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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5월 9일 동대문야구장에서 벌어진 대통령배대회 결승전에서 신일고를 상대로 역투하는 곽재성 |
비운(悲運)의 사전적 의미는 ‘순조롭지 못하거나 슬픈 운명’이다. 은퇴를 눈앞에 뒀거나 부상으로 선수생명에 위기를 맞은 왕년의 스타에게 흔히 ‘비운의 선수’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여기 전· 현직 3명의 투수가 있다. 이들은 지금까지 고교시절 혹사 때문에 프로에서 꽃을 피우지 못한 ‘비운의 투수’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비운의 투수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혹사’는 진실이 아닌 진실을 가리기 위한 보호색에 불과하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고 고교시절을 제외하고 한 번도 정상을 밟지 못했다는 게 두 번째 이유다.
<스포츠 춘추>에서는 1편 곽재성 전 롯데 투수, 2편 김건덕 전 부경고(구 경남상고) 투수, 3편 이정호 현 우리 히어로즈 투수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야구인생이 과연 ‘비운’이었는가 살펴볼 예정이다. 무엇보다 이들이 어떤 투수였는가 기억을 공유하자는 게 글의 의도다.
오랜만이다. 친구야. 잘 지냈나? 내야 매일 똑같지. 가게 운영하고 뭐 있겠노. 그런데 우짠 일이고? 뭐? 낼 기억하는 야구팬들이 있다꼬? 농담하지 마라. 경남상고 교명도 부경고로 바뀐 지 좀 됐재. 경남상고 곽재성 기억하는 사람 동문 빼곤 거의 없다. 농담 아니라꼬? 어허, 이거 그럼 억수로 영광인대(웃음).
니 요즘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서 억수로 잘 던지는 거 알재? 작년 시즌 끝나고 찬호가 귀국했을 때 우리 가게 들렸잖아. 내가 폼을 조금 봐줬는데 그기 도움이 많이 됐는갑대(웃음). 내같은 무명 은퇴선수 인터뷰 하면 뭐하겠노. 그냥 지금까지 살면서 마음속에 담아뒀던 이야기나 편하게 하지 뭐. 친구야. 사투리는 니가 알아서 좀 바꿔도. 사투리 안 쓰려고 억지로 노력하면 생각도 부자연스럽게 변한데이. 이해하재?
1+2=1
원래 태어난 곳은 서울이야. 우리 둘다 1973년 소띠아이가. 아버지가 컨테이너 사업을 시작하는 통에 5공 때 부산으로 내려왔지. 어렸을 때 꽤 잘 살았던 기억이 나. 수영장 딸린 집에 살았으면 말 다한 거지. 야구는 언제부터 했냐고?
내가 국민(초등)학교 때 살던 아파트에 말이야. 빨간색 무슨 유니폼 입고 다니는 애들이 있었어. 그렇지. 초등학교 야구부 애들이었어. 하루는 친구들이랑 테니스공으로 야구를 하고 있는데 그 애들이 자기들이랑 한 게임하자는 거야. “우린 야구선수랑은 안 해”하고 외면했지.
그런데 계속 한번 해보자는 거야. 하도 귀찮게 조르니까 나중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한판 붙었지. 어떻게 됐을 것 같아? 내가 걔네들을 죄다 삼진으로 잡았다니까. 전혀 내 공을 못 치더라고. 그런데 누가 아파트에서 그걸 봤던 모양이야.
그 아저씨가 지관구 배정국민학교 야구부 감독이셨어. 그분이 우리 부모님을 설득해서 내가 야구를 하게 만드셨어(웃음). 그때야 다 고만고만하니까 두각을 나타내고 말고가 없었어. 대천중학교에 진학하고 조금씩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지. 대천중 선배가 누구였는지 알아? 3학년 강상수(LG 스카우트), 2학년 문동환(한화)이었어. 당시 (강)상수형이 우리들 사이에선 ‘야구의 신’으로 통했다. 왜냐고? 지금 상수형 키가 그때 키랑 똑같았거든(웃음). 중학생들이 보기에 그 큰 덩치로 공을 던지니 얼마나 빨라 보였겠어.
