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하느님 뜻과의 조화(13)
완전한 자유 구현하자
인간 각자에게 주어진 자유·책임 성취하려면
하느님 섭리대로 세상과 조화 이루며 살아야
지금 내 손위에 줄이 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줄을 놓고 싶어도 놓을 수 없다. 줄이 손목에 꽁꽁 묶여져 있기 때문이다. 줄은 안개 가득한 저 편 숲 속으로 이어져 있다. 나는 줄을 당기려 한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 반대쪽에서도 그 어떤 힘이 줄을 잡아당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다. 많은 이들이 “나는 자유를 가지고 있어”라고 말한다. 실제로 우리 모두는 일정한 자유와 그 자유를 실행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자유는 완전한 자유가 아니다. 줄다리기를 하는 형태의 자유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불완전한 자유다.
나는 줄을 당길 자유를 가지고 있지만, 줄을 당겨도 반대편의 힘이 세면 끌고 올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줄을 당길 자유를 가지고 있는 것이 무의미해 진다. 줄을 당기지 않을 자유도 가지고 있지만, 반대편에서 줄을 당기면 끌려가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줄을 당기지 않을 자유를 가지고 있는 것이 무의미해진다. 그래서 싫은데도 어쩔 수 없이 줄을 당겨야 할 때가 있다.
이것이 우리들의 불완전한 자유다. 우리의 삶은 자유를 행사하는 가운데 이뤄지는 것 같지만, 실상은 불완전한 자유를 행사할 뿐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저 편하게 살려고 한다. 완전한 자유를 행사하려 하지 않고(줄을 의지로 힘껏 당기려 하지 않고) 그저 상대편에 끌려가는 삶을 산다.
그러면서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한다. 이렇게 하위형태의 삶에서 보이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끌려가는 삶이고, 수동적인 삶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이런 삶을 원하지 않으신다. 우리 각자가 모두 완전한 자유를 구현해 내기를 원하신다. 완전한 자유를 살 수 있는 힘도 심어 주셨다.
완전한 자유는 합치, 연민, 융화, 역량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느님과 합치하고, 이웃에 대해 연민으로 대하고, 세상의 모든 것과 융화하고, 그래서 참된 인간의 역량을 발휘하며 사는 것, 이것이 진정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를 성취해 내는 것이다.
좋은 일, 형성적인 일을 하고자 하면 마음껏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줄을 힘껏 당겨 진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뜻과 조화하는 삶, 즉 공명의 삶이다.
이렇게 자유를 성취해 내야하는 이치는 유일회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이미 허락되어 있다. 거저 주어져 있다. 그만큼 책임도 무겁다. 받았으니까, 그만큼 역할을 해야 한다.
주인으로부터 씨를 받아든 종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작물을 재배해, 열매를 수확해야 하는 책임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책임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해 내야 할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져야할 이러한 책임의 모습에는 세 가지가 있다.
우선 과도한 책임을 느끼는 이들이다. 자녀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과도하게 책임지려고 하는 이들이 있다. 초등학생 자녀에게는 40~50%, 중고등학생 자녀에게는 20~30%, 대학생 자녀에게는 10% 정도의 책임감만 느끼면 된다. 나머지는 모두 자녀에게 맡기면 된다. 주변을 보면 결혼한 자녀도 책임지려는 부모들이 많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책임지려는 태도는 옳지 않다. 마찬가지로 직장에 대해서도, 나 자신에 대해서도 과도한 책임을 지려는 사람들이 있다. 하느님께서 하실 일까지도 모두 자신이 하려는 반형성적인 정신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래서는 완덕의 길로 나아가기 힘들다. 인위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려 하기 때문이다. 복숭아를 참외로 만들려 해서는 안 된다. 새우를 고래로 만들려 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과소한 책임도 문제다. “자녀문제? 냅둬~.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뭐.” 자녀들이 스스로 알아서 한다며 방치 혹은 방기하는 부모들도 적지 않다. 자녀를 낳아놓고 교육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녀에 대한 과도한 책임의식도 문제지만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도 문제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할 삶의 책임은 어떤 모습일까. 대답은 ‘공명적 책임’이다. 풀어서 말하자면 ‘하느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는 책임’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세상의 조화 섭리 때문이다. 한 인간이 태어나 유일회적 삶을 살아가는 것은 그 인간을 통해 세상이 조화롭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최고의 교육은 그 사람이 그 사람이게끔 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섭리하신 대로 세상과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공명적 책임은 조화를 위한 책임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 조화 그 자체이시니까, 세상이 조화로운 것이다. 그 세상의 일부인 우리도 조화를 구현하고, 조화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50) 하느님 뜻과의 조화 (14)
‘몸’의 중요성
정신적 차원보다 몸이 먼저 하느님 인식해서
합치·연민·융화되어 세상에 참된 역량 발휘
젊은 한 여성이 한 남성을 사랑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사랑은 행동을 변화시킨다. 숨겨진 사랑은 없다. 사랑하는 감정은 자연스레 여성의 몸짓과 눈짓, 얼굴 표정 등을 통해 남성에게 전달될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모든 ‘내어줌’의 행위는 몸을 통해 드러난다. 외적인 육체의 행위를 통해 정신과 마음이 표출되고, 더 나아가 정신과 마음 또한 더 깊은 사랑의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인간은 원래부터 그렇게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물고 물리는 순환 고리가 육체, 정신, 마음이라는 인간 형성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을 베풀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행위를 모두 몸으로 한다. 사랑을 받고, 도움을 받는 것도 몸으로 한다. 몸이 중요하다. 정신은 몸으로 드러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몸은 내면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오랜 기간 인류는 몸보다 정신을 더 높은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식해 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유럽 가톨릭 신학계에 몸의 신학이 대두되고 있다. 이는 형성신학적 차원에서는 아드리안 반 카암 신부님께서 벌써 수십 년 전에 간파한 문제다. 몸의 중요성에 대해 가톨릭 신학자들이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늦었지만 환영할 일이다.
