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차(2006년 4월 16일) 풍수답사(진천지방) 안내
사단법인 정통풍수지리학회의 정기 답사는 매월 첫째주와 셋째주 일요일 2회 실시합니다. 1주는 지방이고, 3주는 서울 경기지역에서 가까운 거리를 답사합니다. 4월 3주차 답사는 서울에서 1시간20분 정도의 거리인 충북 진천 지방을 선정했습니다.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이란 말이 있듯이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곳입니다. 동쪽으로는 보은 속리산에서 안성 칠장산까지 이어지는 한남금북정맥이 있고, 칠장산에서 칠현산, 서운산, 성거산 쪽으로 갈라진 금북정맥이 서쪽에 있습니다. 두 정맥이 감고 돌아 형성된 커다란 분지 즉 보국에 진천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칠장산에서 발원한 물은 여러 지류를 합쳐 미호천이 되고, 그 유역에 넓은 평야를 발달시켜 놓았습니다. 산과 물과 평야가 어우려졌으니 여기서 생산되는 농산물은 먹고 남을 정도로 충분했습니다. 또 주민들은 외풍(外風)을 받는 일이 거의 없으므로 순박하고 온후한 성품을 지녔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외지인들도 배타심 없이 쉽게 받아들일만큼 인심이 넉넉합니다. 자연적으로 사람살기에 좋은 곳이란 소문이 자자하니 '생거진천'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일까 한 때 행정수도 후보지로도 거론되기도 하고, 현재는 충북 혁신도시로 진천군 덕산면이 음성군 맹동면과 함께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우리 학회 고문이신 유영봉 교수는 2001년 1월 이 지역을 처음 답사하면서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여 2004년 11월에 『하늘이 내신 땅 ① ② <출판사 : 문자향>』을 출판하였습니다. 처음 오시는 분들이나 이 지역을 답사하시고자 하는 분들이 읽어보시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 학회 답사는 항상 열려 있습니다. 누구든지 참여가 가능합니다. 역사와 자연, 그리고 우리 민족 사상인 풍수지리를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특히 초보자 분들의 참여를 적극 환영합니다.
1. 일시 : 2006년 4월 16일 (일요일)
2. 집결지 및 시간
■ 서울 강남 : 양재동 서초구청 정문 건너편 (오전 09시) ☞ 지하철3호선 양재역 하차, 1번 출구(서초구청 정문 건너편)로 나오면 약 80m 전방에 〈수협은행〉과 〈GS25〉가 있습니다. 그 앞에 그린랜드관광버스가 대기하고 있읍니다. <파일 01 - 양재역 1번 출구 약도 참조> ☞ 일요일은 서초구청과 외교안보센타 사이 주차장은 무료이용 가능하나 주차공간이 넉넉하지 못하므로 가능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합니다. ■ 경기·수원 :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신갈정류장 (오전 09시 20분) ■ 충청·지방 : 중부고속도로 진천IC (오전 10시 20분) ■ 기타 : 다른 곳에서 합류하실 분은 김승원 총무(011-229-7540), 또는 gudtks@korea.com으로 미리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 갈때는 서울 양재동→경부고속도로 신갈정류장 하행선→수원툴게이트 U턴→영동고속도로→호법분기점→중부고속도로→진천톨게이트 ☞ 올때는 그 역순
3. 답사지(사정에 의해 순서와 장소가 바뀔 수도 있습니다.)
