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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활동 60년 서영훈 대한적십자사 총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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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과거를 회고하면 감회가 새롭다. 그렇지만 내 경우는 더욱더 그렇다. 격동기인 한국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왔기 때문이다.
벌써 나와 동고동락했던 많은 동지 중 적지 않은 수가 세상을 떠났고 1923년생인 올해 내 나이는 이제 여든이다. 아직도 건강하게 대
한적십자사 총재란 귀한 직책을 맡아 일하고 있으니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내가 첫 사회활동을 시작한 것은 20세이던 1941년 봄이다.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있던 미스코시백화점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따라서 올해로 사회활동을 60년째 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끊임없이 우리 인간의 보편적 가치와 생명질서를 중시하는 인류 공동의 선을 강조하며 살아왔다. 인류에게는 사회운동이 필요하
며 인간의 존엄성과 민주주의,평화,환경보전,복지 등이 조화를 이루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이 밑바탕에는 기독교의 사랑과
박애,헌신의 정신이 함께 했다. 나름대로 확고한 주관을 갖고 펼쳐온 이 사회운동은 많은 분들의 사랑과 은혜로 결실을 거뒀고 지금
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또 인생의 시점마다 내게 가르침을 주고 도움을 준 분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내가
베푼 것은 작았지만 돌아온 것은 항상 몇 배가 더 컸다.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어김없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감사’임을 발견한다. 인간의 생사화복과 우주를 주관하
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내 삶을 인도하고 계심을 언제나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하지 못했지만 사랑의 하
나님은 늘 나와 함께 하시며 내 삶을 이끌어주셨다. 이제 그 하나님의 인도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내 고향은 묘향산 남쪽인 평남 덕천이다. 대동강이 10리쯤 떨어져 있는 이곳은 겨울이면 유난히 눈이 많이오는 평화로운 시골이었다.
3남3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나는 고향에서 송정보통학교(초등학교)를 다녔다.
조부(서상식)는 협동조합을 운영하실 정도로 개화된 분이셨다. 내게 일제의 교육을 받으면 병역도 의무적으로 치러야 한다며 보통학
교 졸업장을 못 받게 하셨다. 졸업을 불과 2개월 남기고 자퇴하도록 하셨다. 그 대신 내가 읽고 싶은 책은 빠짐없이 읽도록 사주셨다
. 서울은 물론 도쿄에까지 책을 주문했다. 와세다대에서 출판된 책까지 주문했던 기억이 나는데 나는 세상 보는 눈을 이처럼 책을 통
해 차근차근 키워나갔다.
나는 해방 후 서울에서 대학교를 두군데나 다녔지만 내 지식과 지혜는 이때 키워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책 중에 숭실전
문학교에서 발간한 ‘아이동무’란 기독교아동잡지가 있었다. 이 잡지에서 난생 처음으로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
후 톨스토이 문학에 심취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생각의 폭이 점점 넓어졌다.
집과 그리 멀지 않은 외가에 놀러가면 송산교회가 있었다. 김명덕 목사란 분이 시무했는데 방학이면 평양에서 공부하던 자녀들이 내
려왔다. 김 목사의 아홉 자녀 중 내 손위인 김조규씨는 언제나 시집과 책을 손에 들고 있었고 나를 매우 귀여워 했다.
하루는 내게 누가복음이 적힌 쪽복음 한권을 선물로 주었다. 이것은 내 삶이 기독교인으로 바뀌는 큰 계기가 되었다. 책 옆을 빨간
색으로 물들인 것이 신기했는데 김조규씨는 후일 북한 최고의 시인이 되었다.
농사일을 도우며 지내던 나는 일제가 강제 징병한다는 사실을 알고 깊은 산속인 내원암 금방강장이란 곳에 숨었다. 일본군에 끌려가
면 죽을 확률이 높은데 일제를 위해 죽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는 산에서 텐트를 치고 산기도를 하며 지내던 23세의 홍여경이란 청년을 우연히 만났다. 적적했던 그와 나는 매일 저녁 만나 대화
했는데 그에게서 기독교 교리를 전수받고 기독교 신앙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는 나를 기독교에 인도하는 안내자가 된
셈이었다.
산기도를 하러 온 청년 홍여경을 통해 기독교 복음을 전해 받은 나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세계관을 갖게 되었고 묵상하 고 기도하는 습관이 생겼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더욱 가까이 가려고 노력했다. 이때 내 신앙은 지극히 초보적이었으며 성숙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렇게 집안일이나 돕고 숨어지낼 것이 아니라 남자로서 좀더 큰 뜻을 품어보자. 지금 20세인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일이 무엇일까.” 그 결론은 중국 상해 임시정부로 가서 조국을 위해 무엇인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하자는 것이었다. 일본은 분명 패망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던 나는 무조건 서울로 올라와 백화점 점원으로 취직했다. 또 종로 YMCA에서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가려면 중국어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서울에서 그동안 책이나 신문을 통해 알게 된 당대의 명사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구하곤 했다. 당시 유명인사들은 전혀 모르 는 사람이 찾아가 인사를 여쭈러 왔다고 하면 반갑게 맞아 조언을 해주었다. 그만큼 삶의 여유가 있었다. 이때 인사드리고 찾아간 분 들이 소설가 이태준 선생,청록파 시인 조지훈 선생의 부친인 조헌영 선생,동아일보 편집국장 양재하 선생,자혜병원장 조만호 선생 등 이다. 그러나 객지생활이 힘들었는지 9개월만에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런데 한달만에 덜컥 일본경찰에 구속됐다. 당시 나 는 독서에 심취되어 있었는데 이 가운데 금지도서가 발견돼 사상범으로 몰린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책은 고모부가 내게 빌려가 읽다 발각됐는데 책주인에 대한 조사를 마친 상태였다. “중국으로 도망칠 계획을 가졌다”는 사실을 기록해 놓았다. 어처구니없게도 일본 경찰로부터 “상해임시정부나 중국쪽과의 연결이 분명히 있을 것이니 그것을 불라”는 고문을 받아야 했다. 전혀 없는 사실을 이야기 하라고 강요하니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나를 담당한 고등계 주임 구리야 형사로부터 ‘거꾸로 매달아 때리기’‘코에 물붓기’‘잠 안재우기’ 등의 고문을 받아야 했다. 독 방에서 9개월쯤 지냈는데 지금 생각하면 나를 돌이켜보고 수양하며 기도하는 귀한 시간이 되었다. 모든 것에 대해 초연해질 수 있는 마음을 가졌다. 밤에 잠을 자다 쥐가 들어와 옷을 갉아먹어도 가만히 있었던 기억이 난다. 일경은 어머니가 나를 면회하기 위해 30∼40번이나 찾아왔지만 만나게 해주지 않았다. 나는 이 억울함을 하나님에게 호소하기 위해서 ‘기도’라는 통로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옥생활은 힘들었지만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계기가 되었다. 고문 때문에 심신이 지칠대로 지친 나는 결국 그들이 원하는 대로 엉터리 조서 내용에 사인을 해주지 않 을 수 없었다. 조서가 끝나 평양형무소로 이감된 나는 모리라는 유명한 사상검사에 배당돼 다시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이때 정말 놀라운 것을 체험했다. 모리 검사에게 조사를 받기로 한 전날밤 꿈인지 환상인지 ‘오늘 저녁 8시에 석방된다’는 굵고 나지막한 음성을 들은 것 이다. 그러나 나로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 오후 4시 모리 검사를 만나 조사를 받게 된 나는 고문에 못이겨 조서가 진술된 것임을 하소연했다. 베테랑인 그는 금방 알았는 지 “조서 내용대로라면 7∼8년 형을 받아야 하나 중국으로 가는 실행이 이뤄지지 않았고 10개월간 이미 구류생활을 한 것이 참작된 다”며 기소유예처분을 내리며 오늘 저녁 석방될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온몸에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하나님의 실체를 느꼈다. 그것은 지식으로 감각으로 알 수 있는 세계가 아닌 어떤 영적인 큰 힘이 존재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해준 것이다. 아울러 나를 보호하시며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고 계심을,우리의 간 절한 기도에 응답하고 계심을 확신하게 됐다.
