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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표지 --------------------------------------------------------------------------------------
앞 표지 뒷면 ------------------------------------------------------------------------------------
<2008년 5월 <글나루> 5호>
목차 1. 글나루 인사말- —---------- 앞 표지 2. 고등하교 기자단 <마루>님들께----------1 3. 글나루 탐방 <팔당의 아름다운 농사꾼>--------12 4. 서평1. 문화부족의 사회--------------------15 5. 서평2. 박범신의 소설 <촐라체>-----------20 6. 수필—<춘우유감>---- 음영철 교수—-------25 7. 알림--강변문화제 6월 28일부터 --뒤 표지 인문학의 고향 --- 문화사랑방 인서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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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기자단 <마루>님들께 이 글은 지난 08년 5월 24일 인서점 <문화사랑방>을 방문한 고등학교 기자단 <마루>회원님들께 인서점아저씨가 드리는 글입니다. 모두 열 세분이 방문하였고 인서점은 이를 인서점의 문화사랑방 공식 행사로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날의 모든 설거지는 케이메탈의 종영사장님께서 감당하였지요. <나의 대륙 ‘아바투스’를 발견하라.> 쌀쌀한 날, 넓은 갯가엔 우리들 뿐입니다. 모닥불 놀이에 딱 좋은 그런 날입니다. 우리는 이리저리 뛰어 다니면서 마른 뺑대며 자잘한 조팝나무 가지며 달맞이 꽃대며 댕댕이 줄 같은 탈만 한 것들을 마구 꺾고 걷어다가 송아지 한 마리쯤 들어가 누울만한 우멍한 자리에 쌓기 시작했습니다. 손 매운 영국이는 한 아름이나 되는 갈다리 넝쿨을 안아다가 맨 밑에 깔아 불쏘시개를 만듭니다. 뚱뚱한 치종이 하고 장섭이는 끙끙대면서 어디선가 푹 젖은 나무등걸 하나씩을 둘러메고 와서 쌓인 나무 위에 털썩 내려놓았습니다. 고사리 손들이라곤 하지만 시골 아이들의 맵고 당찬 일 매무새에 금방이라도 황덕불이 타 오를 듯 푸짐한 불 섶이 준비됩니다. 이내 불길이 솟아 오릅니다. 매운 연기가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휘돌았지만 그도 잠시 금방 파란 연기를 안고 휘둘리는 불기운이 후후 불던 기연이의 얼굴을 덮치며 쫓아 냅니다. 이내 황~ 황 소리를 내면서 타 오르는 불길이 옷자락을 뚫고 정갱이를 타고 올라와 가슴패기로 해서 온 몸으로 배어듭니다. 금새 불기를 먹고 나른해진 몸은 흐물흐물 녹아서 바닥으로 처져 내리고 불기에 맡겨진 채 지긋이 감은 눈길만이 살아서 한 없이 한 없이 무언가를 찾아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불길과 함께 맴돌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그랬습니다. 학교에서 일찍 오는 날이나 토요일이나 일요일 또는 방학 같은 때면 으레 개울 뚝방 넘어 들판으로 달려갔습니다. 추우면 모닥불을 놓고 더우면 개울물에 뛰어들어서 텀벙 내며 놀았습니다. 고기를 잡아다가 모닥불에 구워먹기도 하고 산자락에 있는 사태북찌를 뒤져서 물새알을 꺼내다가 대파줄기에 넣고 구어 먹거나 논두렁 밑을 뒤져서 우렁이나 꾸구리를 잡아 버드나무 뀀지에 꿰어서 굽기도 합니다. 뚝방을 따라 펼쳐진 너른 들판에다가는 축구장을 만들기도 하고 짚 공을 만들어 차다가 실증이 나면 야구를 하기도 합니다. 숫자가 적어서 팀을 만들 수야 없지만 우리는 그런 것엔 별 신경을 쓰지 않고 뭐든지 재미있게 해내고 그러다가 그게 실으면 큰 산을 넘어 멍심이라는 아주 외진 마을까지 진출하는 대장정에 나서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톱과 낫과 나무로 깎아 만든 몽둥이로 무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줄을 서서 아주 조심스럽게 등성이와 계곡을 지나갔습니다. 더러 위험스러운 벼랑이라던가 숲이 나타나면 우리는 잠시 쉬면서 그 곳을 무사히 통과하는 방법에 대해 논의를 하고 진퇴에 대해서 아주 심각한 통론을 벌려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어른들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 마을의 뒤에 있는 서산이라는 큰 산에는 늑대라던가 여우 승냥이 살쾡이 같은 짐승도 있지만… 더러는 호랑이 같은 영물까지 살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큰 산을 타는 것은 초등학교 3, 4학년의 어린 아이들에게는 감히 도전해서는 안 되는 위험한 금기의 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구비안이라는 개울가 들판은 축구장을 겸한 야구장으로 변했고 그 옆엔 철봉과 평균대 등 씨름판 같은 체력 단련장이 만들어지고 그 가장자리엔 작은 샘도 하나 만들었습니다. 샘은 어느 옛날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파졌던 전설 같은 옹달샘이었는데 이것을 수리해서 만들었지요. 이런 것들을 여남은 살의 고사리 손으로 만들었다니 참으로 신기할 정도였지요. 그렇지만 우리 어린 꼬마들의 호기심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정복의 대상을 찾으려는 모의와 계획으로 마을 앞 개울가의 뚝방 밑 모닥불은 뜨거웠고 환한 불빛으로 장식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일들은 모두 어른들이 알지 못하도록 아주 비밀스럽게 추진되는 우리의 비밀 작전과 함께 말이지요. 그러나 생각해 보면 어른들이 설마 우리들이 벌리는 이런 거창한 일들을 전혀 몰랐을 리는 없었겠지요.