나의 눈빛이, 내 한마디 말이, 내 손길 하나가 얼마나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인지 모른다. 보잘 것 없는 우리들 한 명 한 명의 소소한 눈빛과 말 한마디, 손길 하나하나가 세상에는 큰 선물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은 손으로 환자를 고치고,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몸으로 보여준 모든 그 행위들이 우리들에게는 큰 선물로 다가온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몸 자체가 선물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어떤 원의를 가지셨는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당신의 몸을 통해 나온 외적인 모습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그만큼 몸이 중요하다.
우리는 몸을 통해 세상을 성화해야 한다. 정신과 마음으로 세상을 성화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몸으로 세상에 뛰어들어 세상을 바꿔야 한다. 몸이 세상을 맑게 할 수 있다.
거꾸로 말하자면 이 세상의 모든 소음과 공해는 몸 때문이다. 생각은 조금 나쁜 경향이 있다고 해도 몸은 좋은 쪽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습관이 중요하다. 몸에 좋은 것이 배이도록 해야 한다. 몸을 변화시켜야 한다.
성체 조배를 위해 먼저 성체 조배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몸이 성체 앞에 무조건 나아가 앉아 있는 것도 중요하다. 인간은 그 한계로 인해 정신적 차원에서는 하느님을 완전히 인식할 수 없다. 불가능하다. 하지만 몸은 느낄 수 있다.
성체 앞에 앉아 있는 자세, 손짓, 숨소리 하나하나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성체안의 하느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다. 정신이 먼저 하느님을 이해하고, 그 이해를 통해서 몸이 움직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먼저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눈 예쁘게… 입 예쁘게… 손짓 예쁘게…. 우리 각자 한 명 한 명의 눈과 입과 손짓이 예뻐지면 세상도 예뻐진다. 우리들의 몸이 예뻐지면 세상도 예뻐진다. 얼굴 가꾸고, 몸매 가꾸기 위해 성형외과를 찾을 필요 없다. 비싼 화장품을 살 필요도 없다.
최고의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를 메이크업 해주신다. 그 메이크업을 묵묵히 받아들이면 된다. 그래서 일단 나의 몸부터 변화시키면, 그 영향으로 나의 내면도 변화된다.
내적인 면, 정신과 마음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분석하기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우리 각자의 내면에 집중하는데 에너지를 쏟으려 하지 말고, 쉬운 외적인 면부터 우선적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설거지 하나를 할 때도 어떤 모습으로 하는지, 기도할 때 어떤 모습인지, 성당 올 때 옷차림을 어떻게 하는지, 이웃에게 충고할 때 어떤 눈빛으로 하는지, 직장 동료에게 어떤 표정으로 대하는지…. 이것이 중요하다.
내적인 것에 대한 무분별한 집중과 집착이 오히려 영적인 생활을 방해할 수 있다. 영성은 선물이다. 우리의 몸 자체도 선물이고 그 선물은 세상에 바르게 전달되어야 한다.
몸으로 드러내지 않으면 영성은 그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깊은 영성은 세상에 빛으로 저절로 드러난다. 그 도구가 몸이다. 만약 몸과 행동에서 빛이 나지 않는다면 그 영성은 가짜 영성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바라보는 눈으로 하느님을 보고 하나가 되어(합치), 연인의 상처를 감싸는 손길로 이웃을 치유하고(연민), 몸으로 세상 사람들과 유연하게 어울리고(융화), 구체적 행동을 통해 세상에 참된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영성적인 삶은 몸의 자세 하나부터 바르게 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51) 하느님 뜻과의 조화 (15)
하느님께서 보내는 도전장 잊지 말자
하느님의 삶·자유인의 삶 살고자 한다면
도전 극복하고 이겨내 자신의 형태 가꿔야
소설가 안정효는 소설 「하얀 전쟁」에서 무의미한 죽음만 난무하는 전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존엄성도 없고, 남성적이지도 못하고, 오직 비열하기만 한 싸움. 장쾌한 도전도 없고, 그저 가장 비열한 방법으로 하나씩 하나씩 죽이기만 하는 싸움.”