10개월의 옥살이를 마치고 출소한 나는 고향에서 좀 쉬다가 덕천탄광에 취직했다. 광부 자녀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교사가 된 것이다. 일본어를 가르쳐야 하는데 내가 한글을 많이 사용한다는 이야기가 들어가는 바람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둬야 했다. 다시 농사지도 원 자격을 얻기 위해 4개월간 교육을 받았는데 수료 1주일만에 해방이 됐다.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니 띌듯이 기뻤다. 그동안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버틴 것이 보람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좌익사 상이 북한을 뒤덮기 시작했다. 책도 많이 읽고 서울생활도 해보고 감옥에도 갔다온 나는 고향에서는 대단히 유식한 청년으로 통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민청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나는 그때까지 톨스토이나 간디의 영향을 받아 인도주의 사상이나 토지개혁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우리집도 지주에 속했으나 협조 를 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군 인민위원회가 조직되고 와서 일하라는 요청에는 불편했다. 공산당 열성파들의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협조를 하지 않자 그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또 갈등이 있었던 것은 그들이 애국가를 부를 때 ‘하느님이 보 우하사’를 ‘인민들이 보우하사’로 바꿔부르는 것에 내가 항의를 하고 바꿔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즈음 나는 기독교 신앙에 더 깊이 몰입했다. 하나님께서 꿈으로 나의 석방을 암시해주신 것을 기억하면서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게 을리 하지 않았다. 나는 북한에서 갈등을 갖고 지내느니 남한으로 내려가 공부를 더하리라고 생각했다. 1946년 7월7일 부모님께 하직인사를 하고 고향을 등졌다. 부모님은 같이 지내길 원하셨지만 아들의 꿈을 말리진 못 하셨다. 나는 어 머니가 마련해준 명주 2필을 지고 무작정 서울로 걸어내려가기 시작했다. 평양을 나와 철로를 따라 걸었는데 그만 신막이란 곳에서 보안서원에 붙잡히고 말았다. 당시 청소년이나 청년들은 보이는 대로 바로 인민군에 입대시키곤 했다. 보안서원은 나를 여관으로 데려가 하루를 묵게 한 다음 경찰 서에 간다며 여관주인에게 나를 잘 감시하라고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낙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한에 가기도 전에 붙잡혔으니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간절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 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여관주인이 내 모습이 불쌍했는지 “도망쳤다고 할 테니 그냥 가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분명했다. 감사인사를 하고 부지런히 그 지역을 빠져나왔다. 이후부터는 허름한 농부옷을 입은 채 걸었다. 보안서원을 만나면 근처에 산다고 둘러댔다. 그 결과 무사히 서울까지 도착할 수 있었 다. 어머니가 주신 명주 2필을 노잣돈으로 유용하게 사용했다. 단신 월남한 나는 이때부터 고된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책장사도 하고 이곳저곳 쫓아다녔지만 정착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연결 된 것이 ‘조선민족청년단’이었다. ‘족청’으로도 불렸던 민족청년단은 청산리 전투 등 독립운동으로 유명하고 건국 후에는 국무총 리를 지낸 이범석 장군이 주도하여 창설된 단체였다. 당시 김형원 김관식 김활란 백낙준 설린 선생 등이 참여해 나도 가입을 결심했다. 당시 청년단 중앙훈련소를 만들었는데 내가 1기생 으로 입소해 훈련을 받았다. 나는 우국충정이 가득한 애국지사들의 강의를 들으며 투철한 민족관과 애국심을 가지게 되었다. 과정이 끝난 뒤 공부평가 성적과 면접을 거쳐 나는 청년단 간부 요원으로 발탁됐다. 훈련소 교무처에 근무하게 된 나는 송면수 장준 하 선생 등을 모시고 일했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의 지시로 민족청년단은 해산되고 대한청년단과 통합됐다. 이를 김철씨와 반대했던 나는 ‘보라매동창회’를 만들었다. 또 기억나는 것은 1947년 겨울 ‘간디청년협회’를 조직한 것이다. 간디의 비폭력 진리운동을 흠 모하던 나는 간디의 서거 1주기를 맞아 친구들끼리 모임을 만든 것이다. 백낙준 박사가 축사를 했고 내가 ‘간디와 네루의 사상과 역 할’에 대해 강연했다.