하여간, 우리 꼬맹이들의 이런 짓궂은 도전은 마치 중독성을 가지고 있는 마약과 같았는지 끝없이 끝 없이 계속되었습니다. 마을 뒷산 또는 큰 산 어딘가에 우리들이 들어가서 살만한 아주 커다란 동굴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산을 샅샅이 뒤지는 대장정에 나서기도 했고, 밤길을 따라 여행을 해야 한다면서 횃불을 준비해 가지고 면 소재지까지 진출했다가 경찰 아저씨한테 호되게 야단을 맞기도 했고, 벼가 다 익은 가을의 벌판 한 가운데 쌓여있는 볏가리 속에 동굴을 파고 들어가 놀기도 했고, 종달새 알을 찾아 키 큰 호밀 밭을 뒤지다가 아예 호밀 밭 속에 놀이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정말 마을의 악동들이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말썽으로 가득찬 마을의 골치 덩어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의 짓궂고 개 궂은 놀이는 점점 더 확대되어 갔고 드디어 마을 어른들의 공식논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아주 뜻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느 해 봄날이었습니다. 우리들의 꿈이 있는 자라는 세상 그 모닥불을 피우던 뚝방 밑 원형의 돌무더기와 그 옆 체력 단련장이며 샘은 물론 축구장까지 앗아 어른들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고 몰수되고 점령되었습니다. 우리들의 그 자랑스럽고 멋 있었던 우리들만의 세상 우리들의 토론장 우리들의 꿈이 활활 타오르던 그 세상은 정말 허무하게도 허공으로 날아갔습니다. 그 공간은 조금씩 밭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더군다나 우리가 축구를 하던 공간의 한 가운데에는 마을의 공회당이 우뚝 세워졌고 또 산자락 옆으로는 하나 둘씩 집이 들어서기 시작하더니 몇 년 가지 않아서 마을로 변했습니다. 단지 샘 하나만이 살아 남아서 그 자리를 지키며 목마른 어른들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세월이 간 다음 우리들의 구비안 벌판은 완전한 마을로 변했습니다. 모두 열 다섯 집이 사는 <구비안>이라는 마을로 태어난 것입니다. 아! 그 때 그 녀석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는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보고 싶습니다. 그리워집니다.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현실은 이상(理想)의 공동묘지다. 기자단 여러분! 그렇다면 왜, 어린 꼬마들은 그 들판에 모닥불을 피워놓았는가. 사실 그 때 우리들은 그냥 그게 좋아서 그렇게 했을 뿐이었습니다. 딱히 무슨 이유가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흘러간 오늘에 이르러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건 분명 그때 우리들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어떤 분명하고 확실한 이유가 있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오늘 제가 이렇게 장황하게 여러분께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 이유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요. 빈틈이라곤 없이 온 집안에 꽉 들어차 있는 엄마의 사랑과 그리고 아빠의 높은 권위는 우리를 위한 사랑이라기보다 오히려 우리들의 숨통을 옥죄는 고통이었고, 아주 오래된 관습과 율법에 의해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온갖 삶의 규율들은 우리의 손발은 물론 생각을 꽁꽁 묶어놓고 맙니다. 여기다가 ‘나쁜 짓을 해서는 안 된다’ ‘착해야 한다’는 도저히 그 기준조차 짐작이 가지 않는 윤리도덕의 높고 깊은 잣대는 너무나 촘촘하고 틈새가 없어서 우리의 정신이 싹이 터서 자라기에는 너무나 척박한 토양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시커먼 벽처럼 우리의 상상력을 가두어 놓는 감옥 같은 것이었습니다. 어린 날 우리가 맞이한 그런 현실은 정신의 공동묘지 같은 것이었습니다. 어린 꼬마들이 탈출을 시도할 수 밖에 없는 사막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우리들은 이런 현실로부터 과감하게 도망쳤고 그리고 아주 그럴듯한 꿈의 세상을 개울 건너 산과 뚝방 사이의 벌판에 창조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어쩜 세상은 온갖 도형을 다 동원해서 사람들을 가두어 놓은 감옥 같은 것인지 모릅니다. 더구나 그 도형으로 제작된 감옥의 건물들은 또한 도형의 아름다움으로 치장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감옥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삶을 진리와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으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겪어내야 하는 신성한 고통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그래서 참으로 위대했던 많은 분들이 이런 현실에 대해 지적하고 이를 벗어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야 아름다운 진정한 인간의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공자라던가 석가나 예수도 바로 그런 분들입니다. 그들은 인내와 자비와 사랑을 얘기했고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도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의 말은 구름처럼 떠돌았을 뿐 세상을 바꾸기에는 허무하기 짝이 없는 아름다운 관념으로 단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만 평가되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였던가. 아마 여러분은 수중동물 ‘리바이어던’을 동원해서 아름다운 세상을 설계했던 근세의 사상가 홉스를 기억할 겁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자연권을 포기하고 하나로 모아서 ‘리바이던’권력을 만들고 그 힘으로 군주를 끌어내려야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탄생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옳았습니다. 그러나 유토피아는 결국 디스토피아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집중된 권력은 시간이 가면서 선을 위장하고 악마로 변하는 것은 모든 역사의 교훈입니다. 