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9년전 5윌14일에 예수탄생과 현재에 태어나 살아가는 나의 실존은 무슨상관인가? ~~~~~~~~~~~~ 역사는 예수탄생의 시점을 BC 4년~6년까지로 찾아낸다. 초대교회의 지도자 터툴리안은 시리아의총독 새터니너스가 통치하던 때에 예수가 탄생했다고 기록하였다. 새터니너스는 BC6년~4년사이에 총독이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는 하늘에 월식과 금식이 연이어 있던 해에 헤롯이 죽었고, 악티움해전이 있던 27년 후에 헤롯이 죽었다고 기록하였다. 크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연합하여 옥타비아누스와의 악티움해전에서 최후를 맞았는데, 악티움해전은 BC32년에 있던 전쟁이니 헤롯은 그해로 부터 27년 후에 BC4년 3월 11일에 죽은 것이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제국의 황제칭호를 얻어 아우구스투스(성경기록, 누가2장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되었고,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령 내렸고, 나사렛에서 유대 베들레헴에 방문하여 밤을 새는 날에, 별을 탐지하던 동방박사들의 예언과 방문시점으로 마굿간의 메시야 탄생은 천하를 다스리는 왕이 나실 것이라 별점의 예언과 스토리텔링으로 인류역사는 꿈과 비젼을 이루어갔던 것이었다. 헤롯 황제는 권좌에서 2살 이하의 남자아이를 살해하여 황제의 자리를 탐하는 자의 태생의 싹을 자르라는 명령으로 인하여 창조자의 본질생명 탄생까지, 지상황제 아구스도 헤롯의 이기적 선택의 악행위로 개인인권의 본질과 자유의지의 선택적실존이 압사되었던 것이다. 아기예수는 태어나자마자 이집트로 피난길을 갔다가 헤롯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안도하여 다윗의 동네에 귀환하여 나사렛에 거주하게 되었던 것이니(마태2장), 해롯이 죽은 BC 4년전 일이고, 예수탄생은 그로부터 2년 전으로 현재 태양력BC 6년 5월14일에 탄생의 실재역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알렉산드리아 이집트력 9월25일, 유대달력 2월 28일) 실존주의자 장폴 사르트르에 따르면, 우리 문명에 확고히 장착되어 있어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휴머니즘적 가치는 우리가 그때그때 결단의 상황에서 매번 새롭게 고안하고 실현시킬 때만 존재한다. 실존주의는 이런 자유와 그에 결부된 책임 앞에 우리를 세운다. 실존주의는 현실 도피나 비관주의, 절망의 철학이 아니다. 실존주의는 참여의 철학이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가 인간에게 말하는 것은 오직 행동에만 희망이 있다는 사실과 자신의 삶에 행동으로 참여하고 그렇게 해서 자신의 얼굴을 그리는 것이다. 우리는 한마디 변명도 듣지 못한 채(스스로의 행위를 선택해야 하는) 세상에 버려졌다. '인간은 자유라는 형을 선고받았다'고 내가 말할 때 뜻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실존은 반드시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 혹은 "주관성이 출발점이 되어야만 한다라고 생각한다(Si vous voulez, qu'il faut partir de la subjectivité)"는 것이다. 장폴 사르트르의 해석을 보면, "예컨대 의자가 있다고 하자. 의자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제작된다. 즉 의자는 누군가가 앉기 위해 만들어진다. 따라서 의자의 본질은 '앉기'에 있고, 앉기에 적합하게 만들어진다. 만약 어떤 의자의 형태가 앉을 수 없게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의자가 아닌 것이다. 반대로 일반적인 의자의 형태를 벗어나 있다고 하더라도 앉을 수 있고, 그렇게 사용된다면 그것은 의자인 것이다. 이 경우 의자의 본질은 실존에 앞선다. 즉 원래의 목적(본질)이 충족되는 것이 존재하는 것(실존)의 형태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인간의 본질은 인간의 의지와 다르게 결정론 고정된 것이 아니다. 어떤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그가 어떻게 살고 있느냐의 자기의지에 의해 결정된다. 개별적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이다. "실존주의의 창시자라 부를만한 두사람 중에 죄렌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은 무한한 자유를 가지고 있어서 괴롭지만 신의 의지로 회귀하여 그것을 극복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반면에 니체는 힘의 의지를 발현하여 초인이 되어서 삶의 고통과 무의미한 세계에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뻥카를 치는(종교 등의) 기존 도덕을 초월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상당한 차이가 느껴지지만 본질적 태생은 어찌되었 건, 현재적 개별자의 위치에서 실존적 행위의지의 자유로운 책임의 실존행위로 세계의 중심에 던져진 내안의 선량한 본질을 발현하려고 새로운 나를 찾고 나를 잉태하고 낳아야 하는 것이다. 유대땅 예수님의 탄생은 과거역사의 2029년 전에 박제된 박물관기념예배로 매년 탄생만 축하하여 수량의 사업이득을 챙기려 말고, 실존적 행동하는 선택적 선한 삶의 현장에서 예수그리스도의 현재적 임마누엘로 개혁적 삶의 실존적 행위를 탄생할 때에, 예수현존의 탄생의 날로 의미가 드러나고, 생명과 부활의 실존예수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역사는 전두꽝의 서울의 봄이 아니라 서울의 칠흑같은 겨울을 누리는 국민의 악힘들처럼 국민의 악당 검찰의 칼날에 이땅의 잘난 놈의 싹은 모조리 자르려는 김대중 노무현 이재명과 송영길의 수난과 희생의 때를 보이고 있다. 조선의 영혼들은 이원론적 유체이탈의 친일파 친미파의 탐하는 제사보다 젯밥의 매국제물이 아니다. 시민이 참여하는 실존행위는 일제찬탈과 반공이데오로기로 한몫 챙기는 매국노 국민의 힘팔이들과 일당제 태극개부대와 사이비개독들의 탄생축하사업으로 권좌와 협치하는 전꽝훈과 낙엽수박의 가룟유다와 원균들이 모함하는 개판에 이재명과 송영길의 실존적 존재가치에 참여하는 시민책임의 촛불로 필요하고, 항상 위기 때마다 따뜻하고 정의로운 가슴으로 필요한 관계이다. 조선땅에서 일제와 미제를 물리치는 이순신과 유관순은 조선을 현대역사 속에서 한국의 김대중과 북조선의 김정일로, 코레아의 이재명과 송영길의 수난으로 역사적 실존행위로 나에게 깨어나 빛을 발하라는 책임과 시민참여를 요구하고 있다. (요한1서 3장 1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