나는 민족청년단에 있으면서도 늘 공부를 제대로 해보고 싶은 향학열에 불타 있었다. 그래서 김철 김원경 백동기 등과 함께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가기로 했다. 우리는 재일거류민단장에게 보내는 국무총리의 소개장과 무정부주의 독립운동가 박렬 선생이 일본대학 교수들에게 써준 추천장까지 받아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만 무사히 도착하면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밀항선은 일본 도착 즉시 발각돼 우리는 하리오라는 수용소에 20여일간 억류됐다가 송환되는 바람에 일본 유학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때 다른 배를 탔던 김철 동지는 무사히 도착해 도쿄로 가서 거류민단 사무총장까지 지냈다.지금도 가끔 내가 만약 그 배 를 탔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해보지만 하나님께서 한국에서 더 할 일이 많아 못 가도록 막으신 것이라고 믿는다. 청년단이 해산된 후 특별히 갈 곳이 없었다. 이때 “같이 수양이나 하자”는 신현상 선생의 요청으로 그 분 자택이 있는 공주에서 10 개월쯤 지냈다. 신현상 선생은 김구 선생의 한문 비서로 경교장 판공실장까지 지낸 애국지사였다. 또 우리가 경교장에 김구 선생을 찾아뵐 때마다 다리를 놓아주셨던 분이었다. 우리는 그때 민족지도자의 거처에 가보는 것 자체에 크게 감격하여 경교장을 출입하곤 했다. 김구 선생은 “응,왔어”라고 반기시며 우리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즐겨 하셨고 냉면도 사오도록 하여 같이 드시곤 했다. 공주에서는 민족청년단 출신인 박종민 이병수 등과도 같이 지냈는데 10개월만에 6?25가 발발했다. 부산으로 피란을 간 나는 국방부 문관으로 공채돼 정훈국 포로심사위원회에서 일했다. 피란시절 부산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을 지낸 김재준 목사를 만난 것은 신앙생활에 더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사상지’ 에 기고도 해주시고 좌담회에도 잘 응해주셨으며 말년에는 도산사상연구회 고문도 맡아주셨다. 김재준 목사님은 인간 현실에 깊이 파 고들어 민주 정치와 정의 사회 구현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셨다. 김 목사의 제자들은 사회 일반과 민족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진 강 원용 조향록 문익환 서남동 목사 등이었다. 또 영락교회를 이끈 한경직 목사님도 내가 자주 찾아뵌 분이다. 한 목사님은 “교회는 정치에 개입하지 말아야 하고 따라서 정치 현 실을 비판할 이유도 없다”며 철저한 정교분리의 입장을 견지하셨다. 그래서 오로지 신앙 중심으로 사셨고 천성이 온화하고 고결하여 정통교리에 충실한 목회자였다. 부산에서 민족청년단에서 나오며 헤어졌던 장준하 선생을 다시 만났다. 장 선배는 잡지 창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장 선배가 잡지의 주간을 맡고 원고 청탁이나 편집은 내가 도맡다시피해 만든 잡지가 52년 9월에 창간호를 낸 ‘사상’(思想)이었다. ‘사상’ 은 부산에 피란 와 있던 당대 저명인사와 지식인들의 글을 주로 게재한 수준높은 잡지였다. 원고 청탁 덕분에 쟁쟁한 분들을 많이 만 날 수 있었다. 자유당 국회의원 이교승씨와 백낙준 박사를 아는 미국인을 통해 미국문화원의 지원도 받았다. 그런데 이 잡지는 4호를 발간한 후 폐간되고 말았다. 원고 청탁 때문에 이화여대 학장이던 박마리아 여사를 만나 내가 잡지사의 상황 을 자세히 이야기한 것이 화근이었다. 잡지를 지원하던 백낙준 박사가 자기 세력을 만들고 있다는 것으로 확대해석돼 이승만 대통령 의 귀에 들어간 것이다. 나는 박마리아 여사가 남편 이기붕씨와 함께 이 대통령의 총애를 받고 있는지 전혀 몰랐던 것이다. 나는 송 구한 마음으로 기자생활을 끝내야 했다. 그러나 장선배는 부산에 남아 54년 4월에 ‘사상’의 후신격인 그 유명한 ‘사상계’(思想界)를 창간한다. 나는 잠시 해운공사 공보 비서를 지내다 대한적십자사 청소년국장직을 맡아 1953년 서울로 돌아왔다. 올해가 2003년이니 내가 적십자운동에 몸담은지 정확히 50년이 되는 셈이다.
하나님이 꿈속에서내가 적십자운동에 관계하게 된 사연은 이렇다. 해운공사 공보비서로 일할 때 어느 날 사장(정은수)이 나를 불렀다 . “내 친구(현정주)가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인데 자네를 새로 신설되는 적십자 청소년사무국장으로 일하게 해달라고 자꾸 조르는데 자네 의사는 어떤가”하고 묻는 것이었다. 적십자운동에 대해 잘 모르던 나는 생각해보겠다고 말했는데 현정주 사무총장이 직접 나를 찾아왔다. 그는 “외국에는 청소년적십자 단이 있어 활발한 봉사활동을 하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설립되지 않아 새로 신설하려 한다”며 “적임자를 찾기 위해 주위에 자문을 구했는데 자네를 추천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외국의 청소년적십자 단원들이 한국의 청소년 단원들에게 선물을 보내오는데 아직 청소년단체가 없어 난처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내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민족청년단에서 열심히 활동한 것 을 기억하고 주위에서 추천해준 것 같았다. 근대 시민사상의 이념적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혁명이 자유 평등 박애를 인류사의 지향점으로 제시했다면 적십자운동은 박애를 앞세운 운동이다. 1864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시작된 인도주의 운동으로 “인류가 사는 곳에 재난이 있고 재난이 있는 곳에 적십자가 있다”는 슬로건이 말해주듯 인류애에 뿌리를 두고 인간존중,공정한 구호와 봉사,상호 이해와 평화 추구로 요약된다. 이 사상은 그동 안 내가 책을 읽으며 참된 가치로 여겨온 부분들과 일치되는 내용이 많았고 기독교의 헌신적인 사랑과 일맥상통했다. 적십자사의 봉급 액수를 묻자 해운공사에서 받는 액수의 반도 되지 않았다. 결혼 전이었으므로 나는 ‘돈’보다 ‘가치’에 의미를 부여하기로 했다. 즉시 적십자 청소년 국장으로 일을 시작한 나는 보름만에 설립 취지와 목적,활동을 담은 안내 팸플릿을 만들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허가를 받아 53년 4월5일 정식으로 청소년적십자단이 출범했다. 나는 이때부터 정확히 30년간 대한적십자사에 몸담아 근무하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적십자사에서 일하기 10일 전쯤 이 사실을 꿈으로 보여주셨다. 당시 아침저녁으로 묵상을 통해 기도생활을 꾸준히 해왔던 나는 국가의 큰일이나 개인의 일 등이 꿈을 통해 예견 되고 이것이 정확히 맞는 경우가 많은 편이었다. 그 꿈의 내용은 이렇다. 내가 가본 적이 없는 원산 명사십리 해변가에 있었는데 누가 멍에를 메어주며 “30리를 가라”고 하는 것이 었다. 그래서 멍에를 메고 30리를 걸어 도착하자 정자가 보이고 꽃이 만발한 가운데 해가 찬란하게 떠 있었다. 당시 너무나 선명했던 이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가 30년만에 알게 된 것이다. 하나 더 이야기 하면 6·25가 발발하기 하루 전날이었다. 공주 신현상 선생 댁에서 지낼 때였으므로 사택 마루에서 자다가 꿈을 꾸었 다. 한반도 지도가 보이며 북한에서 불이 붙어 내려오는데 활활 타는 불이 아니라 나지막하게 바닥으로 깔리는 검은 구름과 함께 타 는 음산한 분위기였다. 그 가운데 붉은 호랑이 한마리가 나를 향해 집어삼킬듯 달려들었다. 그래서 옆에 있던 큰 바위를 번쩍 들어 호랑이를 향해 던지려는데 갑자기 남쪽에서 붉은 호랑이보다 배나 더 큰 흰호랑이가 나타났다. 그러자 붉은 호랑이는 불길 속으로 도 망쳤다. 그리고 남쪽의 큰 고목나무에 꽃이 피었다. 참으로 기이한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6·25가 터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꿈을 믿었기 때문에 부산에서 피란생활을 하면서도 남들처럼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연합군이 남한을 도와 반드시 인민군을 이긴다고 확신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꿈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앞날을 꿈을 통해 예시해주시는 경우가 많은데 나도 그런 편이다. 이후에도 나는 꿈을 통해 여러 사건을 알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나의 기도생활은 이때에도 계속됐다.
