 공적이 지대했다고들 내게 일러 줬다.. 그도 그럴 것이 승옥군은 수 백명의 동기들 하나하나의 동정(動情)을 자신의 손금 보듯 헤아리면서 챙겨왔다나 뭐래나....기껏 5년 정도 동기회에 참여해 온 내가 알고 또 겪은 것만을 봐도 이 친구는 실로 대단한 배려와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작년 총동문회 주최 바둑대회 때 승옥군이 동기 선수들을 격려하러 왔을 때, '아! 청주 한씨는 버들잎 한 웅큼 띄워서도 제후장상(諸侯將相)의 지위에 오르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면, 작은 일을 침소봉대하는 밴댕이 소갈딱지를 가진 나만의 호들갑이었을까...
글의 제목맹키로 글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이 뜬금없는 가요 두 곡, 정훈희님의 '안개'와 홍경아님의 '버들잎'을 들어 본다. 단지 글의 제목과 노래의 제목이 같다는 이유만으로...옛날 어느 창의성 관련 연수회 때 강사가 던진 웬 뚱딴지같은 "백조와 벽돌간의 관계를 만들어 보세요."란 질문에 수강생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였을 때, 강사는 의기양양하게 "연못 위에 아름다운 백조가 떠 있는데 내가 벽돌을 휙 던지니 백조가 화들짝 놀라면서 달아났습니다."라고 하면서 창의성의 발현은 결합(association)과 분리(segregation)의 과정이래나 뭐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