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아카데미 위원회가 좋아하는 요소에 MASH, 즉 Mental illness-정신병, Affection-사랑, Success-성공, Humanism-휴머니즘이 있다. 이처럼 정신적인 고통을 수반한 이가 사랑의 힘으로 그것을 극복하고 성공하여 스포트라이트를 받기까지의 생애를 다룬 영화는 수없이 많다. MASH의 요소를 그대로 충족하는 ‘모범답안, 뷰티풀 마인드도 분명 한번쯤은 봤을 법한 천재의 이야기, 정신병자의 이야기, 로맨스, 그리고 극적인 성공들이 잘 배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요소를 교과서처럼 따르고 있어 진부하다고 말하기 전에, 나는 분명 영화를 보면서 존 내쉬의 삶에 함께 눈물 흘리고 감동하고 말았다. 인생은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극적인 것이었고 그의 극적인 삶은 바로 환상과 맞닿아 있었다.
프린스턴 대학원 시절부터 내쉬는 환상과 현실을 절묘하게 오가는 인생을 산다. 그러고 보면 방탕한 룸메이트 찰스 허만은 실제로 내쉬 이외의 사람과 대화하거나, 다른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장면이 없다. 이상하게 생각했을 법도 한데 영화는 절묘하게 나마저 환상을 진실로 믿게 한 다음 뒤통수를 때리는 것이 아닌가.. 찰스와 마시, 그리고 파처는 모두 내쉬가 만들어 낸 환상 속의 인물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환상이라는 것을 넘어, 왜 내쉬가 만들어 낸 환상이 그들이었나 하는 것이다.
내쉬가 본 환상들은 결국 그의 고독과 오만함, 허영심, 자존심이 응집되어 나타난 인물이 아닌가 생각한다. 마치 언젠가 보았던 소설의 한 장면처럼, 언제나 바래왔던 것 처럼, 천재와 그에게 베스트인 개방된 친구 하나, 세상에 물들지 않은 맑은 눈을 한 어린아이. 그리고 재능을 인정해주는 사람. 스스로가 ‘사람들이 나를 싫어한다’고 단정짓고 자존심과 허영심의 담을 쌓은 그에게 술 한잔 권하는 친구는 비록 환상이었지만 찰스 뿐이었고, 궤벽스러운 자기에게 뛰어와 먼저 안아달라고 팔을 벌리는 순수한 영혼인 마시도 그에겐 하나뿐이었고, ‘당신이 아니면 안 된다’며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자존심에 충만할 수 있는 일을 준 사람도 파처 뿐이었다. 사실 현실에서도 내쉬는 암호해독을 한다. 팬타곤에서 소련의 숫자암호를 그 자리에서 풀어버리는 그에게 결코 질문은 허용되지 않는다. 오로지 질문은 내쉬의 방향으로만 쏟아진다. 그 곳에서 대화란 없으며 묻는 사람과 대답하는 사람이 정해져 있을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내쉬는 마치 이용당하는 느낌을 받았을 지 모를 일이다. 칼뱅이 말했던 것 처럼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은 그 능률과 직결하는데! , 그 소명의식을 충족시켜준 것이 바로 파처의 제안이었던 것이다. 또한, 우등생의 논문을 독창적이지 못하다고 폄하하다 바둑에 지자 마자 졌다는 데 대해 자존심의 상처를 입고, 졌다는 상황에서 경악하기까지 하는 그에게 책상을 밀어내 주는 친구란.. 친구를 넘어서, 일기장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 그런 상황들이 환상이었다. 나마저 한동안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혼란스러웠던,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환상이었다. 그가 복잡한 숫자들 속에서 암호를 읽어내면서 어떤 규칙적 도형으로 숫자가 빛날 때 나마저 무언가 보이는 듯한 느낌을 받고 카타르시스를 느꼈기 때문에, 그리고 적정한 시기에 찰스 같은 친구가 있어 꽤나 흐뭇해 했기 때문에, 놀라운 반전이었다. 영화에는 환상임을 인정하기까지 그가 겪는 고통들이 극적으로 잘 나타난다.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아내가 개봉되지 않은 암호해독문을 보일 때 아무 말 없이 가버리는 내쉬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다이오드가 이식되었다 믿는 팔을 피가나도록 후벼판다. 분명 수학자로서의 이성을 지닌 내쉬라면 환상임을 자각했을 것이나 그것을 인정하기까지는 너무 많은 시간과 고통이 따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들은 그의 인생에 참 큰 의미였으니까. 많은 대화중에서 ‘나는 가치부여하기를 좋아해’라고 했던 내쉬의 말의 생각난다. 손 끝을 따라 별이 우산처럼 보인 것 과 같이 어떤 것에 의미를 부여하면 그것은 내게 있어 가치 있는 것이 된다. 하지만 믿었던 사실에 대한 배신감과 여태 해왔던 편집증적인 암호 해독이 무엇에도 기여할 수 없었다는 데에서 온 자존심의 상처들은 세상은 너무나 모순되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니었을까. 내가 진정 바래왔던 것들은 환상속에 있다는 모순 말이다. 그러나 이미 환상에는 금이 가 있었다. 극도의 불안이라는 금이… … 파처에게 그 정도 불안은 세계 평화를 위한 ‘작은 대가’이다. 과연 작은 대가일까? 그 불안이 커져 부부사이에 불신이 생기고 나의 일상생활에 불화가 생기는데 말이다. 내쉬는 세계의 평화를 짊어 지기에 앞서 한 가정의 가장이고 어느 수강생들의 선생님이지, 가미카제 같은 존재는 아니다. 