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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체첸 땅에 아랍 낙타들이 떠돌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 체첸 국가 보안대 수장 레차 쿨리코프
체첸 땅에 번지는 독버섯을 막기 위한 최초의 시도는 1998년 2월에 있었다. 마스하도프의 대테러 부대는 납치 대상을 물색하던 2명의 바라예프의 '이슬람 특수 연대' 부대원을 체포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바라예프 부하이며 그에게 납치 '허가'를 얻었다고 실토하였다. 마스하도프 대통령은 체첸 공영 방송에 나와 현재 자행되는 주요한 납치극의 배후로 아르비 바라예프를 지목하고 그의 처벌을 약속하였다.
아르비 바라예프. '터미네이터'라고도 불렸던 그는 냉혹한 살인자였다.
사실 바라예프의 부하들이 납치 대상을 물색하다가 체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7년부터 체첸 국내 뿐만 아니라 잉구쉬, 카바르다 - 발카리아 등의 다른 코카서스 공화국은 물론 모스크바에서도 그들은 서슴없이 납치하여 체첸 국내로 데려왔다. 바라예프는 납치한 인질들을 억류하기 위해 우루스 마탄의 소련 시절 장애아 학교 건물을 개조하여 자기 사설 감옥으로 썼다. 잉구쉬 경찰들은 바라예프의 부하들이 자국 내에 활동하는 것을 포착하고 1997년 6월에 그 중 6명을 체포했으나, 바라예프는 잉구쉬 군 검문소 하나를 기습하여 군인과 경찰들을 인질로 삼았다. 바라예프는 부하들과 잉구쉬 군,경 인질들의 교환을 요구했고, 잉구쉬 정부가 미적대자 교통 경찰 1명을 살해하였다. 잉구쉬 정부는 7월에 굴복하여 바라예프의 요구에 따라 그의 부하들을 석방했다.
그보다 앞서 1997년 5월에는 살만 라두예프를 인터뷰한 러시아 여기자 엘레나 마수크를 납치하였다. 당시 체첸 내무부 장관 나스구디 바지에프는 경찰들을 동원해 기자를 석방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수백만 달러의 몸값이 지불된 뒤에야 석방되었다. 오히려 바라예프의 부하들은 바지에프를 암살하여 그들의 일에 방해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마스하도프의 티비 연설은 바라예프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더 이상 체첸 땅에서 자행되는 납치, 인질, 암살에 대해 보고만 있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시였다. 한달 뒤인 1998년 3월에는 체첸 정부 대테러 부대 책임자인 훈자르 파샤 이스라필로프가 나섰다. 지난해 7월에 납치된 영국 구호단체 심리상담가 존 제임스와 카밀라 카의 납치극 배후로 바라예프를 지목하고 그의 체포를 공언한 것이다.
훈자르 파샤 이스라필로프. 1차 전쟁의 남동부 사령관
1998년 3월 16일, 이스라필로프의 대테러 부대는 우르스 마탄에 있는 아르비 바라예프의 저택을 습격하여 그의 신병을 확보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체첸 내무부 장관을 암살하기까지 한 바라예프의 '이슬람 특수 연대'는 상당한 전투력을 보유하였고, 체첸 정부군의 요구에 응할 생각도 없었다. 저택 주변에 총격전이 벌어졌고 대테러 부대원 3명이 전사했다. 여기에 라두예프의 '두다예프 군'도 개입하여 이스라필로프는 힘의 열세를 절감하며 물러서야 했다.
체첸 정부는 바라예프의 신병을 확보하는 데도 실패하고 인질들을 구출하는 데도 실패하였다. 바라에프는 체첸 최대 군벌 중 하나인 라두에프가 뒤를 봐주고 있었고 정부군으로서는 상당한 각오없이는 힘으로 어찌해볼 수가 없었다. 결국 카밀라 카와 존 제임스는 그로부터 6개월 뒤인 1998년 9월 20일에 라두예프의 중재를 거쳐 수백만 달러의 몸값이 건네진 뒤에야 석방되었다.
