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만으로 54세가 임박하였다.
어린 아이들은 할아버지라 부를지도 모르고, 다 큰 청년들은 어떻게 부를지 잘 모르겠다. 아저씨 또는 할아버지?
머리카락이 반백은 아니지만 약간 회색빛을 두르고, 배가 나왔기에 간혹 지하철의 젊은이가 힐끗 쳐다 보다 고개를 떨군다.
자리 양보를 해야하는 지를 잠시 생각한 것이겠지...
집을 잠시 비울 일이 있어 아내(나와 동갑)가 내 생일을 미리 챙겨 어제 저녁을 먹었다.
마침 휴가 나온 아들도 있어 아내가 차린 멋진 밥상에 헝가리 토카이산 와인 한잔과 함께 맛있게 먹었다.
조금 비싸다는 요구르트 케익의 촛불을 끄기도 하고...
마침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 교구가 식당 당번을 당하는 바람에 아내는 오늘도 봉사를 하였고, 모래 장인어른의 기일이라 음식 만드는 일을 도와야 하는 형편이다.
앞과 뒤로 있는 일거리로 아내가 피곤할 것 같아 받았던 생일 밥상이 다소 부담스러웠다.
나이가 들어가니 남자(남편)의 당당함이 급속도로 비어가는 것을 느낀다.
난 그런대로 소득이 있어 아내에게 충분한 생활비를 건네는 가장이다. 그런데도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자꾸 위축되어가는 것은 왜일까?
나의 입장에서 볼 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나 자신의 내재적인 이유들이다. 50년을 불철주야 뛰어왔지만, 남에게 보여줄만한 뚜렷한 업적이 없고 초라할 뿐이다. 내 나이에 잘 나가는 관료와 CEO들을 신문기사로 접하면 더욱 그렇다. 결국 과도한 나의 기대치와 비교심리로 인해 내가 이룬 것과 가진 것이 상대적으로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제2의 인생을 시작하거나 득도하는 방법 밖에 없다. 최근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읽었다. 그는 한 때 쫓겨났던 애플사에 컴백한 후, 화려한 제 2의 인생을 시작하였다. i시리즈로 명명되는 일련의 혁신적 제품을 만들며 그는 IT계의 전설로 남았고 그런 다음 일찍 세상을 떴다. 그는 독특한 유전형질을 타고난 감각적 혁신가였다.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나름 의미있는 두번째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종교의 힘을 빌리거나 아님 스스로 재물, 권력, 명예에 대한 불필요하게 과도한 욕심을 줄이는 것이다.
둘째. 육체의 싱싱함을 잃어가는 것이다. 얼마 전 보았던 영화 '은교'는 결코 되찾을 수 없는 젊음을 갈망하는 노작가의 심리를 잘 그렸다. 검버섯이 생육하고 탱탱함을 잃어가는 얼굴과 피부, 쉬 피곤해 지는 눈과 육체, 줄어드는 성적 욕구와 매력, 각종 성인병들... 젊음을 잃은 육체는 버리기는 아까운 뭉게진 토마도와 같다. 바로 내일이면 버려야 한다. 일반적으로 나이에 대한 보상은 '돈'과 '지혜 또는 인격'라 할 수 있다. 둘 중에 '돈'은 잘 팔리지만 '지혜'는 글쎄...그래서 특히 남자 노인들을 위한 충고 중에는 '지갑을 열어라', '말을 아끼라', '잔소리 하지마라'가 주를 이룬다. 몇 일 전, 홀로 계신 팔순의 아버지와 1박2일을 지내면서 더욱 그랬다. 30년 뒤의 내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비교적 건강하시고 교회 등에 여럿 지인 그룹도 있으시지만 자주 혼자 식사하시고 혼자 주무셔야 하는 것이 힘드신 것 같았다. '살'냄새. '인간'냄새. 인간이 죽을 때까지 맡으며 살고 싶으나, 죽어 떠나고, 싫어 떠나고 나이 들면 어느듯 주변엔 사람의 가뭄이 찾아 온다. 난 혼자 할 수 있는 것을 열심히 찾고 즐기려하긴 한다. 운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다보니 여행, 가벼운 등산, 전시회, 독서, 공연과 영화보기, 블로깅... 대부분 혼자하는 것들이다. 여럿이 어울려 하는 것들이 메뉴에 별로 없다. 그래서 어느 날 견딜 수 없는 외톨이가 되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다.
글을 쓰면서 나름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결국 해답은 없고 넉두리로 끝내야겠다. "나 이적요는 늙었습니다. 늙는다는 건 이제껏 입어본 적이 없는 납으로 만든 옷을 입는 것이다. 시인 로스케는 말한 적이 있습니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이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라는 영화 '은교'의 대사가 생각난다. 젊은은 갈고 닦고 채워야 하는 것이고 늙음은 내려놓고 비워가는 것이란 생각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