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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 (無比) 큰스님 妙 法 蓮 華 經 문수원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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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공부는 278쪽 제일 밑 줄 부터입니다. 이야기의 내용이 어떻게 되어 가는가 하면은, 모든 사람에게 불성이 있고 그 불성을 계발하는 일을 불교에서는 성불(成佛)이라 말하지요. 누구나 가지고 있는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 다시 말해서 불성이 어떻게 해서 계발이 되는지, 또 어떻게 하면 그 불성을 계발한 최고의 경지, 그런 경지의 삶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성의 가치를 얼마만치 쓰고 있는지, 예를 들어서 불성의 가치가 돈으로 쳐서 백만 원이라면, 그 백만 원어치를 우리가 다 쓰고 있는지, 아니면 한 백 분의 일인 만 원 정도 밖에 쓰고 있지 못한지, 아니면 백분의 일도 못쓰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이런 관계를 사실은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법화경 저 앞에서는 말하자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런 가치를 우리가 한껏 쓰고 살아야 하며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던 조그마한 목표(目標)는, 다시 말하면 삼승(三乘)인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의 지위다, 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또 그 삼승(三乘)이라는 말 속에는 보통 우리가 불교를 통해서 성취하고자 하는 자기의 소망(所望)이 다 들어 있어요. 그것을 낱낱이 다 설명하지는 못하고 경전에서는 삼승이라고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 소망 성취를 가지고 우리는 인간으로써의 어떤 보람과 소질을 계발해서 과연 한껏 누리고 쓰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법화경의 취지는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늘 들은 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질인 부처의 소질을 한껏 계발해서 살아야 그것이 인간으로 태어난 가장 큰 보람이고,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상의 이상(理想), 이상(理想)의 극치(極致)라고 말할 수 있지요.
그러나 그 상태를 누구나 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부처님은 별별 중간과정을 많이 이야기를 합니다.
뭣도 하면 좋고, 뭣도 하면 이뤄지고, 성취되고.. 하는 온갖 중간과정을 팔만사천의 근기에 맞춰서 그야말로 팔만사천 방편으로 그런 중간과정을 설정을 하고 소개를 해요.
그런 중간과정이 우리 마음에 드니까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다.’ 해서 열심히 하다보면 실제로 거기까지 이른 사람도 있고, 또 그보다 좀 더 앞선 먼 데를 설정해 놓은 뒤 거기까지 간 사람도 있고 그래요.
사람들마다 목표를 정해 놓고는 그 정한대로 대개 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마음에 알맞게 정했을 뿐이지 사실은 우리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이상은 아니라는 거지요.
그럼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이상은 뭐냐? ‘부처로써 사는 길’이라는 것을 저 앞에서 쭉 설명을 해 오다가 중간에 여러 가지 비유를 들지요.
장자(長者) 궁자(窮子)의 비유, 제가 많이 이야기 한 것이 그것이지요.
어떤 큰 장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예전에 아들을 잃어버리고 그 아들을 찾아다니다가 어떤 도시에 머물러 살면서 큰 부자가 되었지요.
그런데 아들은 여태껏 거지로 돌아다니다가 그 아버지를 만나게 되는 그런 과정이지요. 아버지를 만나서 아버지의 재산을 전부 물려받는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거지인 아들은 어떻습니까? 평소의 소원이 뭐예요? 오직 품값 그거 제대로 낫게 주는데 가서 거름도 쳐주고 화장실 청소도 해주고, 똥도 쳐주고, 다른 험한 일이라도 좋으니까 일거리만 있으면 좋은 일꾼이었어요.
큰 돈은 상상도 못하지요. 그저 일꾼방에 자면서 밥이나 배불리 먹고 옷이나 따뜻하게 입고 일거리나 많이 있어가지고 그날 그날 비록 험한 일에 싼 품값이지만 그거라도 늘 있었으면 하는 그 정도의 꿈을 가졌다는 거지요.
그게 그 사람의 꿈이고 이상이었어요.
그러나 그것 가지고는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비유인즉슨 그 부자 앞에는 국가의 대신과 바라문, 어떤 대신도 와서 굽신거리는 대부호가 되는 것을 그곳의 이상으로 설정했는데 바로 그런 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의 아버지였다는 겁니다.
아버지가 그러면 아들은 당연히 그럴 수 있다는 거지요.
결국 나중에는 아들이라는 것이 알려지고 그 많은 재산들을 다 물려받는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로 비유가 이어지지요.
거기서 중요한 것은 그렇습니다. 물론 아들인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설사 아들임이 확인되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그 부자의 아들임에는 틀림없다는 사실이에요. 그 부분도 우리가 생각해야 돼요.