살만 라두예프는 단순히 바라예프의 뒤를 봐주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마스하도프 정부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기획하였다. 1998년 6월 20일, 라두예프는 그로즈니에 수천명의 추종자들을 집결시켰다. 체첸 국가 보안대 사령관 레챠 쿨리코프는 반정부 시위임을 눈치채고 라두예프에게 해산령을 내렸다. 그러나 '외로운 늑대'와 그의 추종자들은 예정됬던 대로 다음날 집회를 강행하였다.
1998년 6월 21일, 그로즈니 테트랄나야 광장에서 수천명이 운집한 가운대 라두예프는 마스하도프를 성토하였다. 빈자들을 속이고 그의 몫을 가로채며 대통령 두다예프를 배신하고 러시아와 내통하여 체첸을 연방 내로 잔류시키려 한다는 것이었다. 열렬한 박수와 함께 분위기가 고조되자 라두예프는 시위대를 이끌고 거리로 나섰다.
군중 앞에서 연설하는 살만 라두예프
라두예프는 시위대를 이끌고 정부 공영 방송국과 그로즈니 시청이 위치한 건물로 향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건물이었다.). 시위대는 건물에 진입하여 두군데 모두 장악하려고 하였다. 레차 쿨리코프의 국가 보안대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정문에서 대치하였고, 양쪽은 고성이 오가며 서로를 반역자라고 규탄하였다. 수천명이 운집한 가운데 혼란은 겉잡을 수 없이 커졌고, 마침내 총성이 울렸다. 현장에 나와 있던 레차 쿨리코프, 바사에프의 친척인 아흐마드 바사예프, 라두예프의 휘하 지휘관인 바하 자하파로프가 죽었다.
라두에프의 반정부 시위를 막다가 체첸 국가 보안대 사령관이 죽은 참사에 대해 마스하도프 대통령은 3일의 애도를 선포하였다. 애도가 끝난 뒤에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라두예프를 샤리아 대법정에 정부 전복 시도 혐의로 기소하고 그의 체포령을 내렸다.
그러나 말뿐이었다. 체첸 정부는 라두예프에 손대기를 주저하였다. 체첸 그로즈니 동쪽 일대를 장악한 강력한 고르달리 씨족 (테이프) 출신 라두예프는 두다예프와 인척이었기 때문에 그의 지지세력을 흡수할 수 있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두다예프를 잊지 못하는 지지세력은 아직까지도 만만치 않았고, 라두예프를 건드린다는 것은 그들과의 내전을 의미할 수 있었다. 마스하도프는 그런 결단을 쉽게 내릴 수 없었다.
살만 라두예프. 마스하도프는 결국 통제할 수 없었다.
추가 유혈을 피하기 위해 마스하도프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햇고, 체첸 땅에서 이는 수장으로서 치명적인 실수가 되었다. 마스하도프에 대항하는 세력들에게 좋지 못한 선례가 되었기 때문이며, 그들은 체첸 정부군을 쉽게 보고 노골적으로 반항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불과 한달 뒤에는 더 큰 불상사가 초래하였다. 구데르메스에서 국토 수비대와 와하비 세력이 충돌한 것이다.
구데르메스는 야마다예프의 다섯 형제들이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하는 곳이었는 데, 그 중 술림 야마다예프가 구데르메스 국토수비대 사령관으로 있었다. 1998년 7월 13일, 국토수비대 대원 2명과 아르비 바라예프의 '이슬람 특수 연대'의 와하비 병사 사이에 언쟁이 오갔다. 서로 감정이 격화되고 격앙되는 가운데 바라예프가 직접 개입하였다. 일명 '와하비'라고도 불렸던 그는 와하비의 맹신자 중의 한명으로, 구데르메스 지역을 직접 장악하여 와하비 이념에 따라 통치하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구데르메스의 실력자인 술림 야마다예프로서는 용납할 수 없었다.