1) 김유신 장군 탄생지 충북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계양마을 태령산 아래에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김유신 장군은 진평왕17년(595)에 만노군(萬弩郡/진천의 신라 때 이름) 태수를 지내던 김서현(金舒玄) 장군과 만명부인(萬明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서현은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12세손이이고, 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이며, 부친은 백제 성왕의 3만 대군을 무찔러 큰 공을 세운 김무력(金武力)이다. 신라는 가야 왕실을 진골(眞骨) 귀족으로 편입했는데, 왕족이며 무장으로서 공을 세운 김서현은 소판(蘇判)이란 높은 벼슬에 올랐다. 어느날 김서현은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만명 부인과 마주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첫 눈에 반해 곧 사랑에 빠져 중매도 없이 결합하게 되었다. 만명 부인은 진흥왕의 아우인 입종(立宗)의 아들 숙흘종(肅訖宗)의 딸이다. 혈통을 중시하던 신라 왕실은 금관가야 왕족을 극진히 대우 하였지만 서로 결혼까지는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신라 왕족들은 골품제도에 따라 왕족끼리 결혼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숙흘왕은 딸을 별채에 가두어 놓고 지키게 했다. 그러자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쳐 그 방문을 부수자 겁을 먹은 문지기가 달아났다. 그 틈을 타 집을 빠져 나온 망명부인이 김서현을 찾아가자 신라은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김서현을 만노군 태수로 임명하여 부인과 함게 보냈다. 만명부인은 어느날 금갑을 입은 동자가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꿈을 꾸었다. 김서현도 꿈을 꾸었는데 형혹성(熒惑星)과 진성(鎭星)이 자기에게로 떨어지는 꿈이었다. 형혹성은 화성이고 진성은 토성을 말한다. 얼마가 지나자 않아 임신을 하게 된 부인은 아이를 밴지 20개월만에 아기를 낳았다. 등에는 북두칠성 모양의 점이 찍혀 있었다. 아이 이름을 지을 때 경진일 밤에 꿈을 꾸어 아이를 얻었으니 경진(庚辰)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간지(干支)로 이름을 짓지 않는다 하니, 경(庚)은 유(庾)자와 서로 같고 진(辰)과 신(信)의 소리가 가까워 유신(庾信)이라 하였다. 진평왕31년(609) 15세에 화랑이 된 김유신은 낭비성 싸움에 공을 세워 압량주 군주가 되었다. 선덕여왕 때 상장군, 무열왕 7년(660년) 상대등이 되어 당군(唐軍)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다시 나당연합군의 대총관(大摠管)이 되어 고구려를 정벌(668년)하고 태대각간(太大角干)이 되었다.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다시 찾아 삼국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고 문무왕13년(673)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후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었다. 김유신이 태어난 터는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제41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83년 생가를 복원하였고 유허비를 세워 놓았다. 김유신의 태를 묻은 탄생지 뒷편 산을 태령산이라 하는데 소년 김유신이 말 달리며 무예를 연마한 곳이다. 김유신의 영정을 모시고 제향하는 길상사는 탄생지에서 떨어진 진천읍 벽암리 도당산 아래에 있다. 지금 유허비가 있는 계양(桂陽) 마을 입구는 본래 태수 관저가 있던 곳으로 장군터라 불리워지는 곳이다. 이곳에서 동북 500m지점에는 태수 관저에서 사용했다는 우물터 연보정(蓮寶井)이 현존하고있다. 2) 송강 정철(鄭澈) 묘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산14-1 꽤나 높고 가파른 능선 위에 있다. 부친 정종명(鄭宗溟) 묘보다 뒷 자리에 있어 역장이다. 본래는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신원리에 있던 것을 우암 송시열이 현재 자리를 정하자 그의 후손 정양(鄭瀁)이 이장하였다고 한다. 송강(松江) 정철의 본관은 연일(延日)이며 중종31년(1536)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누이들이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자 어려서부터 궁중 출입이 잦았다. 큰 누이가 인종의 귀인이고, 둘째 누이가 계림군의 부인이다. 특히 같은 나이의 문정왕후의 소생인 경원대군(명종)과 친하게 지냈다. 명종 원년(1545) 을사사화때 계림군이 관련되었다 하여 그 일족으로서 아버지가 유배당하자 유배지를 따라다녔다. 명종6년(1551) 유배에서 풀려나자 온 가족이 고향인 전라도 창평(昌平)으로 이주하였다. 이때 호남의 거유인 김인후, 기대승 등 석학들에게 배웠으며 이이, 성혼 등과도 친교를 맺었다. 명종16년(1561) 진사시에 합격 암행어사를 지낸 뒤 이이와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는 서인의 영수로서 철저하게 당파 이익을 대표하여 정치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아왔다. 그러나 시조와 가사에서 이룬 그의 업적은 탁월하다. 무엇보다도 정철에 이르러서 국문 시가가 작품 수, 표현기교, 취급방식에서 한시에 못지 않은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문학가이자 음악가, 말하자면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이었다. 한문학의 모든 장르에 달통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특기할 만한 일은 우리의 일상어를 갈고 다듬어 천금 같은 국문노래들을 남겼다는 점이다. 한문을 읽고 쓸 줄 아는 독서인들이 지배계층을 형성하고 있던 시대, 더구나 지배계층의 핵심부에 속해 있으면서 으레껏 우매한 민중들만이 사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던 구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여 우리 노래들을 지었다는 것은 높이 살 만하다. 1580년 이후 3년 동안 강원도·전라도·함경도의 관찰사를 지내면서 《관동별곡(關東別曲)》 《훈민가(訓民歌)》 등의 가사를 지었고 1584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다음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성산별곡(星山別曲)》 등 수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었다. 정치인이면서도 당대 가사문학(歌辭文學)의 대가로서, 시조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더불어 한국 시가사상(詩歌史上) 쌍벽으로 일컬어진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벼슬길에 나서 체찰사가 되었고,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지만 동인들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강화 송정촌에서 만년을 보내다 선조26년(1593) 사망하였고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어떤 안목으로 이 자리로 옮겨왔는지 모를 일이다.