그러한 불안이 그를 극도의 정신분열로 이끌어 환상과 현실의 괴리사이에서 방황하고 사회는 그를 냉대하게 된다. 어느 비오는 날 엘리샤의 차를 막으며 ‘마시는 나이를 먹지않아’라며 드디어 그는 조금씩 치료에 응하고 견디기 힘들었던 환상을 인정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내쉬에게 있어 그 가치 있는 것들은 엘리샤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지극히 현실에서의 일이 아님을 용납하기 불가능 했을 지 모르나 인정의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가끔은 찰스와 대화하던 때가 그리워’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엘리샤의 헌신적인 사랑과 내쉬의 엘리샤에 대한 믿음이다. 물리학도였던 엘리샤는 내쉬와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줄 아는 유연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다. 소음을 차단하기보다는 줄이는 방법. 마치 고등학교 때 소음을 차단하는 간접적 방법과 소음 자체를 줄이는 직접적 방법의 예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장면을 시작으로 둘은 사랑하고 결혼까지 골인하게 된다. 하지만 정신분열증을 앓는 내쉬를 남편으로 두고 엘리샤는 참으로 힘들어 한다. 그녀가 느꼈던 의무감, 죄책감, 분노, 자각, 그리고 사랑 사이에서 그녀는 차차 늙어가고 상처입는다. 그러한 극복의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환상에 대한 ‘무시’였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라고 했던가. 마찬가지로 그는 환상에게 ‘넌 환상이야!’라고 윽박지르는 대신 그들을 무시함으로써 더 이상 나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감동적으로 하나하나를 극복해가면서 어느 샌가 노장이 되어버린 내쉬는 젊은 시절 열정적으로 ‘창조’했던 내쉬 균형이론으로 노벨상을 받게 된다. 여기서의 노벨상은 영화에서 말하는 것 처럼 ‘특이한 경우’이다. 그에게 있어 노벨 경제학상의 의미는 엘리샤에 대한 사랑의 결정체이고 그녀의 헌신에 대한 보답이며 그의 정상궤도 진입에의 축하인 것이다.(정상과 비정상의 관점차이에 대해서는 잠시 접어둬야 할 것 같다)
그 내쉬 균형이론은 오리지날 아이디어에만 가치를 두고싶어 했던 그의 ‘생활의 발견’이었다. 그에겐 전공 수업보다 모이를 쪼는 새의 움직임이 더 흥미로운 것이었다. 무언가를 관찰하고 다른 시각에서 보는 것이야 말로 창조의 시작인 것이다. 그 창조야 말로 그가 진정 원했던 사회의 인정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이로써 그의 환상에의 집착은 모두 해소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아름다운 마음’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비상한 두뇌가 아니라,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논리적 연산작용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한계를 뛰어넘는 사랑과 의지의 힘인 것이다.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도 이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하다. 내쉬 교수가 무한대 기호를 그리는 것처럼 끊임없이 걷던 장면이 그것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르트르는 ‘천재는 재능이 아니라 절망적인 처지 속에서 만들어 지는 돌파구’라고 했다는데 만약 내쉬가 그 이전의 사람이었다면 ‘바로 존 내쉬 같은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하나 더 붙을 법도 하겠다. 언젠가 읽었던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라는 책을 덮을 때 내가 살아온 삶에 대한 반성을 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은 영화로 기억될 것 같은 뷰티플 마인드였다.
첫댓글과제물은 열심히 했군요. 각주 출전이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답안도 평범 수준이었어요. 다만, 좀 더 이론적이고, 좀 더 치밀하게 반박을 하는 게 어땠을까요? 우리는 다 같은 과이고, 그래서 더 친밀하게, 더 도발적으로 할 수 있었을텐데...정모에 꼭 참석하세요. 동기들 끌고....
첫댓글 과제물은 열심히 했군요. 각주 출전이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답안도 평범 수준이었어요. 다만, 좀 더 이론적이고, 좀 더 치밀하게 반박을 하는 게 어땠을까요? 우리는 다 같은 과이고, 그래서 더 친밀하게, 더 도발적으로 할 수 있었을텐데...정모에 꼭 참석하세요. 동기들 끌고....
이제1학기 수업밖에 받지 못 했고, 철학과 수업다운 수업은 받아보지 못 했습니다. 그런데, 지극히 철학과다운 답안을 원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좀 더 커서 다시 교수님 수업을 수강하도록 하겠습니다. C로 낮춰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