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권(徐東權)은 1932년 10월 30일 경상북도 영천군에서 태어났으며,
고려대학교 정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검사로 출발
검찰총장에 올랐다. 1989년 7월 19일에서 1992년 3월 30일까지
6공화국 시절 제17대 국정원장을 지냈다.
이 직책은 안기부 장관직이다.
박정희 대통령 집권 이후 그때까지 안기부장을 지낸 이는 모두 직업군인
출신이었으며 민간관료출신은 고작 3 명뿐(노신영, 배명인. 서동권)이었다.
그런데 이 세 사람 중 배명인, 서동권은 검찰 출신이었다. 6공에 들어 오서면서
검찰출신이 권력의 요직인 청와대와 안기부의 핵심에 포진하였다. 중정부장
안기부장은 그 당시 권력 서열 제2위라 일컫는, 막강한 자리이었다.
일찍이 전두환 대통령은 장세동 안기부장을 평양에 밀파하고 북한의 허담을
서울에 비밀리에 오게 하여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였으나 그 회담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하여 김일성과의
정상회담을 논의하기 위하여 서동권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을 평양으로
밀파하였다.
1980년대에 소련의 서기장 고르바초프는 ‘개혁’, ‘개방’을 주장하고 이에
추진함에 따라, 공산권 국가들이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되어 냉전체제가
해체됨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도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노태우 정권은 공산권국가들과 수교를 하는 등 이른바
‘북방외교’ 정책을 추진하였다.
서동권 국가안전기획부장은 북방외교 정책의 총대를 메고 1990년
9월 30일부터 10월 2일까지 방북하여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를 만나며
다각도로 노력한 끝에 남북고위급회담을 성사시켰다. 1991년 9월에는
남북한이 UN에 동시에 가입하였으며 이를 배경으로 12월에는 남북한
기본합의서를 채택하게 된 것이다. 이 기본합의서의 주요사항은 남북한
상호 체제인정과 상호불가침, 남북한 교류 및 협력 확대안이었다.
1992년 9월 16일부터 9월 17일까지 남북고위급[총리]회담이 열렸다.
이 회담에서 양측은 남북합의서 이행과 관련한 3가지 부속합의서에 합의했다.
3가지 부속합의서는 남북화해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합의서, 남북불가침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합의서, 남북교류협력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합의서이다. 이로서 서동권은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의 물꼬를 튼
일등공신이 되었다. 또한 새 시대에 부응하는 북방외교 정책의 새로운 아이콘을
만들어 남북통일사에 기념비적 업적을 이룩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현재 직업은 변호사로서 동서법률문화연구소 대표연구사이며, 시민단체인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줄여서 ‘헌변’]에서 활약하고 있다. 헌변은
보수성향의 변호사들이 만든 단체다. 헌법정신의 근본인 자유와 창의를
바탕으로 한 헌법정신의 수호와, 헌법이론연구, 판례연구 및 발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지키다 고통을 받거나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 대한 법률적 지원을
위한 변호사들의 모임이다.
회원은 서동권 변호사를 비롯하여 정기승 전 대법관, 전직 국회의원인 강신옥
장석화 변호사, 서울시장을 지낸 김상철 변호사, 82년 자유민족당 총재를
맡았던 용태영 변호사,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이기창 변호사 등 주로 보수층을
대변해 온 원로 변호사 87명이 중심이 되어 전국 11개 지부에 230여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있다.
서하진은 안전기획부장 동권의 딸이며 소설가이다. “나의 아버지 - 외경의
대상과 친구가 되다”라는 제하의 글에서 아버지에 대해 그리고 자기 형제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지난 주 어느 날 아버지의 안경다리가 부러졌다. 그 날 저녁 아버지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너와 함께 맞춘 안경이 부러졌다. 안경 맞추러 가자”라고
하셨단다. “그 집 괜찮았다. 네가 안경은 잘 보지 않니, 그러시는거야
십 년도 더 된 거 같은데.....”라며 동생은 놀라워했다.
아버지 말씀처럼 동생은 눈썰미가 있고 까다로운 편이다. 그 애가 보아 준 옷은
실패가 없고 함께 장만한 소소한 가구는 두고두고 다른 이의 부러움을 산다.
대신 웬만해서는 오캐이 사인을 받기 어려워 상당한 시간을 들일 것을
예상해야만 한다. 그러니 십년을 두고 쓸 물건인 안경의 경우 동생과 함께
가기로 하신 건 당연했다.
한 편 사안이 좀 클 경우, 예컨대 집을 옮긴다거나 누군가의 결혼, 모종의
대외 행사를 기획해야 하는 일, 기타 등등의 일이 생길 때 나를 부르신다.
명색이 작가이니 큰 그림으로 보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서 그러시는거다.
체구는 작아도 담대한 면이 있다. 결단력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도 같고
사소하나 중요한 일상적인 일들을 위해 호출 되는 사람은 큰 언니이다.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아무 일이든 함께 하고 싶은, 큰 언니는 넉넉하고
여유로운 성품의 소유자다. 아버지와 농담을 주고받고 이따금 아버지의 어깨를
툭 치기도 하는 등 큰 언니는 우리 중 누구도 아직 발을 들여 놓지 못한 영역에
닿아있다.
아버지 친구 역할을 위해 큰 언니가 이틀이 멀다하고 불려간다면 둘째 언니는
건강 상담역이다. 친구 분 중 누가 녹내장 수술을 한 날이면 아버지는 반드시
눈 검사를 하신다. “어째 허리가 아프구나”라고 하시면 헬스센타에서
아버지보다 높은 연세의, 보다 더 건장한 어떤 분에게 자극을 받아 무리한
근력 운동을 하셨다고 보면 틀림없다.
