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단양군입니다.
눈병과 몸살감기라는 최악의 병마를 껴안고 있습니다만, 학교에도 못가고 집에만 있기에는 너무 심심한(?)관계로, 이번에는 일본국유철도 시대의 막장중 일부인 '전철역 폭동사고'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지금이야 JR이나 JR산하의 신칸센은 정시운전의 대명사로 손꼽히고 있습니다만...
그것도 비교적 최근 들어서 이루어진 사항이지, 원래부터 그러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오히려 더욱 더 우리나라의 코레일보다도 심한 막장역사를 겪었다는거죠...
(이 글을 쓰는 이유중 하나는, 우리나라도 절대 이런일을 겪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있습니다.)
그 단편중 하나로 바로 이 사건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아게오(上尾)역 폭동사건, 통칭 아게오사건(上尾事件)
이 아게오역 폭동사건(이하 아게오사건으로 통칭)은 1973년 3월 13일, 일본국유철도 노동조합(이하 국철노조로 통칭)과 일본국유철도 동력차 노동조합(이하 국철동차노조로 통칭)의 준법투쟁에 참다 못견딘 이용객들이 일으킨 집단 폭동 사태입니다.
1970년대 국철에서는 임금인상, 노동환경 개선, 경영 합리화에 반대하는 노동투쟁이 밥먹듯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지금 우리나라의 상황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공무원인 국철 직원들은 일본 법률상 쟁의행위(여기서는 파업등의 강력한 쟁의행위를 뜻합니다)가 사실상 불가능했으므로, 직원들은 법률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투쟁을 하게 되는데, 이를 '준법투쟁' 이라고 합니다.
제 1차 베이비 붐(1947~1950년 출생, 흔히들 단카이세대라고들 하죠)에 의한 인구 급증으로, 시가지가 확대되는 한편 통근, 통학객들도 꾸준히 증가해왔고, 그에 따라 다이어를 조정하여 이미 다이어는 과밀상태 였음에도 불구하고 통근시간대의 열차상황은 이미 한계를 넘어서서 안구에 습기가 차다못해 안구에서 약수물이 펑펑 솟아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상황에 이르자 다이어를 지키며 운행하는것은 이미 불가능으로 치닫았고, 지연, 과속, 취급위반등의 사고는 자주 발생하다 못해 아예 일상화 되는 실정이었습니다.
게다가, 국철노조는 이를 역으로 이용하여 고의로 운행에 차질을 빚는 태업형태의 준법투쟁을 개시하고 있었습니다.
(※ 태업(怠業) : 외관상으로는 작업을 하지만 실제로는 작업을 하지 않거나 고의적으로 완만한 작업, 또는 조잡한 작업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문 뜻 그대로 해석하면 게으른 일이라는 뜻이 됩니다.)
노조의 기관사들은 수시로 사소한 이유를 핑계로 정지, 서행을 반복하여 후행열차가 더 이상 다이어를 지킬수 없게 만듬으로서 이미 다이어는 완전히 소실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사건 당일, 이 날도 노조는 위와 같은 준법투쟁을 여전히 실시, 국철 타카사키선(高崎線) 카고하라(籠原)역을 출발하여 우에노(上野, 우리나라의 용산역과 비슷한 역할을 합니다. 일본 동북부 지역에서 들어오는 거의 모든열차의 시종착점으로, 규모가 상당히 큽니다.)역 도착예정이었던 상행 열차가 약 14분 지연되어서 아게오역에 도착합니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국철의 제 2차 준법투쟁의 두번째 날이었습니다. 상행 플랫폼에는(준법투쟁으로 인한 지연으로)이미 3,000여명의 통근/통학객으로 북적이고 있어 열차에 탑승할수 없는 승객은 물론, 아예 열차도 출발하지 못할 심각한 상황을 맞닥트린지라, 부득이하게 역에서는 개찰제한을 할 정도로 혼잡했습니다.
그런 상황속에서 역시 우에노로 가는 보통열차가 옆 플랫폼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이 열차는 165계라는 급행형 열차로 운행되는 보통열차 였습니다. (165계는 2문형 열차로서, 통근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은 열차입니다. 차량설명은 http://cafe.daum.net/jtrain 에서..) 그러나, 역시 이 열차도 완전히 콩나물 시루떡이 된 상태여서 더 이상 발차할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결국 (누군지는 모르지만)이 열차를 두 정거장 뒤에 있는 오오미야(大宮, 사이타마현의 철도 중심지)역에서 종착시킨다는 판단을 과감히 실행, 이를 알리는 안내방송을 하게 됩니다.
