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이 점령한 부도(父島)에서 재미난 사건도 있었다.
하루는 폭격으로 파인 땅을 고르는 노역을 마치고 막사로 돌아가는데 목사 친구가 옆구리를 쿡쿡 찌르더니 “저 미군한테 말을 걸어 보자”고 했다.개울 옆 언덕바지에 몸을 반쯤 기대고 누워서 작업하는 우리를 감시하던 헌병이었다. 미군하고 손짓 발짓 섞어 가며 몇 번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지만 영 자신이 없었다.
목사 친구는 “신학교에서 미국 선교사들을 자주 만났기 때문에 웬만큼 통할 것이다”며 그 헌병에게 넉살 좋게 말을 걸었다.
“What's your religion?”(네 종교가 뭐야?)” “I'm catholic(가톨릭이다)” '가톨릭'이란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나는 앞으로 뛰어나가 “Me too, Me too(나도 가톨릭이다)하며 반가워했다.”
그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You jab (너는 일본 사람이잖아)”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흔히 그들을 '왜놈'이라고 부르는 것과 어감이 비슷하다.그의 말은 너는 일본 사람인데 어떻게 가톨릭을 알고 있느냐는 뜻이었다.
그 때부터 또 땅바닥에 일본과 한국 지도를 그려 놓고 “난 이쪽에서 살던 한국 사람인데 학병으로 끌려 왔다. 일본사람이 절대 아니다. 난 한국 가톨릭 신학생이다.” 고 설명했다.
“Can you serve mass?(너 미사 복사를 설 줄 알아?” 형편없는 영어 실력으로 그 질문을 용하게 알아들었으니 참으로 신통 방통한 일이다.
“물론 할 수 있다고 대답했더니 그는 천주교 신자라는 증거를 대 보라는 듯이“어떻게 하는 건지 한 번 해 보라”고 주문했다.
“인 노미네 빠뜨리스 엣 필리이 엇 스피리뚜스 상띠 아멘.(In nomine patris et Spiritus Sancti.Amen.) 그에게 라틴말로 십자성호부터 그어 보였다. 그 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이라 전 세계 모든 교회가 라틴어 미사경문을 사용하던 시절이다.
이어 층하경(층下徑)을 바쳤다. 층하경은 미사 시작에 앞서 주례사제와 복사가 제단 아래서 주고받으며 바치는 기도였는데 복사를 하려면 제법 긴 층하경을 모두 외우고 있어야 했다.
“인 뜨로이보 앗 알따레 데이. (나 이제 천주의 제단 앞으로 나아 가리로다)” “앗 데움 귀 레띠피깟 유벳뚜뎀 메암.(나의 청춘을 즐겁게 하여 주시는 천주께 나아 가리로다.)” 그 헌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내친 김에 고개를 숙이고 가슴을 치며 고죄경(고백기도)을 바치기 시작했다. “메아 꿀빠(Mea Culpa. 제 탓이오)...” 그 순간 헌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나랑 똑같이 가슴을 치며“메아 꿀빠. 메아 꿀빠. 메아 막시마 꿀빠(제 탓이오 제 탓이오 제 큰 탓이 옵니다.)”라고 기도했다. 그러더니 나를 와락 껴안고는 “너는 틀림없는 가톨릭이다”며 기뻐했다.우리 주위로 빙 둘러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일본군들은 '두 사람이 지금 뭐 이상 한 짓을 하는가?'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헌병이 반가운 마음에 속사포처럼 쏟아 내는 말을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나도 복사를 했다. 한때 신부가 되려고 했다. 내 누이는 수녀다” 라는 말을 대충 이해했다.
가톨릭신자는 기차나 버스 안에서 옆 사람이 묵주반지를 끼고 있는 것만 봐도 특별한 동질감을 느낀다. “아,교우시군요”라는 인사 한마디면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봄볕에 눈 녹듯 사라지는 게 신자들 정서다.