술림 야마다예프
결국 바라예프의 '이슬람 특수 연대'와 술림 야마다예프의 '구데르메스 지역 국토수비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바라예프는 사우디 출신 와하비 아둘 라흐만의 부대와 샤리아 법정 연대 압둘 말리크 메지도프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야마다예프는 만만치 않았고 와하비들이 수세에 몰렸다. 1천명이 3일간 교전하였고 그 중에 50명이 전사했다. 이 중 30명이 와하비였다.
전투가 격화되자 본격적인 내전으로 발전하기를 원하지 않는 마스하도프 정부 내의 인사들이 개입하였다. 대표적으로 당시 부통령인 바하 아사노프였다. 그의 개입에 의해 구데르메스에서 수세에 몰린 와하비와 바라예프는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이 전투에 강력한 무력을 보유한 하타브와 바사예프는 개입하지 않았는데, 바사예프는 후일 와하비들에게 포로가 된 국토 수비대의 석방을 중재하였다.
바하 아사노프. 궁지에 몰린 바라예프와 와하비에게 활로를 뚫어줬다.
전투 종료된 1998년 7월 17일, 마스하도프는 바라예프와 메지도프를 준장 지위에서 하사관으로 강등시키고 그들이 받은 훈장을 모두 반납하라고 명령하였다. (역설적이게도 바라예프는 국토수비대 소속 지휘관이기도 하였다.) 또한 바라에프의 '이슬람 특수 연대'와 메지도프의 '샤리아 법정 연대'를 각각 해산토록 명령하였다.
압둘 말리크 메지도프
바라예프에게는 뒤를 봐주는 유력자들이 있었다. 앞서 언급한 라두예프 외에도 전직 대통령 젤림한 얀다르비에프도 마스하도프와 대립하였고 바라예프는 여기에도 줄을 대고 있었다. 따라서 와하비 세력들이 얀다르비에프의 고향 스타리 아타기에 집결하여 그를 수장으로 반 마스하도프 반란을 이끌어 달라고 요구한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얀다르비예프는 이에 대해 숙고해봤지만 마을 주민들의 추방 위협에 굴복하여 그냥 돌려보내고 만다.
여기에 대항하여 체첸 전통 수피즘 세력도 움직였다. 1998년 7월 25일 코카서스 수피 무슬림 위원회는 와하비 세력을 체첸 사회를 교란하고 젊은이를 타락시키는 유해요소로 규정, 이를 금지하기를 공식적으로 건의하였다. 마스하도프 대통령도 와하비 세력이 자국 내의 불안 요소임을 인정, 그 수장 급인 하타브에게 48시간 내에 체첸 영내를 떠날 것을 명령하였다. "우리는 이 곳이 타지크와 아프간처럼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미 죽은 레카 쿨리코프는 1998년 초에 이런 말을 하였다. '우리는 체첸 땅에 아랍 낙타가 떠돌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하타브와 휘하 와하비들
그러나 마스하도프는 결국 주저하고 말았다. 실질적으로 체첸 내의 와하비 세력과 바라에프의 납치 조직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구데르메스 전투를 아득히 상회하는 유혈사태를 각오해야 했다. 단순히 바라예프와 메지도프 부대를 제압하는 문제가 아니라 라두예프, 하타브에 이어 바사예프까지 개입할 수 있었다. 종교 문제에 있어 와하비에 그다지 찬동하지는 않는 편인 바사예프는 하타브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에는 민감했기 때문이다. 마스하도프 정부군은 이들 모두를 힘으로 제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마스하도프에 대한 암살 시도가 여러 차례 자행되었다. 1998년 7월 23일에 마스하도프의 차량 밑에서 200킬로 TNT가 폭발하여 경호원 1명이 죽고 4명이 부상당했다. 8월에도 암살시도가 있었고 그 해에만 총 4차례의 암살 시도가 있었다. 구데르메스에서 바라예프를 궁지에 몰아넣었던 술림 야마다예프도 몇차례 암살 위기를 넘겨야 했다. 심지어 그렌져 텔레콤 참수 사건을 계기로 설치된 체첸 정부 납치 전담부 수장인 사기드 바기쉬에프 장군도 바라예프에 대한 진압 준비를 천명한 다음날인 10월 25일, 차량 폭발로 암살당했다.