그 결과, (당연히)일부 승객들이 완전히 맛이 가서 운전실에 접근, 또는 선로에 들어가 열차에 돌을 투석하는 등의 테러(?)행위를 자행, 유리가 깨지자 그 소리를 듣고 차내의 승객들도 폭도에 가담, 결국 일부 승객들이 뒤엉켜서 다같이 사이좋게(?) 테러행위를 자행하는 폭도들이 되버립니다. 흔히 이런 상황을 보고 폭동이라고 하죠.
당장 자신을 죽이고도 남을것 같은 폭도들을 두려워한 열차의 운전사들은 잽싸게 손에 들고있던 마스콘을 팽개치고 빛의 속도로 아게오역 역장실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
이로서 열차는 완전히 운행하지 못했고, 당황하던 일반 승객들도 열차가 움직이지 않는것에 대 격분, 결국 역 내에 있던 약 10,000 여명 정도가 전부 폭도로 변하여 역장실로 돌입하는등의 테러행위를 가했습니다. 안에 있던 역장은 망치등의 도구로 맞아 전치 5일정도의 부상을 당했습니다. 또한 폭도들은 당 역에 정차하고 있던 열차의 헤드라이트, 창문등을 부수고, 운전실로 난입해 운전설비를 완전히 걸레로 만들고, 심지어는 역의 시설마저도 무참하게 파괴되는 대 참사를 일으켰습니다.
이것으로도 모자라서, 플랫폼을 두 열차가 점거하고 있는 관계로 역을 통과하지 못하고 아게오역에서 약 300m정도 떨어진 선로에서 대기중에 있던 특급 토키 2호(원래 니이가타 방면의 죠에츠본선 특급열차. 지금은 죠에츠신칸센 개통으로 신칸센화.)도 폭도들에 의해 돌에 맞아 유리창이 파손되는 등의 피해를 입었으며, 이 혼란을 틈타 역무원실에서 20만엔을 훔쳐 달아나려 했던 아주 이성적이고 현명한(?) 폭도도 있었다고 합니다.
역은 폭도가 된 승객들에게 점령되어서 그 주변마저 완전 개판이 되었고, 사이타마현 경찰측에서도 즉시 기동대원을 파견하였으나 너무나 쪽수가 딸리는 관계(약 550여명, 10,000여명의 폭도를 상대하기엔 모자라기 그지 없습니다;;)로, 폭도를 제압하지 못하고 그저 더 퍼지지만 않게 견제할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 자리에 취재하러 왔던 취재기자마저 제대로 털려서 부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최종적으로 폭동에 가담한 인원수는 약 1만여명 정도라고 추정됩니다. (너무 많아 다 잡을수가 없었다는거죠.) 이 폭동은 같은 노선인 타카사키선의 오케가와(桶川)역이나 키타모토(北本), 코노스(鴻巣), 쿠마가야(熊谷)역을 시작으로 타카사키선과 오오미야~우에노 간의 선구를 공용하는 도호쿠본선(東北本線) 사이타마 현내의 역에도 영향을 끼쳐(즉, 폭동이 발생) 주변 치안이 극도로 악화되는등의 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타카사키선의 미야하라(宮原, 아게오역 바로 전 역. 4.2Km 차이)역에서는 평소부터 통근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쌓인 승객들이 열차가 오지 않자 참다 못해 당 역 직원을 강제로 연행하여 다음 역인 오오미야역까지 걸어가도록 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오오미야역 에서도 폭동이 발생)
이 폭동사고로 아게오역 주변 타카시키선은 약 11시간 동안 완전마비, 또한 정상적인 다이어로의 운행이 불가능(당연한 결과죠;;)하여 대행버스로의 수송을 병행하는 등 이날 내내 다이어는 혼란의 도가니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체포자는 전체 폭도의 0.1%에도 못미치는 7명으로, 이 중에는 위에서 말했던 '20만원 훔쳐 달아난놈'과 '취재하러 온 취재기자 폭행한놈' 등이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국철노조의 캐안습 준법투쟁(태업)에 의해 승객들의 분노가 표출된것이 원인'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당시 국철직원의 건방진(흔히들 싸가지 없다고들 하죠) 영업행위를 참다못해 결국 이 준법투쟁으로 인해 폭발해버린 사고라고도 할수 있겠습니다.
