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 샘소리터에 올리는 편지
남 중
존경하는 김 선배 내외분께 올립니다.
지난번 정읍 여행이 저에게는 일생을 뒤흔드는 대사건이었습니다. 정읍 쌍암리 ‘샘소
리터’ 풍류방 방문 이후, 제 알량했던 문학관, 예술관, 인생관이 성장 동력을 얻은 까
닭입니다. 음악이 무엇인가를 어렴풋 느끼게 되었고,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내포한 숭
고한 정신을 향해 깊이 수행할 수 있음을 이제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천박(淺薄)했습니다. 이곳저곳 기웃거렸고, 발을 넣자마자, 이내 다른 곳으로
옮겼지요. ‘화려한 이사’. 어떤 친구가 제게 붙인 별명입니다. 탈춤과 민속학을 더듬다
가 문화인류학에 정신을 빠뜨렸고, <주역>에 삼 년 넘게 잠겼다가, 불경을 오 년 가
량 더듬었고, 노장 사상으로 옮겼다가, 정신분석학을 훑었습니다. 최근에는 훈민정음
을 읽은 후, 동학사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개신교 세례는 단호히 거부했으나, 천주교
견진성사는 받았으며, 스님께 법명을 받고, 동학에 입교하였지요. 그러나 시 쓰기에서
만큼은 평생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내뱉은 작품(?)이 1,500 편이 넘고,
퇴고 횟수는 30만 번이 넘으니 만만치 않다 평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만만한가
봅니다. 제 시를 읽은 사람들은 ‘어렵다. 어지럽다.’는 한두 마디로 제 작품에 대한 평
을 끝냈습니다. 성의 있는 분들은 너무나 많은 내용을 작품에 담으려 한다 했지요.
반성한다면 빈 깡통이 내는 요란한 소리가 제 작품에서 들렸던 모양입니다.
천박함이 무조건 나쁘지는 않습니다. 깊고 무거움은 얕고 가벼움에서 시작하니까요.
물 한 방울도 얕음에서 시작하여 바다를 이루니까요. 졸졸거리는 실개천들이 인도양,
대서양, 태평양을 이루니까요. 세포가 모여 생명 개체를 이루고, 개체가 모여 생태계
를 형성하는 법이지요. 세상과 우주에 대한 생각도 ‘나’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됨이 분
명하니까요. 천박함은 크고 두터움을 이루는 기본입니다. <주역> 몽괘(蒙卦)는 그 정
신을 강조합니다. ‘산하출천몽(山下出泉蒙)’이라 했습니다. 바위산 아래로 솟는 샘물은
얕고 연약하기만 합니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천박함이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순
수함입니다. 물론 저는 제 천박(淺薄)을 순수함으로 이해해주기를 바랐습니다. 어린
아이가 세상에 대해 갖는 의문과 질문, 그리고 세상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노력으로
제 ‘화려한 이사’를 이해해주거나, 거들어주기를 소망했습니다.
‘먼지알 속에 우주가 있다.’는 의상대사 노래입니다. ‘손바닥에 천지가 있다.’는 소강
절선생 말씀입니다. 저는 부분에서 전체를, 변두리에서 중심을 구했습니다. 이 판단
자체가 잘못되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고향 상촌 사투리에 천착했고, 서양 중심 사상에
서 소외받는 동양사상을 읽었으며, 주류 학자들이 놓친 훈민정음 낱자에서 올바름을
찾으려 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논문으로 썼으며, 이런 정서로 시를 내놓았습니다. 이
런 태도에 낯선 사람들은 제 글을 꺼려했고, 어렵다며 문제점을 제기했으며, 저는 설
명해야 해야 했습니다. 제 설명을 자신들이 지닌 인식체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
고, 논쟁으로 번졌습니다. 저는 논쟁에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했습니다. 이기면 현
학적인 오만이나 교만으로, 지면 낡거나 비과학적인 생각으로 분류되어 소외되었습니
다. 그럴수록 저는 그들에게 도전했고, 제가 지닌 ‘변두리 의식’을 무기로 그들 중심
에 서고 싶었지요. 변두리가 지닌 중심성에 대한 저의 오해였지요. 그 중심성은 소외
받음도 아니었고, 지배함도 아니었습니다.