홉스의 ‘민주주의’는 우리 역사에서도 군사독재라는 꽃으로 피어났던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군주’를 ‘지도자’로 바꾼 민주주의는 결국 ‘독재’나 ‘파쇼’로 변했고 하는 세계대전을 야기하는 인류의 재앙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이런 아픈 경험을 겪어내고 쌓아가면서 조금씩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역사는 전체를 관리하는 소수와 관리를 받는 다수의 줄다리기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때 둘의 관계가 언제나 팽팽한 긴장을 통해 유지되면서도 대중에 의해 주도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그러나 이런 관계 또한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것은 이런 둘의 줄다리기가 정치라는 장에 멈춰 있는 게 아니라 그 다음의 가치인 ‘경제’라는 장으로 한 단계 올라서서 또한 이런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바로 ‘자본주의’가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지금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가치의 바탕에서 또 다시 줄다리기를 해야 되는데 오늘의 현실에서 그것이 잘 안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의 자본주의는 자본의 권력을 가진 소수가 다수를 무참히 짓밟는 정치에서의 ‘군주’시대를 방불케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경제 민주주의’로 나가게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할 수 있지요. 이에 대해 사회주의가 강력하게 태클을 걸었지만 그러나 이 태클은 반칙을 동원했기 때문에 실패로 끝났습니다. 즉 사회주의는 전체를 내세운 디스토피아였던 것입니다. 사회주의는 민중을 내 세웠지만 그것은 허울뿐이었지요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이제 인류에게는 그 어떤 대안도 없는 듯 합니다. 더구나 이런 중에서 지금 인류는 자본주의에 의해 화려하고도 찬란하게 장식된 문명의 마차를 타고 가는 자랑스럽고 오만한 승객입니다. 그러나 이 화려한 마차는 어쩌면 우리 인류의 꽃 상여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인류의 종말이 저 앞에 아주 빤하게 보인다고 예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벼랑 끝을 향해 급히 달려가고 있는 것이 인류의 미래라는 것입니다. 지금 전국 방방곡곡에서 진행되는 ‘살 처분’의 참상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또 몇 해전의 쓰나미 소식에 이어 이번 중국 대지진의 참혹하고 두려운 광경이며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는 기상이변 등 날이면 날마다 우리를 위협하는 재앙의 소식이 날아 오고 있지만… 그 소식 앞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우리 인간은 ‘대량살상무기’를 제조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으며, 하느님 앞에 나아가 경건하게 기도하면서 또 한편으로 그 하늘을 향해 우주선을 쏘아올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새로운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서서 오던 길과 가야 할 길을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이와 함께 ‘인간’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또 그 인간들의 공동체인 ‘우리’에 대해서 그리고 그 공동체의 구성원인 ‘나’에 대해서 그리고 ‘생명’에 대해서 근본적인 것을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환경과 지구와 우주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앞으로의 역사는 여러분의 시대입니다. 나와 너와 그리고 그들인 ‘우리’에 대해서 좀 더 심각하게 ‘욕망’이 절제돼야 함을 성찰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생명과 함께 이 자연과 지구에서 어울려 사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에는 거의 1킬로그램 이상의 세균과 바이러스가 살아가고 있으며 그들은 우리의 몸을 위해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벌레와 동물 그리고 식물이며 열과 냉 습기와 물 산소와 철분 등 이 우주의 어느것 하나 귀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가족입니다. 우리 인간의 욕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문명을 버리는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의 소박한 삶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들을 인간으로부터 떼어놓고 이용하고자 하는 인간의 오만은 결국 인간의 재앙으로 마감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을 느끼고 알고 실천하고자 하는 우리의 성찰이 인문학의 길입니다. 여러분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인서점은 우리나라 최초의 인문사회과학 서점입니다. 1982년 5월 12일에 문을 열었고 수 많은 청년과 학생과 노동자와 지식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서점은 ‘문화사랑방’ 입니다. 삶의 공간에서 그리고 삶의 일상에서 삶의 설계와 삶의 실천을 통해 아름다운 삶과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반가운 마음에 저의 어린 날을 추억하면서 거기에 여러분의 마음을 덧 얹어 보면서 거의 몇 시간에 걸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글은 지루하고 또 어려운 부분이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방문을 환영하는 저의 마음이라는 점에서 따듯한 마음으로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문화사랑방 인서점> 아저씨 심범섭 올림 * <문화사랑방 인서점>의 까페는 다음 <인서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 회원 여러분의 글을 기다립니다. 시, 수필, 칼럼을 보내주세요. * 도서주문 및 연락처 =02)2201-2250, 011-9971-7771(심재법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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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글나루 탐방>--------------<글나루>가 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이야기를 찾아 전해 드립니다.>
-아름다운 삶을 찾아- 팔당의 인환님과 요왕님의 농장 5월의 푸른 하늘을 보며 팔당으로 향했습니다. “양수대교 위에서 내려다 보면 바로 그 밑”이라는 농사꾼 인환님의 말을 생각하면서, 차를 양수리 장터 근처에 있는 공영주차장에 세워놓고 손주녀석들과 그 아비어미와 함께 온갖 구경을 하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리 밑으로 갔습니다.