폭동에 가담한 승객들은 주로 아게오역 주변에 발달하던 신개발 택지지구에 거주하던 단카이세대(47~50년생)로서, 당시 사회의 주역으로서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이 단카이세대의 인구수가 매우 많은지라(전후 베이비붐 세대입니다) 그때 당시에는 주택 부족현상이 심화되어 아게오등의 도쿄도 주변 6개 현에 택지지구가 한창 조성되던 때였습니다. 그로 인해 그 주변지역의 인구가 급증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국철측은 재정의 압박으로 인해 승객이 불어남에도 불구하고 전혀 열차를 신조할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운영형태는 거의 모든 열차를 각출해서 운행하던 그야말로 초 막장 운행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수도권 전철에 전동차형 CDC가 투입되었다고나 할까요? 솔직히 지금의 우리나라 상황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이젠 전설이 되었지만요...)
더 이상 열차를 각출해 내지 못하여서 지방에서 쓰이던 근교형 로컬열차까지 총 동원하여 수도권의 러쉬아워에 투입하였다고 합니다. (심지어 나가노 지방에서 쓰이던 우스이고개 등반용 169계까지 넣었다고 하니.. 이건 거의 안습이 아니라고는 볼수 없는 상황입니다;;)
또 당시 6~70년대 일본에서도 우리나라와 같이 데모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용객들이 데모에 익숙해져서 이런 사고를 발생시켰다는 가능성도 없지않아 있기는 합니다. 결국, 이 당시의 시민들이 당시 국철노조의 태업에 대해 얼마나 반감을 갖고 있었는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사건 다음날, 다시 폭동이 나지 않을까 두려워한 경찰은 기동대 병력을 아게오역 주변에 배치하여 치안을 강화하였고, 그 날도 전날과 다를바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째 승객들은 '어제 무슨일이 있었지?'라는 식으로 평소대로 전철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놀랍습니다)
또한, 노조원들에게도 비난의 여론이 쏠려서 준법투쟁 중단의 위기에 몰릴뻔 했으나, 이에 국철 노조측은 아주 간단히 '아게오역 폭동사고는 단순히 위에서 선동한 행위' 라고 받아쳐 버렸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이 발언으로 국민의 여론을 간단히 씹어버린 국철노조는 결국, 같은 해 4월에 '수도권 국철 전동차 폭동사건, 통칭 국전폭동'을 면치 못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당시 국민들이 일본국유철도에 갖고있던 불신감을 표출해낸 하나의 사건이며, 또 '정부 고위층이 여론을 조작하고 있다'고 그냥 받아쳐버린 국철의 각 노조에 있어서도 크나큰 타격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표면적으로 보면 '합법적 노동운동이 주권을 갖고있는 국민들에 의해 저지당했다'는 이야기가 되어, 향후 노조의 정당한 쟁의행위마저 부정되는 풍조를 만들었다(고도 합니다만, 역시 국민을 볼모로 삼은 쟁의행위는 마땅히 제재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러쉬아워에 급행형 열차를 투입하여 아주 제대로 피본 국철측은 다음달 즉시 통근형 전동차 115계 40여량을 긴급발주, 그 후에도 계속 차량을 증비하여 적어도 '아게오'역을 지나는 열차에 대해서는 2문 형식의 급행형 차량의 운행을 막았다고 합니다. (어지간히 무섭기는 했나봅니다;;)
현재 이 노선에는 E231계라는 최첨단 차량이 달리고 있습니다. (물론 혼잡하긴 하지만 이 당시만큼은 아닙니다^^)
다음 편에서는 이 아게오역 사고의 진화판(?)인 수도권 국철 전동차 폭동사건, 통칭 국전폭동에 관해 알려드리겠습니다^^(아마 내일도 눈병덕에 학교를 안가게 된다면 내일 쓰게 될겁니다..)
출처 - Wikipedia, 본인의 병든 머리 등...
P.S 어디 한일간 텍스트번역 사이트에서는 일부 일빠들이 '일본의 민도는 세계 최고' 라는 개헛소리를 떠들고 다니더군요. 허허,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신경쓸 필요없는 캐헛소리입니다. 가서 말해주세요. 혹시 아게오사건과 국전폭동사건을 아냐고. 이 이외에도 국철테러사건은 여러번 있었습니다. (그것도 일반 자국민에 의한 테러행위... 우리나라에선 이런거 없죠?)
첫댓글 1985년 국철동시다발게릴라사건도 꽤 유명하죠. 역에 불지르고 케이블까지 자르고, 이때는 국철직원 2명도 연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일본공산당 산하 과격파들과 국철동력차노조가 저질른 일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