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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이순신장군에 비견될 수는 없다
통영이 통제영과 충무공에 연유된 지명이라 그럴까.
통제영과 충무공 없는 통영은 없다 해도 과언 아니겠다.
있다 해도 팥소(앙꼬) 없는 찐빵에 다름 아니겠다.
달리 말하면, 통영의 명운은 충무공 효과를 어떻게 극대화 하느냐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보아도 되뎄다.
통제영과 충무공의 비중이 그만큼 절대적이다.
윤이상(尹伊桑), 청마 유치환(靑馬柳致環)을 비롯해 출중한 문인과
예술가들을 배출하기도 했으나 충무공 이순신에 비견될 수는 없다.
그리고 모두 20세기, 현대에 들어서 있는 인물들이다.
'통제영'은 경상, 전라, 충청 등 3도수군의 본영(本營)이었으며 통제
영지는 사적 제402호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세병관(洗兵館)은 통제영의 상징적 건물이다.
경복궁의 경회루, 여수의 진남관 등과 함께 이조 최대의 목조건물중
하나로 국보 제305호다.
운주당(運籌堂), 경무당(景武堂), 병고(兵庫), 내아(內衙) 등이 우선
복원되었는데 복원이 완료되면 옛 통제영의 위용이 재현될 것이다.
세병관 앞'통영시향토역사관'의 전시품들 역시 임진왜란, 통제영과
관련된 사료(史料)가 주를 이루고 있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충무공과 통제영이 갖는 비중의 바로미터(barometer)라 하겠다.
통제영지 복원현장(1. 2)
통제영의 정문 망일루(1) 통제영의 객사 세병관(2)
적의 항복을 받는 수항루(3) 운주당과 경무당(4) 비석군(5)
향토역사관(1) 각종 문서들(2) 통제영에서 주조해 사용한 주화(3)
충렬사(1. 2) 충렬사내 휴식공간 강한루(3) 명조팔사품(4. 5)
세병관 서편 600m지점인 명정동의 충렬사(忠烈祠:사적 제236호)는
충무공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는 신위사당이다.
특히 주목되는 전시품은 보물 제440호인 명조팔사품(明朝八賜品).
명나라 신종황제(13대神宗:1572~1620)가 하사한 8가지 물품이다.
(都督印,令牌,鬼刀,斬刀,曲喇叭,督戰旗,紅小令旗,藍小令旗 등)
충무공의 인품과 전략 전술에 감복한 조.명 연합수군의 명수군도독
진린(陳璘)이 자기의 황제에게 하사를 주청해 내려진 것들이다.
문득,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의 일화가 떠올랐다.
그는 러시아의 막강한 극동함대를 격멸한 일본 해군제독이다.
기자들이 "세간에서 그를 이순신 장군에 비견한다"며 소감을 물었을
때, "넬슨(영국) 제독에 비교될 수는 있겠으나 감히 이순신 장군에는
미칠 수 없다"고 일축하고 충무공을 존경했단다.
('도고'가 아니고 '야마토'라는 설도 있음)
이처럼 국가와 시대를 초월하여 존경받았으며 그 기림이 변함 없이
이어지는 충무공이다.
통영을 걷는 걸음걸음은 옛대로는 접어두고 충무공의 음덕(蔭德)이
얼마나 지대한가를 실감하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지금은 세계 3대미항(美港) 중 하나인 이태리의 나포리에
견주어 '동양의 나포리'라 한다거나 한려해상국립공원의 노른자로
청정해역의 아이콘(icon)에 다름아닌 통영으로 경천동지할 만큼 업
그레이드 되었지만 조선조 마지막 까지도 자기 이름을 갖지 못하고
고성과 거제, 남해로 떠돌며 괄시받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즘엔 "걸출한 예술인을 대거 배출한 예향,무형문화재를 가장 많이
보유한 전통의 고장" 운운하지만 조선 말까지는 배출된 인물이 전무
했기 때문이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판데목과 해저터널)
충무공의 위패를 모시고 기신제(忌辰祭)를 지내온 사당중 효시(嚆
矢)라는 지방기념물 제13호 '착량묘(鑿梁廟)'로 발길을 돌렸다.
이 고장민들과 수군들이 충무공의 충절과 구국 위훈을 기림은 물론
후세에 전하기 위해 순국 이듬해(1599년)에 세웠다는 사당이다.
당초에는 초가였는데 와가로 개수하고 '착량묘' 라고 이름 붙인 이는
제198대 통제사 이규석(李奎奭)으로 그는 충무공의 10세손이란다.
개수할 때, 지방민 자제들의 교육을 위하여 새 집도 지었는데 경내의
'호상재(湖上齋)'다.
착량묘
착량(鑿梁)은 당항포해전에서 참패한 왜군이 도주하다가 미륵도와
통영반도 사이의 지협(地峽)을 파고(鑿) 도랑(梁)을 만들어 달아난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나 그 이전에도 그리 불려왔단다.