상수형이 선발로 나가면 (문)동환형이 마무리로 뛰고 점수 차가 꽤 벌어지면 내가 던지는 식으로 투수진이 가동됐지. 아, 동기생으로는 차명주가 있었어. 그때 전국에서 대천중이 꽤 잘하는 팀으로 소문이 났을 거야. 뭐? 그런데 왜 부산고나 경남고로 진학하지 않고 경남상고(현 부경고)에 입학했냐고? (한손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리다)아픔이 있다.
뭐, 다 지난 일이니까 이제는 말해도 상관없겠지. 그때 두 학교에서 내보고 ‘오라’ 했다고. 그런데 내가 두 학교 가운데 한곳에 가게 되면 동기생들이 갈 곳이 없는 거야. 너도 알잖아. 보통 운동부 있는 학교는 운동 잘하는 선수가 입학하는 조건으로 동기생 2명을 더 뽑아주잖아. 그래봤자 어차피 1+2=1이지.
(손을 저으며)아니야. 누가 시켜서 그런 건 아니고 내가 대천중 감독님한테 “친구들이랑 같이 가겠다”고 했어.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고. 실은 중학교 때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난거야. 이거 숙소가 필요한데 부산고, 경남고는 옷 갈아입을 만한 라커는 있어도 먹고 잘 수 있는 기숙사가 없었거든. 반면 부산상고, 경남상고는 기숙사 시설이 완비돼 있었어. 고민 끝에 경남상고행을 선택했지.
1991년 기적의 2관왕, 그러나 무관의 에이스
(경남상고)입학하고 나서 솔직히 실망했지. 야구 잘한다 싶은 선배들도 별로 없고 경기만 하면 지는 거야. 난 체격이 좋아서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뛰었어. 임종수, 안명성, 우승진 등 동기들 실력도 참 좋았어. 1학년생끼리 2, 3학년 선배들이 졸업하면 우리가 고교대회 전관왕 되는 건 일도 아니라고 했다니까. 정말 훈련을 지독하게 많이 했거든. 아,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마른 침이 나올 것 같다.
1991년 창단 43년만에 모교에 전국대회 우승기를 안긴 곽재성 |
그때 경남상고 사령탑이 안병환(LA 다저스 한국 담당)감독님이었다고. 그분의 야구에 대한 열정은 말도 마라, 진짜 대단했다. 29살에 감독이 되셨으니 얼마나 혈기왕성하고 욕심이 많았겠어. 거기다 얼마나 독했는지 몰라.
우리들이 야구를 알 때까지 그리고 실력이 늘 때까지 거의 쉬지 않고 훈련을 시켰는데 난 겨울에 하루 1천500개씩 공을 던질 때도 있었어. 엄청나다고? 거의 미친 짓이었지. 그런데 고3이 되니까 이게 묘한 거야. 거짓말처럼 내가 던지고 싶은 곳에 공을 던질 수 있게 됐다니까. 그렇지. 제구가 잡힌 거야.
그런데 안 감독님도 어느 감독한테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그게 누군지 아나? 우째 알았노. 맞다. 김성근(SK)감독님이야. 김 감독님이 태평양 돌핀스에 계실 때 2년 동안 동계훈련을 부산에서 했거든. 그때 안 감독님이 김 감독님한테 많이 배웠던 모양이야. 안 감독님이 김성근식 야구를 우리에게 똑같이 적용하려고 노력했지.
나중에 나를 비롯해 몇몇 선수들이 “안 감독의 혹사 때문에 야구인생을 망친 대표적인 선수”로 지목됐지만 안 감독님한테 야구를 배울 때만은 아버지처럼 믿고 따랐어. 야구감독으로서도 나를 잘 가르쳐주신 것 같고.
내가 악바리였냐고? 당연하지. 당시 경남상고가 툭하면 100일 합숙훈련을 했거든. 하루 종일 운동장에 뒹굴다 잠자리에 누우면 ‘픽’하고 쓰러지게 마련이야. 그런데 난 애들 다 잘 때 슬며시 일어서 새벽까지 스윙연습을 했어. 무슨 투수가 스윙연습이냐고? 친구야. 그때 내가 팀의 4번 타자 아니었냐. 청소년 대표팀에서도 4번을 쳤잖아. 그때는 건방진 생각일지 모르지만 ‘투수는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을 했어. 대신 타격은 힘은 좋은데 정확성이 부족해서 연습이 필요했거든.
