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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시>, 2010년 봄호.
기억의 현재화
― 이시영의 『긴 노래 짧은 시』론
맹문재
1.
이시영의 시세계는 기억들을 현재화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시인들의 시세계 역시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체험한 일들을 기억을 통해 현재의 의미로 창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시영의 경우는 보다 심화되어 있다. 그리하여 그의 창작방법의 중심이자 특성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기억을 창작방법으로 삼고 있는 것일까?
우선 시인의 기억이 현재형의 시제로 구실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거나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은 물론 미래 지향까지 제시하는 것이다. 시인의 기억은 이 세계를 부단히 품는다. 개인적인 자아를 적극적으로 정립하는 것은 물론 사회적인 자아까지 인식하는 것이다.
시인의 기억은 자신으로부터는 물론이고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 몸을 담고 있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자본주의는 성찰은커녕 자기 이익 증대에 몰두하기 때문에 구성원들을 끊임없이 경쟁시킨다. 구성원들 간의 양보, 사랑, 조화, 희생 등의 가치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이기적인 존재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기억은 파편화된 존재들에게 인간 가치를 복원시키는 역할을 한다. 자신의 얼굴을 진지하게 되돌아보며 정체성을 재확인하고 사회적 존재를 자각하는 것이다.
시인의 기억은 고도의 선택 행위이다. 체험의 서사를 단순히 회상해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의도에 따라 가감되고 부각된다. 그러므로 기억의 대상은 실제보다 집약되고 유기성을 띠고 그리고 통일성을 갖는다. 사건이 일어난 순서로 배열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의향에 의해 조종되고 재창조되는 것이다.
기억은 본질적으로 자기를 긍정하는 세계관을 깔고 있다. 과거의 자신을 단절시키지 않고 현재까지 지속시키는 것으로, 자기만의 방에서 나와 이 세계와 교류한다. 자기중심적인 방문을 개방하고 이 세계와 공유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의 기억은 과거를 수용하면서 현재를 인식하고 미래를 지향하는 역동성을 띤다.
2
용산역전 늦은 밤거리
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
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 늘 일등을 하여 밥솥을 타던
정님이 누나가 아닐는지 몰라
이마의 흉터를 가린 긴 머리, 날랜 발
학교도 못 다녔으면서
운동회 때만 되면 나보다 더 좋아라 좋아라
머슴 만득이 지게에서 점심을 빼앗아 이고 달려오던 누나
수수밭을 매다가도 새를 보다가도 나만 보면
흙 묻은 손으로 달려와 청색 책보를
단단히 동여매주던 소녀
꽁깍지를 털어주며 맛있니 맛있니
하늘을 보고 웃던 하이얀 목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지만
슬프지 않다고 잡았던 메뚜기를 날리며 말했다
어느 해 봄엔 높은 산으로 나물 캐러 갔다가
산뱀에 허벅지를 물려 이웃 처녀들이게 업혀와서도
머리맡으로 내 손을 찾아 산다래를 쥐어주더니
왜 가버렸는지 몰라
목화를 따고 물레를 잣고
여름밤이 오면 하얀 무릎 위에
정성껏 삼을 삼더니
동지섣달 긴긴밤 베틀에 고개 숙여
달그당잘그당 무명을 잘도 짜더니
왜 바람처럼 가버렸는지 몰라
빈 정지문 열면 서글서글한 눈망울로
이내 달려나올 것만 같더니
한번 가 왜 다시 오지 않았는지 몰라
식모 산다는 소문도 들렸고
방직공장에 취직했다는 말도 들렸고
영등포 색싯집에서 누나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끝내 대답이 없었다
용산역전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던 내 팔 붙잡다
날랜 발, 밤거리로 사라진 여인
―「정님이」 전문
시인은 어린 시절 인연의 대상이었던 “정님이 누나”를 기억하고 있다. 시인이 그녀를 기억하는 이유는 달리기를 잘해 운동회 때 일등을 맡아 놓았거나 목화를 따는 일이며 무명 짜는 일을 잘해서가 아니라, 따스한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마에 흉터가 있을 정도로 인물이 뛰어나지 않았고, 학교를 못 다녔기 때문에 지식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부모가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출신성분도 불분명했다. 그렇지만 시인에게는 친누나 내지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운동회 때 배가 고플까 봐 점심을 챙겨주었고, 밭을 매다가도 시인을 보게 되면 달려와 책보를 단단히 동여매주었으며, 어느 해 봄엔 산에 나물 뜯으러 갔다가 뱀에 물려 동네 사람들에게 업혀왔으면서도 다래를 시인의 손에 쥐어주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녀는 어느 날 집을 떠나간 후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 그녀가 왜 집을 떠나갔는지는 작품에 소개되어 있지 않지만, 사회의 변화에 영향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작품에 소개된 시인의 운동회 장면이나 책보를 매고 학교를 다닌 일들, 그리고 그녀가 목화를 따고 물레를 돌린 일들은 대체로 1960년대 이전에 일어났던 상황이다. 따라서 그녀가 집을 떠나간 시기 역시 그 무렵이라고 유추된다.
