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뱅우주론에서 불거진 우주의 평탄성과 지평선 문제는 인플레이션 가설을 도입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이 가설은 초기우주에서 기하급수적으로 가속 팽창하는 과정이 있었다는 설정이다. 우주의 인플레이션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 배경에는 입자물리학의 주요 주제인 기본 힘의 통합이 관련되어 있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4가지 기본 힘 : 중력∙전자기력∙약력∙강력
우주에는 수많은 물질이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과학의 역사는 이런 물질의 근원을 찾는 의문으로 시작되었다. 화학자들이 수많은 물질을 분해하고 분석하는 과정을 거쳐 물질이 원자로 구성됨을 밝혀내자, 물리학자들은 원자를 조사하여 원자핵과 전자로 구성됨을 알아냈다. 그 후 발전한 소립자물리학은 원자핵보다 작은 세계를 탐구하여 모든 물질은 쿼크와 렙톤이라 불리는 몇 가지 기본입자로 이루어지고, 그들 사이에는 중력과 전자기력 그리고 강력과 약력이라는 네 종류의 기본 힘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아냈다.
기본 힘 중 중력과 전자기력은 우리에게 친숙한 힘이지만, 강력과 약력은 뒤늦게 발견된 낯선 힘이다. 강력과 약력은 원자핵 내부와 같이 극히 작은 세계 안에서만 나타나는 근거리 힘이다. 중력은 물체를 땅으로 떨어지게 하고 달이 지구 주위를 공전하게 하는 힘이지만, 전자기력은 원자핵과 전자를 결합시켜 원자를 만들거나 원자와 원자를 결합시켜 분자나 결정을 이루게 하는 힘이다. 그리고 강력은 양성자와 중성자 내부에 있는 쿼크들을 결속시키는 동시에 양성자와 중성자를 원자핵 속에서 강하게 결합시켜 주는 힘이며, 약력은 우라늄이나 라듐 같은 원소들이 방사능 붕괴를 일으키도록 작용한다.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소립자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기본 힘, 하나로 통합할 수 있을까?
기본 힘 중에서 가장 약한 힘은 중력이고, 가장 강한 힘은 강력이다. 원자 크기에서 전자기력은 중력보다 무려 1036배나 강하다. 공중에 매달린 자석에 쇠구슬이 붙어 땅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은 전자기력이 중력보다 훨씬 강한 힘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강력은 이런 전자기력의 100배, 약력의 1013배에 이른다. 비록 중력이 미약한 힘이기는 하지만 거시적인 세계에서는 중력이 지배적이 된다. 그 이유는 강력과 약력은 원자핵 크기에서 작용하는 근거리 힘이고, 전자기력은 전하의 부호에 따라 인력과 척력으로 동시에 작용하기 때문이다. 물질 대부분은 양전하와 음전하를 똑같은 양만큼 가지고 있어서 서로 상쇄 효과가 나타나지만 중력은 항상 인력으로만 작용하기 때문에 중력이 크게 나타난다.
기본 힘은 왜 4가지이며 전혀 다른 성질을 갖는가? 물리학자는 기본 힘을 하나로 통합하는 연구를 해왔다. 이것은 현대물리학이 풀어야 할 기본적인 의문이며, 아인슈타인이 물리학계에 남긴 유산(통일장 : 전자기력과 중력의 통합)이기도 하다. 물리학자는 기본 힘을 연구하여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였다.