1953년 대한적십자사 청소년부장을 맡은 이래 정말 열심히 일했다. 내 인생의 황금기인 젊은 시절의 열정을 온통 이웃과 사회를 위해 돕고 봉사하는 적십자 운동에 쏟았다고 생각하면 나름대로 보람이 크다. 더구나 이 일을 하면서 정말 존경하는 많은 분을 만나 교제하고 신앙을 본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조건이다. 적십자사에서 얻은 가장 큰 선물이라면 무엇보다 아내를 만난 것이다. 내 일생의 반려자가 된 어귀선(魚貴善)은 대한적십자사에 나보 다 1년 먼저 입사해 구영숙 총재의 비서로 일하고 있었다. 천성이 착하고 살림을 지혜롭게 하는 그녀는 4남1녀를 잘 길러내고 내조를 잘해줘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 청소년적십자(JRC)가 설립된 후 첫 봉사활동은 부산 송도 뒷산에 200여명의 중?고생이 2만그루의 나무를 심은 일이었다. 그해 여름에 는 부산 광안리해수욕장에서 각 학교 대표들 100여명을 모아 JRC 리더십 강습을 실시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청소년적십자운동은 본부가 서울로 다시 올라오면서 더욱 활성화되었다. 이 무렵 내 신앙에 새로운 도전을 준 분이 함석헌 선생이었 다. 55년 가을 학생들에게 좋은 메시지를 전해줄 만한 분이 없는지 물색하던 중 장준하 선배의 소개로 서울 충무로 자택으로 함 선생 을 찾아갔다. 긴 흰수염과 흰 바지저고리 차림이었던 함 선생은 구도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분은 신의주학생의거의 배후 인물로 투옥된 경력이 있으며 47년 단신 월남한 후 많은 학교와 단체에서 성경강론을 하며 주목받기 시작한 사상가이자 민권운동가,문필가였다. 함 선생은 국가주의와 강권주의를 모두 배격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인 ‘역사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지론을 펴셨다. 나는 첫 대면 에서 “역사란 전진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 명령하신다”는 말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선생은 이후 자주 모임의 강사로 초청돼 말씀을 해주셨으며 ‘청소년적십자’란 잡지에 고료도 받지 않으시고 글을 주시기도 했다. 함 선생의 스승인 류영모 선생도 내게 신앙적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준 분이었다. 오산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기도 한 그분은 승동교회 에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셨고 한때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기도 하셨다. 류 선생은 식(食)과 색(色)이 심성을 흐리게 한 다며 하루 한끼 소식을 하시며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시는 영향도 컸다. 나는 사상적으로 영향은 받았지만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수긍하지 못 했다. 나는 하나님이 만든 생명의 법칙은 제때에 음식을 고루 먹고 정신과 육신을 건강하게 가꾸는 것이라 여겼다. 세상을 살면서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는 말되 세상을 좀더 좋게 만들기 위해 열 심히 일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러려면 인연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생명계의 연장으로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 고 보다 보람있는 삶에 필요한 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세상이 험하고 추해서 살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이 땅은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 으로 하여금 지배하도록 하셨다. 하나님이 섭리하는 이 땅이 나는 쉽게 파멸될 것으로 보지 않는다.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늘 회개하고 구원의 반열에 들어서길 원하고 계시므로 나는 늘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단원들이 부를 ‘적십자의 노래’와 ‘청소년적십자단가’가 필요했다. 작사를 누구에게 부탁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문단에서 원로애 국시인으로 대우받던 김광섭 선생에게 부탁드렸다. 정말 잘된 가사여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십자의 노래는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이,청소년단가는 김대현 선생이 작곡해주셨다.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고 신앙적으로 더 성숙될 수 있었던 적십자 활동은 시간이 흐를수록 내게 큰 보람을 안겨주었다. 청소년 시절 적십자 활동을 활발히 했던 단원들이 사회에 나가서 지도자로 성장하고 사회의 중요한 인물들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적십자운동은 1903년 대한제국이 ‘제네바 협약’에 가입함으로써 비롯됐다.그러다 1905년 고종은 칙령으로 적십자사 규칙 및 관제를 공포,적십자운동 기틀을 세웠다.그러나 한일합방 직전인 1909년 일본은 대한제국의 적십자사를 폐합시켜버렸다. 그후 상해 임시정부에서 다시 적십자운동을 시작,제네바에 대표를 보내기도 했는데 해방이 된 후 1949년에 대한적십자사(한적)가 재 조직됐다.6.25 전란을 치르는 동안 한적은 조직을 정비하고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 적십자사의 많은 지원을 받아 재민구호와 대군봉사 에 매우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때인 1953년 청소년적십자가 부산에서 발족되고 내가 그 책임을 맡은 것이다.50년대 후반에는 한적 전국 지사조직이 정비되고 병원 이 설립됐다.빈발하는 수해와 화재 등 이재민 구호에 주력했고 농촌봉사 식수조림 고아원위문 국제친선교류 등에 나섰다. 나는 1972년 50세의 나이에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으로 임명됐다.이 때까지 한적은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각 종 프로그램 개발과 구 호 및 봉사범위를 계속 확대해 나갔다.적십자연맹의 JRC자문위원과 집행위원 등에 당선돼 국제활동에도 활발히 참여했다. 