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조가 1776년 즉위한 후 선왕들의 어필과 어제를 봉안하기 위해 창덕궁 내에 규장각(奎章閣)을
창설하도록 하고 그 전경을 그린 <규장각도>이다. 화면의 중앙에 규장각을 실제보다 크게 강조하여 그렸다.
이어 사방에 부속 건물과 주변 경치를 에워싸듯이 묘사하였다. 종이에 채색하여 그린 <규장각도>는
김홍도가 32세에 그린 그림으로, 초기 본격적인 산수화풍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정조는 1776년(정조 즉위) 규장각을 창덕궁에 설치할 것을 명하였다.
송나라의 제도를 따라 선왕의 책과 어필 그리고 어제 등을 봉안하기 위한 것이었다.
규장각은 처음 왕실 도서관으로 출발하였다. 정조는 이후 규장각을 학술과 정책을 연구하는 기관으로
변화시켜 많은 도서를 수집하여 학문 연구의 중심기관으로 삼았다.
또한 개혁을 뒷받침하는 핵심 인물들을 육성하기 위해 초계문신제도를 시행하여 친위세력으로 키웠다.
이곳에서 정약용, 서유구, 홍석주, 김조순 등 당대 최고의 학자와 관료가 배출되었다.

조선시대 독특한 전통조경기법의 하나인 취병(翠屛 푸른 병풍)이다. 주합루 전면에 푸른 병풍 취병을 재현시켰다.
취병은 식물을 소재로 한 산(生)울타리와 울타리의 복합형태이다. 내부가 보이는 것을 막아주는 가림막 역할과 공간을
분할하는 담의 기능을 하면서 그 공간을 깊고 아늑하게 만들어 생기가 나게 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주합루 주변은 3단의 화계(花階)에 정원을 꾸며 놓았다. 화계 첫 단에는 어수문(魚水門)을 두고 주합루에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주합루의 정문인 어수문이다. 임금을 물(水)에, 신하들은 물고기(魚)에 비유하여 군신의 융화적 관계를 함축한 뜻이 담겨져 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신료들도 왕의 뜻 안에서 활약하라는 뜻이다. 어수문으로는 임금이, 그 옆 좌우의 작은 문(협문)으로는 신하들이 출입하였다. 어수문에서 주합루로 오르는 계단길은 어변성룡(魚變成龍)의 길이다.

어수문을 지나 만나게 되는 2층의 주합루 건물을 만난다. 이 건물의 2층에는 주합루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이 현판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2층만의 것이다.2층의 누각일 경우 2층에는 '누', 1층에는 '각'이 들어가는 현판이 각각 달린다.
2층과 1층의 이름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 건물의 1층의 이름은 바로 규장각(奎章閣)이다.
창덕궁 주합루(昌德宮宙合樓)는 정조 즉위년(1776) 창덕궁 후원에 어제·어필을 보관할 목적으로 건립한 2층 건물이다.
기단은 네벌대의 장대석을 바른층 쌓기하고 맨 위의 갑석에는 쇠시리를 넣어 마무리하였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층 건물로 기둥은 모두 상하층 통주로 사용하였다. 사방을 외부 기둥에서 1칸씩 물려서 퇴를 두었으며,
내부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하였다. 공포는 궁궐에서 전형적으로 사용되는 이익공으로 주두와 익공살미,
행공이 짜여지고 그 위에 재주두가 놓이며 운공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처마는 부연을 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양성바름으로 마감하였고 용마루 끝에는 취두를, 내림마루에는 용두를, 추녀마루에는 잡상과
용두를 얹어 권위가 높은 건물임을 나타내고 있다.
정조의 정책개발과 개혁정치, 조선 중기 문예부흥의 산실로서 정약용과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 다양한 인재들이 활동하던 중요한 공간이며, 정조가 지은 어제와 어필, 어진, 인장 등을 보관하였던 장소로 그 원형이 잘 남아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 또한 건물은 경사진 높은 지형에 배치하여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으며, 1층은 왕실도서 보관에 적절한 퇴와 사분합 들문을 설치하였고 내부는 온돌을 두었다. 2층 열람실은 사방의 빼어난 경관을 조망할 수 있도록 배치하는 등 건물의 기능에 맞는 실 배분이 충실히 반영되었다. 이처럼 주합루는 역사적,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