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카제 이야기가 나올 때는 보통 엽기적인 비인간성에 중점을 둔다. 하지만 카미카제도 일본군이 전술로 사용한 만큼 전술로서의 의미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 해군의 공간전사에서도 일단 엄연한 전술로서 인정하고 그 가치를 다짜고짜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참조하자. 물론 그들이 겪은 정신적 충격과 인간적인 경멸을 빼 놓지는 않지만.
1942년 과달카날 전투 이전까지의 일본군 조종사의 숙련도는 대단히 높았다. 미해군 함재기들의 공격을 뚫고, 미칠듯이 솟구쳐 올라오는 대공포의 사격과, 미해군 함정들의 현란한 회피기동 속에서도 30~40% 명중률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거둔다. 물론 미군 함재기의 조종사들도 만만찮은 솜씨를 보였으니 대등한 전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1942~1943년을 거쳐 솔로몬 제도 상공에서의 처절한 소모전과, 1944년 6월의 필리핀 해전을 거치며 숙련된 일본 조종사들은 말 그대로 죽어 나갔다. 반면 미군은 300,000명(…) 정도로 조종사들을 본토에서 양성하고 있었다. 이 숫자는 14,000명 수준의 사단 20개 이상을 구성할 수 있는 수다.
더 무서운 건 1944년도부터 신규육성되는 조종사 수는 감소되기시작했는데 이미 보유한 조종사만으로도 몇년간은 문제 없다는 판단으로 비행학교를 줄이고 훈련시간을 늘려서 질적 향상을 도모하고 있었으며, 수십 회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베테랑들은 무조건 일선에서 물러나 후배들에게 자신의 생생한 노하우를 하루 종일 훈련시키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중간탈락율은 비슷했고 따라서 44년부터 신규양성된 조종사들들은 선배들보다 더욱 치열한 경쟁을 뚫고 조종사가 되었으며 기량도 더 훌륭했다. 따라서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과 같은 일방적인 학살은 당연한 결과물인 것이다.
반면 카미카제의 명중률은 숙련 조종사가 소규모로 동원되었던 1944년 말 필리핀 전역(戰域)에서는 40~50%, 카미카제로 쓸 숙련 조종사마저 고갈되어 꼬꼬마 조종사들을 대규모로 투입했던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14%의 명중률을 기록한다. 350기의 함재기가 출격하여, 220기가 격추되고 명중탄은 단 1발 밖에 기록하지 못한 1944년 6월의 필리핀해 해전과 비교해 보면 확실히 나아보인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오키나와 전투에서 총 1,900대의 특공기가 돌입해 33척의 적함을 격침시켰다고 한다. 일단 자료에 따라서 차이가 난다. 침몰한 미군함도 21척내지 26척에 불과하다는 자료도 있다. 그 밖에 280척 내지 360척에 피해를 주었다. 다만, 이 피해도 대부분은 작은 상륙정이다. 그러나 이 자료를 순수하게 믿더라도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는 당연하게도 특공기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순수하게 특공기만으로 이루어진 편대를 조직했다면 당연히 돌입하기도 전에 모조리 격추되었을 것이다. 때문에 폭격기를 호위하는 전투기 편대처럼 특공기를 호위하기 위한 편대도 출격했고, 특공이 아닌 폭격만을 위한 항공기도 출격했다.
문제는 여기서 1,900대라는 것은 순수한 특공기만을 의미하는 것이고 호위 전투기 편대와 폭격을 하기위해 출격한 항공기는 제외한 수치라는 점이다. 애초에 공습의 성과란 투입한 항공기와 손실된 전체 항공기와 적의 피해를 비교해서 따지는 것이지 순수 특공기만의 손실만 계산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럼 특공기와 호위기를 합친 전체 일본군의 손실은 얼마일까? 놀랍게도 오키나와에서만 모두 7,830대 이상의 항공기를 손실했다. 약 8,000대의 항공기를 소모품으로 말아먹고, 겨우 33척을 격침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단순비교로도 항공기 280대와 겨우 1척을 맞바꾼 셈이다.
더 중요한건 격침시킨 33척 대부분이 군함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작은 상륙정들이고, 나머지는 전략적 가치가 크게 떨어지는 구축함이라는 것. 정말 위협적인 항공모함은 제대로 격침시키지 못했다. 그나마 경항모보다도 못한 호위 항모 2척에 큰손실을 준건 사실이고, 이 2척의 호위 항모는 종전뒤 폐기 처분되긴 했다.
이것은 전혀 남는 장사가 아니다. 항공모함만 100척이 넘어가던 당시 미해군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감안하면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 자료도 역시 자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난다. 미공군 홈페이지에 의하면 2,800기의 특공기(오키나와 만이 아니라 일본의 모든 특공기 공격을 포함한 수치)의 공격에 의해 34척의 배가 침몰했다고 되어있다. 반면, 일본학 연구자인 Bill Gordon에 의하면 47척이라고 한다. 이런 차이는 수리중 침몰한 군함도 포함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차이가 나긴 한다. 그래봐야 오십보 백보. 일본군이 뻘짓을 했다는 진실을 뒤엎는 정도는 절대로 아니다.
