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도(道)에 걸쳐 있는 40여 가구의 작은 마을이다.
개울을 복개하여 만든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을 남쪽은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나곡리(羅谷里),
북쪽은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월천리(月川里)로 나뉜다.
앞집에 전화를 할 때에도 지역번호를 누르고,
한동네 아이들이 서로 다른 학교에 배치되는 등의 상황이 벌어진다.
마을 앞바다에서는 왕실에 진상했던 유명한 돌미역인 고포미역이 생산된다.
마을에 고포해수욕장이 있다
[출처] 고포마을 | 두산백과
1680년 경에 난을 피해 아기를 업고 마을에 온 어느 할머니가
배를 구해 떠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는
것에서 고포 (姑浦) 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
규모가 적은 어촌이지만 인근에 민물의 유입이 적고,
주변이 맑고 깨끗한 청정해역 얕은 수심의 암석에서 자연상태로
성장한 품질이 좋은 미역으로 잘 알려진 곳이어서 고포 미역마을이라 한다.
고포마을 은 고려 때부터 왕실에 미역을 진상한 유일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지역의 미역은 이른 봄인 3월에서부터 이른 여름인 6월 사이에 생산된다.
고포미역은 삼척시와 울진군의 특산물이다.
지명유래에 의하면 조선 후기에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이나,
주변의 청정해역에서 생산된 미역이 고려 때부터 왕실에 진상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주민이 거주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고포마을 포함한 울진군 은 행정구역상 강원도 에 속하였으나,
1963년에 경상북도 로 편입되었다.
당시 부인(夫人)이라는 호칭은
왕비, 왕의 어머니, 왕비의 어머니 이들 세 분에게만
내려지는 위호(位號)였다. 수로부인은 왕비의 어머니였다. 삼척이란 지명을 사용하도록 한 경덕왕의 왕비 삼모부인(三毛夫人)이 수로부인의 딸이다. 이토록 고귀한 신분과 아름다운 미모의 수로부인이 감탄했던
해안절경, 철쭉꽃, 해룡과의 짜릿했던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이 삼척의 수로부인길이다 .
삼척시에서는 이러한 역사성을 살리기 위해
시화(市花)를 철쭉으로 지정하고, 증산동에 수로부인공원을 조성하였다
2012.12.23. 09:10
오늘의 동행
김*익님, 햄벅,산골신사
갈림길에 나타나는 표시
다음에 나타날 때까지 무조건 직진
전봇대에 주로 표시되어 있는 안내 표시
도화동산
2000년 4월 12일 강원도 에서 발생하여 26,794㏊의 피해를 입힌 사상
최대의 동해안 산불이 삼척시 에서 울진군 으로 번져 오기 시작하였다.
이에 민·관·군은 합심하여 22시간에 걸쳐 다음날인 4월 13일 산불을 진화하였다.
이에 군민이 사력을 다해 산불을 진화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울진군 에서 피해 지역인 북면 고포리 지역에
도화(道花)인 백일홍을 심어 도화동산 을 조성하였다.
갈령재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
옛7번 국도 동해 휴게소
원덕읍 호산의 대규모 건설(LNG 기지, 화력발전소)공사로
레미콘 공장이 들어서 있네요
휴대전화 안테나 방향진입↑ 하여
옛 비포장 도로 우측 능선길 진입하여 월천리 마을
7번국도및 월천교 방향
월천다리 저멀리 건설 현장
호산삼거리
호산방향 우회전하여 터미널 진행
호산교
다리 건너 뚝방길 좌회전
소방서 앞
옥원방향 좌회전
상수도 취수장
우측진행 전봇대 2개째 우회전
정수장
입구에서 우회전
수릉교
다리 건너서 직진 후 수릉 도로따라 좌회전 후
직진하다 우회전(옛7번 국도)
원래의 코스를 버리고 임도를 선택
사실은 살면서 다녀본 코스라고
소공대비 올라가는 임도로 무조건 선택한 길잡이의 실수
그래도 일행님들의
자전거 라이딩 코스 사전 답사는 실행?했네요
소공대비 올라가는 임도 입구
뒤 돌아본 호산 방향
소공대에서 본 임원항
소공대비
종 목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07호
명 칭
삼척소공대비 (三陟召公臺碑)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수량/면적
1기
지정(등록)일
1986.05.23
소 재 지
강원 삼척시 원덕읍 노곡리 산67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삼척시
상 세 문 의
강원도 삼척시 문화공보실 033-570-3223
삼척 노곡리 마을 옛 국도변에 서 있는 비로, ‘소공대’위에 놓여 있다. 조선 세종 5년(1423) 이곳 일대에는 대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거의 굶주림에 고통받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들을 구하고자 황희 선생을 강원도 관찰사로 파견하였고,
이곳으로 부임해 온 황희는 정성을 다해 이들을 도와 마침내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백성들은 그 은혜를 잊지 않고 당시 황희가 가끔 쉬곤 하던 와현(瓦峴)이라는 고개에
돌을 모아 단을 쌓고 ‘소공대’라 이름하여 그의 공적을 기리고자 하였다.