3) 남지(南智) 선생 묘 진천군 문백면 평산리 산18-1 안릉마을 뒷편에 부인의 묘와 나란히 있다. 이곳은 비학승천형(飛鶴昇天形)으로 유명한데 묘를 조성할 때 전설이 있다. 광중의 흙을 파 내려가던 인부들의 삽에 무언가가 걸렸다. 조심조심 파보니 관 하나가 나왔다. 뚜겅을 열자 학 한 마리가 퍼득 나와 푸른 하늘로 날아갔고, 다른 한 마리가 날아가려고 하자 깜짝 놀란 인부들이 얼른 뚜껑을 덮었다. 한 마리는 그대로 관에 갇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일까 그 후손 중에 남구만 같은 큰 학자를 배출하였다. 남지의 본관은 의령(宜寧)이며 영의정 남재(南在)의 손자다. 17세 때 음보(蔭補)로 감찰이 되었고, 세종 때 영남의 경력(經歷)을 지냈다. 관찰사 하연(河演)에게 재주를 인정받아 지평(持平)에 임명되고 의성군(宜城君)에 봉해졌다. 그 뒤 우의정을 거쳐 1451년(문종 1) 좌의정이 되었다. 영의정 황보인(皇甫仁)·우의정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문종의 유명을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려 하였으나 풍질(風疾)로 벙어리가 되어 정사를 볼 수 없게 되었다. 딸이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아들 이우직(李友直)에게 출가하여 사돈이 되었는데,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안평대군 부자가 화를 당할 때도 풍질로 해서 화를 모면하였다. 4) 농다리 → 시간을 봐서 지방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굴티마을 앞을 흐르는 세금천에 놓인 아름다운 고려시대 돌다리다. 『상산지(常山誌)(1932)』에는 '고려초기에 임장군'이 축조하였다고 전해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본래는 28수(宿)를 응용하여 28칸으로 만들었으나 지금은 25칸만이 남아 있으며, 길이는 93m에 이르고 있다. 사력암질의 붉은 색 돌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아 올려 교각을 만든 후, 상판석을 얹어 놓고 있다. 이 다리의 특징은 교각의 모양과 축조방법에 있는데, 돌의 뿌리가 서로 물려지도록 쌓았으며 속을 채우는 석회물의 보충 없이 돌만으로 건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교각의 폭은 대체로 4m 내지 6m 범위로 일정한 모양을 갖추고 있고, 폭과 두께가 상단으로 올수록 좁아지고 있어 물의 영향을 덜 받게 하기 위한 배려가 살펴진다. 비슷한 예가 없는 특수한 구조물로 장마에도 유실되지 않고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으며, 상판석의 돌은 특별히 선별하여 아름다운 무늬를 잘 보여주고 있다. 5) 진천향교 진천군 진천읍 교성리 416. 진천향교는 대성전과 동·서무로 이루어진 문묘와 강당인 명륜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이한 구조로는 순조4년(1804년) 지방의 유지 최흡이 사재를 들여 지은 외삼문에 해당하는 삼문인 풍화루(정면 6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건물)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진천현 관아 남쪽 2리인 교성리에 있고 조선 태조때 창건되었다고 하며 『충북향유회집(忠北鄕儒會集)』에는 고려 충숙왕때 창건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고려시대에 설치되었던 지방 교육기관이 조선시대에 들어와 재정비된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6) 이상설(1870∼1917) 선생 생가 진천읍 산척리 134-2 지방기념물 제77호다. 