1960년대는 정치적인 면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면으로도 현대사에서 중요한 시기였다. 정치적으로는 4․19혁명이 일어났듯이 이승만 정부의 억압과 부패를 민중들이 피를 흘리며 몰아낸 시기인 동시에 5․16군사 쿠데타에 의해 민주주의가 좌절된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가동된 데서 볼 수 있듯이 본격적으로 경제정책이 추진된 시기이기도 했다. 정부가 주도한 경제정책이 본격화됨으로 인해 이전 시대에는 볼 수 없었던 사회 변화가 일어났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초래되었고 그에 따라 이농현상이 심화되었다. 농촌이나 어촌에서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던 사람들이 정부의 경제정책으로 인해 산업화와 도시화가 팽창하자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난 것이다. 그와 같은 경우는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병처럼 번졌다.
그와 같은 상황을 고려해보면 시인이 “정님이 누나”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주목된다. 그녀를 단순히 떠올리거나 소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통해 현재의 상황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인은 그 누나를 “용산역전 늦은 밤거리/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과 연결시켜, 몸을 팔아야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도시의 하층 여성들을 환기시키고 있다. 결국 그녀에 대한 기억으로써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고 소외된 여성들을 사회적인 차원으로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정님이 누나” 같은 여성은 아무리 마음씨가 좋고 성실하고 손재주가 있다고 할지라도 근대사회에 편입해서 제대로 살아가기가 힘들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지식과 전문 기술을 요구하는 산업사회에서 낙오될 수밖에 없다. 물레나 베틀 같은 단순 노동은 힘과 숙련이 필요하지만 산업시대의 공장들과 기계들은 전문 기술을 요구한다. 또한 그 누나가 살아오던 공동체 사회에서는 인정과 도리 같은 정신 가치가 통용되었지만, 도시화된 사회에서는 오히려 물질 가치가 지배한다. 따라서 변화된 사회가 요구하는 조건들을 갖추지 못한 그녀로서는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하기가 어렵다. 자신의 주체성을 발휘할 수 있는 일자리를 가질 수 없고,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일상생활이며 인간관계를 마련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리하여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거나 지하방에서 재봉틀을 돌리거나 그것도 아니면 몸을 팔아야만 목숨 붙이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시인이 용산역 앞에서 윤락행위를 하는 한 여인의 모습을 보고 “정님이 누나”를 기억한 것은 개인적인 대상을 공유화했다고 볼 수 있다. 시인의 고유한 대상을 기억에 의해 낙오된 여성으로 보편화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 비정치적인 대상을 시대적인 문제를 안은 대상으로 확대시킨 셈인데, 이와 같은 모습은 「후꾸도」에서도 확인된다.
