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웅변잡지와 웅변운동
일제강점기 조선 사회에서 웅변은 민족의식을 고양하고 대중을 계몽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이러한 웅변운동의 확산과정에서 중요한 매개로 작용한 것 중의 하나가 웅변잡지였다. 그리고 웅변잡지는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웅변이론을 제시하고, 웅변을 통하여 민족운동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였다.
1920년대 이후 조선 사회에는 다양한 행태의 잡지와 출판물이 등장하였다. 이들 잡지 중 1920년에 창간한 ‘개벽’은 청년과 지식인들의 사상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역할을 하였고, 1929년도에 창간된 ‘삼천리’가 대중의 웅변문화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개벽’에 기고한 인물 중에는 신채호, 박은식, 한용운 등이 있으며, ‘삼천리’에는 김동인과 여운형이 있다.
이들 잡지 외에도 ‘별건곤’이나 ‘청춘’, 그리고 ‘소년’과 ‘청년’, ‘신동아’, ‘동광‘ 등의 웅변잡지가 있으며, 이들 잡지는 주로 정치, 사회, 문화, 사상 등을 폭넓게 다루었다. 그리고 웅변교육을 위한 강좌 내용이나 웅변대회 사례 등을 꾸준하게 게재하였다.
그리고 웅변 관련 출판물은 주로 청년단체나 교육기관, 그리고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제작되었다. 이들 매체에는 연설문이나 웅변대회 우수작 원고가 수록되었으며, 토론 주제나 시사 논설문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는 웅변을 통한 사상교육의 역할을 하는 통로가 되었다.
특히, 웅변원고는 일반 문학작품과 달리 현실 문제에 대한 인식과 해결 의지가 담겨있기 때문에 이는 곧 그 당시의 사회 문제를 인식하게 해주었다.
이처럼 웅변잡지는 웅변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어서 각 지역에서 이루어진 웅변 활동의 성과가 잡지를 통해 공유되면서 웅변운동은 지역을 넘어 전국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웅변잡지는 웅변의 이론이 체계적으로 정리되면서 점차 하나의 학문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웅변교육의 지침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웅변운동의 주체가 청년과 학생들이었으며, 이들은 웅변잡지를 통해 사회 문제를 인식하고 자신의 생각으로 정리하여 발표하는 훈련을 받을 수 있었고,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일제강점기의 웅변잡지는 웅변의 이론과 사례를 축적하고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였으며, 웅변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 검열의 칼날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 잡지의 웅변
일제강점기 웅변운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신문과 잡지였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문과 잡지가 크게 늘어났고, 각종 단체가 현상웅변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특히, 웅변대회는 단순한 말하기 경쟁이 아니었다. 당시의 웅변 주제는 민족자강과 사회개혁을 다룬 내용이 많았고, 잡지와 신문은 대회의 개최 소식뿐 아니라 웅변 내용과 심사평까지 소개하면서 웅변을 하나의 사회적 운동으로 확산시켰다.
그 중신에 ’개벽‘을 발행한 개벽사가 있었다. 1920년 창간된 ’개벽‘은 천도교 계열의 종합잡지였지만, 단숭한 종교잡지에 머물지 않았다. 민족의식과 사회개혁, 그리고 신문화에 관한 다양한 내용을 담으면서 식민지 조선의 새로운 지식과 사상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통로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개벽‘은 항일적 논조 때문에 40회 이상 압수되고 정간까지 당했으며, 결국 1926년 강제로 폐간되었다. 잡지 한 권의 발행을 둘러싸고 이처럼 반복적인 압수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당시 언론이 얼마나 심한 검열 아래 놓여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에는 흥미로운 ‘숨은 이야기’가 있다. ‘개벽’이 폐간되자 개벽사의 사람들은 그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개벽’을 살려낼 수 없다면 다른 이름으로라도 독자들에게 말을 하겠다는 선택을 했다.
그렇게 1926년 11월 등장한 잡지가 ‘별건곤’이었다. 당시 개벽사 사람들은 ‘개벽’의 폐간을 두고 ‘자식은 죽었으나 산모는 여전히 건재하다.’는 뜻의 결의를 보이며 후속 잡지를 발행했다. 겉으로는 취미잡지를 내세웠지만, 실제 지면에는 문학과 사상, 그리고 여성과 교육, 정치 동향 등 다양한 내용이 실렸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검열을 피하는 방법 자체가 하나의 언론 전략이 되었다는 점이다. ‘별건곤’의 편집진은 정치, 사상적 내용을 전면에 내세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검열당한 글에서는 삭제된 흔적이 남았고, 연구자들은 이러한 삭제의 흔적 자체가 당시 검열의 경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한다. 즉, 일제가 지우려고 했던 흔적이 오히려 오늘날에는 당시 무엇을 두려워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가 된 것이다.
1920년대 웅변대회가 큰 인기를 얻은 것도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사람들은 연단에 올라 자신의 생각을 말했고, 잡지는 그 목소리를 지면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 지면을 읽은 또 다른 사람이 다시 연단에 올라섰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의 잡지는 단순한 인쇄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민족의식이 숨 쉬던 작은 연단이었고, 침묵을 강요받던 시대에 끝내 꺼지지 않는 언론의 등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