가끔 안 감독님이 술 한 잔 하시고 기숙사에 오셨다가 새벽까지 스윙연습을 하는 날 보곤 했어. 그럴 때면 ‘천하의 악바리’ 안 감독님이 “너무 훈련을 많이 해도 좋지 않다”고 말렸다니까. 왜 그렇게까지 했겠냐. 당연하지. 내가 성공하고 그래서 고생하는 우리 부모 살릴 수 있는 방법은 훌륭한 야구선수가 되는 길밖에는 없다고 믿은 거지.
역시 노력은 배신하는 법이 없더라. 1991년 대통령배대회 우승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막 뛴다. 누가 뭐래도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어. 무명의 경남상고가 강호 신일고를 꺾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냐고. 그때 신일고 멤버 기억나? 조성민(MBC ESPN 해설가), 강혁(SK), 백재호(한화 코치), 설종진(우리 히어로즈 1군 매니저) 등 고교 최강 멤버들이었지.
1991년 <주간야구>에 실린 경남상고와 신일고 기사. 대통령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곽재성과 봉황기에서 우승한 신일고 조성민이 기뻐하는 장면. |
신일고랑 결승에서 딱 맞붙었는데(목이 탄 듯 물을 마시고 나서). 이상하게 긴장이 안 되는 거야. 어찌나 자신감이 붙는지 ‘이거 오늘 쉽게 가겠는데’하는 생각이 들더라니까. 아니나 다를까 결승에서 내가 4안타 무실점으로 신일고 타선을 완전히 틀어막았잖아. (안)명성이랑 (조)준혁이가 홈런 쳐서 우리가 신일고에 5-0 압승을 거뒀지. 우승하고 나서 학교가 난리가 났지. 그도 그럴 게 경남상고 창단 이래 첫 전국대회 우승이었거든. 스포츠신문 1면 톱에 실리고 아주 정신없었어. 나도 혼자 3승을 거둔 덕분에 대회 최우수투수상을 받았지.
이때만 해도 주변에서 우리보고 그랬어. “대통령배대회 우승은 그저 우연일 뿐”이라고. 우리도 사실 긴가민가했지. 그런데 1달 있다가 열린 청룡기대회에서 우리 실력이 ‘우연’이 아니란 걸 알게 됐지 뭐야. 청룡기대회 결승 상대가 어디였냐고? 이번에도 강팀이었어. 호남 명문 광주일고였어. 내가 준결승전까지 많이 던져서 그날은 일단 선발로 차명주가 나갔어. 여차하면 내가 마운드에 올라간다는 게 팀의 작전이었지.
그런데 광주일고 애들이 (차)명주 느린공에 계속 말리더라고. 당시 광주일고 방망이가 장난이 아니었거든. 박재홍(SK)이 투· 타에서 엄청났잖아. 김종국(KIA)은 대통령배대회에서 충암고 상대로 3연타석 홈런을 때렸을 만큼 슬러거였고. 아마도 광주일고가 (차)명주에 대해 연구가 거의 안했던 모양이야. 거의 매일 내가 마운드에 올랐으니까 상대적으로 명주는 신경을 덜 썼겠지. 그 덕분에 우리가 2-1로 광주일고를 따돌리고 청룡기대회 첫 우승을 차지했어.
청룡기대회에선 최우수선수에 뽑혔느냐고? 아니. 다른 친구가 뽑혔어. 그때 결승 빼고 내가 다 던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거든. 아니 지역예선 때부터 내 혼자 거의 다 던졌다고 봐도 무방하지. 은근히 화도 나고 서운하기도 하대. 한창 시상식 하는데 그냥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니까. 지금 생각하면 치기어린 행동이었지.
사실 최우수선수로 뽑힌 친구한테는 아무 감정이 없었어. 되레 잘됐다고 생각했지. 걔네 어머니가 기숙사에 오셔서 빨래며 식사준비를 도맡아 하셨어. 정작 열 받았던 이유는 따로 있었지. 아마추어 야구에서 실력 외적인 이유로 후한 대접을 받는 경우가 간혹 있잖아. 혹시 기억나? (쓴웃음을 지으며)왜 ‘세꼬시 존’이라고 있었잖아. 그것 때문에 열 받아 있었지. 어차피 이젠 다 지난 일이지만 그땐 그랬다.