체첸 땅의 모든 사람의 눈에 마스하도프의 힘의 열세가 뚜렷이 느껴졌고, 이는 그의 지지세력이 하나씩 빠져나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미 1998년 1월에 모브라디 우두고프가, 3월에 샤밀 바사예프가 각각 마스하도프 정권의 공보장관과 국세청장 자리를 사임하고 빠져나갔다. 1998년 2월까지만 해도 라두예프의 반정부 움직임에 우두고프와 바사예프는 강경한 대응을 천명하며 마스하도프의 뒤를 받쳐주기도 하였다. "더 이상 정부와 대통령에게 반항하는 세력에 대해 관용을 보이지 않겠다" (바사예프) "우리는 한 나라에 두명의 대통령과 두개의 군을 동시에 보유할 수 없다." (우두고프)
모브라디 우두고프. 1998년 전반기까지는 마스하도프의 든든한 지지자였다.
그러나 1998년 7월이 넘어서면서 바사에프와 우두고프도 마스하도프 진영에서 이탈하여 중립으로, 중립에서 서서히 반 마스하도프 세력으로 움직였다. 여기에 지난 3월에 바라예프 체포 시도까지 했던 대테러 부대 수장 훈자르 파샤 이스라필로프도 반 마스하도프 세력에 가담하였다. 그 전에 그가 남긴 말에는 무력감이 묻어나온다.
"우린 납치범의 통화를 도청할 장비도 없고, 그들을 제압할 중화기도, 심지어 그들을 추격할 차량조차 마땅치 않다. 우리 부하들은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열의만 같고 일하고 있다. 도대체 이 상황에서 어떻게 납치범에 대항할 수 있는가?"
마스하도프는 그래도 체첸 대통령으로서 파국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1998년 10월 3일, 그렌져 텔레콤 직원 4명이 납치되었다. 이미 작년 7월에 존 제임스와 카밀라 카가 납치된 이후로 다시 4명이 납치되자 국제적으로도 체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널리 확산되었다. 더 좌시할 수 없었던 마스하도프는 납치 전담부를 신설하였다. 물론 앞서 언급한 대로 전담부 수장 바기쉬예프는 취임 다음날 암살되었지만, 납치 전담부서는 자신들의 일을 시작하였다.
체첸 납치 전담부
체첸 정부 납치 전담부는 그로즈니 일대의 납치 조직을 샅샅이 뒤졌고, 바라예프의 이름을 빌리는 몇몇 하부조직을 소탕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지시를 받는 아프티 카라예프 등의 납치 실행 담당자를 검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바라에프 본인과 그의 조직 자체를 건드리는 것은 주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에 1998년 12월 8일에 납치됬던 그렌저 텔레콤 직원 4명의 목이 그로즈니에서 발견되었다. 체첸과 국제 사회는 경악하였고, 마스하도프는 30일의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범인은 바라예프의 지령을 받은 람잔 아흐마도프였다. 과거 압하지아에 참전하기도 했던 아흐마도프는 자신 나름의 납치 조직을 운영하면서 바라에프와 서로 거래를 하고 몸값을 나누고 있었다. 마스하도프 대통령은 이들을 납치 범인으로 공개적으로 언급하였고, 과거 라두에프와 키즐레이 원정을 동행햇던 현재 부통령 투르팔 - 알리 아타게리프도 바라예프를 배후로 지목하였다.