확인이 안 돼도 아들은 아들이거든요. 비록 거지라 하더라도 부자의 아들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는 우리 마음에 맞는 조그마한 꿈을 가지고 살지만 그래도 내용은 부처가 될 수 있는 소질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머니에는 백만 원이 있어요, 그런데 어린아이들은 기껏해야 몇 백 원, 몇 천원이면 만족한 그런 정도의 씀씀이밖에 없지만 그래도 그 사람에게는 백만 원이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조그마한 소박한 꿈을 가지고 살지만 사실 내용은 부처로 살 수 있는, 부처의 인격으로 살 수 있는 그런 소질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법화경에서는 일깨워 주는 것이지요.
그러나 처음부터 그런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 할 수는 없지요? 그래서 여러 가지로 근기를 성숙시켜 우리 중생들의 꿈을 자꾸 크게 만듭니다. 처음에는 조그맣게 했다가 차츰차츰 키워가는 그런 과정이 부처님이 중생들을 교화하시는 방편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화성유품(化城喩品)에서는 화성(化城)이라고 하는 비유이야기가 물론 나옵니다만, 지금까지는 대통지승불이라고 하는 부처님을 등장시킵니다. 그 대통지승불에게 열여섯의 아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헤아릴 수 없는 어마어마한 세월동안 살아온 그런 삶의 과정들을 쭉 이야기 하고 있지요. 그 내용 속에는 우리의 꿈을 키워서 성불하게 되는 그것을 인간의 최고의 이상으로 생각하며 우리가 산다고 하는 거,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그런 내용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지요.
여기까지는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대통지승불에게 열여섯 아들이 있었는데 그 열여섯의 아들들이 출가를 했지요. 출가를 해가지고서 대통지승불께 법화경을 배운 열여섯 보살사미들은 대통지승불이 선정에 들어있는 동안에 각자 자기와 인연 맞는 곳에서 법화경을 설하여 많은 중생을 건지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일금 부진이라. 제불세존이 지금까지 다하지 않고 계속되어 내려오고 있다고 했습니다.
115.
제비구(諸比丘)야 아금어여(我今語汝)호리라, 모든 비구들아, 내가 지금 너희에게 말하겠다.
피불제자십육사미(彼佛弟子十六沙彌)은, 저 부처님[대통지승불]의 아들 십육사미는
금개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今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사, 지금에 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큰 깨달음을 얻어서는
어시방국토(於十方國土)에 현재설법(現在說法)하사대, 시방국토에서 현재 설법하고 있다.
곳곳에서 그 십육 아들들이 부처가 되어가지고서 설법을 하고 있다.
유무량백천만억 보살성문(有無量百千萬億菩薩聲聞)이 이위권속(以爲眷屬)이라, 무량백천만억의 보살성문들이 모두 그의 권속이 되어,
제자가 되고, 권속이 되고 이리저리 시방세계 모든 곳에서 온갖 인연을 맺고 있어 우리도 그 권속에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의 이야기이면서 또 지금 듣고 있는 우리도 다 이 권속 속에 포함이 됩니다. 지난 시간에 그랬었지요. 곳곳에서 설법하고 있는 그 인연의 굴레 속에는 우리가 다 들어있다고 했습니다.
곧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116.
기이사미(其二沙彌)는 동방작불(東方作佛)하시니, 그 두 사미는 동방에서 부처를 지었으니
일명아촉(一名阿閦)이라 재환희국(在歡喜國)하고, 이름은 아촉인데 환희국이란 나라에서 교화를 하고 있고
이명수미정(二名須彌頂)이니라, 두 번째 이름은 수미정이니라.
이명은 수미정이란 부처의 이름으로 성불을 해서 교화를 하고 있다.
117.
시방을 다 이야기 하지요.
동남방이불(東南方二佛)은, 동남방의 이불은
일명사자음(一名師子音)이요 이명사자상(二名師子相)이며, 사자음 부처님, 사자상부처님이며
우리가 백팔참회 할 때 나오는 부처님, 또는 천불, 만불명호경에도 보면 이런 부처님 이름이 전부 망라되어 있습니다.
118.
남방이불(南方二佛)은 일명허공주(一名虛空住)요 이명상멸(二名常滅)이며, 허공주부처님과 상멸부처님이 남방에서 교화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그 다음,
119.
서남방이불(西南方二佛)은 일명제상(一名帝相)이요 이명범상(二名梵相)이며, 서남방의 부처님은 한 분은 제상이요, 한 분은 범상이시며
120.