그런 정서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친히 선발하신 사도들로부터 내려오는 전통과 법통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종교를 믿는다는 동질감이 아닐까 싶다.
이 세상에 수많은 종교와 종파가 있지만 가톨릭은 하나다.세상 어디를 가도 전례와 교리, 교회구조가 똑같다. 미국 뉴욕 번화가에 있건 아프리카 밀림에 있건 지구상의 모든 가톨릭교회는 하나의 믿음으로 베드로 사도 후계자인 교황과 연결돼 있다. 즉 모든 신자가 한 가족 한 형제다. 그러니 패전국의 학병. 그것도 일본군 군복을 입고 있는 한국 신학생이 그 섬에서 미국 형제를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가톨릭 신학생이란 신분이 알려진 덕에 그 해 성탄 대축일 미사에 참례하는 행운까지 얻었다. 성탄절 직전. 군종 목사는 수천 명 되는 일본군 중에 유일한 가톨릭 신자인 나를 불러 “유황도에 있는 군종 신부가 여기 와서 성탄전야 미사를 할 예정인데 원하면 참례해도 좋다”고 말했다. 부도에 군종 목사는 있었지만 군종 신부는 없었다. 미사참례라는 말에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막상 성탄전날 밤 미사가 봉헌되는 막사로 갔더니 미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아무래도 미사시간을 잘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벽면 십자가를 향해 서서(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방식)두 팔을 벌리고 전례를 거행하는 군종 신부님 뒷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이 울컥했다.체격이 건장한 미군들 틈에 끼어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로 봉헌하는 미사였지만 내 마음은 내내 감동의 물결로 출렁거렸다. 1년 넘게 미사참례를 못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영성체 시간이 되자 당혹스러웠다. 1년 넘게 고백성사를 보지 못해 성체를 받아 모시러 나가면 안 되는데 시선은 자꾸 신부님 손에 들린 성체를 향했다.
당시 성탄미사는 3대 연속 봉헌됐다.사제는 자정미사를 신자들과 성대하게 봉헌한 뒤 나머지 미사 2대는 신자들이 남아있건 집에 돌아가건 상관하지 않고 연속해서 드렸다. 미사가 끝나면 잠깐이라도 고해성사를 본 뒤 다음 미사에서 성체를 모시면 되겠지만 늦게 도착해서 몇 번째 미사인지 알 길이 없었다. 만일 마지막미사라면 1년 만에 성체를 모실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를 잃는다.
나는 한참 망설이다 용기를 냈다.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시니까 통회하는 마음으로 보시면 이해해 주실 거야’라고 자위하면서 성체를 받아 모셨다.
그런데 그게 마지막 미사가 아니었다. 미사가 끝나자 복사를 섰던 군인은 돌아가고 신부님 홀로 미사를 이어 드렸다. 나는 미사 순서와 복사 역할을 훤히 꿰뚫고 있는 터라 아무런 실수 없이 미사 집전을 도왔다.
미사가 끝나자 신부님은 제의도 벗지 않은 채 나를 껴안더니“자네는 누군가?” 하고 물었다.“한국에서 온 신학생”이라고 대답하자 “이렇게 감동적인 미사는 처음이다.”가톨릭은 인종,민족,언어,이념을 초월하는 종교다”며 감격스러워했다.
그 신부님은 얼마 뒤 괌으로 사목 지를 옮기셨다. 미군 전투기 조종사 실종사건 재판의 증인으로 나선 노무자들과 괌에 체류하고 있던 나는 그 곳에서 신부님과 반가운 상봉을 했다. 미사에 참례하면 신부님은 항상 내게 복사를 맡기셨다. 그 곳에서 6개월 정도 머물다 일본을 거쳐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을 밝았다.