두물머리의 유명한 느티나무와 그 밑에 있는 선대시대 칠성별이 새겨져 있는 고인돌(왼쪽 그늘에 있는 석주)
두물머리에 있는 황포돗대 나루
부근에는 왜가리와 황새들이 살고 있지요.
올 유아원에 입학한 벽설이가 아주 예쁜 실잠자리 한마리를 잡아서 손바닥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때 포르르 날아 갔고.... 벽설이의 저 무시무시한 떼도 시작...데고...
마치 시원한 보리밭이 나타납니다. 빛채가 가장 좋아합니다.
정말 시원하네요.
너무너무 아름다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그랜서지 너무너무 부럽고 좀 시샘도 나고... 비닐하우스가 즐비하군요. 앞쪽에 인환님과 요왕님의 농장이 있습니다. 벽설이의 재촉에 인서점아줌마하고 아저씨가 불나케 달려갑니다.
가는 길, 저 유명한 두물머리 그러니까 남한강의 물머리와 북한강의 물머리가 머리를 맞대는 곳
그러자 어느새 다들 좆아 나왔지요. 반가움에 손을 덮석 잡았는데 과연! 농부의 튼튼한 손힘이 가슴으로 뜨겁게 전해왔습니다.
뿌듯한 힘과 함께 그들의 아름다운 삶이 주는 진실과 아름다움의 힘이 가슴으로 뿌듯하게 전해왔습니다. 반가움은 자연스럽게 술자리로 연결, 하우스 옆에 있는 살림에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저녁을 맞았습니다. 아줌마는 하우스에 들어가서 딸기를 따기 시작 한 소쿠리 두 소쿠리 세 소쿠리 ..... 욕심이 너무 많아도 좀 분수가 있어야지.... 원 하여간, 이것 저것 챙겨주는 걸 다 싣고 왔으니... 양심이 부끄럽지만... 넘넘 행복했지요. 양상추가 무지무지 크게 자라고 있는 하우스, 그 밖에는 또 그런 하우스가 여섯동, 규모가 느껴지더군요. 그 건너편에 요왕님의 하우스, 그 밖에는 황새가 우렁이를 노리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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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말농장 <개미와 베짱이> 소식입니다. 지난해의 패농, 그것은 우리의 게으름의 원인이기도 했지만, 농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입니다.
팔당 생명살림의 인환님과 요왕님 그리고 재욱님의 몇 마디 도움말이 있었던 금면의 농사는 정말 획기적으로 잘 돼가고 있네요. 수고하셨습니다. 광고 *** 현대사회, 그 신자유주의 세상을 살아가자면, 꾸준히 지식을 쌓아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날엔 가 님의 걸음이 늦어진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지식은 현대인의 삶을 지탱하는 바탕입니다. 우리의 머리와 뇌는 지식을 요구합니다. 현대사회를 사는 에너지는 지식이라는 먹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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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2,008. 5월 <글나루> 서평1 세계를 보는 ‘새 잣대’ <문화>, 그리고 그 부족들 <문화부족의 사회 * 히피에서 폐인까지 이동연 <인간은, 지식을 가진 무서운 동물이다> 좀 무시무시한 이 말은 1982년 5월 12일,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과학서점’ <인(人)서점>의 간판에 새겨놓았던 글입니다. 그 때, 그 엄혹했던 시절, 이 땅에 굳건히 자리잡고 있던 군사정권을 몰아내고자 한다면, 그리고 민주주의를 건설하고자 한다면, ‘사회과학’이라는 지식의 투쟁도구가 필요하고 그래서 그 무기를 제작하는 대장간이 바로 ‘사회과학’ 이었습니다. 그랬다, 그리고 다섯해가 지난 뒤….. 아닌 게 아니라 이 땅에 드디어 민주주의가 찾아왔습니다. 바로 87년 6월의 민주 항쟁이 정권을 쓰러트리고, 이 땅에 민주주의의 종자를 뿌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민주주의 씨앗이 발아되어 파란 새싹을 보일 무렵, 이 땅엔 또 다른 준비가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민주화 이후는 문화의 시대입니다. 문화로 세상을 바꿔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꿈적도 하지 안았습니다. 그랬지요. 그래서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과학서점’이라는 간판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다시,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과학마당 인서점’이라는 간판을 걸었지요. 