이후 중종 11년(1516) 그의 증손인 황맹헌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이곳을 둘러본 뒤 보수를 하고 비를 세워두었는데,
비바람에 쓰러져 부러지고 말았다.
현재 남아 있는 비는 선조 때 삼척부사로 부임해온 그의 6대손 황정식이
옛 비를 치우고 그 터에 다시 세워놓은 것이다. 비는 낮고 널찍한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모습으로,
비의 윗면 양쪽이 둥글게 다듬어져 있다.
비몸 앞면 위쪽에는 ‘소공대비’라는 비의 명칭이 가로로 적혀 있다.
선조 11년(1578)에 세운 조선 중기의 일반적인 비의 형태로,
당시 영의정이었던 남곤이 비문을 짓고,
려원군 송인이 글씨를 썼다.
★관동별곡★
1580년(선조 13) 정월 작자가 45세 때 강원도 관찰사 로 부임하여
내 ·외 · 해금강 (內外海金剛)과 관동팔경 (關東八景) 등의 절승(絶勝)을 두루 유람한 후
그 도정(道程)과 산수 ·풍경 ·고사(故事) ·풍속 및 자신의 소감 등을 읊은 노래로,
조선시대 가사 가운데서도 대표작으로 손꼽을 만한 백미편(白眉篇)이다.
음률이 주로 3 ·4조로 이루어진 이 가사의 용어는 비교적 순수한 우리말이 많고,
비록 한문어휘라 하더라도 대개 우리말화한 것들이다.
또한 이 가사는 파란이 심하였던 작자의 관직생활에서 비교적 득의(得意)에 찼던
시절의 작품인 만큼 전체의 분위기가 웅장하고 명쾌하여 화려체 의 문장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특색이다.
특히 대구법 (對句法)의 묘를 살리면서 감탄사 를 적절하게 첩용(疊用)하고
생략법을 알맞게 구사하는 등 능란한 수법은 송강의 빼어난 문장의
경지를 남김 없이 보여 주는 대목이다.
전편(全篇)을 크게 4단(段)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제1단은 강원도 관찰사로 제수된 감격과 임지로 부임하는 모습을 엮은 서곡(序曲)이고,
제2단은 내금강 의 절경을 읊은 노래이며,
제3단은 외금강 ·해금강과 관동팔경의 절경을 읊은 노래이며,
제4단은 작자의 풍류를 꿈 속에서 신선이 되어 달빛 아래 노니는 데 비유한 결구(結句)이다.
《 송강가사 》에 있는 가사의 첫 부분은 다음과 같다.
“강호(江湖)에 병이 깁퍼 죽림(竹林)의 누엇더니,
관동(關東) 팔백리에 방면(方面)을 맛디시니,
어와 성은(聖恩)이야 가디록 망극하다.
연추문 (延秋門) 드리다라 경회남문(慶會南門) 바라보며,
하직(下直)고 물너나니 옥절(玉節)이 압패 셧다.
평구역(平邱驛) 말을 가라 흑수(黑水)로 도라드니,
섬강(蟾江)은 어듸메오 치악(雉岳)이 여긔로다.
소양강 (昭陽江) 나린 믈이 어드러로 든단말고,
고신거국(孤臣去國)에 백발(白髮)도 하도할샤"
[출처] 관동별곡 | 두산백과
소공대
소공대비를 지나면서 나타나는 갈림길
우측진행하여 직진
여기서 길을 잃다
직진하면 멧되지 농장인데 길이 없네요
세심하지 못 했네요
하지만 좌측 임도로
약 5~6km는 긴 느낌이네요
도보 계산상
청명한 날씨에 응봉산, 백병산도
시야에 들어 오내
임도 삼거리
좌측 이천리,우측 임원3리(자연 휴양림)
우측진행
점심 만찬
멋는 즐거움이 무엇과 바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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