투르팔 알리 아타게리프. 키즐레이 원정의 지휘관 중 한명
바라예프는 참수할 당시부터 마스하도프의 반응을 예상하였고, 자신과 '이슬람 연대'에 대한 무력 개입을 도발로 간주하며 러시아 영내에서 새 전쟁을 도발할 것을 경고하였다. 자기 본거지이자 당시 와하비 세력이 가장 강했던 우르스 마탄 일대에 참호를 구축하고 병력을 집결시켰다. 동시에 그렌저 텔레콤 4명 참수 사건을 기소한 검사 만수르 타기로프를 납치하였다. 체첸의 그 어떤 정부 요직이라도 그의 일을 방해하면 무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마침내 1999년 1월 21일, 마스하도프는 납치 전담부를 우르스 마탄에 급파하여 바라에프를 체포하도록 명령하였다. 지난번 구데르메스 반란 때는 바라에프를 수세에 몰아넣을 정도의 세력이 되었던 마스하도프 정부군은 이미 그 힘이 반감되었다. 납치 전담부 병력 중에 바사예프와 훈자르 파샤 이스라필로프의 입김이 닿는 병사들은 우르스 마탄 진입을 거부하였다. 참호까지 파고 만반의 대비를 한 바라에프가 순순히 나올리는 었으니 결국 고성이 오가다가 총격전이 벌어져 한명이 사망하였다. 체첸 정부군은 빈손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아르비 바라예프와 '이슬람 특수 연대'. 체첸 정부군으로서는 그를 힘으로 제압할 수 없었다.
체첸이 파국으로 향하는 것을 막기 위한 마스하도프의 노력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우르스 마탄 전투 이후 닷새가 지난 1월 26일, 전직 대통령 젤림한 얀다르비예프의 고향 스타리 아타기에서 반 마스하도프 세력이 총 집결하였다. 바사예프가 주최한 모임으로 하타브, 바하 아사노프, 훈자르 이스라필로프, 모브라디 우두고프가 참여하였고, 심지어 당시까지도 중립을 고수했던 '검은 천사' 함자트 겔라예프와 아흐마드 자카예프까지 참여하였다.
함자트 겔라예프
아흐마드 자카예프
이들은 마스하도프에 대해 성토하면서 서로 의견을 모았지만, 무력에 의해 마스하도프를 실각시키지 않는 데는 모두가 동의하였다. 하지만 무력을 쓰지 않는다 해도 사실상 체첸 내부의 핵심 군벌들이 전부 반 마스하도프로 돌아섰다는 사실 만으로도 이미 체첸의 균형추가 그 쪽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었다. 몇번의 시도에도 실패했듯이 힘의 논리에 의하면 마스하도프는 그들을 어쩔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결국 1999년 2월 3일, 마스하도프는 체첸이 샤리아 통치에 따른 이슬람 국가가 될 것임을 선언하였다. 이는 서구적인 대통령, 의회, 헌법에 따른 민주적 통치 대신에 샤리아 대법정에 따른 결정을 준수하고 이슬람 슐라 위원회를 통해 실질적인 정책 결정을 하게 됨을 의미한다. 마스하도프는 이슬람 슐라 위원회 위원으로 얀다르비예프, 바사에프, 이스라필로프, 아사노프 등 주요 군벌 지휘관들을 임명토록 시도하였으나, 그들은 마스하도프의 임명같은 것을 굳이 받을 필요도 없고 받으려고도 안했다. 대통령으로서 마스하도프의 권한이 슐라 위원회에 까지 미치는 것을 원치 않았다.