오키나와 전투 기간 전사한 미군은 12,281명인데, 이중 4,907명이 카미카제에 의해 전사한 해군 소속의 수병들이다. 이것이 대단한 수치인가? "금쪽같이 귀중한 자원인 항공기 1기" + "항공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욱 중요한 자원인 조종사 1명"을 고작 "수병 3명"과 맞바꾼 셈이다. 인명의 소중함의 문제 이전에, 전쟁의 냉정한 전략적/경제적 측면에서 이미 이것은 삽질 of 삽질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참고로 나치 독일군 최대의 삽질이라고 평가받는 보덴플라테 작전에서 독일군은 연합군기 340기를 격파하고, 독일군기 304기를 잃었다. 그럼에도 실패라고 평가받는데, 이것과 비교하면 8,000기나 손실했다는 건 무엇을 말하겠는가?
시기상 전력적으로 크게 차이가 나므로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는 무리가 있지만, 과달카날의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일본군은 통상공격만으로 99대의 비행기를 손실하고 정규 항공모함인 호넷을 격침시키고 엔터프라이즈를 중파시켰다. 이것과 비교하면 참으로 안습한 수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밖의 다른 요소는 별로 고려할 필요가 없다. 카미카제를 대비하기 위해 함재기들이 함대방공에 힘써 오키나와의 공중지원이 힘들어졌다고는 하지만, 이건 카미카제가 아니라 통상공격이라도 마찬가지이다. 8,000기가 통상공습을 해왔다고 생각해보자, 카미카제가 아니라도, 지상지원을 할 수 있을까? 이건 카미카제의 전술적 효과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공습의 규모가 워낙 컸기 때문이다.
펄펄 뛰는 커티스 르 메이를 여러 장군들이 간신히 제압(?)하고 B-29를 도시폭격을 잠시 돌려 비행장 폭격으로 돌린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카미카제가 특별히 대단해서가 아니라 공습의 규모 자체가 워낙 커서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확실히 해군력 서열 2위인 영국 해군과의 비교조차 무의미할 정도로 압도적인 전력을 지닌 미군이 아니라면 이만한 규모의 공격을 버티지 못했겠지만... 이 또한 통상공격이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전력을 가미카제 요격에 쏟아 붓게 만들었고, 또 당시 일본군의 처한 현실상 통상공격보다는 분명 효과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약간 더 효과적이었다고 해도, 그 성과라는 것이 고작 상륙정 몇 척, 구축함 몇 척에 불과했을 뿐이니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었던 짓인지는 알아서 판단하자. 이런 초라한 결과는 결과론적인 이야기도 아니다. 압도적이기 그지없는 미군의 전력, 비숙련자 집단 & 쓰다 버린 비행기들을 닥닥 긁어 모인 기체의 성능 등 가미카제 자체의 한계를 감안하면 뻔한 결과였다.
굳이 더 의미를 찾자면 미 해군 수병들 중 후송되는 전투피로증 환자를 조금 더 늘렸다는 것 정도(…)? 가뜩이나 오랜 전쟁으로 지친 미 해군 수병들이었기에 몇 달 간 지속된 가미카제 공습상황으로 피로증 환자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촘촘하기 그지없는 함재기들의 전투초계비행(CAP)과 스크램블(긴급요격)을 감안하면, 가미카제의 명중률 10여 %는 수병들 눈에 보이는 가미카제 2기 중 1기는 자신의 배로 날아든다는 의미였으니 수병들에게는 확실히 무서운 존재였다. 하지만 어떤 형태의 전쟁이든 당사자에게 무섭기는 마찬가지고... 당연히 미 해군의 수병 운용에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카미카제가 효과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이딴 전술에 의지함으로서 일본군 스스로 더 효과적인 방법을 망각해 버렸다는 점에 있다. 카미카제를 작전으로서 사용한다는건 조종사의 기량향상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으며, 항공기 발전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다. 애초에 적의 군함에 들이받을 항공기를 뭐하러 발전시킬 필요가 있을까?
확실히 처음 베테랑 조종사들에 의한 카미카제 작전은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이는 지속적인 출혈과 같고 일본군은 여차하면 카미카제를 쓰면 되니까...라는 안이한 생각으로 항공기 발전과 조종사의 기량향상에 힘을 쓰지 않았다. 당장 카미카제가 조직적으로 이루어진건 1944년 10월부터지만, 작전상으로서의 검토는 1942년 미드웨이 해전부터였고, 특공병기가 처음 만들어진건 1944년 3월이다. 일본의 함상전투기는 끝까지 제로센뿐이었는데, 이처럼 기술 발전이 뒤처진데는 이런 안일한 생각의 영향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애초에 카미카제 같은 전술에 의지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항공기 기술을 발달시키고, 조종사 기량을 향상시키는데 중점을 두었다면, 좀 더 효과적으로, 조금이라도 더 오래 미군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카미카제에 의지함으로서 이런 가능성을 스스로 부정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