장사나 잘 되는지 몰라
흑석동 종점 주택은행 담을 낀 좌판에는 시푸른 사과들
어린애를 업고 넋나간 사람처럼 물끄러미
모자를 쓰고 서 있는 사내
어릴 적 우리집서 글 배우며 꼴머슴 살던
후꾸도가 아닐는지 몰라
천자문을 더듬거린다고
아버지에게 야단맞은 날은
내 손목을 가만히 쥐고 쇠죽솥 가로 가
천자보다 좋은 숯불에 참새를 구워주며
멀뚱멀뚱 착한 눈을 들어
소처럼 손등으로 웃던 소년
못줄을 잘못 잡았다고
보리밭에 송아지를 떼어놓고 왔다고
남의 집 제삿밤에 단자를 갔다고
사랑이 시끄럽게 꾸중을 들은 식전아침에도
말없이 낫을 갈고 풀숲을 헤쳐
꼴망태 위에 가득 이슬 젖은 게들을 걷어와
슬그머니 정지문에 들이밀며 웃던 손
만벌매기가 끝나면
동네 일꾼들이 올린 새들이를 타고 앉아
상머슴 뒤에서 함박 웃던 큰 입
새경을 타면 고무신을 사 신고
읍내 장터로 써커스를 한판 보러 가겠다고 하더니
갑자기 서울서 온 형이
사년 동안 모아둔 새경을 다 팔아갔다고 하며
그믐날 확독에서 떡을 치던 어깨엔
힘이 빠져 있었다
그날밤 어머니가 꾸려준 옷보따리를 들고
주춤주춤 뒤돌아보며 보름을 쇠고
꼭 오겠다고 집을 떠난 후꾸도는
정이월이 가고 삼짇날이 가도 오지 않았다
장사나 잘되는지 몰라
천자문은 다 외웠는지 몰라
칭얼대는 네댓살짜리 계집애를 업고
하염없이 좌판을 내려다보며 서 있는 사내
그리움에 언뜻 다가서려고 하면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모자를 눌러쓰고
이내 좌판에 달라붙어
사과를 뒤적이는 사내
―「후꾸도」 전문
시인은 흑석동 종점에 있는 주택은행 옆에서 좌판을 차려 놓고 사과를 파는 한 노점상을 발견하는 순간, 어린 날 자신의 집에서 꼴머슴으로 살던 “후꾸도”를 기억한다. 정확하게 성명을 알지 못하지만 주위 사람들로부터 “후꾸도”라고 불렸던 그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천자문을 깨치지 못했다고, 못줄을 잘못 잡았다고, 보리밭에 송아지를 떼어놓고 왔다고, 남의 집 제삿밤에 단자를 갔다고 야단맞기가 일쑤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천성이 착해 야단을 맞거나 놀림을 당해도 소처럼 웃기만 했다. 그리고 주인집 아들이었던 시인에게 인정을 베풀었다. 좋은 숯불에 참새를 구워주기도 했고, 게들을 걷어와 건네주기도 했던 것이다.
그의 꿈은 새경을 타면 고무신을 사 신고 읍내에서 열리는 서커스 구경을 가고 싶어할 정도로 소박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에게도 「정님이」에 등장하는 “정님이 누나”와 같은 삶의 변화가 일어났다. “갑자기 서울서 온 형이/사년 동안 모아둔 새경을 다 팔아”간 일로 그는 상실감에 빠져 확독에서 떡을 쳐도 힘이 없었고 다른 일에도 재미를 잃었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상황은 그에게 서울에서 살아가는 형의 삶과 자신의 삶을 대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옷보따리를 싸들고 주인집을 떠난 것이다.
그는 집주인에게 보름을 쇠고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았다. 그가 돌아오겠다고 한 약속은 그의 성품으로 보아 거짓말이 아니었지만, 상상하지 못했던 상황 앞에서 그도 어쩔 수 없었다. 그가 막상 서울에 도착해 며칠 지내는 동안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록 그가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었지만 도시화되고 산업화된 서울이란 곳은 자신이 머슴으로 살아온 산골마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유혹의 대상이었다. 서울은 무엇보다도 그에게 머슴이란 신분을 깨끗이 지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종속된 신분이 아니라 철저히 계약이 통용되는 것을 발견한 순간, 그의 해방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생활의 편리함이며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도 그에게는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의 면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주인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꿈은 쉽게 획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님이」에 등장하는 “정님이 누나”가 배운 것이 없어 제대로 도시 생활에 적응할 수 없는 것처럼 그 역시 천자문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했기 때문에 서울이 제시하는 기회를 잡기는 어려웠다. 배움이 적은 그가 고도로 전문화되고 상업화된 서울에서 주체성을 가지고 일자리를 잡고, 신분을 상승시키고, 자아를 실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정님이 누나”가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거나 재봉틀을 돌리거나 심지어 몸을 팔면서 살아가듯이 그 역시 일용직 잡부를 하거나 좌판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시인은 “후꾸도”에 대한 기억을 통해 좌판을 차린 한 사내를 발견함과 아울러 “장사나 잘 되는지 몰라”라고 걱정하고 있다. 한 지식인 시인으로서 민중들의 곤궁한 삶을 확인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책무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지식인의 책임감은 자신의 모순을 인식하고 반성하는 데서 달성된다. 지식인으로서 지배계급에 대해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자기 계급의 근본적인 한계를 반성하고 민중들과 연대하려는 의식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와 같은 면은 시인이 제대로 적응해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정님이 누나”나 “후꾸도”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품은 것에서 여실히 볼 수 있다.