그러나 내가 한적에 몸담으며 가장 보람있게 여기는 것은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려 4반세기 동안 단절됐던 남북한이 수십차례의 예비회 담과 8차례의 본회담을 가짐으로써 7?4남북공동성명을 성공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74년부터는 헌혈운동을 개시하고 낙도 벽촌을 찾아다니는 순회진료,무료개안수술과 어린이집 청소년복지관 등을 개관해 도움을 주었 다. 이렇게 왕성하게 일한지 30년이 되던 1982년,나는 사무총장직에서 물러나며 적십자사를 떠나기로 했다.사무총장이 별정직이기는 하지 만 정년도 가까워졌고 건강도 돌보아야 한다고 판단해 스스로 물러난 것이다.그 사이 내가 출석하던 서울 종로 초동교회에서 장로로 피택을 받았다.장로가 되고나니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에 더 열심을 내야 하겠다는 사명감이 생겼다.그래서 이 때 부터 기독교 단체나 평신도 운동에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게 새로운 길을 예비해 놓고 계셨다.병원에 좀 입원에 건강을 회복하자 흥사단에서 이사장을 맡아달라는 제의 가 들어온 것이다. 흥사단은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이 민족의 자주독립과 인물양성을 위해 191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한 민족운동단체였 다.흥사단은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 독립 운동 단체로서 국권 회복에 기여할 인물 양성에 노력했으며 상해임시정부의 운영 자금을 조 달하는 등 독립 운동을 적극 지원했다.해방 후에는 국민 계몽 운동 단체로서 금요강좌의 개최와 새벽지의 발간 등을 통해 자유와 민 주 사상을 고취하였다.특히 1963년부터는 미래 한국 사회 지도자와 흥사단 후계 세대 양성을 위한 청년 학생 운동으로 ‘흥사단 아카 데미 운동’을 전개하였다. 내가 흥사단에 참여할 즈음은 때맞춰 일기 시작한 민주화열기의 영향으로 흥사단은 노장층과 청년층 간에 다소 갈등이 있었다.각 대 학에 설립돼 있는 흥사단 아카데미 활동이 본부와의 연락을 거의 끊은 채 진행하는 경우도 많았다. 흥사단에서 나를 이사장 자리를 맡아달라고 한 것은 이런 내부 불협화음을 추스리고 시대적 흐름에 맞게 흥사단의 활동방향을 새로 잡아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나 역시 도산 안창호 선생을 존경하고 그분의 사상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기에 쾌히 승락,시민운동 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곳에서도 도산 생존시부터 흥사단 멤버셨던 이용설 박사를 비롯 장리욱 주요한 최희송 백낙준 김재순 김주홍 안병욱 안기영 선생 등 많은 선후배들을 만나게 되었고 교제했다.이사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나는 세대간 갈등을 해소하고 역사인식과 시대적과제에 대한 책임인식,재정기반을 튼튼히 하는 것에 주력했다.
나는 흥사단 이사장으로 있는 동안 안창호 선생의 사상과 그 유지를 효과적으로 펼치기 위해 휴면 상태에 있던 ‘도산기념사업회’를 재건,부활시키는 한편 ‘도산사상연구회’를 새로 발족시켰다. 도산의 유업을 되살려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보다 객관적인 측면에서 뜻있는 학자들과 유력 인사들이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산기념사업회는 초대회장에 김상협씨,2대 회장에 강영훈씨를 모시고 일을 했다. 흥사단에 대해 모르는 분이 많은 것 같아 약간 설명을 하고자 한다. 안창호 선생을 따르는 서북지방 출신 사람들이 주축이 돼 결성된 흥사단은 창립 당시 “본 단의 목적은 무실역행(務實力行)으로 생명을 삼는 충의남녀(忠義男女)를 단합하여 정의(情誼)를 돈수(敦修) 하며 덕체지 삼육을 동맹수련(同盟修鍊)하여 건전한 인격을 지으며 신성한 단체를 이루어 우리 민족 전도 번영의 기초를 수립함에 있 다”고 밝혔다. 그래서 흥사단은 ‘무실(務實) 역행(力行) 충의(忠義) 용감(勇敢)’ 4가지 기본정신을 바탕으로 ‘인격 단결 공민’의 3대 수련 활동 을 해왔다. 특히 1980년대 들어 사회 각계에서 민주화 투쟁을 전개하여 우리 사회의 민주 발전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이밖에 다양한 공익사업을 전개하고 있으며 21세기 3대 운동으로 민족통일운동,투명사회운동,교육·청소년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흥 사단 본부는 서울에 있고 전국 20여개 주요 도시에 지부가 조직되어 있다. 이 무렵 많은 곳에서 강연 요청을 받았다. 인생을 바르게,가치있게 살기 위한 방법을 나누는 강의를 많이 했다. 강의 내용은 기독교 진리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때 주로 강의한 내용이 ‘생명질서 존중과 인간 존엄성 회복’이었다. 나는 “사람이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란 성경구절을 인용하며 이렇게 강조하곤 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존재에게 최고의 가치는 생명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라는 대생명권의 위대한 질서 속에 속해 있으며 인 간 뿐 아니라 더불어 생존하는 모든 생명 역시 존엄하다. 모든 생명은 대자연의 신비하고 풍성한 섭리와 혜택에 의해 태어나고 성장 하며 발전한다. 그러므로 생명 질서 존중은 곧 인류의 삶의 터전을 존중하는 일이다.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한다고 하는 것은 사회적 역사적 공동체 의식을 갖고 삶의 의미와 목적을 깨닫고 좀더 나은 이상을 추구 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 존엄성의 고유한 기능은 일차적으로 선을 지향하는 마음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을 사랑하 기 위해 양심을,선을 알게 하기 위해 이성을,선을 선택하고 실천하도록 자유를 부여했다. 인간 생명의 가치는 그 사명과 뜻을 발견하 고 뜻을 세워 사람으로서,자유시민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와 직분을 다하기 힘쓸 때 비로소 구현되는 것이다.” 주위에는 ‘왜 사느냐’는 질문에 제대로 답을 못하는 사람이 많다. 기독인은 신앙 안에서 참된 자유인으로서의 삶을 만끽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안에서 바른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사명과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 은혜와 복을 누릴 수 있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겠다는 의지로 일을 하기보다는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선택되는 경우가 많았다. 1988년 올림픽이 열리던 해 당 시 방송위원장을 맡고 있던 강원용 목사님께서 나를 KBS 사장으로 추천하셨다. 당시 노태우 정부에서는 다른 후보를 천거했다. 그래 서 이사회 표결을 거쳤는데 7대5로 내가 선출됐다. 당시 KBS는 시청료 거부 운동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던 상황이었다. 나는 그동안 정치적 다툼이 별로 없는 봉사단체와 정신운동단 체에서 일했기 때문에 KBS가 생경하고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 사장으로 보내신 분명한 뜻이 있으리라 믿고 열심히 일해보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했다.