착량은 일명 '판데'인데 이 곳이 풍수학상 통영의 목(項)에 해당하기
때문에 막히면 흉하고 틔우면 길하다 하여 다리를 놓았단다.
그러나, 풍우에 유실되기를 반복하므로 한 독지가가 석교(착량교)를
건설했는데 일제강점기인 1927년에 일제는 다리를 철거하고 1931~
32년 판데목 아래에 해저터널을 뚫었다.
일제는 강제수탈 곡물과 광물 등을 원활하게 운송하기 위해 신작로
개설에 열을 올렸다.
이 때, 대부분의 경우 옛길을 따랐다.
한데, 해남(삼남)대로를 따라 신작로를 내가던 그들은 전남영암에서
당연한 진로인 해남을 버리고 병영을 거쳐 강진으로 우회했다.
그 까닭을 해남땅에는 이순신 장군의 우수영과 그들이 참패한 명량
(울돌목)이 있기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통영 역시 한산도 참패를 비롯하여 형언할 수 없는 수모를
당한 지역인데 터널을 뚫어 길을 내다니?
더러는 일본인의 자존심이 해저터널을 만들게 했다고 보는 것 같다.
지금은 큰 배도 통과하는 넓은 운하지만 임진왜란 당시엔 간조 때는
개펄이 드러나는 곳(판데목)으로 많은 왜수군이 죽었단다.
일제는 이 위의 다리로 왕래하는 조선인들을 못마땅해 했다나.
그래서, 자기네 수군들의 원혼 위로 조선인들이 다닌다 해서 다리를
철거하고 밑으로 터널을 뚫은 것이라고.
그러나, 설득력 없는 추측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스스로 발기인이 되어 이순신 장군을 비롯해 임진왜란때
사망한 조선과 일본수군 전사자들의 영령제(英靈祭)를 집행한 이가
바로 해저터널을 주창한 통영군수 야마구찌 아끼라(山口精)니까.
"용궁(해저)으로 들어가서 산양(山陽: 미륵도의 행정구역)에 이르는
문"이라는 뜻의 터널 입구에 붙은 현판 '龍門達陽(용문달양)'도 그가
썼단다.
군사적 목적이 이유라고도 한다.
그렇다 해도 보다 용이하고 견고한 교량 대신 난도 높은 해저터널을
판 것은 아무래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기만 하다.
통영해저터널
이해되지 않는 문화유산
'통영해저터널'은 우리나라에 건설된 해저터널의 효시일 뿐 아니라
동양 최초의 해저터널이란다.
지금은 터널의 노후화와 누수로 인한 위험성 때문에 차량의 통행을
전면 금지하고 신설 충무교가 터널을 대신하고 있지만.
터널은 보수하여 관광 보행용도로 이용하고 있다.
일제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관광자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해저터널이 대한민국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제201호)
으로 지정되어 있다.
비록, 우리의 노동력을 강제 동원했지만 일제가 자기네 기술력으로
자기네의 목적을 위해 만든 시설이 우리의 문화유산이라고?
'문화유산'이란 "다음 세대에 물려줄 민족 및 인류 사회의 모든 문화,
유형 무형의 각종 문화재나 문화양식 따위"라고 사전은 정의한다.
정의에 부합 여부는 차치하고 이 터널이 과연 우리의 문하유산으로
지정될 만한 가치가 있는가.
당시에는 놀라운 기술력이었을 테지만 지금은 길이 483m, 넓이 5m,
높이 3.5m의 해저터널 정도라면 특별한 기술에 들지도 못하리 만큼
우리의 기술력은 약진을 거듭했다.
더구나, 광복한지 환갑이 훨씬 넘은 시점에서도 각 분야에서 일제의
잔재를 털어내겠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되레 문화유산이라니?
일제가 1926년에 조선총독부 청사로 지은 중앙청 건물이 70년 만인
1996년에 철거되었다.
"식민통치의 본거지로 오욕의 상징이므로 철거해야 한다" 는가 하면
"동양에서 건립된 근대서양식 건물중에서 르네상스양식의 대표적인
걸작이므로 보존가치가 있다" 는 등 양측 주장이 팽팽했던 건물인데
결국 철거쪽이 이겼다.
통영해저터널도 중앙청 건물의 철거 이유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잘
못된 지정이라는 답이 나오지 않을까.
의왕시는 '儀旺'을 일제의 소행으로 규정하고 '義王'으로 바꿨다.
(사실은 의왕의 전신인 광주군 의곡면과 왕륜면은 일제의 강점 오래
전에 이미 儀谷, 旺倫으로 쓴 기록들이 있는데도)
서울의 '삼각산' 원명 찾기 운동도 북한산을 일제의 개명으로 규정한
데서 출발했다.
한남금북정맥 '구녀성'의 설화가 전통적 모정을 부정하고 있는 것도
일제의 조작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유사한 예가 전국적으로 비일비재한데 이는 반일감정의 악용이지만
'통영해저터널'이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에 대한 이의 제기는 반일
감정의 차원이 아님을 분명히 해둔다.