1960년대의 사회 변화는 시인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대응에 대한 동기부여도 해주었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경제정책을 추진함으로 말미암아 산업화 및 도시화로 인한 이농현상, 계층 간의 빈부 격차, 상대적 박탈감 등 사회문제가 본격화되자 시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농촌 공동체의 삶을 영위했고 아울러 지식인이기도 한 시인으로서 비인간적이고 물질주의가 횡행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인간 가치를 지킬 수 있는가를 고민한 것이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보면 시인이 “정님이 누나”나 “후꾸도”를 기억하는 것은 인간 가치를 지향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시인은 배우지 못하고 가난하지만 성품이 착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들을 휴머니즘의 잣대로 삼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과 함께했던 삶과 그렇지 못한 현재의 삶을 대비 혹은 비교를 통해 조명하고 있다. “왜 가버렸는지 몰라” “왜 바람처럼 가버렸는지 몰라” “한번 가 왜 다시 오지 않았는지 몰라” 등으로 토로하고도 있다. 노래의 후렴구 같은 효과로써 그들의 소중함을 독자들에게 반복적으로 각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3.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참새떼 왁자히 내려앉는 대숲마을의
노오란 초가을의 초가지붕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토란잎에 후두둑 빗방울 스치고 가는
여름날의 고요 적막한 뒤란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추수 끝난 빈 들판을 쿵쿵 울리며 가는
서늘한 뜨거운 기적소리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빈 들길을 걸어 걸어 흰옷자락 날리며
서울로 가는 순이 누나의 파르라한 옷고름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아늑한 상큼한 짚벼늘에 파묻혀
나를 부르는 소리도 잊어버린 채
까닭 모를 굵은 눈물 흘리던 그 어린 저녁 무렵에도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싸락눈 홀로 이마에 받으며
내가 그 어둑한 신작로 길로 나섰을 때 끝났다
눈 위로 막 얼어붙기 시작한
작디작은 수레바퀴 자국을 뒤에 남기며
―「마음의 고향 6- 초설(初雪)」 전문
위의 작품에서 시인의 세계인식은 예상을 뛰어넘는다. 시인이 기억하는 대상은 「정님이」에 등장하는 “정님이 누나”나 「후꾸도」에 등장하는 “후꾸도”와 같이 가난했지만 착하고 인정 많은 사람들이고, 그들과 함께 삶을 영위했던 고향이다. 시인의 고향은 참새 떼들이 왁자하게 내려앉고 초가지붕이 덮인 대숲마을이었다. 또한 여름날 토란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맑았고, 추수가 끝난 빈 들판에는 짚가리가 쌓인 아담한 곳이었다.
그런데 시인은 그와 같은 자신의 고향이 “있지 아니하”다고 표명하고 있다. 착하고 인정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던 고향이 사라지고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왜 그와 같은 입장을 내보이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시인이 사회의 변화를 보다 분명하게 인식하기 위한 다짐으로 볼 수 있다. 시인은 그와 같은 의도를 추구하기 위해 기적 소리를 들고 있다. 추수가 끝난 들판을 지나가는 기적 소리에 시인은 “서늘한 뜨거운” 마음을 가졌다고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김기림이 「철도연선」에서 그렸듯이 농촌 공동체 사회는 기차가 들어오면서 큰 혼란에 휩싸인다. 기적 소리에 산신제가 사라지고 가부장제 가정이 무너진다. 그리하여 아내를 버리고 술집 여자를 사는 남자들과 부모며 남편이며 자식들을 버리는 여자가 등장한다. 김기림은 근대화를 상징하는 기차가 마을을 관통함에 따라 1930년대의 전통적인 농촌사회가 무너지는 장면을 여실하게 그린 것이다. 이시영 또한 기적 소리를 매개로 1960년대의 농촌 마을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드는 면을 그리고 있다. 시인 역시 “싸락눈 홀로 이마에 받으며” “그 어둑한 신작로 길”을 나서서 기차를 탔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으로 볼 때 시인이 기차를 타기 전까지 태어나서 자라났던 고향이 “있지 아니하”다고 표명한 것은 이해된다. 시인은 현재의 삶을 더욱 넓고도 깊게 인식하기 위해 물리적인 차원이 아니라 정신적인 차원에서 “마음의 고향”이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산업화의 결과로 인한 도시 공간에서는 이전 사회의 정신 가치가 존재하지 못한다. 흙길이 아니라 아스팔트가, 빈 들판이 아니라 아파트가, 한복이 아니라 양복이, 수레가 아니라 자동차가 지배하는 곳이기에 더 이상 농촌 공동체의 정서나 인간관계가 통용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자신의 고향이 없다고 토로한 것은 아프기도 하면서 정직한 세계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산업사회 이전에는 도시가 농촌이나 어촌과 같은 공동체 사회와의 비교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되었다. 공동체 사회가 자연환경이 좋고 평온하고 인심이 후하다고 여겨진 반면 도시는 공기가 탁하고 물이 나쁘고 거리가 혼잡하고 인정이 메말랐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그렇지만 산업화가 확대되면서 그와 같은 이분법적 관점은 무너졌다. 오히려 그 관계가 역전되어 도시에 비해 공동체 사회가 가난하고 소외되고 낙후되어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으로 인정되고 있다. 풍요롭고 안온하고 따스하고 인정이 넘치는 공동체 사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향이 없다는 시인의 표명은 현재의 상황을 정확하게 간파한 것이다.