FBI가 나를 추적한 사연
불가에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는데 정말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1977년 5월, 한인본당 사목방문과 노틀담대학교 명예 법학박사학위 수여식 참석을 겸해 미국에 갔을 때다. 학위 수여식 후 한인 공동첼를 방문하려고 시카고 공항에 내렸는데, 마중 나온 성콜롬반 외방선교회 신부님이 “혹시 켈리 신부라는 분을 아세요?”하고 물었다.
퍼뜩 떠오르지가 않아 이리저리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신부님이 “해군 군종신부? 출신”이라는 힌트를 줬다.
해군 군종신부?…….아, 그 신부님! 부도랑 괌에서 미사할 때 내가 복사를 섰던 그 신부님. 맞아, 그분 성함이 켈리야. 그 때 소속이 시카고 교구라고 하셨어, 그런데 그 신부님을 아세요?”
“물론 알지요.우리 이웃 본당에서 사목하고 계시는데, 김 추기경님이 시카고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내일 점심식사에 초대하셨어요.”
다음날 설레는 마음으로 캘리 신부님을 만나러 가는데 골롬반회 신부님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거기 가면 무척 놀랄 일이 또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게 뭐냐고 물어도 “가보면 안다”면서 좀체 알려 주지를 않았다.
캘리 신부님과 32년 만에 재회를 했다. 얼마나 반갑던지 사제관으로 들어갈 생각은 안하고 문 앞에 서서 악수와 포옹을 번갈아 가며 한동안 인사만 나눴다. 드 때 노틀담대학에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에게도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한 터라 학위 수여식 사진이 전국 주요일간지에 실렸다. 켈리 신부님이 신문에 난 내 얼굴을 보고 30여 년 전 부도에서 만난 한국 신학생이란 걸 용하게 알아챈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 신부님과 몇 마디 주고 받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신부님은 우리에게 방해가 될까 봐 나가서 복도에 있는 전화를 받았다.그 때 골롬반회 신부님이 “저 전화 받으세요, 저게 바로 오늘의 '빅서프라이즈'입니다.”라며 방에 있는 수화기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김 추기경입니다.” “반가워요. 딕이라는 사람인데 저를 기억하겠어요?” “딕? 글쎄요, 죄송하지만,잘 기억이 나질 않네요?” “부도에서 만난 해병대원, 딕을 모르겠어요?”
부도에서 해병대 대원들과 자주 마주치기는 했다. 몇 명 친해진 대원들과는 손짓 발짓 섞어 잡담을 주고받으며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도 했다.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그 사람 얼굴이 떠오르질 않았다. 그는 “쌘프란시스코 FBI에서 일하고 있어요.보고 싶으니 당장 만납시다.”고 말했다.
FBI(미 연방 수사국)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당시 내게는 공안 당국의 감시 눈길이 늘 따라붙었다.1971년 전국으로 생중계되는 명동대성당 성탄 자정미사 강론에서 박 정권의 장기집권 술수을 비판한 뒤로 요주의 인물이 됐기 때문이다. 내 일거수 일투족을 어떻게 한 뒤로 요주의 인물이 됐기 때문이다. 내 일거수 일투족을 훤히 꿰뚫고 있던지 외국 공항에 도착해도 현지에 상주하는 정부요원들이 어김없이 나와 있었다.
그런데 나보다 더 놀란 사람이 골롬반회 신부님이었다. 몇칠 전 한 남자가 신부님 숙소로 전화를 걸어“여긴 FBI인데, 한국에서 온 김수환 추기경 행방을 아는가?”하고 물었다는 것이다.잠결에 전화를 받은 신부님은 FBI에서 나를 찾는다기에 무슨 큰 일이 난 줄 알고는 “그럼 당신도 켈리 신부를 아는가? 마침 김 추기경이 켈리 신부를 만날 예정인데. 그 때 3자 전화상봉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금문교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딕(Dick,리차드 애칭)을 잠깐 만났다. 그는 언행이 거칠기 짝이 없는 해병대 대원들 중에서 군계일학(群鷄一鶴)처럼 점잖은 친구였다. 나는 양반 중의 양반인 그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꽤 정이 들었는데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는 “당신은 쉽게 잊을 우 없는 친구”라며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유학 길에 오르기 전에 외삼촌과 찍은 내 사진이었다. 맙소사! 부도에서 헤어질 때 건네준 정표(情表)를 32년째 간직하고 있다니….“그나저나 나를 어떻게 찾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파안대소 하며 말했다.