또 한 구비의 세월이 흘러 갔을 때, 그러니까 2005년 12월 10일 인서점이 여러분의 모금으로 부활하던 날, <문화과학마당 인서점>은 문화과학이라는 지식의 마당을 청산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의 공동체’ <문화사랑방 인서점>이라는 아주 긴 이름으로 문화를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 생활의 장으로 가져가고자 의미를 담았지요. 그랬습니다. 격변하는 이 땅의 최근 역사가 고스란히 인서점의 간판으로 새겨졌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인서점의 자랑이자 인서점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의 긍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서점의 역사가 그렇게 자신의 역사로 우리의 역사를 대변해주었듯, 우리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가 군사파쇼의 시대를 거쳐 민주주의를 위장한 독재, 그리고 마침내 민주주의 계절까지 흘러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온 몸으로 투쟁하던 혁명의 시기와 사회과학으로 투쟁하던 이념의 시기를 거쳐 마침내 세상을 문화로 바꿔 낼 수 있는 오늘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모든 역사의 시기는 그 역사가 요구하는 투쟁의 도구가 있습니다. 그것을 읽고 대안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몫이라고 봅니다. 그렇군요. 이제 ‘문화’는 세상을 바라보고 읽어내는 ‘새로운 눈’이자 세상을 재는 측정의 ‘새로운 잣대’입니다. 문화라는 도구로 바라보지 않으면 오늘은 자신의 속살을 보여주기 위해 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이라는 현실을 읽어낼 수 없으며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문화란 무엇인가’. 참으로 막막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화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인류학자답게 종족의 특정한 양식으로 남아 있는 관습이 문화라고 주장하면서, 시간을 간직한 세대의 흐름에서 문화의 의미를 찾았고 이와 달리 부르디외는 개인들이 사회적 주체로 성장하는 공간의 과정에서 개인이 겪어내는 생존의 성향체계에서 문화의 의미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러니까 레비스트로스는 역사가 생성하는 권력의 수직관계에서 그리고 부르디외는 현실이라는 사회적 수평관계에서 문화의 개념을 읽어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문화현상의 근본개념을 규명하려는 문화에 대한 거대담론은 어쩌면 레비스트로스나 부르디외 같은 세계적 지식인들의 학문적 장이어서 오히려 우리의 피부에 직접 와 닿지 않는 관념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맞이 해야 할 문화는 금방 여기 이 자리에서 우리가 “어! 바로 이거야”라고 느낄 수 있는 감성이 뭉쳐진 문화이지 이성이 감성을 제압하는 지식의 파편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책 <문화부족사회 – 히피에서 폐인까지>야 말로 우리의 입맛에 딱 맞는 문화담론이라고 봅니다. 앞에 서문이나 ‘1장 문화부족사회’ 같은 좀 까다롭다 싶은 마을은 일단 훌쩍 지나갔다가 관심이 일어났을 때 봐도 되지요. 그래요. 그래서 아무데나 책장을 열어놓고… 이를테면 뭐 팔랑팔랑 책장을 넘기다가 눈에 썩 들어오는 단어가 있거든 거기서부터 아니 거기만 보고 또 다른 데로 이동해도 좋다는 것이지요. 그래요 “어! 뭐 홍대… 인디 문화…그게 좋겠군!”이라면 거기 261쪽에서부터 시작하면 된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이 책을 처음부터 다부지게 맘먹고 체계적으로 보겠다면 모르거니와, 그렇잖다면 외려 아무데나 풀풀 넘겨보다가 “어! 바로 이거!”라고 생각하는 곳, 바로 거기서부터 한 발 한발 밟고 나가세요. 그렇게 자꾸 이동하면서 구경만 하다 보면 그 자체로도 꽤 짭짤한 소득이 바구니에 담기겠지만….음~ 뭐 요런 것도 있었어? 하고 ‘모드’라던가 펑크, 또는 히피며 스킨헤드, 여피 아! 그렇지요 세대담론으로 신세대, 앤세대 조금 더 나아가 소비시대의 영웅 몸짱이며 얼짱이며 또는 스노화이트 족이라던가 키털드족도 만나 보시면 좋겠군요. 그래도 재미가 덜 붙거든 아예 마지막 쪽으로 가서 스스로 동굴 속에 갇혀서 살아가는 폐인부족의 족장들을 만나보신다면 ‘아 나도 한번 …’ 그러나 아서라 그것만은 제발 그만 두세요. 뭐 이런 책이 있냐고? 사실 솔직히 말하면 문화란 게 원래 쪼매 어렵고 또 까다로운 물건 아니던가요. 