한산도전양(前洋)해전
미륵산(산양읍 관광)의 유혹을 뿌리치고 여객선터미널로 갔다.
인기있는 섬들의 추파를 물리치고 한산도행 배를 탔다.
역시 충무공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으니까.
'70년대 초반에 들른 한산도는 비진도해수욕장의 검은 자갈 추억에
밀렸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2009년 3월의 한산도는 모든 유혹을 물리칠 만큼 우선했다.
열광적 충무공 신도(박정희 대통령) 덕일 수 있다.
지금의 모습은 1976년에 국가예산을 투입하여 대대적으로 복원 및
정화사업을 벌여 갖추게 되었다니까.
한산도 대첩문(1) 제승당(2) 충무사(3) 수루(4)
수루에서 바라본 한산도 앞바다(5)
閑山門(한산), 大捷門(대첩)을 거쳐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을 이룰
때 수군 본영이었던 制勝堂(제승당), 충무공의 영정을 모신 忠武祠
(충무사:影堂), 활 쏘던 閑山亭(한산정) 등을 돌아본 후 적의 동정을
염탐하던 망루(戍樓)에 올라서서 장군의 시조를 읊어보았다.
閑山셤 달 발근 밤의 戍樓에 혼자 안자
큰 칼 녀픠 차고 기픈 시람 하난 적의
아듸셔 一聲胡茄난 남의 애를 긋나니 (珍本靑丘永言111)
(閑山島 明月夜 上戍樓
撫大刀 深愁時
何處一聲 羌笛更添愁)(閑山島夜歎이라는 제하의 漢譯)
한여름이지만 밤의 바닷바람은 서늘했을 것이다.
한산도해전이 7월 8일(任辰年:.陽曆1592년 8월 14일)에 있었으니까
전야라면 칠석(七夕)의 밤이므로 반달 정도였을까.
그래도 검은 밤바다에 비취인 달빛이라 아마 밝게 느껴졌을 듯.
'달 밝은 밤'이라 했으니까 아주 깊은 밤은 아니었을 것이다.
큰 전투를 목전에 둔 밤은 일대 광풍 전야에 다름 아니었을 터.
애오라지, 우국충정 일념뿐이라 해도 긴장감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
하고 수루에 올라선 장군이지만 요귀들이 준동할 듯 괴괴한 적막에
감싸이는 것이 싫었으리라.
그래서, 일성호가는 아마 저 요귀들의 준동으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비록, 승리를 위한 작전을 구상중이었다 해도 깊은 수심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장군의 인간적인 면모가 보이는 듯 했다.
견내량(巨濟郡沙等面德湖里見乃梁)의 지형적 한계를 간파한 장군은
양퇴기동(佯退機動)으로 견내량의 적을 한산도 앞바다로 끌어낸다.
그리고는 학날개진(鶴翼陣)을 펴 적함선 66척을 격파하고 불태우며
적86명을 참수한다.(이순신 장군의 확인분만:李炯錫의任辰戰亂史)
이 전투가 바로 "閑山島(前洋:앞바다)海戰"이며 한산대첩이다.
(더러는 '견내량해전'이라 하며 이순신 장군의 壯啓에도 견내량으로
되어 있으나 적을 격멸한 해전이 한산도앞바다에서 전개되었으므로
"한산도전양해전"이라 해야 한다고 임진전란사는 말한다)
"我軍艦隊는 예정대로 閑山島 앞바다까지 물러나온 뒤에 미리 약속한
신호에 따라 모든 배가 一時에 북을 울리면서 돌아서고 호각을 불면서
鶴翼陣을 폈으며... 敵艦隊를 향하여 일제히 진격하여 모든 地字銃筒,
玄字銃筒,勝字銃筒을 동시에 쏘게 하니 그 소리는 한산도 초목이 떨고
앞바다의 魚龍이 놀랠만 하였다".(임진전란사 한산도해전편에서)
<계속>
첫댓글 느지막하게 아니 너무 늦게 글을 올립니다. 2주일 정도 바쁜 일에 매달리다 보니 글을 한 번 슬쩍 읽긴 했는데 이제사... 이곳 출신인 저보다 더 많이 상세하게 올리시니 제가 할말이... 세병관 뒤에 제가 다닌 국민학교가 있었는데 이제는 통제영지 복원공사로 흘렸지요. 45년 전입니다만 3학년 때 교실 공사를 한다고 세병관에서 1개월 정도 공부했던 기억이 납니다. 중학교 시절 해저터널을 걸어서 등하교 했고, 지금도 고향에 가면 미륵산 정상까지 꼭 갔다오곤 합니다. 출타 준비는 잘 하시고 계시겠죠? 조만간 연락드리고 찾아 뵙겠습니다.
달랑 1장 남은 달력이 추워보입니다.
2년만에 뵙게 되겠다 싶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