(주 : 당시 고교야구에서는 횟집을 운영하는 모 선수 아버지가 심판들에게 ‘세꼬시(광어새끼, 도다리 새끼 등을 뼈째 썰어 먹는 회)’ 접대를 잘해 모 선수가 스트라이크 존에서 굉장한 이득을 얻었다는 루머가 돌았다. 이를 빗대 일부 야구인들이 모 선수의 스트라이크 존을 가리켜 ‘세꼬시 존’이라고 불렀다.)
그때 시속 150km의 강속구를 던졌다고? 누가 내가? 에이 그 정도는 아니었지. 직구 최고 구속이 145km, 보통은 130km대 후반이었어. 돌아보면 내가 고교야구에서 그래도 이름을 날렸던 건 직구 때문이 아니었어. 농담이 아니라 전국대회 예선전 때 노 히트 노런 할 기회가 억수 많았거든. 그게 다 변화구 덕분이었다. 내가 고교생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반포크볼, 왜 있잖아. ‘SF볼’이라고 그걸 던졌거든.
경남상고 감독 시절의 안병환. 스파르타식 훈육으로 유명했으나 역설적이게도 훗날 미 메이저리그 LA 다저스 한국 담당 스카우트가 됐다. '고교야구계의 김성근'이었다는 게 중평이다. |
가르쳐주긴 누가 가르쳐줘. 순전히 독학했지. 당시 <주간야구>라는 책에서 간혹 변화구 그립 잡는 법이 사진으로 소개되곤 했거든. 우연한 기회에 ‘포크볼’편이 나왔기에 한번 쓱 보고 나중에 장남삼아 던져봤지. 그런데 이게 웬걸. 난 그냥 직구처럼 던지는데 공이 ‘쭉’ 오다가 ‘획’하고 떨어지는 거야. 언제 고교생들이 그런 공을 보기라도 했겠냐고. 당연히 던지기만 하면 타자들 배트가 허공을 가르는 거야. 2학년 때 본격적으로 ‘SF볼’을 마스터하고 3학년 때 잘 써먹었지.
프로와 대학 사이
고 3때 대학이랑 프로 사이에서 좀 갈등을 했어. 그때 야구부 있는 전국대학에서 다 내보고 오라 했거든. 나도 대학을 다니고 싶었고. 그런데 집안사정을 고려하면 프로 입단이 정답이었어. 롯데가 날 고졸우선지명을 했던 터라 부산에서 계속 야구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었지.
1992년 고졸우선지명으로 롯데에 입단한 당시의 곽재성. |
결국 1992년 계약금 5천만 원, 연봉 1천200만 원에 롯데에 입단했지. 외부에서는 계약금 3천만 원으로 알고 있을 거야. 솔직히 말하면 계약금에 관련해서는 나도 얼마나 받았는지 잘 몰라. 그것도 사연이 있다.
왜 경남고 투수 가운데 내보다 한 학년 아래인 서정민이라고 있었다고. 근마하고 롯데랑 한창 몸값 때문에 갈등이 있었거든. 그런데 롯데가 서정민한테 “우리는 5천만 원 이상 네게 배팅하지 않겠다”고 공표를 한 거야. 그러면서 한 말이 “네가 (곽)재성이보다 야구 잘 했어?”라는 거였대. 그러니까 서정민이 계약금을 낮추려고 나한테 지급한 계약금을 일부러 낮춰 발표한 거지.
그렇지. 입단 동기 염종석(계약금1천500만 원, 연봉 1천300만 원)보다는 많이 받았지. 그런데 입단할 때는 (염)종석이보다는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았어도 그해 스프링캠프부터 분위기가 반대로 흘러가더라.
그게 무슨 말이냐고? 말하면 길다. 어쨌든 입단을 딱 하고 나서 프로에 적응하려고 억수 노력을 많이 했어. 아, 참 친구야. 여기서 꼭 한 가지 바로 잡을 게 있다. 가끔 내보고 그러는 사람들이 있더라. “당신, 고교 때 혹사만 없었으면 프로에서 대단했을 거”라고. “어깨부상만 아니었으면 롯데 투수진의 중심이 됐을 거”라고.