KBS 사장이 된 후 내 소신은 방송이 국민을 위한 민주방송으로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교육방송자문위 원으로 있었고 또 사회교육방송 고정 출연자였기 때문에 방송을 접하며 나름대로 느끼는 바가 많았다. 그래서 방송철학과 사훈을 제시하고 직원들을 독려해 열심히 일하는 풍토 만들기에 앞장섰다. 아울러 시청률을 감안한 오락 프로그램 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역사 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리 등 교육적 측면을 고려한 방송이 되도록 나름대로 신경을 썼다. 직원들 사이에 열심히 잘해보자는 의견이 모아지고 올림픽 개최에 따른 경제 상승 무드가 더해지면서 1989년말의 방송사는 60억∼70 억원의 흑자를 냈다.시청료 납부 거부 운동도 자리를 감췄다. 사장으로 재임하던 중 몇몇 주요 인사와 한정식집에 가게 됐는데 1인당 16만원짜리 인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직원들에게 아무리 공 금이지만 이렇게 비싼 식사를 해야 하느냐고 말했더니 “이 정도는 싼 것”이라고 하는 말에 고개를 젓지 않을 수 없었다.우리나라에 서는 공무원이나 회사 임직원은 판공비를 미치 공돈이라도 되는 것처럼 헤프게 쓰는 경향이 있다. 물질은 아끼고 나눌 때 더 자유롭 게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는 아내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데 지금도 생활비가 200만원을 넘지 않는다. 이 가운데 반 이상은 아는 분들의 경조사비로 나간다. 지금도 외국손님이나 귀한 초청으로 중요한 모임이 아니면 설렁탕이나 냉면으로 식사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돈은 쓰면 쓸수록 돈에 구속되는 것이 인간이다. 쓰는 만큼 벌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아내는 지금도 택시 타는 것을 어려워한다. 지하철과 버스로도 충분 하다는 것이다. KBS 사장으로 부임한 초기 6개월은 사원들이 특근비도 없이 모두 합심해서 일했고 회사도 흑자가 났으니 연말에는 특근비를 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직원들의 건의가 있었다. 이에 따라 노사협상을 거쳐 특근비 지급을 결정하고 이사회 결의를 거쳐 특근비 17억원을 지 출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감사원의 감사를 세차례나 받은 후 특근하지 않은 사람에게 지불한 3000만원을 회수하고 담당 국장 2 명을 사퇴시키라는 지시가 있었다. 나는 사장 책임이라고 판단,정부측에 사의를 표명하고 사표를 썼다. 그러자 KBS 노조원들이 정부 조치에 반발하는 집회를 갖고 시위대가 광화문까지 진출하는 등 거세게 반발했다. 당시는 민주화 바람이 거셌고 각 기관이나 언론사에서는 노사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때라 이 사태가 사회에 미친 파장이 적지 않았다. 후임 사장으로 노조가 기피하는 인사가 임명되는 바람에 사태가 더욱 악화되어 그 후유증이 상당히 오래갔다. 1959년부터 초동교회에 출석한 나는 교회를 담임한 조향록 목사에게 신앙적 감화와 함께 삶에 대한 바른 가치를 정립하는데 많은 도 움을 받았다.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신앙관을 토대로 신앙의 사회 참여에 대한 인식을 넓힐 수 있었다. 조향록 목사님이 은퇴하신 후 에는 신익호 목사님에게 도움을 받으며 형제와 같은 우의를 다져가고 있다. 상당수 한국교회에는 전통적인 보수신앙이 자리잡고 있다. 종교는 문화를 만든다.한국 기독교는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들여온 그때의 예배 형식과 찬송을 사용하고 사회 참여와 개혁에 부담을 느끼는 부분이 많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해하고 포용하고 사랑하려고 노력 할 때 하나님의 의가 실현된다고 믿는다. 성경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가르친다. 나는 이 진리의 핵심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랑이 사물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존재를 삼라만상 속에서 찾아내게 한다. 별과 산,강,스치는 바람 소리에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만날 수 있다. KBS를 떠난 뒤에는 92년 새로 발족한 세계선린회 이사장직을 맡았다. 같은 초동교회 성도로 친교가 있던 이수민 목사가 세계 YMCA 사 무총장직을 마치고 귀국,선린회를 만들었는데 내가 동참을 한 것이다. 이수민 목사를 회장으로 신익호 유경재 목사,이일선 씨 등이 이사로 앞장선 이 운동은 기존 사회복지운동과 차별화된 의미있는 사업 이었다. 즉,조선족 동포나 못 사는 지역 제3세계 주민들에게 소나 돼지 등을 사줘 기르게 하고 천천히 원금만 갚게 하는 일종의 잘살 기운동을 직접 도와주는 일이었다.