기본 힘과 힘을 전달하는 입자(게이지 입자) 그리고 기본 힘을 설명하는 이론
첫 번째 공통점은 힘의 세기를 결정하는 물리량이 있다는 것이다. 중력은 질량(mass), 전자기력은 전기전하(electric charge), 강력은 강전하(strong charge), 약력은 약전하(weak charge)라는 양에 의해 결정된다. 두 번째 공통점은 힘을 전달하는 입자(게이지 입자라고 부른다.)가 있다는 것이다. 물체의 에너지나 속도가 변했을 때 뉴턴역학에서는 힘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데, 변화된 에너지나 속도를 제공해주는 실체를 입자로 해석할 수 있다. 전자기력은 광자(photon), 중력은 중력자(graviton), 약력은 W와 Z 입자(W&Z boson), 그리고 강력은 글루온(gluon)에 의해 전달된다. 세 번째 공통점은 수학적으로 구조가 유사한 대칭성의 원리를 이용하면 4가지 힘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와 기본성질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통점들은 이 힘들이 동일한 기본원리에 의해 통일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힘의 세기나 작용하는 입자가 다른 힘들이 어떻게 하나로 통합될 수 있을까? 그 실마리는 온도에 따라 힘의 세기가 달라진다는 데 있다. 낮은 에너지 상태에서는 서로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힘이 높은 온도 조건에서는 하나로 통합이 될 수 있음을 내포한다. 힘의 세기는 거리에 따라서도 달라지는데 약 10-32cm의 거리에서 크기가 같아진다는 것이 밝혀졌다.
힘이 각각 다른 입자에 작용하는 문제는 매우 질량이 큰 매개입자가 존재해서 충돌로 입자가 생성되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매개입자의 질량이 매우 크다는 것은 이 입자들의 생성 당시의 온도가 매우 높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인슈타인의 질량-에너지 등가 원리에 의해 질량은 곧 에너지이고, 에너지가 높다는 것은 온도가 높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전자기력과 약력의 통합, 그리고 대통일이론(GUT)
Z boson을 발견한 The Gargamelle bubble chamber, 현재 스위스 CERN에 전시되어 있다. <출처: Fanny Schertzer at en.wikipedia.com>
기본 힘의 통일 연구에서 거둔 첫 번째 성공은 약력과 전자기력의 통합이다. 1967년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 1933~ )와 압두스 살람(Mohammad Abdus Salam, 1926~1996) 등은 새로운 무거운 입자를 매개로 한 전자기력-약력(전약력)의 통합이론을 제시하였는데, 1983년의 CERN의 실험을 통해서 예측하였던 두 종류의 새로운 기본입자들이 발견됨으로써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이에 힘을 얻은 물리학자는 통합된 전약력에 강력을 통합하는 대통일이론(GUT, Grand Unified Theory)을 연구하게 되었다. 이론적으로 전약력과 강력은 온도가 약 1028K까지 올라가면 세기가 같아질 것으로 예측하였다.
1028K는 지구 상의 입자 충돌에 의해 생성될 수 있는 온도가 아니다. 이 온도는 빅뱅 후 10-35초의 우주 온도에 해당한다. 자연스럽게 대통일이론 연구는 우주론 연구와 연결되어 우주론의 새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 빅뱅이 일어나던 순간에 기본 힘이 하나의 힘(초힘, super force)으로 통합되어 있다가 몇 개의 다른 힘으로 분리되었다. 최초의 순간 힘은 같은 세기로 작용하면서 구별되지 않는 상태였다. 이것을 물리학에서는 대칭성을 갖는다고 표현한다.
대통일이론으로 설명하는 우주 초기의 모습, 반물질∙자기홀극∙진공의 상전이
대통일 이론에서 강력과 전약력은 하나의 힘으로 통합되어 있고, 입자들은 임의의 다른 입자로 변환될 수 있다. 이 반응은 흔히 X 입자와 Y 입자로 불리는 입자들에 의해 매개된다. X 입자는 지금까지 알려진 어떤 입자와도 다른 입자로, 물질을 반물질로 변화시킬 수 있는 입자이다. 모든 기본입자는 자신과 반대의 성질을 갖는 반입자가 존재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주에는 반입자로 이루어진 반물질이 대량으로 존재한다는 증거는 없으며, 물질이 지배적으로 존재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주 초기에 물질과 반물질의 존재량에 차이가 있어야만 설명될 수 있는데, 물리학자들은 X 입자와 그의 반입자가 같은 비율로 붕괴하지 않아 존재량에 차이가 생겨서 오늘날의 불균형 상태로 변화되었다고 설명한다.