그런데 솔직히 털어놓으면 내가 프로에서 성공 못한 건 혹사와는 별 관계가 없다. 어깨부상과도 연관이 없고. 그거 아나? (목소리에 힘을 주며)내가 한 번도 수술대에 오른 적이 없다는 거 그리고 단 한 번도 어디가 아파서 공 못 던진 적이 없다는 거. 롯데에 입단했을 때 내 어깨가 얼마나 싱싱했는지 아나. 막 잡은 생선처럼 펄떡펄떡 생기가 얼마나 넘쳤는지 아느냐고. 그걸 너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더라.
(길게 숨을 내쉬며)원래 자기 몸은 자기가 가장 잘 안다고 하잖아. 난 중학교 때부터 어딜 다치면 회복속도가 남보다 훨씬 빨랐어. 스프링캠프에서 어깨가 조금 좋지 않았지만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거든. 그런데 이상하게 첫해부터 코칭스태프가 기회를 안주더라고.
그럴 때면 2군에서 더 몸을 만들었지. 웨이트트레이닝 정말 열심히 했다. 공도 고교 때보다 더 빨라졌어. 직구 던지면 스피드건에 시속 145km는 우습게 찍혔다니까. 그런데도 1군에 아무리 투수가 펑크 나도 날 올리지 않는 거야.
나중에 듣기로는 ‘모 선수 키우기’를 위해 코칭스태프에서 의식적으로 나를 배제했다는 거야. 뭐 나로서는 그게 사실이냐고 물을 형편도 아니었고 또 그게 사실이라고 해서 어떻게 할 수도 있는 입장도 아니었지. 거기다 내가 코칭스태프한테 ‘찍혔다’는 이야기도 들리더라고. 뭐, 경남상고가 부산 야구판에서 힘이 센 것도 아니었지.
그즈음 그룹 윗분들이 “비싼 돈 주고 데려온 곽재성은 왜 안 쓰느냐”고 물었나봐. 그럴 때면 코칭스태프에서 “그렇잖아도 내일 등판할 예정”이라고 했다는데. (묘한 미소를 짓다가)그런데 꼭 내가 등판하려고 하면 비가 오는 거야. 알고 보니까 비오는 날만 골라서 나를 이날에 등판시키겠다고 윗분들한테 말한 모양이더라고. 긴 말 필요 없이 날 기용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때 감독? 강병철 감독님이었지. 감독님이야 깊은 뜻이 있으셨겠지만 당사자인 나는 피를 토하는 심정일 수밖에. 지금이라도 묻고 싶다니까. 그때 당신께서 보시기에 그렇게까지 내가 형편없는 투수였는지 말이야. 1993년까지 1군 등판 경기가 달랑 2경기 밖에 없었다. 사지육신 멀쩡한 젊은 놈이 ‘세월아, 네월아’하면서 산거지. 솔직히 나도 그때 더 이를 악물고 뛰었다면 어땠을지 몰라. 그러지 못한 내 책임도 크다고 봐.
1992년 롯데 합동사진. 맨 윗줄 왼쪽부터 염종석, 곽재성, 최민호, 이요섭, 이상번, 박동희 |
그러다 기회가 왔지. 맞아. 강 감독님이 물러나시고 김용희 코치님이 감독으로 승격되신 거야. 1994년 스프링캠프지로 출발하면서 김 감독님이 그러시더라고. “누가 뭐래도 네가 우리팀 선발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올시즌 끝까지 선발투수로 끌고 갈 테니까 열심히 훈련해라.”
그 말 들으니까 얼마나 용기가 나던지. 엄청나게 훈련을 많이 해도 힘이 드는 게 아니라 반대로 더 훈련하고 싶어지는 거 있지. ‘아, 이렇게 3년 만에 선발투수진에 합류하는 구나’싶은데 참 감회가 남다르더라고.