“신문에 실린 사진을 보니까 영락없이 그 때 만난 신학생이더라고요. 노틀담대학 측에 알아보니까 ‘시카고에서 골롬반회 신부를 만날 예정’이라는 단서가 나왔어요, 그 때부터 말하자면 FBI 범인추적시스템을 가동한 거지요.”
세계 최고 수사기관이라는 FBI에서 무슨 시스템까지 동원해 내 행방을 추적했으니 ‘빅 서프라이즈’가 맞긴 맞는 것 같다
어렵사리 밟은 고국 땅 '실망 투성이'
해방된 내 조국으로 돌아오는 길이 왜 그리 멀고 고달프던가.
괌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것은 1946년 9월이었다. 원래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고 싶었으나 대구 교구장님의 승낙서가 좀체 도착하지 않는데다 이래저래 일이 꼬여서 3개월 더 일본에 머물다 귀국 길에 올랐다.
귀국을 결심한 이유 중 하나는 재일교포들의 분열과 다툼이었다. 36년간 남의 나라 밑에서 설움을 겪다 해방됐으면 이제 한마음이 되어 조국의 미래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재일교포들은 툭하면 좌우로 갈라져 싸웠다. 그 때 일본 주둔 연합군은 한국인과 같은 제3국인을 일본인보다 우대했다. 가령, 일본인은 맥주를 구입할 수 없어도 한국인은 자유롭게 맥주를 사서 마실 수 있었다. 그런데 교포들은 맥주를 마셔가면서 회의를 하다 의견이 서로 안 맞으면 맥주병을 깨서 혈투 극을 벌이곤 했다. 그런 소식이 들려 올 때마다 실망스럽고 마음이 아팠다.
귀국하는 한국인을 위해 편성된 동경 발 임시열차에 몸을 실었다. 일본 열도의 제일 서쪽에 있는 구주(九州)지방 하까다에 가서 귀국 선을 타야 했다. 평소 19시간이면 닿는 거리인데 그 임시열차는 서른 대여섯 시간이나 걸렸다.
그 길고 지루한 시간을 도시락 한 개로 버텼다. 하까다에 내리자 안내원들이 우리를 큰 창고에 밀어 넣었다. 가마니가 깔린 바닥에서 모포 한 장과 건빵으로 사흘을 견뎠다.
사흘 후 마침내 귀국선에 올랐다. 다음날 아침 나절에 부산항이 보였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감격스러워했다. 단 1초라도 빨리 일본인들이 물러간 조국 땅을 밟아 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배가 항구에 정박하기도 전에 미군제복처럼 생긴 옷을 입은 청년들이 배에 올라왔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청년들은 우리를 모아놓고 장황하게 일장훈시를 했다. 귀에 들리지도 않았지만 희망찬 조국건설을 위해서 ○○를 해 달라는 얘기 같았다. 화가 나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했다.
'타지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 들어오는 사람들 앞에서 무슨 입 바른 소리인가. 여기 있는 사람들 얼굴을 보면 모르나. 며칠 동안 먹은 거라곤 건빵뿐이 없어 쓰러질 판인데.'
내 옆에 한국인과 결혼한 일본 여인이 있었다. 한국에 있는 남편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남편이 어디에 사는지 알아요?" "전에 남편하고 한 번 가본 일이 있어요. 그런데 그 집에 가니까 본처가 있더라고요. 남편이 본처랑 이혼하고 부를 테니 먼저 일본에 가 있으라고 해서 기다렸는데 소식이 없어서요." "그럼 이혼했다는 연락은 받았어요." "아이요. 이혼했으리라 믿고 가는 길이에요."