한편 두 번째 입자인 Y 입자는 자기홀극(magnetic monopole)이라 불리는 입자로 초기 우주에서 비정상적인 에너지장의 방향이 잘못 배열된 곳에서 생성되었다. 자기홀극은 간단히 말해서 N극 또는 S극만 있는 자석을 의미한다. 이 입자는 우리 우주에 존재하는 전기력과 자기력과의 연관 때문에 대통일이론에서 필연적으로 대량으로 발생하게 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자석은 N극과 S극이 동시에 존재하며 우주에도 자기홀극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없다. 이것을 자기홀극 문제라고 한다.
대통일이론에서 우주는 처음에 에너지 밀도가 높고 대칭성이 높은 상태(‘가짜 진공’이라 불림)에서 팽창과 냉각을 통해 에너지 밀도가 낮고 대칭성이 낮은 상태로 진화해왔다고 생각한다. 이 과정은 댐이 붕괴하는 과정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강물은 항상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강이 이르는 최종 목적지는 가장 해발고도가 낮은 바다가 된다. 하지만 때로는 강물이 바다에 도달하지 않았음에도 흐르지 않고 고여 있는 경우가 있다. 댐으로 강물을 가로막아 놓은 경우이다. 댐에 고인 물은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 하지만 댐에 엄청난 압력을 가하고 있다. 만약 댐이 수압을 견디지 못해 한순간에 터지게 되면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쏟아져 나오고 강물은 바다로 흘러가게 된다. 우주공간의 에너지가 가장 낮은 상태를 ‘진공’이라 하면, 바다는 ‘진공’에 해당하고 댐은 ‘가짜 진공’에 해당한다.
진짜 진공은 에너지가 가장 낮은 true 상태라고 하면, 가짜 진공은 이보다 에너지는 높지만 다른 이유로 그 상태에서 안정화되어 있는 false 상태를 말한다. <출처: Stannered at en.wikipedia.com>
대통일 이론에서는 우주는 강물을 가둬 놓은 댐과 같은 ‘가짜 진공’ 상태에서 시작되었고 힘은 하나의 힘으로 통합되어 있었다고 상정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러한 구조가 붕괴하면서 가짜 진공이 진짜 진공으로 전환되었고, 그 과정에서 힘이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이 과정은 물이 얼음으로 바뀌는 상전이(phase transition)와 유사하며 진공의 상전이라 불린다.
대통일이론으로 설명하지 못한 현상을 인플레이션 이론으로 해결할 수 있어
자기홀극 문제로 고민하던 앨런 구스(Alan Harvey Guth, 1947~ )는 어느 날 우주가 가짜 진공의 상태에서 출발했다면, 초기의 팽창속도는 지수함수적으로 빨라져서 자기홀극의 밀도가 순식간에 작아질 것이라는 착상을 하였다. 그리고 자기홀극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자기홀극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넓은 우주에 흩어져 있어서 찾지 못하는 것이라는 답을 얻었다.
인플레이션 이론에서는 우주 초기에 우주는 가짜 진공상태에 있어서 진공의 에너지로 가득 차 있었고 상전이가 일어나는 순간 진공의 에너지는 우주를 급격하게 팽창시켜 우주의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고 설명한다. 이 과정은 물이 가득 찬 댐이 한꺼번에 터지듯, 호수의 물이 한꺼번에 얼어붙듯이 극적으로 일어난다. 호수의 물이 얼어붙는 과정은 물 분자들 사이의 미시적인 결합구조가 호수 전체로 확산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주의 인플레이션은 영원히 지속하지는 않는다. 진공에서 흘러나온 에너지가 입자로 흘러들어 가면서 중력이 인력효과를 발휘하여 팽창속도를 늦추기 때문이다. 이후 인플레이션에 의한 가속팽창은 멎고 우주는 등속팽창을 계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인플레이션 이론은 빅뱅의 순간에 일어났던 일을 설명하는 가장 설득력 있는 이론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동안 빅뱅이론은 빅뱅의 순간보다 빅뱅 이후에 일어난 일을 설명해왔는데 비해 인플레이션이론은 빅뱅의 순간에 최대한 접근하게 한다. 그리고 인플레이션이론은 현재의 우주 모습을 자연스럽게 설명한다. 왜 우주가 전체적으로 모든 방향에서 같게 보이는지 우주공간이 평평한지를 설명한다. 인플레이션으로 우주는 자동으로 곡률이 거의 없어지고 밀도가 임계값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