그런데. (잠시 말문을 닫았다가) 일이 안되려니까 이상한데서 꼬이더라. (싸움이라도 했느냐고 묻자 고개를 숙이며)나는 말렸지. 하지만 프로야구 선수라는 게 마이너스로 작용하더라. 대중이 좋아하는 직업이 혼자 죄를 뒤집어쓰기엔 딱 좋더라고. 그날 오랜만에 친구들 만나서 술을 마셨는데 옆 테이블 사람들이랑 시비가 붙은 거야. 그냥 조용히 끝날 수 있었는데 일이 커졌지. 막상 싸움이 붙었을 때 친구들은 다 도망가고 나만 남았지 뭐야. 나 혼자 대여섯 명을 상대할 수는 없잖아. 나도 죽기 살기로 덤볐지. 그러다 보니 일이 더 커졌어.
경찰서에 가니까 거기서 그러더라고. “감방과 군대 가운데 선택하라”고 말이야. 뭘 선택하겠어. 당연히 후자지. 참 사는 게 허무하더라. 선발투수 진입을 눈앞에 두고 그렇게 허무하게 군대에 갈 수 있느냔 말이야.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개막전 선발투수감이라는 소리까지 있었는데.
롯데에서 그해 11월 나를 임의탈퇴선수로 발표했어. 그런데 말이야. 1996년 의가사 제대를 한 거야. 생각보다 빨리 사회로 나온 거지. 롯데에서 임의탈퇴선수로 묶었으니 야구를 하고 싶어도 어디 다른 팀에 갈 수가 있어야지. 그때 도와준 분이 초등학교 은사님이던 지관구 감독이셨어. 마침 롯데 프런트에 경남상고 출신의 최순하 부장님이 계셨고 이상구 롯데 단장님도 사심 없는 분이라 흔쾌히 자유계약선수로 풀어주셨지. 그게 아마 1996년 2월 28일이었을 거야.
그런데 일이 또 꼬이려니까 자유계약선수로 풀어준 날짜가 문제였어. 무슨 말이냐고? 2월 20일까지가 선수등록일이었거든. 당시 야구규약대로라면 난 선수등록이 늦어 그해 놀 수밖에 없었어.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뭘 어떻게 해. 놀았지(웃음). 그게 아니고 조금씩 야구에 회의가 생기더라니까. 그렇잖아. 뭐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있어야지. 그러다 LG에서 ‘콜’이 왔어. 공교롭게도 최주억 스카우트 팀장님과 장동철 LG 기록원님 두 분이 경남상고 선배였거든. 내 실력이 아까우셨는지 신고 선수로 입단하라고 하시더라고. 알았다고 했지. 최 팀장님이 당시 이광환 LG 감독님한테 “괜찮은 친구를 영입했다”고 말씀드린 모양이야. LG에서도 조금 기대하는 눈치더라고. ‘내 야구인생이 이제 LG에서 시작되는 구나’생각하니까 만감이 교차하대. 여기서 꼭 부활해 롯데에서 못 다한 선발투수의 꿈을 이뤄야겠다고 다짐했지. 그런데.
무슨 또 그런데냐고? 그러게 말이야. 이거 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LG에서 새롭게 시작하려고 하는데 아니 글쎄. 이광환 감독이 물러나고 천보성 코치가 감독으로 승격하는 거야. 덩달아 내 입지도 상당히 좁아졌지. 그래서?
그래서는 뭐 그냥 그길로 야구 때려 치웠지. 그때부터 장사를 시작했어. 대구시 수성못 근처에서 포장마차를 했지. 그때 나이가 보자(손가락을 접으며) 24살이었네. 어렸어도 사업수완이 좋았는지 꽤 (돈을)벌었던 기억이 난다.
투수에서 타자로
1997년이었을 거야. 우연한 기회에 대구 원정경기를 오신 김성근 감독님을 만났어. 대뜸 “너, 왜 야구 그만뒀어?”하시지 뭐야. 뜨끔했지. 공교롭게도 안병환 감독님도 그즈음 다시 연락이 됐어. “너, 미국에서 야구 계속 해볼 생각 없느냐”고 물으시더라고.
2008년 6월 이제는 건실한 요식업 사업가가 된 곽재성이 자신이 운영하는 서울 ㅊ 음식점에서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
그때부터 다시 야구가 생각나기 시작하더라니까. 그렇게 꼴도 보기 싫은 야구가 막 하고 싶어지는데 이거 미치겠대. 한국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실패했지만 미국에선 열심히만 하면 성공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야. 그런데 이거 한번 붙은 살을 빼는 게 장난이 아니더라고. 현역시절 85kg이었던 체중이 110kg까지 불은 거야.
