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여름
김 인 현
나락으로 떨어졌다.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었다. 침몰한 나의 배. 선장으로서는 불명예였다. 나는 바다로 돌아가지 않고 해상법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도서관에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준비했다. 다행히 대학원입학시험에 합격하였다. 서울 그 낯선 곳에서 길이 보였다. 인자해 보이는 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연구실의 조교를 지원했다. 한 학기를 공부했다. 궁금했던 의문들이 하나씩 풀리기 시작했다. 이제 해상법의 기본을 알 것도 같았다.
첫 학기를 마치고 집이 있는 대전으로 왔다. 다음 학기를 위하여 휴식이 필요한 때였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마음의 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스스로 불명예스럽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 것인가?
나는 이렇게 속으로 대뇌었다.
“차라리 내가 경험한 것을 글로 남기자”.
“그리하여 해운계나 선장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도록 하자”. “더 이상 부끄러운 마음으로 소극적으로 살아가지 말자”.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는 점을 널리 알리자”.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의 짐에서 벗어나자”.
호주로 입항하던 배가 암초에 좌초한지 3년이 된 시점이었다. 아직도 운명의 그날을 전후한 모든 사실들이 생생한 때였다. 한 학기동안 배운 해상법이론을 바탕으로 글의 뼈대를 잡았다. 그 글의 뼈대에 내가 경험한 사실들을 하나씩 채워나갔다. 선박은 좌초했고 화물에 물이 들어와 화주가 선주에게 손해배상청구를 하였다. 선장이 어떻게 이 소송을 방어하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적었다. 몇 번을 고쳐적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적은 논문형식의 글이었다. 그렇게 15페이지 정도의 글이 완성되었다. “본선 선장의 선박전손사고에 따른 국제소송체험기”라는 제목을 달았다. 월간 해양한국에 그 글을 보냈다. 글이 채택되었고 그해 9월과 10월 2회에 걸쳐서 게재가 되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내가 불명예스런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가만히 있었으면 그것을 몰랐을 사람들이다. 괜히 내가 삿갓을 뒤져서 오히려 나의 부끄러운 과거를 알게 된 것이다. 그것도 내가 스스로 택하여 말이다. 이를 계기로 나는 왜 선장이 바다에 있지 않고 학교에 있느냐는 질문에 당당하게 답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나는 이렇게 답하곤 했다.
“저와 같은 불운한 선장에게 법률적인 도움을 주기위함입니다”
다음해 국내 최고 법률사무소에서 영입제안이 들어왔다. 나는 이 글을 제출하였다. 그런데, 그 변호사님은 이미 나의 글을 읽은 상태였다. 법률사무소에서 제2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다. 선장이라는 직함을 가진 해사자문역으로서 전문가로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게 된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좌초된 선박의 성장이 아니었다. 나는 당당하게 선장으로서 일할 수 있었다. 나와 같이 사고를 당한 선장을 인터뷰하고 조언을 해주기도 하였다.
그 뒤 교수가 되었고 많은 글을 발표하였다. 어느 글이 가장 가치있는 글인가라는 질문에는 단연 나는 위 “선장의 체험기”를 꼽는다. 왜냐하면 이 글이야말로 나의 인생을 바꾼 최고로 가치있는 글이었기 때문이다. 내용 때문이 아니다. 그 글을 통하여 내가 부끄러움을 떨치고 세상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는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부끄러웠던 마음에서 일어나 당당하게 살아나갈 수 있도록 글을 발표하자는 그 결심과 즉각적인 실행. 돌이켜보니 정말 신의 한수였다.
그해 여름방학은 무척 더웠다. 골방에서 윗통을 벗어 재치고 거의 8월 한달을 더위와 싸웠다. 신의 한수가 된 이글은 바로 1994년 여름 대전 중리동의 우리 집 골방에서 탄생되었던 것이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1994년 여름이다. 올해보다 더 더웠던 때가 바로 1994년 여름이라는 언론보도를 보니 불현 듯 절박했던 22년 전의 일이 생각났다(2016.8.12.)
첫댓글 지난날의 거울이 지금에 이르게 만들지 않았나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기억나요,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으니 불행이 다행이라 생각하세요,
늘 마음으로 당신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김인현 고려대 법대 교수님 당신을 존경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