92년 세계선린회 이사장직을 맡은 시기부터 시민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이어 ‘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와 ‘신사회공 동선운동연합 상임공동대표’를 94년에 맡았다. 공동선 운동은 현대 인류사회가 안고 있는 물질문명의 모순과 한국의 민족사적 시련 속에서 생긴 정신문화의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화 시대에 대비,민족국가의 생존 발전을 도모하며 사람답게 살 수 있는,선진사회를 만들기 위한 운동이었다. 나는 인간이 지향해야 할 공동선의 과제를 12가지로 잡아 이것을 꾸준히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그것은 첫째 인간존엄성 회복이며 둘째 생명질서존중과 환경보호였다.이것은 앞에서 자세히 설명했다.셋째가 가정윤리회복과 자녀의 바른교육이다.가정은 축복받은 인 생의 요람이요 생활의 터전이 되는 공동체다.안식과 위안,활력을 얻기 위해서는 어른을 공경하는 효도와 부부의 도리를 다하는 태도 가 필요하다.자녀들에게 부모가 모범을 보이도록 힘써야 한다. 넷째가 전인성과 전문성을 기르는 교육의 실현이다.청소년들의 성장 발달 단계에 맞추어 덕성과 지성,정서와 신체발달을 균형있게 돕 는 전인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다섯째는 건강한 도덕적 신사회의 건설이다.사회 구성원들이 선량하고 건전한 도덕성과 주인의식을 갖 춘 자유인격으로 날마다 거듭나며 성숙해 나가야 한다.여섯째가 정의로운 민주사회의 건설이며 일곱째가 고루 잘 사는 복지사회의 실 현이다.여덟째가 수준높은 문화사회의 실현이며 아홉째가 국제경쟁력 강화와 경제정의의 실현이다.열번째가 평화적인 남북통일과 민 족의 부흥발전이며 열한번째가 온세계가 하나되는 인류공동체 실현이다. 나는 12번째 마지막을 종교와 신앙인의 윤리실천이라고 강조했다.종교는 선과 정의를 힘써 행하도록 함으로써 악을 근원적으로 봉쇄 하고 자발적인 선의 힘을 일으키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나는 기독교 신앙의 분명한 사명이 인류의 구원 뿐만 아니라 인 간을 죄악과 고통에서 구원하고 기쁨과 소망을 갖고 바른 삶과 도리를 다하도록 인도하고 봉사하는 것에 있다고 믿는다. 나는 대한적십자사에 근무할 때 현재 건물이 있는 남산 입구에 집을 마련하고 이곳에서 20년 가까이를 살았다.그리고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남산을 올라가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상쾌한 아침공기를 마시며 남산을 올라가는 기쁨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남산에 오르다 보면 언제나 내가 앉아 기도하는 바위가 나타난다.나는 이곳에 앉아 20분에서 30분 정도 어김없이 아침기도를 하곤 했다. 자연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기도를 드리면 마음 속에 침전돼 있던 갖가지 상념과 걱정이 사라지고 그곳에 새로운 자신감과 기쁨이 생 긴다.기도 속에 모든 것이 정화되는 것을 체험한다.아침마다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기독교인의 특권이요 자랑이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 옆에 우리와 함께 늘 계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매사가 조심스러워지지 않을 수 없다. 1993년,세계선린회 이사장의 자격으로 회장인 이수민 목사와 현재 국무총리인 고건씨,서울대 정경근 박사 등 6명과 옌지와 백두산을 방문했다.조선족과 한족이 사는 화룡현과 서성진 장항촌을 방문해 선린회가 마련해 기증한 소 70마리를 기르는 현장을 보았다.문화관 과 지붕개량 등도 돌아보고 격려하는 시간을 가졌다.다른 민족에 섞여 살면서도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과 생활풍습,말을 그대로 간직 한 것에 감동을 받았다. 백두산에도 올랐다.2년전에 정주영 회장의 초청으로 온 적이 있으나 그 때는 바람이 세차게 불고 구름이 끼어 천지를 제대로 보지 못 하고 돌아갔었다.그런데 오늘은 날씨가 화창한데다 구름이 없어 그 놀라운 풍광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아침 햇살과 어우려져 신비스 런 모습을 드러낸 천지의 모습은 아름답다 못해 외경스러움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멀러 건너편에 북한땅이 보이고 초소와 북한병사도 보였다.한민족의 얼이 담겼다는 이 놀라운 곳을 우리 땅이 아닌 중국에서 보아야 한다는 서글픔이 밀려오며 기도하고픈 마음이 생겼다.나는 일행과 조금 떨어져 바로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일찍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거룩한 곳에서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열어주셨고 오랜 세월동안 험난한 시 련을 통해 민족을 단련시켜 구원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이 민족을 긍휼히 여기시고 자비와 은총으로 축복을 내려 주옵소서.분열 된 민족이 화합하고 단결하여 남과 북이 통일되어 자유와 정의와 복지를 누리게 인도하소서” 기도는 멈추기 힘들 정도로 계속됐다.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이 가슴 가득 느껴졌다.