1999년 2월 8일, 체첸 이슬람 슐라 위원회 (메흐 케르)는 샤밀 바사예프를 위원회 책임자로 이명하고, 체첸 전역의 각 지부를 담당할 위원 35명을 구성하였다. 마스하도프 대통령은 '위원'으로서 가입을 권유받아야 할 정도로 더 이상 실권이 없었다. 물론 마스하도프는 가입을 거절했지만, 체첸 각지의 군벌들이 포함된 메흐 케르를 마스하도프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하타브와 주요 와하비 지휘관들
마스하도프가 힘을 잃게 된 데에는 문화적인 차이도 있었다. 러시아에서 서구적인 교육을 받고 서구적인 민주주의 제도에 따라 대통령으로 선출된 마스하도프는 서구적인 가치관에 따라 러시아와 온건한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또한 선출된 대통령으로서 그에 걸맞는 권한을 원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체첸 사회의 의사 결정은 각 씨족의 연장자들의 모임에서의 합의에 따른 결정이 일반적이었으며, 수장에게 씨족들이 복종하는 것은 전시에 한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마스하도프도 이러한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자신들을 다루기를 원했고, 씨족들의 합의 사항과 대립되면 그 쪽에서 물러서기를 원했다. 또한 마스하도프의 서구적 가치보다는 이슬람 율법에 따른 통치를 선호한 사람들은 그가 알라의 뜻에 거슬리게 지나칠 정도로 러시아에 무딘 반응을 보인다고 생각했다. 여기에는 1차 체첸전 당시의 친러시아 정부 측 인물들도 마스하도프 정부 내에 몇명 합류해 있었던 것도 작용하였다.
결국 전통적인 수피즘에 대한 와하비즘의 유입과 납치, 테러의 문제 외에도 서구적인 민주주의가 정착하기에는 체첸 사회가 지나칠 정도로 전근대적인 씨족 사회였던 것이다. 역사 이래 하나의 강력한 수장 밑에 왕권 국가나 봉건주의를 경험해 보지 못한 씨족 사회 체첸이 헌법과 선거를 치뤘다고 일반적인 민주사회가 구현될 것이라는 기대는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이것이 체첸인들의 불운이자 비극이었다.
아슬란 마스하도프.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하여 체첸 이치케리야 공화국은 3대 대통령 마스하도프의 손을 떠났으며, 그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굴러가기 시작하였다. 체첸 동쪽 다게스탄에서 전쟁의 기운이 싹트고 있었는 데, 체첸의 와하비 세력과 군사 동맹을 맺은 다게스탄 이슬람 세력이 사절을 보내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체첸 국내의 반대 세력을 굴복시킨 와하비 세력들은 일제히 동쪽을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출처 : Paul Murphy의 The Wolves of islam
Moshe Gammer의 The Lone Wolf and The Bear
Sebastian Smith의 Allah's Mountain
http://en.wikipedia.org/wiki/Movladi_Udugov
http://en.wikipedia.org/wiki/Zelimkhan_Yandarbiyev
http://en.wikipedia.org/wiki/Aslan_Maskhad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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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워......영화를 보는거 같다는....ㅇ_ㅇㄷㄷㄷㄷ
나름 파란만장하게 전개되었죠
자멸을향해달려가는건가요 =ㅅ=;;;역시 단합이란건 없는거군요 전시제외,,,,
파멸을 막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그 세가 약했죠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체천의 내부 상황이 참 아수라장이군요. 그런데 본문 중에서 '우리는 체첸 땅에 아랍 낙타들이 떠돌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 걸 보면, 체첸인들이 다른 나라의 이슬람 세력이나 아랍인들에게 무슨 반감이라도 가졌던 것인지요?
와하비즘, 사우디의 지배적 이념이자 순수 이슬람으로의 회복을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은 원래 체첸 전통의 수피즘과는 상극이었습니다. 아랍세력에 대한 반감이라기 보다는 아랍출신 와하비에 대한 반감입니다.
지못미 마스하도프...
나중에도 마스하도프를 다루는 장이 있을겁니다. 체첸 땅에 그가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역시 광신도들이 제일 무섭군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광신도에게는 내일 이기던, 천년 뒤에 이기던 큰 차이가 없습니다. 현 체첸 반군들도 향후 10년 쯤은 더 전쟁이 계속될 거라고 하더군요.