그러나 문화란 무엇인가? 창조의 원천 바로 나의 내부로 들어가서 거기에 존재하는 나의 정신 나의 영혼 그 무한한 가능성에 불의 씨앗을 던져 활활 타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틀에 갇혀 있어서는 안됩니다. 나의 영혼과 정신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나를 자유와 방 임의 세계로 안내하는 것입니다. 그럼요, 그래서 나의 무궁한 에너지의 바다를 나의 영혼이 여행하도록 안내하는 것 그것이 문화입니다. 머이 요런 괴상한 학문의 영역이 존재하는가고 묻지 마세요. 그리고 머이 요런 접근법을 소개하느냐고 묻지 마세요. 그게 바로 문화를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하여간, 살금살금 재미를 붙여나가다 보면 어느새 만세! 억 그러나 위기 위험, 빨리 문화의 정상에 도달한 님의 영혼을 확보(아! 조금 설명이 필요한 말이군!! 이건 등산용어, 안정되게 고정시킨다는 말이지요. 벼랑이나 또는 바람이라던가 더러는 실수, 이런 때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얼음이나 바위 같은 곳에 말뚝을 박고 나를 붙들어 매는 것이랍니다.)하세요. 그러니까 다시 주변을 살펴서 그 불안한 걸 안정시키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느새 님은 문화의 생성과 진화와 소멸의 그 끊임없는 변화와 반복의 원리를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님은 거기서 주저앉지 않고 앞으로 더 전진하고자 하겠지요. 그래서 여러 문화부족의 마을을 가로질러 나아가 결국은 인간의 행복이 이성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에너지의 세계가 아니라 감성의 세계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님께서는 끝내, 이 책의 저자가 민주주의에 의해 문화의 장이 열리게 되는 것이라던가 감성과 이성이 문화의 장에서 어떻게 인간의 욕망이 자연으로 인도하는가 하는 문화 이전의 본질이 슬쩍 놓치고 있음을 눈치채게 되리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저자의 시야가 문화의 장에 갇혀있음을 알게 되리라는 것이지요. * *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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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2008.5월 <글나루> 서평2 생사의 경계 그 벼랑에 매달린 카르마 박범신의 소설 <촐라체> 누군가 말했다. 그곳이야말로 ‘카르마’라고……, 그렇다. 작가 박범신이 찾아 나선 곳, 촐라체 북벽은 카르마라고…… 존재가 끝나고, 생명이 끝나고, 삶이 끝나고, 그리고 거기서는, 선과 악도 끝나게 된다고 했다. 이는 바로 시간과 함께 공간이 거기서 끝나게 된다는 말 아닌가. 그럴 것이다. 거기서는 하나의 ‘원인’이 마감할 뿐만 아니라 그 마감에 대한 응보의 세계, 곧 새 천지가 열리는 곳이다. 그것이 응보의 법칙 곧 ‘카르마’다. 붓다가 이르길, ‘태어난 것은 죽게 되고 / 모인 것은 흩어지고 / 축적한 것은 소모되고 / 쌓아올린 것은 무너지고 / 높이 올라간 것은 아래로 떨어진다.’ 고 한 바로 그 업의 심판장이 카르마다. 아니, 사람들은 바로 그 곳이 ‘촐라체 북벽’이라고 했다. 인간 세상의 모든 원인과 결과가 거기서 끝과 시작으로 갈라진다고 했다. 작가 박범신은 과연 그 신성한 장에 들어 무엇을 얻고자 했던가. 스스로 말하지만, 그는 어리석었다. 참으로 지난 한 문제, 그러니까 창조주 신이 관장하는 영겁의 문제에 무모하게 도전했다는 생각이지만, 그랬다. 그래서 그의 도전은 자신의 소중한 생명과 더불어 두 사람의 숭고한 젊음이 천신만고를 감수해야 했다. 아픈 마음으로 하는 말이지만, 이는 어쩌면 무모함에 대한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서 돌아왔다. 그랬다. 꼭 6박 7일간이었다. 그 기적적인 두 사람의 촐라체 북벽 등정과 조난 그리고 생환과정에서 그들이 보여준 인간의 육체와 인간의 정신과 인간의 의지는 이제 그들만의 것은 아니다. 그렇다. 우리 인간의 증명된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지옥에 비견되고도 남을 그 과정에서 그들은 수십 개의 손가락과 발가락 그리고 팔과 다리를 거기에 묻어야 했다. 그것이 어찌 그들만의 것이겠는가. 눈부시게 발전해 가는 현대문명에 의해 하루가 다르게 퇴화하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과 의지 그래서겠지만 오직 수동적인 삶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는 우리 인간이 아닌가. 우리는 이 소설은 픽션이 아니다.