국적을 떠나서 한 여자를 내팽개친 한국 남자의 무책임한 행동에 또 실망했다.
동포들은 하선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하루 종일 쫄쫄 굶으면서 대기했다. 사무치게 그리웠던 조국 땅을 지척에 두고 바다에 떠서 굶는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하선 허락이 떨어져 배에서 내렸다. 그런데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깡패들이 몰려와서 승객들의 짐, 특히 부녀자들의 핸드백을 낚아채 가는 것이었다. 하루 종일 배에 가둬 놓고 있다가 어두워진 후에 하선시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일본에서 온갖 설움을 겪은 동포들이 조국 땅을 밟자마자 당한 것이 약탈이라니…. 또 한 번 실망했다.
저녁밥이라고 나온 게 밀가루 몇 조각 띄운 멀건 국물이었다. 그것도 한 사람씩 퍼 주는 것 아니라 한 번 마시고 옆 사람에게 그릇을 넘겨줘야 하는 엉터리 배식이었다. 개인화물 하역작업은 새벽 2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그래서 떠밀려 들어간 곳이 큰 창고였는데 구석에 시체 3구가 있었다. 귀국 동포들의 감정이 결국 폭발했다.
동포들은 "우리가 너희한테 밥을 달라고 했냐, 돈을 달라고 했냐. 왜 붙잡아 놓고 이 고생을 시키느냐"면서 "차라리 일본으로 돌아가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그렇다. 해방 직후의 조국은 법과 원칙도 없이 혼란스러웠다.
아무튼 저녁 늦게 그 실망스러운 자리에서 빠져 나왔다. 그 시간에 어딜 찾아가서 밥 한술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는 곳은 범일성당과 성당 근처 김태관 신부님 집이었다. 이미 고인이 되신 김 신부님(예수회)은 일본 상지대학 선배로서 방학 때 잠시 집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 집에 도착했더니 저녁식사를 하던 가족이 나를 보고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내 얘기를 듣고는 밥을 먹고 가라고 옷소매를 끌었지만 괜히 예고없이 찾아와서 가족들 밥을 축내는 것 같아 성당 위치를 물었다. 범일성당에 형님(김동한 신부) 서품동기인 신 신부님이 보좌신부로 계신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가족들은 "보좌신부의 성은 신씨가 아니라 김씨"라면서 "그렇지 않아도 아까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그 김 신부님이 오신 줄 알고 깜짝 놀랐다"는 것이었다. 참 이상했다.
'형님 동기신부들이야 내가 뻔히 다 아는데. 그럼 혹시 형님이….'
성당을 찾아 올라가는데 얼마나 마음이 앞서던지 헛걸음질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제관 문을 두드렸더니 교리공부를 하고 있던 한 아주머니와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아이들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와~ 김 신부님 동생이다"라고 소리쳤다. 형님 책상에 놓여 있는 내 액자사진을 아이들이 본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조금 떨어진 식당 쪽을 향해 "신부님, 신부님, 동생 오셨어요!"라고 외쳤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형님이 맨발로 달려나왔다. 그 반가운 마음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겠는가.
학병에 나가는 나를 부산항에서 배웅할 때 눈물을 보이신 형님이었다. 며칠 동안 굶은 채로 부산항에 내리자마자 그 형님을 만나 밥을 얻어먹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부산의 한 여인에게서 '청혼'받고 고민
나 같은 사람은 누구와 언성을 높여 싸워 본 일이 한번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전쟁터에서 돌아와 어머님을 찾아 뵙기 위해 도착한 대구에서 경찰관과 대판 언쟁을 벌인 적이 있다.