2000년 1월,나는 새천년민주당 대표를 맡았다. 주위에서는 모두 깜짝 놀랐다. ‘의외의 인선’이라는 반응에다 내가 평소 정치를 하 지 않는다는 분명한 입장을 취해왔기에 놀라고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배경을 좀 설명할 필요가 있다. 새천년민주당 창당을 앞두고 정균환 의원,한광옥 대통령 비서실장이 차례로 찾아와 입당을 간곡히 요 청했다. 이에 대한 내 주장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강원용 목사에게 자문을 구했더니 “한번 최선을 다해 보라”고 격려했고 가족 회의를 열었더니 “아버님이 평소 나라걱정을 하면서 생각한 부분들을 국정에 반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반응이었다. 김대 중 대통령이 표방한 개혁정치나 대북 화해정책 등이 내가 시민운동을 통해 추구해온 부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 대통령은 나를 조찬에 초청한 뒤 그 자리서 내게 다시 한번 대표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나는 대통령께 말씀드렸다. “나라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내가 대표직을 사양한다면 내 개인적 이미지나 관리하며 편하게 지내기 위한 떳떳하지 못한 행동이라는 죄책감이 들 것이라 판단해 수락합니다. 세상이 알고 있는 서영훈은 이미지가 좀 희생되겠지만 나라가 잘될 수 있다면 하 는 생각으로 돕겠습니다.” 민주당 대표를 맡은 1년여 동안 나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자리에 연연해 하지 않고 소신껏 일했다. 이 때문에 내게 실망한 분도 많았고 대표직 역할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분도 많은 줄 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일했다고 자부한다. 이제 나는 내 고향인 대한적십자사에 다시 돌아와 남은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하나님께서 언제까지 내게 일을 맡겨주실지 모르지만 주어진 여건 하에서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 연재를 마무리하기 전에 나의 신앙세계와 변천과정을 생각해 본다. 나의 일생을 돌이켜볼 때 거쳐온 생애의 고비고비마다 하나님 의 은총이 항상 함께 하여 오늘의 내가 있게 되었음을 역력히 알 수 있어 감사한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할 것이고 어린 시절 부모와 조부모의 사랑과 보호 속에 지각이 생길 때까지 측량키 어려운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가 있었다. 아주 어릴 적 중병도 여러 번 앓았고 아슬아슬한 사고도 있었다는데 그때마다 구함을 얻은 것도 은총이겠고 청소년기에 읽은 서적들을 통해 받은 성현들의 교훈 또한 나에게 인생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천성으로 타고난 양 심과 지혜를 싹틔우고 북돋워주는 데 적잖은 영향을 미쳤음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17∼18세부터 겪어온 험난한 역경과 시련,유혹에서 나의 지혜나 의지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고 이겨낼 수 없었던 고통과 함정에서 나를 구원해주시고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신 것도 지금 돌이켜보면 헤아리기 어려운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이었다. 나의 신앙이 자라기 시작한 것은 지금까지 언급한 바와 같이 17세 시절부터다. 20세전후 일제하에서는 공포와 불안 속에 방황과 고민 을 거듭했다. 일경에 의한 악형과 공포의 고통에서 형용키 어려운 기적의 체험을 통한 구원의 은총을 입은 데서부터 신령하고 초월적 인 절대존재가 엄존하고 계시다는 신념이 나의 심령 속 깊이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보통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런 것과 같이 나도 가정적,전통적으로는 유교적 윤리교육과 불교적 유심사상(唯心思想)의 영향이 적지 않 았다. 그러나 일제시대와 해방후의 혼란,6·25 전쟁 등 험난한 역사과정을 살아오면서 차츰 인류역사의 배후에는 그 근원이 되고 본 체가 되는 절대존재가 계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인간은 다른 우주만물과의 관계에서 그 자신의 특이한 위치와 존재가치와 사명을 자각하고 다른 생명체와의 윤리적 상호관계를 바로 세워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같은 인류동포인 다른 사람들과의 사회적 윤리적 관계를,영원한 유일자적 존재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바로 찾아 다 같은 자녀요 형제로서의 믿음과 사랑으로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짧은 기간이지만 정치에 몸 담고 느낀 것은 우리 사회가 정치인을 보호하고 일을 잘하도록 격려해주는 게 아니라 무조건 비난하고 공
격한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비난받을 요소도 있고 제도권 정치가 안고 있는 문제점과 한계도 많다. 그러나 우리는 민주헌정 아래서
의회정치가 바르게 실현되도록 먼저 정치인이 앞장서서 노력하고 정치문화를 개선해야 한다. 정당과 정치인 국회의원을 모두 매도하
고 부정해버리면 어떻게 될 것인가.
요즘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더욱 새로워진다. 우리 개개인은 한울의 큰 생명(대생명체)속의 한 분자인 씨알
이다. 씨알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고 그 크고 거룩한 얼,양심과 지혜가 깃들어 있다. 그것이 나와 너,그리고 우리 모두를
하나 되게 하는 속알과 덕성(德性)이요,인간성이요,인류적 양심이다.
성경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자란 후에는 큰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
에 깃들이느니라”(마 13:31∼32)고 말씀하고 있다. 다석 류영모 선생은 일찍이 우리 인간의 생성과 성장 변화를 씨알의 개념으로 파
악하고 씨알이 어떻게 역사의 변화와 맞물리는 지를 역설하였다.
“씨알이 무엇이냐? 곧 나다. 나대로 있는 사람이다. 모든 허식과 가면을 벗은 사람,곧 알사람이다. 정말 있는 것은 알,한 알뿐이다.
그것이 얼이요 언(仁)이며 올(義)이다. 씨 알은 또한 ‘민’이요, ‘민중’이다. 물이 바다로 가는 것이라면 역사는 씨알이 자라고
모인 한울나라로 간다. 바다가 모든 물의 근본이요 끝이듯이 씨알도 모든 인간적 존재의 알파요 오메가다.”
인간에게 주어진 양심과 지혜는 선과 악을 분별하여 선을 택하고 그를 실천하기 위해 있고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 또한 선악을 판단하
고 진리와 정의를 실천하기 위하여 있다. 그러므로 양심의 명령이 곧 하늘의 뜻(志)이고 역사의 명(命)이다. 인간이 그 뜻과 명령을
거역하고 반항하는데서 인류의 죄악이 생겨났고 그 죄값을 치르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구주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으며 우리에게
회개와 중생의 길을 열어주셨다.
나는 적십자운동에 일생을 바쳐왔다. 적십자 정신은 인류애에 바탕을 둔 인도주의 운동이다. 지금은 지구촌 시대요,세계화 시대라고
한다. 지금이야말로 인류적 양심과 인도적 정의를 구현해야 할 시대이며 국제적 정의,인류적 공의 그리고 우주적 질서를 존중하고 구
현하며 순응해야 할 때이다.
인류생활은 자연적 사회적으로 나아가 국가적 국제적으로 모두 하나님의 은총과 공의에 의해 구현되고 실천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 인간이 부여받은 인류적 양심의 명령과 지혜의 판단에 의하여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칸트는 ‘우리들 머리 위의 하늘에는 찬란한 별들이 빛나고 있고 가슴속 깊은 곳에는 살아있는 양심과 이성이 있다’고 했다.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 권능과 은총에 대한 경외와 감동의 심성과 지능을 부여받았다. 인간 본성은 태초부터 천지만물, 우주운행과 생명
의 질서 속에서 그것을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 선한 본성과 지능을 지니고 있다. 우주 천체와 생명질서의 장엄하고 아름답고 신비로
움에 대한 감동, 때로는 천재지변,생로병사,역사의 흥망성쇠와 그 속에서 선악과 상벌의 심판 등을 보며 두려움 경외심 참회 감동을
느끼게 된다.
인간으로서 축복된 삶을 영위해 나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속에 우리의 양심과 지혜를 다하여 이 땅위에서 문명의 역기능
을 방지하고 순기능을 선용하고 활용하여 지상에 그 나라와 의를 구현하는 천국을 건설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요,역사의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믿는 것이 우리들의 신앙이요,삶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짧지 않은 글을 읽어준 독자와 안부전화를 준 분들께 감사드린다. 앞으로 남은 삶은 이웃과 사회에 봉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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