그렇지만 시인은 고향을 개인적인 차원으로 가두지 않고 공유화하기 위해 부단히 기억한다. “정님이 누나”나 “후꾸도” 외에도 없는 집 농사꾼의 맏딸로 태어나 갖가지 고생을 한 어머니(「만월」), 강 건넛마을에서 수절해 사는 이모(「늙은 이모전」), 택호를 가진 고향 마을의 아낙들(「우리 마을 택호 풀이」), 1956년 4월 한 교실에서 공부하던 친구들(「첫 수업」), 전라북도 운봉골에서 살아가는 종고모(「종고모」), 반내골에서 물맞이하는 어머니들(「물맞이」)을 기억하고 있다. 또한 사립문 새끼줄 밖에서 끝내 잠들지 못한 맨대가리의 장정들(「종고모」), 인간다운 대접을 받기 위해 낫과 쇠스랑을 들었던 고타관(「머슴 고타관 씨」), 국군이 들어오면 국군에게 밥해주고 밤사람이 들어오면 밤사람에게 밥을 해주어야 했던 여성들(「어머니」)도 기억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은모래가 쌓여 소들의 천국이자 아이들의 놀이터인 섬진강변의 삼각주(「섬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은어들이 상류로 거슬러 오르던 섬진강(「여름」)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시인은 그 기억의 대상들을 지키기 위해 현재의 대상에 부단히 연결시키고 있다.
내가 깨어진 한 여자와의 사랑에 연연해하며
길을 가고 있을 때
그 여자들은 왔다 신록 사이로.
한쪽 손에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다른 손에는 댓가지 빽들을 들고.
시립부녀복지회관에서 나오는 여자들이었을까
평범한 블라우스에 넓은 스커트, 서툰 화장솜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얼굴엔 생활의 무게가 주는 겸허와
일하면서 사는 자의 자랑이 빛나고 있었다
사람이 희망을 갖고 산다는 게 무엇인가
하루종일 일을 하고 나오다가 저처럼 수수한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빨며 혹은 댓가지 빽을 흔들며
저녁길로 나서는 것이 아닐까
몇걸음 걷다가 나는 돌아서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무거운 짐트럭 한 대가 식식거리며 다가와
짧은 상고머리를 내밀며
쌍년들! 어쩌고 하면서 투덜거리다가 이내 사라졌다
여자들의 대오가 잠시 벽 쪽으로 밀려났다가 다시 모이며
이번에는 신록 우거진 사이로 아랫배까지 시원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자랑스런 날」 전문
시인은 평범한 옷을 입고 화장을 서툴게 한 여자들이 도로를 걸어가는 모습을 회피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대견스럽게 여긴다. 또한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는다. 그리하여 시인은 “그들의 얼굴엔 생활의 무게가 주는 겸허와/일하면서 사는 자의 자랑이 빛나고 있”다고 노래하고 있다.