부산항에서부터 조국의 혼란스런 현실에 실망해 마음이 언짢았던 것이 사실이다. 형님 자전거를 타고 부산항으로 짐을 찾으러 갈 때도 경찰관의 고압적 검문 태도에 마음이 상했다. 대구행 열차는 유리창이 모두 떨어져 나간 데다 시트도 성한 것이 없었다. 해방 후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사람들이 떼어 간 것이다.
전등도 없는 열차가 컴컴한 터널에 들어가면 선반 위에 올려 둔 짐이 없어지는 일이 다반사라 나 역시 터널에서는 가방을 꼭 껴안고 있어야 했다.
'이 나라가 제 꼴을 갖추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까….' 내내 마음이 답답하고 서글펐다.
경찰관과 언쟁이 붙은 이유는 통행금지 위반 때문이었다. 밤 늦게 역에 도착하는 승객에게는 손에 도장을 찍어 주는 모양이었는데 일본에서 돌아온 내가 그걸 알 리가 없었다. 어머니가 사시는 남산 동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데 경찰관이 나를 불러 세웠다.
"여보 여보, 어딜 가요?" "어딜 가다니요. 집에 가는데요." "이 사람이, 통행금지 있는 거 몰라?" "… 통행금지요? 처음 듣는데요." "(거칠게) 모르다니? 어디서 왔어?" "며칠 전에 일본에서 왔습니다. 일본서 공부하다 귀국하는 길입니다." "공부만 하면 제일이야." "몇 년 만에 고국에 돌아왔으면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럼 경찰관이 친절하게 가르쳐 줘야지, 다짜고짜 죄인 다루듯 다그치는 게 잘하는 겁니까."
나는 물러서지 않고 언성을 높여 꼬박꼬박 말을 되받아 쳤다. 일제 압제에서 풀려 났으면 국민들이 서로 감싸 주면서 한마음이 되어야 할 텐데 경찰관의 태도에서 보듯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난 그 경찰관이 미운 게 아니라 조국의 현실이 서글펐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집에 도착했다. 그 동안 내가 어머니 품에 안겼지만 그 때는 내가 어머니를 가슴에 안았다. 어머니가 그렇게 우시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다음날부터 만나는 사람들마다 "자네는 어머니 덕에 살아왔네"라는 인사말을 했다. 그렇다. 난 어머니 기도 덕에 목숨을 건졌다. 어머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대구교구청 옆 성모당에 나가 이 아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바다 한가운데서 미군 잠수함 공격에 목숨을 잃을 뻔한 그 순간에도 어머니는 성모님께 아들의 무사귀환을 빌고 계셨다.
어머니의 그런 사랑을 느낄 때마다 '하느님의 사랑은 얼마나 더 크겠는가'하고 생각하곤 했다.
신학교에 복학하기 전까지 대구에서 9개월쯤 머물렀다. 대구대목구 임시 교구장인 주재용 신부님의 일을 거들고, 형님이 계신 부산을 오가면서 보낸 그 기간에 갈등과 유혹이 끊이지 않았다.
누님은 집안 형편이 쪼들리자 "네 형이 신부됐는데 너까지 또 신부가 돼야겠느냐"면서 신학교 복학을 탐탁스러워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보다 마음을 더 심란하게 만든 사건은 한 여인의 청혼이었다.
그 여인은 형님이 계시는 범일성당에 드나들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형님이 관여하는 고아원에서 일하면서 가끔 사제관 청소를 해주었는데 잘은 몰라도 심적 고통이 큰 사람처럼 보였다. 마음의 병 때문인지 그녀가 병으로 눕자 형님은 "다른 사람은 그 여자를 좀 어려워 하니 네가 병간호를 해주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그래서 아무 생각없이 대답하고 병간호를 하는데 그녀가 어떤 얘기를 하다 말고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장황하게 들려주었다.