물은 태평양으로 흘러든 다음에야 제 깊은 본성을 획득하지 않습니다. 새 소리가 아
름다움은 하늘 중심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린 아기에게 애정어린 눈길이 가
는 까닭은 갓난아기가 위대한 인격으로 성장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위 산 아래 솟
는 물은 이미 바다처럼 깊은 본성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중심이 되어 태평양
에 도달하여 하늘로 오르게 되지요. 새 소리가 아름다운 까닭은 새가 자신이 지닌 본
성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위대한 성인보다 아기가 예쁘고 귀여운 이유는 타고
난 본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까닭입니다. 물은 물대로, 새 소리는 새 소리대로, 아
기 웃음은 깔깔거림 그대로 이미 중심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깨달음은 김 선배 내외분께 얻었습니다. 새벽부터 빵배달을 하고 밤에는 국문
학을 공부했던 선배, 그런 남편을 평생 지킨 안주인. 남들이 거들떠 보지 않는 국악,
그것도 정악을 평생 고집한 선배, 그 미친 사람을 말없이 도운 안주인, 선배 내외분
은 부정할지 모르지만 두 분은 정읍 산골에서 이미 중심이 되었습니다. 정읍 쌍암리
용바위와 거북바위는 그 자체로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생극합일(生剋合一)된 경지
를 보이고 있고, 음과 양이 이루는 태극(太極)이며 이것이 음악으로 발현됨이 율려(律
呂)이니 세상 중심 원리가 이미 쌍암리 ‘샘소리터’ 풍류방에 실현되고 있다고 보아 마
땅하지요. 그 숱한 손해 속에서 이것을 이루어낸 두 분은 이미 인간으로서 태극(太極)
과 율려(律呂) 그 자체가 된 셈입니다. 김 선배 내외분, 당신들께서는 이미 천지인(天
地人) 원리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미 저도 삼류문학에 머물겠다 선언했지만, 이 기회에 철저하게 중심 지향성을 포
기하겠습니다. 더 사투리에 충실하고, 민간사상을 포함하여 소외받는 생각들을 더 소
중하게 살피겠습니다. 흙내음, 풀꽃 향기는 물론 똥냄새까지 더 맡아 보겠습니다. 제
주변머리를 청룡언월도처럼 휘둘러대지 않겠습니다. 다만, 제 내면의 성장을 위해, 제
본성 회복을 위해 더 치열하게 탐구하고 수행하겠습니다. 방민 교수님을 모시고 최근
시작한 수필공부는 시 쓰기에서 도망가기 위함이 아닙니다. 더욱 치열해지기 위한 방
편입니다. 수운 최제우가 나무칼을 휘두르며 불렀던 <칼노래>는 내면 성장을 위한 치
열한 노력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최제우는 그 노력을 ‘다시 개벽’이라 했지요. ‘다시
개벽’이 제 본성을 회복해 주리라 확신합니다.
선배는 장구를 짚으며, ‘풍류에는 시작과 끝이 없다’라 선언했지요. 그러니 중간도
없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나 이미 선배는 매 순간이 중심임을 깨닫고 실천하고 있습니
다. 쌍암리를 떠나는 이른 저녁 시골 어르신들 모습으로 배웅하는 내외분을 보며 한
없이 부끄러우면서도 다시 시를 쓰고 싶은 의욕이 솟구쳤습니다. 우뚝우뚝 뻗어가는
내장산 서래봉 그림자를 품은 만경강. 강물에 흐르는 저녁노을을 가슴에 안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두 내외분께 감사합니다. (3,180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