‘촐라체’, 히말라야 에베레스트에서 서북방향으로 17킬로미터 지점이다. 수천 수만의 희말 영봉의 숲 그 한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촐라체, 해발 6440미터의 ‘촐라체’, 세계의 내노라는 클라이머들의 신앙이라고 해야 할 도전의 꿈이다. 그러나 감히 그 앞으로 나서지 못한다. 왜, 2,000미터의 수직 북벽, 그 어두운 벽 앞에 세계의 내노라는 클라이머도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래서 촐라체는 전인미답의 전설로 남아 있었다. 적어도 그 때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2005년 1월, 이 전설은 아무도 모르게 무너져 내렸다. 아니 촐라체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위대한 두 사람의 클라이머에게 내어 주었다. 세계 등반사에 길이 빛나는 이 전설은 그러나 냉엄하게도 북벽의 넘어 서벽의 한 만년빙의 크레바스에 묻혀 조용히 잠든 채 있었다. 후배의 방문을 기다리며 “사랑해”, “미안ㅎ’라는 기호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영우, 선우, 미야, 정순희’라는 수신자의 이름을 적어놓고 그것이 세상으로 나아가 전해지기를 기다리면서….., 나중에 이를 ‘절절한 <그리움>’ 으로 해석한 작가 박범신 일행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긴 세월을 참고 견디며 그리움을 크레바스에 쌓고 있었다. 그리고 기다리던 후배 일행이 오자 그는 긴 잠을 깨어 신성에 도전한 후배 일행을 촐라체에서 벗어나게 인도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소설은 실화다. 그래서다. 여기서, 작가 박범신의 처신에 대해 말해두는 게 좋겠다. 그는 이 소설을 쓰는 객관이면서 또한 주관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작가는 글을 쓰는데 멈추지 않고 스스로 소설의 내부로 들어가 캠프지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 박범신의 이런 행각이 마냥 픽션에 의지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작가 박범신이 2005년 1월, 박정헌과 최강식이라는 두 사람의 클라이머가 촐라체에서 조난됐다는 그리고 생환 되었다는 이야기가 들어왔을 때, 작가와 교수라는 자신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모든 것을 팽개치고 그리로 달려 갔다는 것과 히말의 영봉이 자리잡고 있는 수 만리 티벳의 영토를 순례했다는 것은 이 소설 촐라체가 작가 박범신 자신이 작가만으로서가 아니라 주인공으로 말해주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작가 박범신은 그 때 혼이 빠져나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니 촐라체가 그의 영혼을 데려 갔다고 해야 좋을 것 같다. 그것은 어쩌면 그의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때, 작가 박범신은 ‘글쓰기에 대한 자신의 순정적 열망’과 ‘삶에 대한 유한성’이 격렬하게 충돌하였고 이에 대한 자신의 저항이 극한의 상태에 있었다고 했다.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던 이 과제와 지루하게 씨름 하던 때, 자신의 영혼을 ‘촐라체,가 다가와 사로잡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홀연히 삶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촐라체로 달려갔고, 촐라체를 안고 있는 티벳, 히말, 중국, 인도 등 세계의 지붕대를 탐험하는 순례여행에 들어갔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이 소설의 실제인물 박정헌과 최강식을 대리하는 가상의 인물 상민이와 영교는 캠프지기인 작가 박범신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 박범신은 이 순례여행의 동반자이면서 기록자다. 이런 작가 박범신의 이중적인 처신은 소설 촐라체 곳곳에서 어색하게 노출되기도 한다. 이는 어쩌면, 상상력에 의지해서 글을 써야 하는 작가의 한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전문 클라이머가 아닐 뿐만 아니라, 당연한 말이지만 촐라체 북벽을 등반 한 경험이 없고 능력이 없는 사람이 동원할 수 있는 상상력의 한계라는 생각이다. 더구나 이 소설은 카르마 즉 인과 응보의 법칙 다시 말해서 불가의 업의 장을 다룬 이야기다. 생명의 생과 사가 갈리는 지점의 이야기다. 그래서 소설 촐라체는 아니 작가 박범신의 생각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존재와 무, 선과 악,, 우주의 본질적 이해와 해명에 자신의 지적 뿌리를 내려 놓고자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인문학의 근본적 담론이다. 물론, 점수를 주기에 조금도 아깝지 않은 이야기다. 그러나 그가 오랜 삶의 여정과 거기서 획득한 지성을 피켈로 삼아 새롭게 찍어 가면서 올라간 이 순례여행의 기록 촐라체는 그러나 그 용기에 비해 그가 넘어야 할 인문학적 담론의 산 촐라체는 여전히 저 앞에 거대한 북벽으로 우뚝 서있다는 생각이다. 그는 여전히 베이스캠프에서 로프나 피켈 등 장비들을 닦고 손질하면서 그리고 카르마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조금 서운할지 모르지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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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루> 수필 이 글은 음영철교수님께서 <글나루>의 청탁으로 보내주신 글입니다. 내용 중에 아저씨에 관한 부분이 있어서 송구스러운 점이 있으나 --
