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문
흔히 우리가(일반인) 알고 있는 르네상스의 인물은 대부분이 예술가 아니면 문학인이다. 그많은 사람 중 정치가나 위정자들을 잘 모르는 까닭은 현재와 같이 정치가 예술에 비해서 사람들의 관심에 벗어나 있다는 얘기가 아닐 런지 모르겠다. 화제를 바꾸어 그렇다면 그 중에서도 한 사람을 손꼽으라고 하면 어느 인물을 들 수 있을까? 강대한 힘을 가진 프랑스 왕, 아니면 독일과 그 밖의 영토를 가지게 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또 로마에 거주하는 카톨릭의 수장인 교황? 하지만 나는 여기서 이 사람들을 내 글의 주인공으로 하진 않겠다. 나는 오히려 교황의 아들로 태어나 르네상스 시대의 이단아로 낙인된 로마냐 공작 체자레 보르자를 주연으로 발탁하겠다. 그 이유로 말하자면 그는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의 정치적 변동에 빼놓을 수 없는 중대한 인물이기 때문이고, 다른 타 군주들에 비해서 뚜렷한 인간적 성격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
2.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의 정치적 동향
그 당시의 유럽정세는 한마디로 혼란 그 자체였다. 특히 이탈리아 반도를 두고 강 세력들의 경쟁은 치열했다. 이탈리아에서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프랑스, 샤를마뉴의 후계자로 칭하면서 반도의 영유를 주장하는 신성로마제국, 그 사이에서 기독교 세계의 실질적 지배자로 내려오는 외세를 막으려는 로마교황. 이런 대립적 양상이 몇 세기 진행되었다.
보다 자세히 반도내의 세력상황을 살펴보면(지도참조) 북쪽엔 대표적으로 밀라노 공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이, 중부에는 교황령과 피렌체 공화국, 그리고 남쪽에는 나폴리 왕국,마지막으로 나머지 소규모 공국, 공화국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밀라노는 스포르차라는 가문이 통치하고 있었으며, 피렌체는 그 유명한 메디치 가문이 실질적으로 공화국을 이끌고 있었다.
그러나 1492년 로드리고 보르자라는 추기경이 알렉산데르6세로 즉위하게 되면서 이탈리아 반도는 격동의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바로 이 인물이 주인공인 체자레의 아버지이다.
3. 체자레가 르네상스 시기에 끼친 영향
(1)정치적 영향과 체자레의 일생
1494년 중대한 사건이 터진다. 바로 샤를8세의 이탈리아 침입으로 나폴리 왕국의 통치권을 주장하며 8만의 군사를 일으켜 진군한 것이다. 엄청난 군세에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성문을 열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반도 내에서의 외세를 경계하는 알렉산데르6세는 그를 막기 위해 수단을 발휘했지만 오히려 간파되어 왕의 노여움을 얻게 된다. 하지만 교황의 타고난 수완에 넘어간 샤를8세는 교황을 나의 아버지라 부르며 용서하게 된다. 그렇지만 교황의 아들인 체자레를 볼모로 잡아가고 나폴리로 행진하게 되는데 도중에 체자레가 기지를 발휘해 단신으로 탈출해 버린다. 그후 샤를은 나폴리왕국을 점령하지만 결국 교황과 프랑스와 경쟁관계에있는 신성로마제국, 에스파냐왕이 대프랑스동맹을 맺게되어 고립되고 만다. 결국 귀환도중 아펜니노 산맥의 타로 강에서 대패하고, 나폴리도 부흥군에 잃고 말았다. 이게 대략적인 사건의 개요인데 이 사건이 불러온 파장은 대단했다. 밀라노는 사실상 프랑스의 속국으로 편입되고 말았고, 피렌체에서는 사보나롤라가 메디치가를 추방하고 신정국가를 세우게 됐으며, 나폴리는 일종의 무정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체자레가 일어난 것이다. 25세를 갓넘긴 나이에 그는 흔히 로마냐 지방(이탈리아 중부지방)이라 불리는 영역을 거의 석권했다. 이몰라, 파엔차, 포를리, 페사로를 잇따라 정복하고, 교황령도 사실상 정치적으로 석권하고 있어서 그와 중부에서 맛설수 있는 상대는 피렌체 공화국 밖에 없었다. 그의 목표는 이제 토스카나의 피렌체였다. 젊은 공작의 용병술과 정치적 역량은 그것을 가능하게 할수 있었다. 하지만 1503년 8월, 교황이 갑자기 고열과 구토로 쓰러졌다. 또한 이튿날에는 체자레가 똑같은 증세로 쓰러진다. 이것이 독살인지 아니면 사흘돌이로 되풀이 되는 열이 있다는 기록을 근거로 말라리아에 감염된 것인지 논란의 여지가 많다. 여하여튼 알렉산데르6세가 죽게되고, 병색이 완연한 체자레는 다음 교황을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로 지지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보르자 일가에게 밀렸던 11년의 증오를 잊지 않았다. 결국 로베레는 율리우스2세로 즉위하게 되고, 체자레는 탈출에 실패 감금당하게 되고 자유와의 교환 조건으로 로마냐의 영지를 포기하게 된다. 자유를 얻은 그는 나폴리로 가지만 다시 사로잡혀 에스파냐의 페르난도 왕에게 감금당하게 된다. 역발산 기개세의 그가 그 몇 년사이에 초라한 패자가 된 것이다. 몇 년 후 다시 탈출한 그는 보르자가문의 영지(보르자 가문은 에스파냐에 근거)에서 새출발 했으나 지방 호족일당과의 전투중에 어이없이 죽고만다. 이름없는 무지렁이 잡병들의 손에 말이다. 1507년 그의 나이 겨우31세였다.