단어 그대로 자멸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래서 2차 체첸전부터는 아무리 봐도 체첸의 손을 들어줄 수가 없어요(...)
처음 시리즈를 하면서 고민했던 게 이 부분을 어떻게 묘사하냐는 것인데, 결국 사실에 최대한 가깝게 가감없이 쓰기로 했습니다
러시아에게 '리..림하 어서 저를 먹어주세요' 라고 날뛰고 잇군요
체첸인들의 강한 기세가 브레이크를 잃고 적정한 선에서 멈추지 못했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근데 이것도 사실 복잡한 사정이 있습니다
이걸 보면 일본인들의 저력이 참 대단하긴 합니다...메이지유신때 그 많은 무장집단들이 얌전하게 무기를 놓은 셈이니 말이죠. 하여간, 내부의 결속력을 다지는데는 역시 강경파가 최고인듯 합니다 -_-;;;
일본과 체첸은 전혀 다른 민족이라고 봅니다. 일본은 역사 이래로 천황이라는 절대적 존재에 저항할 생각을 안하고 실질적으로든 명목상으로든 형식상으로든 자신들을 군림하게 하였지요. 그래서 나중에도 하나의 구심점으로 얼마든지 뭉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첸인들은 유사 이래로 각 씨족들의 합의에 의해 결정해 왔고, 이민족의 침략 시에만 하나의 수장 밑에 뭉쳤습니다. 이것을 '군사 민주주의' '전투 민주주의'라고도 하더군요. 각 씨족 단위는 서로 협력하거나 서로 피의 복수를 하거나 해서 티격태격하여 왔지만 씨족 전체가 어딘가에 굴복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민족인 러시아가 사라졌다고 세련된 민주 사회가 구축될 거라
기대하기는 난망하지요. 그래서 마스하도프 세력이나 반 마스하도프 세력이나 서로를 '비민주적' 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전자는 선출된 정부를 무시한다는 것이고, 후자는 전통적 합의체를 무시한다는 것이었죠. 물론 와하비와 수피즘의 대립도 빼놓을 수 없고, 씨족 사이의 세력 다툼도 빼놓을 수 없지만요
현재도 체첸에서 테러 일어났다고 간간히 보도가 뉴스가 나옴니다. 도대체 언제쯤 안정될것인지.!!!!!
누군들 알 수 있겠습니까
체첸이 마스하도프의 계획대로 운영되는게 가장 바람직했는데... 2인자 바샤예프가 등을 돌림으로써 정부가 빈껍데기가 되어버렸네요... 군사 민주주의. 전투 민주주의라... 우리나라도 그랬죠 해방이후 여러 지도자들이 힘을 하나로 모으기가 어려웠죠... 오랫동안 억압을 받아온 민족이 자유를 얻게 되면 아무리 못해도 3개 이상의 세력들이 난립하더라구요...
현재 구도를 정리해보면...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되네요... 정부파. 비정부파. 반정부파... 정부파 : 마스하도프(대통령). 아사노프(수상한 부통령). 야마다예프(국토수비대) / 비정부파 : 수피즘(전통파). 바샤예프(전수상). 이스라필로프(대테러부대). 겔라예프(검은천사). 우두고프(공보장관). 얀다르비예프(전대통령)
반정부파 : 와하비즘(사우디근본주의). 라두예프(외로운 늑대). 바라예프(냉혹한 터미네이터). 하타브(와하비 용병). 두다예프 지지세력... 맞나요?
아사노프와 얀다르비예프가 반정부파로, 수피즘이 정부파로, 하타브가 비정부파로 가면 얼추 비슷할 겁니다. 사실 그렇게 나누기도 복잡하지만요
결국 체첸이 파멸로 치닫게 되는건가요..정말 안타깝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