그 때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고해성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당 신부님은 그녀가 어려워할 것 같아 영도에 계시는 프랑스 신부님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씀 드리고 모셔 왔다. 그녀의 고해성사는 한시간도 넘게 걸렸다. 그런 관심과 배려가 그녀의 마음을 사로 잡았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 보니 마음이 극도로 지친 상태에서 자신에게 잘해주는 누군가가 옆에 있으면 그 쪽으로 마음이 쏠리는 것은 당연할 것도 같다.
어느 날 그녀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나를 받아 줄 수 있겠어요?"
깜짝 놀랐다.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소신학교 시절에 방학이 되어 고향에 내려갈 때면 교장 신부님이 "여자는 아예 쳐다보지도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셔서 안면이 있는 여자에게도 고개를 돌렸는데 프로포즈까지 받게 될 줄이야….
물론 어릴 때부터 '나만을 사랑해주는 여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막상 그런 여인이 나타나자 나에게 모든 걸 거는 한 사람을 평생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신부가 돼서 부족하나마 여러 사람에게 고루 사랑을 쏟는 일이 훨씬 쉬울 것 같았다.
내가 단호하게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단념하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훗날 전해 들었을 때는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어쩌면 그 해프닝이 나는 사제의 길을 가야 할 사람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갈림길에서 우왕좌왕하는 나를 붙잡아 준 은인은 장병화 주교님(1990년 선종)이다.
당시 우리 본당에 계시던 장 신부님께 내 결점만 쏙쏙 골라서 과장되게 말씀 드린 적이 있다. 신부가 되어도 집안 걱정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 같고, 여자에게도 마음을 쉽게 빼앗길 것 같다는 식으로 말이다. 사제가 되면 안 될 사람이라고 판단하시도록 유도한 것이다.
장 신부님은 한 달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시더니 한 달 내내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정확히 한 달째 되는 날 아침미사에 참례한 나를 부르셨다.
"신부는 모름지기 자신의 약점이 뭔 지 알아야 해. 그래야 그걸 이겨내고 성덕을 쌓을 수 있어. 그렇기 때문에 자네는 꼭 신부가 돼야 하네."
장 신부님은 내가 한 말을 모두 거꾸로 해석하시고 신학교 복학을 독려하셨다.
공베르 교수신부님 금경축 날 전쟁 터져
1947년 9월 서울 혜화동 신학교 교정으로 다시 돌아왔다.
일본 유학 기간의 공백 때문에 후배들과 함께 공부해야 했다. 내가 소신학교 5학년 때 1학년에 갓 입학한 후배들이었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비슷한 또래도 더러 섞여 있었다.
내 소신학교 입학 동기들은 그 해에 벌써 사제 품을 받았다. 동기라 하더라도 신부와 신학생 신분은 천양지차(天壤之差)라 착잡한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다.
남들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생활했다. 유학과 학병시절에 있었던 재미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으면 새 친구들이 모여들어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그 때는 지금보다 남들에게 얘기를 쉽게 꺼내는 편이었던 것 같다. 10개비가 든 담배 한 갑을 다 피워 가면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다.
담배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난 우리 민족이 해방되는 바로 그 날부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 전에도 담배를 배워 보려고 했지만 몇 모금 빨고 나면 머리가 아파 그만두곤 했다. 그런데 전쟁터에 나가 있는 학도병에게 들려 온 해방 소식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그 날 입에 문 담배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명동성당이 조용한 날이 없던 1970년대는 하루에 두갑까지 피웠는데 1984년 교황님이 한국에 다녀가신 그 해 가을에 완전히 끊었다. 요즘 금연열풍이 불어 담배를 끊으려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인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100% 확실한 금연비결(?)을 공개하겠다.