春雨遺憾 -봄꽃은 지지만 꽃향기는 오래 가리니... 딸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오면서 봄꽃이 지는 걸 보았습니다. 또 그렇게 여름 같던 봄날이 가나봅니다. 심 선생님, 요즘 흘러가는 시간을 두고 예전처럼 세월이라 부르기에는 저 자신부터가 여유가 너무 없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멀리 보며 돌아갈 줄도 알아야 한다고 하지만 말뿐이고 올해는 유난히 힘들고, 유감스럽다 못해 무섭기까지 합니다. 심 선생님도 힘드신데 제가 괜한 짐을 드리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 당신께서는 60년 4월의 꽃망울도 보시고, 80년 광주의 진달래도 보셨겠지요. 제가 곁에서 본 바로는 선생님은 꽃이기보다는 잡초였습니다. 밟히면 밟힐수록 역설적으로 더욱 살아나는 그런 잡초와 선생님은 많이 닮으셨지요. 꽃잎이 진 자리 옆에서 저는 키 작은 들꽃을 보았습니다. 제 눈은 그 순간 부끄러웠습니다. 위로만 보며 살아가는 모든 꽃들을 선망하면서 저 자신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으니까요. 심 선생님, 일곱 살 난 제 딸아이는 민들레를 무척 좋아해요. 조그만 입으로 민들레 홀씨를 불 때면 좋아라고 하지요. 또 아이답게 애기똥풀을 좋아해요. 애기똥풀을 반복해서 부를 때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자꾸 웃습니다. 그럴 때면 딸아이가 마냥 부럽기도 하구요. 심 선생님, 요즘 우리에게 들려오는 소식들은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뿐이네요. 제가 선생님께 길을 물어도 되는지요? 지난번에 선생님께서 한겨레신문에 썼던 칼럼(‘살 처분’영혼님께)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글에서 살 처분 되는 뭇 생명들을 안타까워하시며 인간이란 참 무서운 존재라고 하셨지요. 공감합니다. 역지사지로 세상을 보아야 할 터인데 아직도 우물 안 개구리처럼 개안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 뜬 장님이지요. 사람만 살려고 서울시 안에 있는 조류들을 모두 죽이는 그런 일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알았습니다. 심 선생님께서도 윌리 로만이라는 세일즈맨 이야기를 다룬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을 아실 겁니다. 그 친구, 아니 저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인생의 선배라고 해야 할 그 중년이 넘은 사내가 어느 날 회사로부터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합니다. 그땐 그래도 정리해고도 늦게 하고, 그 이유도 나이 탓으로 돌릴 만큼 꽤나 낭만적이었나 봅니다. 아무튼, 윌리 입장에서는 억울하겠지만 약자에게는 선택권이 없기에 따라야했죠. 그에게 해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기에 가족과의 불화는 더욱 커지고 결국 우리의 주인공은 장남에게 보험금을 남겨주기 위해 자살을 택합니다. 왜 갑자기 80년대 대학로에서 보았던 연극이 떠올랐을까요? 선생님께서는 잘 아시리라 봅니다. 신자유주의가 횡행하는 요즘의 한국 사회를 보면서 저는 아서 밀러의 어느 세일즈맨이 2008년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이 아니기를 바랄 뿐입니다. 심 선생님, 혹시 <존 Q>라는 영화 보셨나요? 아직 못 보셨다면 제가 줄거리만 이야기 할게요. 단란한 한 가정의 아버지인 존은 회사의 경영난으로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강등됩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아들이 야구 게임 중 쓰러지고 병원에서는 당장 심장 이식 수술을 해야 한다고 통지합니다.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비정규직이 된 존이 민간의료보험 조직인 HMO의 규정에 따라 2만 달러 외엔 더 이상의 돈을 받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고, 결국 존은 자신의 아들을 위해 수술을 진행할 병원을 상대로 인질극을 벌인다는 내용입니다. 심 선생님 저는 이 영화가 먼 나라인 미국의 이야기로 끝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런데 머지않아 한국의 의료보험 체제가 민영화로 간다는데 그렇게 되면 한국에는 존보다 더 심한 사람들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심 선생님, 남의 나라 이야기 말고 우리나라 이야기도 내친김에 하지요. 얼마 전 선생님께서도 PD수첩을 통해 아셨겠지만, 어느 지방 대학(건국대 충주 캠퍼스)의 강사가 딸과 함께 미국으로 여행을 가서 그곳에서 자신의 한 많은 인생을 끝냈지요. 많은 사람에게 공분을 느끼게 한 그녀 또한 젊은 날의 꿈이 있었을 텐데 그것이 피기도 전에 지고 만 것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이유야 어떻든 세상에 홀로 남겨질 딸아이를 위해서라도 좀 더 모질게 살았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심 선생님, 2008년의 봄은 아름답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너무나 슬프게 합니다. 미국소가 몰려온다는 소식에 이 땅의 한우들이 수명의 반도 채우지 못하고 도살장으로 끌려 나가는 현실이 우리들은 슬프게 합니다. 한반도 대운하로 인해 생태계가 파괴되고 뭇 생명들이 죽게 될지도 모르는 두려움이 우리들을 슬프게 합니다. 이 땅에 늘어만 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커져만 가는 절망이 우리들을 슬프게 합니다. 사교육을 막아보겠다고 학교를 학원화하는 대한민국의 교육정책 때문에 우리의 아이들이 학교가 아닌 학원에 간다고 할까봐 우리들은 슬픕니다. 심 선생님, 5월의 봄은 비록 비가 오면서 멀리 갔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남겨진 꽃향기는 오래 갈 것입니다. 청계천과 광화문에 핀 꽃사태를 보면서 역사는 그래도 흐르는구나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또한 2009년의 봄을 맞이하기까지 이 땅에 모든 생명들의 신음 소리가 더 이상 없었으면 하는 바람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꿈으로 끝날까봐 두렵고도 슬픕니다. 2008. 5. 13일 화요일에 음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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