그렇다. 의미 있는 도전이 없는 싸움은 그저 무가치할 뿐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삶은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그 전쟁터에서 무의미한 총질만 계속한다면 우리의 삶은 무가치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쓸데없이 기력만 낭비할 수 있다. 이러면 하느님 선형성의 의미를 구현하지 못한다.
‘도전’(挑戰)이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정면으로 맞서 싸움을 걺’이라는 뜻과 함께, ‘어려운 사업이나 기록 경신 따위에 맞섬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뜻도 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신기록 도전’ ‘에베레스트 정상 도전’ 등 ‘도전’이란 말을 종종 듣고, 또 사용한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를 찾는 일과 관련해서는 얼마나 ‘도전’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직장 생활 등 일상 안에서 늘 도전을 받고 있다. 어떤 이들은 그 도전이 힘겨워 아예 도피하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도전에는 항상 모험과 위험이 따른다. 도전에 당당히 응해야 한다.
신앙을 가진 우리들은 우승한 사람들이다. 세례를 받는 순간 우리 모두는 ‘깨끗해짐’이라는 우승의 월계관을 썼다. 그런데 우승은 우승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승한 선수는 항상 도전자들의 도전을 피할 수 없다.
실제로 우리는 매일 도전장을 받고 있다. 길거리 청소하는 사람도 경력이 조금 쌓이면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효율적으로 거리를 깨끗하게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한다. 수영선수와 육상선수는 기록을 조금이라도 더 단축하고 싶어 하고, 야구선수는 조금이라도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미술가는 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싶어 하고, 영화감독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형식의 영상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금보다 더 발전하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욕구들이 세상이 우리에게 보내는 도전장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중요한 도전장을 잊고 살아간다. 바로 하느님께서 보내는 도전장이 그것이다. 우리들은 대부분 세상에서의 도전장만 생각하고, 하느님의 도전장을 생각하지 못한다. 하위 형태가 아닌 상위 형태의 삶을 살도록 하느님은 늘 도전장을 우리에게 내미신다. 이것을 민감하게 느껴야 한다.
하느님의 도전장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올 수도 있다. 화창한 날씨와 맑은 햇볕은 선물로 주어지는 은총에 대해 감사하라는 의미일 수 있다. 구름 잔뜩 낀 하늘은 눈물로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을 차분히 묵상하라는 뜻일 수 있다.
중환자실에서 고통 받은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1분 1초 시간의 소중함을 묵상할 수 있다. 하느님은 이렇게 우리가 매일 접하는 수많은 정보들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을 촉구하신다. 새로운 삶을 위한 도전장을 그렇게 매일 우리에게 보내고 계신다.
혹시 우리는 일류대학, 권력, 출세 등 세속의 도전장에만 몰입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하느님의 도전장을 형성의 장안에서 의식할 수 있을 때 그때 나의 형태를 바로 세우고, 세상에 참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
인생이 모두 끝날 때, 모든 것은 내 책임이다. 그 책임을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다. 도전장들을 잘 받아들이고, 그 도전을 극복하고 이겨 나감으로써 우리는 나의 형태를 잘 가꾸어 나갈 수 있다.
권투선수가 도전장을 내밀고, 또 스스로에 대한 한계에 대한 도전을 받아들이면서 궁극적으로 이루고자하는 목표는 챔피언이다. 인간이 도전을 받아들이면서 궁극적으로 이뤄야 하는 목표는 자유인이다.
완덕은 완전한 자유와 책임을 살아가는 것이다. 부자유를 느낀다던지 책임성 있게 생활하지 못하던가 하는 것은 완덕의 삶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완덕이 어렵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완덕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책임 있게, 지금보다 조금 더 자유롭게 사는 것이 지금 여기서의 완덕이다.
가장 아름다운 인생은 도전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과거 한때 열심히 살았다는 것을 위로 삼아 현재 어떤 도전도 하지 않고 있다면 그 인생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도전을 하지 않는 삶은 운명에 희롱당하는 인생을 사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인생에 어떤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가. 하느님의 삶, 자유인의 삶을 살고자 어떤 땀을 흘리고 있는가. 혹시 이미 챔피언이 되었다고 착각하고 자만하고 있지는 않는가.
초월적 도전은 독특한 인간만의 특성이고 본질이며 이는 죽을 때까지 계속 되어야 한다.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