선생은 현 가옥에서 학자이신 이행우의 아들로 태어나 1894년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교수, 한성 사범학교 교관 등을 역임하면서 영어, 프랑스어 등 7개 국어를 구사하여 신학문을 깨우쳤다. 1904년에는 보안회의 후신으로 대한 협동회를 조직하여 민족 운동을 하였으며, 탁지부 재무관 법부협판을 거쳐 1905년에는 의정부 참찬에 발탁되었다. 같은 해인 11월7일에 수옥헌에서 이또 주재하에 대신회의가 강제 개최되어 이완용 박제순등의 찬성을 조약체결을 선언하였는바 선생은 대신회의에 실무 책임자임에도 일본군의 방해로 참석하지 못하고 다음날 새벽에 알게되어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1906년 4월에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설 것을 결심하고 이동녕, 정순만과 같이 망명길에 올라 상해를 거쳐 북간도 용정으로 가서 서전서숙을 건립하고 자비로 항일 민족교육을 시켰으며 1907년 6∼7월 헤이그에서 개최하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라는 고종황제의 위임장을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한국의 실권과 국권의 회복문제를 국제여론에 호소하려다 실패한 후 이준은 현지에서 순사하였다. 선생은 귀국하지않고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여러나라로 다니면서 일본의 침략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이 동양평화의 열쇠라고 주장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소련령으로 이주, 한흥동의 한인마을을 건설, 민족교육을 시키다 1917년 47세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7) 이시발 묘 초평면 용정리 196-11 이시발의 호는 벽오(碧梧)이고 경주인(慶州人)으로 오촌 대건(梧村大建)의 아들로 청원군 오창면 오근리(현 청주시 오근장)에서 선조(宣祖) 2년(1569년)에 태어났다. 오(梧)자는 오근리(梧根里)의 연고를 딴 것으로 그의 부친의 묘를 시발(時發)이 죽은 뒤 초평면 용정리로 이장하고 그 뒤 자손이 늘어나 초평이씨(草坪李氏)의 호칭이 붙었다. 선조 22년(1589년)에 문과에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고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박춘무와 함께 큰 공을 세웠으며 선조 29년(1596년)10월 이 몽학의 난을 평정하고 장락원정(掌樂院政) 형조판서(刑曹判書)와 북변(北邊)을 방어하기 위해 함경감사로 포대와 성곽을 보수하였다. 이괄의 난때 체찰부사서 난을 수습하는데 공을 세우고 남한산성의 역사를 감독하다 죽었다. 이에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신도비는 선조 광해군 인조의 삼대왕을 잘 섬기면서 여진인을 무마하여 백성의 생활에 안정을 주고 지방민을 평온하게 하였던 공을 찬양하였다. 효종9년(1658)에 건립된 이 비의 비문은 송시열이 지었으며 서(書)는 송준길이, 전(篆)은 이정영(李正英)이다.
8) 시간이 되면 충북 혁신도시로 선정된 진천군 덕산면 일대
4. 회비 : 4만원 (회비는 당일 총무에게 납부)
5. 신청기간 : 4월 15일(토)
6. 신청방법 : 참가지 이름과 연락처를 E-mail이나 전화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7. 연락처 E-mail : gudtks@korea.com 김승원 총무분과부위원장(011-229-7540) 윤석구 총무분과위원장(011-774-1727) 이영재 고문님 : 019-646-6257(호남지역) 김종우 전회장님 : 018-401-2222(충청, 대전지역)
8. 기타 : 산행을 할 수 있는 간단한 복장과 나경패철, 필기도구 등 (우천시도 예정대로 진행하므로 비가 오면 우산이나 우의를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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