<체자레 보르자의 초상화>
(2)사회적 영향과 예술적 영향
그와 관계된 위대한 르네상스의 예술인은 두명이다. 한 명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나머지 한명은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다. 레오나르도는 그가 50세의 나이에 체자레의 군사기술자로 연관을 맺었다. 체자레는 그에게 공학기술의 감독과 백지위임장을 주고 ‘나의 아르키데메스’라고 부르면서 하고 싶은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아 위대한 예술인은 체자레를 이탈리아 통일의 희망으로 보고 자신의 능력을 주었던 것이다. 실제로 그는 공학 감독의 지위에서 여러 가지 공성용 기계나 전차를 설계했고, 아직도 그 설계도가 남아있다. 하지만 체자레의 몰락으로 그의 희망은 사라지게 된다.
마키아벨리 또한 다 빈치와 같은 생각을 품은 사람이었다. 피렌체공화국의 외교사절로 체자레를 접하고 이 “뛰어난 재능을 가진 남자”한테서 「군주론」의 구체적 모델을 발견했다.
(군주론의 실제 모델은 바로 체자레이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함과 대담한 영혼을 가진 체자레, 바로 그가 분열된 이탈리아를 통일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 군주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그는 사회・문화적으로도 작은 영향을 끼쳤다.
<체자레와 관계된 위대한 르네상스인 다빈치와 마키아벨리>
4.결말
나는 이 인물을 접하게 되면서 삼국지에 등장하는 조조와 상당히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과감한 결단력 지도력, 피도 눈물도 흘리지 않을 듯한 냉혹함. 자고로 영웅은 간흉계독을 모두 지니고 있어야 된다고 하지 않던가? 둘은 너무 닮았다. 출신 성분부터 그렇다. 조조가 당시 환관의 자손이라는 동양 세계에서 비천하게 여기는 불명예적 칭호를 얻었듯이 체자레는 서양 세계에서 교황의 자식이라는 기독교 세계의 이단아로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둘의 결말은 사뭇 달랐다. 조조는 자신의 왕조를 실질적으로 창건하고 침상에서 죽음을 맞이했지만, 체자레는 건설하려는 찰나 하늘의 방해로 실패하고(이렇게 해석할 수밖에) 이름 없는 잡병들의 손에 최후를 마쳤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이런 패배자의 이야기를 하느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를 패배자로 부르기에는 그의 능력과 정신이 허락하지 않은다. 그는 르네상스 시기를 살은 인물 중에서 뚜렷한 개성을 지닌 인물이다. 근 천년동안 이루지 못했던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을 꿈꿨던 그는 진정한 영웅이다. 여담이지만 그가 반도를 통일했다면 세계사는 다시 쓰여 져야 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르네상스 시기를 가장 정열적으로 살은 인물은 바로 이 체자레 보르자다.
(인용.삽화) 시오노 나나미, 체자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
첫댓글 저도 저책 읽었어요. 우아한 냉혹이란 타이틀이 정말 잘 어울리는 사람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체사레의caesar이 카이사르의 이름에서 따온거라내요. 사내의 야망이 느껴지는 이름인듯 합니다. 사람은 이름을 잘 지어야 한다는 교수님 망씀이 생각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