그런 모든 경우, 둘째 언니는 아버지 말씀대로 검사를 받으시게 하거나 검사는
무슨, 하며 의사의 권위를 누르거나. 혹은 진짜 건겅하시다 수치가 놀랍다
등등의 말로 아버지를 위로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해낸다. 네 명의 사위에
대해서도 각각의 분담역이 있지만 시간 관계상 생략하고 두 아들은 여기서
거론하지 않으려 한다. 아침저녁으로 무시로, 그야말로 ‘아아아~무’이유 없이
부르시는 대상이므로.
우리가 본래 그러했을까, 아버지가 부르셨으므로, 세심함. 결단력, 넉넉한 등의
이름을 붙여 주었으므로 그리 된 것일까, 우리 육남매가 자라난 집은 늘
분주했으며 우리들의 개성 같은 것을 파악하기에 아버지는 턱없이 바쁜
분이었는데 무엇보다 아버지는 우리들 성장기의 절반 이상을 상주, 의성,
대구, 광주 등등의 외지에서 보내셨는데, 아버지는 도무지 모르시는 일이
없는 분이던 것이 게 앉아라, 한 마디 하시면서 똑바로 쳐다보시면 우리들
마음 속, 머릿속의 어떤 데이터가 그 눈빛에 줄줄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고, 그러면 사실상 상황 끝이었다.
아버지가 굳이 묻지 않으셔도 우리는 공손이 이야기를 늘어놓았으며
(물론 가려서) 우리들의 이야기가 끝나면 아버지의 굳게 닫힌 입이 열리고
일의 시시비비와 향방이 갈리게 마련이다. 모든 일에 그랬다. 아버지는
누군가에게 어떤 일을 시키시면 아, 저애에게 저런 재능이 있나보다 싶었으며
아버지의 판단은 거의 틀리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다.
이따금 아버지는 생각하면 가슴이 ‘싸아해질 때’가 있다. 유년기와 청년기
장년을 거쳐 노년에 이르기까지 아버지는 당신의 일과 가족과 일가와 고향과
주변과......늘 그 모든 일들에 대해 생각하고 기획하고 고민하고, 그리고
결행한 사람이었다. 단 한시도 그것들을 어깨에서 내려놓지 않으셨다.
요즈음 우리 형제들은 모이면 슬금슬금 아버지 흉을 본다. 그건 여태껏,
아니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아버지가 우리에게 외경의 대상이라는 뜻일 것이다.
조심스럽던 말투의 수위가 여느 때 슬며시 과감해지기도 하는 건......
어쩌면 우리들이 이제 아버지를 진정 이해한다는 뜻일 것이다.
서동권의 딸 하진은 아버지가 “평생을 당신의 일과 가족과 일가와 고향과
주변과......늘 그 모든 일들에 대해 생각하고 기획하고 고민하고, 그리고
결행하였으며 단 한시도 그것들을 어깨에서 내려놓지 않으셨다.”고 하였다.
서슬이 시퍼런 5공이나 6공 시절의 안기부장은 무시무시한 자리이었다.
그런 서동권이지만 딸 하진이 그린 아버지 상은 대구서씨 5백년 문헌록에
오른 행장이나 묘비 묘갈문의 인물 2백 내지 3백인이 보여준 아버지상
그대로이다.
그들 중에는 만인이 우러러보는 영의정과 대제학, 날아가는 새도 능히
떨어뜨릴만한 권세를 지닌 9경과 6조 판서, 수백 읍을 거느리는 8도 감사,
백만대군을 호령하는 대장, 산천초목을 떨게 하는 암행어사 들이 무리로
쏟아졌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근엄하면서도 자상하고 자애가 넘치는
아버지들이었다. 그들의 지난 행적을 더듬으면 하나같이 평범한 아버지로
여러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아 왔다. 서동권은 서씨 문중의
아름다운 기풍을 그대로 간직한 현대인이다.
서동권은 검찰총장으로 대검찰청의 사무를 맡아 처리하고 검찰사무를 총괄하며
검찰청의 공무원을 지휘·감독하는 공인이다. 검찰총장은 다른 청장과는 달리
장관급으로 업무가 중차대하며 바쁘기가 말할 수 없다. 안기부장 역시
국가안전보장에 관련되는 정보•보안 및 범죄수사를 담당하던 대통령 직속
국가정보기관의 최고 책임자로 바쁘기 이를 데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동권은 서씨 종친회 고문 정철, 회장 진석, 내무장관 명화,
한나라당 대표 청원 등과 함께 서씨의 고문서 장갈록을 수습하여 대구서씨
문헌록을 발간하는 대역사에 참여하였다. 일찍이 약봉 서성의 종택 중건
등 문중 대소사에도 성력을 보탰다.
우리는 서동권 집안을 통해 우리의 소중한 아버지상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다 변해 버린 세상, 아버지의 위상이
애완용 강아지보다 훨씬 못한 현대에 우리 고유의 아버지의 모습이 그대로
간직 되고 있다는 사실이야 말로 소중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자산이다.
워싱턴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연방 정부의 기초 확립에 노력하여 건국의
아버지로 불린다. 우리는 워싱턴과 같은 위대한 정치가는 아직 없어도
우리에게는 우리의 진정한 아버지는 이와 같이 건재하다. 서동권은 미국처럼
거창한 아버지가 아니라 언제나 우리 곁에서 가족과 일가와 주변 사람들의
고민과 사명을 어깨에 짊어지고 산 우리의 아버지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며 주변 모두의 안녕과 행복을 염원하는 우리의 아버지이다.
첫댓글 서동권님은 대학동문인 고 임환형의 생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