심지어 손을 물어 뜯으면서 분심을 쫓는 친구도 있었다. 평양 출신의 서운석 신부는 성체조배 하는 모습이 얼마나 경건했던지 마음 속으로 '기도를 가장 잘 하는 신학생'이라고 인정해 주었다. 서 신부와 충남 공세리 출신의 강만수 신부 등 몇 명은 한국전쟁 당시 공산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신학생들이 성서 다음으로 애독한 것이 '준주성범'(遵主聖範, Imitation of Christ)이라는 영신지도서였다. 제목 그대로 주님을 따르는 데 필요한 거룩한 모범을 제시한 그 책을 옆에 끼고 살면서 그 가르침대로 살려고 애를 썼다.
신학교 생활 중 삭발례(削髮禮)의 감동은 잊을 수가 없다. 삭발례란 세속을 끊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친다는 의미로 머리를 깎고 수단을 착용하는 예식인데 성직 입문의 첫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사라진 예식이다. 스님이 되기 위해 머리를 깎듯이 성직자가 되기 위해 첫 관문을 통과한 것뿐인데 그 날의 기쁨은 사제수품 때보다 오히려 더 컸던 것 같다.
하느님이 그 동안 내게 주신 영적 기쁨 가운데 가장 큰 기쁨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그 날 예식의 복음이 가슴 깊이 와 닿았다. 말씀 줄거리는 "야훼 하느님은 나의 유산이다"라는 것이었다. 내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을 재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설사 있다 해도 하느님이 계시는 한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오로지 하느님만이 내가 차지할 수 있는 몫처럼 느껴졌다.
교정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신학생들의 순수한 열정이 가득했다. 그러나 신학교 울타리 밖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정치인과 국민들이 좌우로 갈리어 극한 이념대결을 벌이고, 곳곳에서 폭력적 투쟁을 일삼았다.
많은 지식인들이 좌익계열 단체에 가입해 활동했다. 일본 상지대학 선배들 중에도 적지 않은 수가 좌익단체에서 비중있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함경도 출신의 유학 동기를 서울역 앞에서 만난 일이 있는데 그 친구도 좌익에 가담한 듯했다. 그 혼란스런 이념대결을 지켜보는 동안 내가 가톨릭 신자가 아니고, 신학생이 아니었더라면 좌익 쪽으로 기울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우익 성향을 보이기는 했으나 기본 입장은 중립이었고, 우리 신학생들 역시 그러했다. 일반 대학교수로 있던 한 선배가 내게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요즘 학생들이 교수님 입장은 뭐고, 가톨릭 입장은 뭡니까 하고 자주 물어봐.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좌익과 우익 중간에 하느님당(黨)이 있는데 난 그 당원이다. 하느님 당은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기우는 게 아니라 하늘로 곧장 올라간다'고 대답하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답(名答)이라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내가 만일 하느님당 당원이 아니었더라면 이념투쟁의 한복판에서 방황했을지도 모른다.
1950년 6월25일은 신학교 교수인 공 베르(파리외방전교회) 신부님의 사제수품 50주년 금 경축 날이었다. 내가 총급장(총학생회장)인데다 공 신부님은 소신학생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 온 터라 학생들을 동원해서 금 경축 행사를 정성껏 준비했다.
그 날 금 경축 행사를 다 치를 때까지도 전쟁이 일어난 줄 몰랐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의정부 방면에서 피난민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인민군이 청량리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느니, 미아리 고개까지 들이닥쳤느니 하는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조국 광복 5년 만에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다니, 그리고 우리 국군이 그토록 힘없이 밀리다니….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국군들이 신학교 뒷 편 언덕 배기 성터에 포를 설치하는 것을 보고는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런데도 신학생들은 27일 저녁까지도 학교에 남아 있었다. 식당에 저녁밥을 준비해 놓았지만 주위가 뒤숭숭해서 어느 누구도 밥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교수신부님 같은 웃어른으로부터 어떻게 행동하라는 지시가 내려오지도 않았다. 사태 추이를 종잡을 수 없는 건 신부님이나 신학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날 저녁부터 학생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일단 명동성당으로 가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총급장인 내가 학생들을 통솔해야 했으나 나 역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