시인의 이와 같은 인식은 「정님이」에 등장하는 “정님이 누나”에 대한 기억을 확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땀 흘려 일하며 서로 아껴주는 마음을 인간 가치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방동 골목길에 있는 허름하지만 안온한 이발관의 이발사(「문화이발관」)며, 아파트의 경비인 농사꾼 박씨(「풍경」) 같은 이들도 소개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지만 그들이야말로 사회의 토대이고 역사의 거울이라고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기억을 더욱 확장시킨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 1백 1인 선언을 할 때 경찰의 급습과 강탈 그리고 그것에 저항하던 일(「1974년 11월」), 김지하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의 출간으로 인해 안기부에 끌려가 고초를 당한 일(「1982년 여름」), 서울구치소에 입소했을 때 수감자들이 투쟁 구호를 외치며 열렬히 환영하던 일(「‘민중의 소리’ 방송」) 등 지식인 시인으로서 감수했던 일들을 밝히고 있다. 또한 인도네시아 출신 불법 체류 노동자가 자살한 사건(「봄날」), 이스라엘 감옥에서 숨진 남편과 수감된 다섯 아들 그리고 이스라엘군과 대치하다가 숨진 손자의 한을 갚기 위해 순교의 길을 택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64살 된 여성(「누가 이 할머니를 전사로 내몰았는가」), 인도 북서부의 히말라야 휴양도시인 심라에서 15세부터 30년 동안 짐꾼 노릇을 해온 하싼(「하싼」), 이스라엘군의 무차별 공습으로 60여 명이 사망하고 집을 잃은 레바논 난민들(「카길중학교에서」)도 알리고 있다. 다문화가족은 물론 국외의 사람들까지 품고 있는데, 결국 시인은 기억을 현재화해서 민중들의 생명력과 역사성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맹문재
시론집으로 『한국 민중시 문학사』『패스카드 시대의 휴머니즘 시』『지식인 시의 대상애』『현대시의 성숙과 지향』『시학의 변주』, 편저로 『박인환 전집』『김명순 전집』 등이 있다. 현재 안양대 국문과 교수.
<이시영의 대표작 읽기>
만월
누룩 같은 만월(滿月)이 토담벽을 파고들면
붉은 얼굴의 할아버지는 칡뿌리를 한 발대
가득 지고 왔다
송기를 벗기는 손톱은 즐겁고
즐거워라 이마에 닿는 할아버지 허리에선
송진이 흐르고
바람처럼 푸르게 내 살 속을 흐른다
저녁 풀무에서 달아오른 별들,
노란 벌이 윙윙거리면
마을 밖 사죽골에 삿갓을 쓰고
숨어사는 어매가
몰매 맞아 죽은 귀신보다 더 무서웠다
삼베치마로 얼굴을 싼 누나가
송기밥을 이고
봉당으로 내려서면
사립문 밖 새끼줄 밖에서는
끝내 잠들지 못한
맨대가리의 장정들이 컹컹 짖었다
부엉이 울음소리가 쭈그리고 앉은
산길에는 썩은 덕석에 내다버린 아이들과 선지피가 자욱했다
어둠속에 숨죽인 갈대덤불을 헤치고
늙은 달이 하나 떠올랐다
공사장 끝에
“지금 부셔버릴까”
“안돼, 오늘밤은 자게 하고 내일 아침에……”
“안돼, 오늘밤은 오늘밤은이 벌써 며칠째야? 소장이 알면……”
“그래도 안돼……”
두런두런 인부들 목소리 꿈결처럼 섞이어 들려오는
루핑집 안 단칸 벽에 기대어 그 여자
작은 발이 삐져나온 어린것들을
불빛인 듯 덮어주고는
가만히 일어나 앉아
칠흑처럼 깜깜한 밖을 내다본다
행렬
벌레들이 밤새도록 울면서
거대한 씨멘트 담의 몇만분의 일쯤을 기어이 뚫어놓는다
어디서 모여왔는지
아침이면 연둣빛 코끝의 새끼벌레들이
그 구멍 속을 열심히 들락거리며
새 먹이를 물어나르고 있다
햇빛 아래 씨멘트 담을 뒤덮는
키작은 잔디들의 행렬이 파랗다
이시영(李時英)
1949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나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에서 수학했다.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월간문학』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만월』(1976), 『바람 속으로』(1986), 『길은 멀다 친구여』(1988), 『이슬 맺힌 노래』(1991), 『무늬』(1994), 『사이』(1996), 『조용한 푸른 하늘』(1997), 『은빛 호각』(2003), 『바다 호수』(2004), 『아르갈의 향기』(2005),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2007), 시선집 『긴 노래, 짧은 시』(2009)가 있다. 현재 단국대 문예창작과 초빙교수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