그래도 도전해보기로 했지. 안 감독님이 마침 제주전문대에 계셔서 코치로 갔어. 애들 가르치면서 몸을 만들자는 계산이었지.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해도 직구가 시속 130km를 넘지 못하는 거야. 그즈음에는 안 감독님도 미국 가자는 소리가 없으시고.
그래도 보람이 없지 않았다. 제주전문대 때 내 제자가 누구였는지 알아? 신철인(우리 히어로즈)이야. (신)철인이는 내가 처음부터 된다고 했어. 정말 열심히 가르쳤지. 특히나 철인이가 상체로만 던지는 버릇이 있어 하체이동을 중점적으로 가르쳤어. 그게 통했는지 현대 입단하고 잘 하대.
제주전문대에서 애들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데 마침 쌍방울이 봄 훈련을 제주도에서 했어. 그때 김성근 감독님이 쌍방울 사령탑을 맡고 계셨어. 어느 날 갑자기 김 감독님이 “같이 야구를 해보자”고 하시는 거야. 두말할 필요 없이 “고맙습니다.”그랬지. 누가 말은 하지 않아도 ‘마지막 기회’라는 걸 뻔히 알겠더라고. 정말 엄청나게 훈련해서 살을 30kg이나 뺐다. 대신 투수는 아니고 타자를 하기로 했어. 당시 쌍방울이 투수는 많은데 타자가 별로 없었거든.
2군에서 몸을 만들었는데 페이스가 좋은 거야. 그런데 1군으로 올리려고 하면 베이스러닝을 하다가 발목을 다치고 뭐 좀 하려고 하면 또 어딜 다치고. 안 되겠더라고. 결국 그해 1군에 한 번도 못 올라가고 구단에서 나왔어.
그길로 야구 완전히 접었냐고? 설마. 욕심이 있지. 다음해 야구도 공부할 겸해서 여차여차해서 미국에 갔어. 그래. 솔직히 다시 야구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지. 하지만 어디 그게 쉽냐. 멕시칸리그에도 갈려고 다 알아봤는데 시간과 돈만 낭비한 꼴이 됐지.
2000년이 시작되면서 야구와 완전히 담을 쌓았어. 본격적으로 장사를 했지. 라이브 카페도 하고 대형식당도 하고. 지금은 보다시피 양대창 가게를 하고 있어.
운동선수 출신 사업가들이 왜 그런 말 많이 하잖아. “과거 무슨 축구, 야구했던 게 사업할 때 도움이 많이 된다”고 말이야. 그런데 나는 사실 별로 도움 받은 게 없는 것 같아. 오히려 방해만 됐지. 지금도 야구 때문에 내 인생은 큰 방해를 받고 있어. 무슨 말이냐고?
(멋쩍게 웃으며)지금도 야구만 보면 가슴이 벌렁벌렁 뛴다. 사업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달려가고 싶다니까. 기회가 되면 유소년 야구선수들에게 도움도 주고 싶고 야구에 대한 글도 쓰고 싶어.
곽재성의 아내는 농구선수 김지윤이다. 그의 첫사랑이기도 하다 |
“비운?” 그래 어찌 보면 나도 비운의 투수일 수 있어. 그런데 친구야. 내가 비운이라면 정상에 한번이라도 올라가봤어야지 하지 않나. 하지만 프로에서 난 정상은 고사하고 산중턱도 올라간 적이 없다.
늘 후회하면서 살았지만 지금껏 살면서 절대 후회 안하는 게 딱 2가지가 있다. 그게 뭔지 아나? 와이프랑 야구 만난 거다. 친구야. 내가 술에 취해서 하는 말이 아이고 내한테 진짜 비운이 뭔지 한 번 물어봐도. ('네게 진짜 비운이 뭐냐'고 묻자 환하게 웃으며)달리 뭐 있겠노. 야구를 안했으면 그게 진짜 비운이지. 야구선수 아니었으면 그게 진짜 비운의 인생 아니었겠나. 내는 그리 생각한다. 니는 우에 생각하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