서방이불(西方二佛)은 일명아미타(一名阿彌陀)요 이명도일체세간고뇌(二名度一切世間苦惱)며, 서방의 이불은 한 분은 우리가 잘 아는 아미타요, 한 분은 도일체세간고뇌이시며.
일체 세간의 고뇌를 제도하는 부처님, 부처님 이름이 그렇고 또 부처님의 임무가 역시 그런 거지요.
121.
서북방이불(西北方二佛)은 일명다마라발전단향신통(一名多摩羅跋栴檀香神通)이요 이명수미상(二名須彌相)이며, 서북방의 두 부처님은 일명 다마라발전단향신통이요, 두 번째는 수미상이며, 다마라 발전단향이 아니고 다마라발 전단향입니다. 저 앞에서 한 번 있었지요? 전단향은 향이름이니까 다마라발 전단향 신통이지요. 그리고 두 번째는 수미상이라고 그랬어요. 저 앞에서 한 분은 수미정이라고 있었지요. 여기는 수미상입니다.
122.
북방이불(北方二佛)은 일명운자재(一名雲自在)요 이명운자재왕(二名雲自在王)이며, 북방의 이불의 일명은 운자재요 이명은 운자재왕이며, 앞에는 왕(王)자가 빠졌지요? 운자재가 맞습니다. 왕(王)자가 없어요. 이명은 운자재왕, 뒤에가 운자재왕이고 앞에는 운자재이고 그렇습니다.
123.
동북방불명(東北方佛名)은 괴일체세간포외(壞一切世間怖畏)며, 그 다음 동북방의 부처님 이름은 괴일체세간포외이며,
일체 세간의 두려움을 전부 무너뜨려준다고 그랬어요.
동북방의 한 부처님은 그렇고, 또 한 부처님은 뭐라고요?
124.
제십육(第十六)은 아석가모니불(我釋迦牟尼佛)이 어사바국토(於娑婆國土)에 성아뇩다라삼먁삼보리(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아, 석가모니불이 저 사바국토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었다고 그랬어요.
그때의 열여섯째 아들이 바로 나, 지금 설법하고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이거에요.
마지막 제일 막내가 오늘 날 이렇게 석가모니가 되었다는 겁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왜 이런 말을 하냐고 하면은,
그 많고 많은 세월 전에 대통지승이라고 하는 아버지부처님을 모셨고 그로 인해서 공부를 잘 해 가지고 오랜 세월동안 법화경 설법을 많이 해서 오늘 날 이렇게 ??하게까지 되었다는 그런 인연의 이야기입니다.
석가모니 인연이 이렇게 길다고 하면 여러분의 인연도 역시 이렇게 깁니다. 뭐 우리는 그동안 부처를 이루었는지 안 이루었는지 그건 알 바가 없지만 무엇으로 살아왔던지 간에 석가모니 못지 않은 그런 장구한 세월 속에 우리는 살아왔어요.
말하자면 타심통을 못하고 숙명통을 못해서 기억을 못해 그렇지, 부처님같이 이렇게 기억이 생생하다면 다 알 텐데 기억을 못하지요. 기억을 못하니까 지금 아주 밉게 보이는 사람이 과거 전생에 아주 이쁘게 보인 사람이었는지 어떤 관계였는지 지금 알 수가 없어요.
인연이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가까워졌다 멀어졌다가, 원수가 됐다가 아주 친한 이가 됐다가, 아버지가 됐다가 아들이 됐다가, 아들이 됐다 아버지가 됐다가 별별 그저 그런 인연들이 서로 엇바꿔 가면서 길고 긴 세월을 우리가 살아온 그런 인연의 역사, 이것을 지금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자신의 인연을 하나의 어떤 모델로서 이야기 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여기 꽃이 한 송이 있다고 하면, 지금은 꽃이지만 꽃 속에 담겨져 있는 이 요소가 인연이 되어서 나중에 썩어서 거름으로 돌아가지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다면 흙이 또 흙으로 그냥 있나요? 또 어떤 풀의 씨앗이 떨어져 이 꽃이 변해서 된 그 흙에 인연을 맺어 무슨 나무, 무슨 풀이 될지 모르지요. 또 그 위에 곡식이나 채소를 심으면 그 채소를 사람이 또 먹고, 그 사람은 또 어떤 일을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시 또 그것이 증발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서 오늘의 꽃 한 송이가 가지고 있는 수분의 요소가 어디나라에 가서 어떤 빗방울로 떨어질지,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가 될지, 안 그러면 장마비가 될지 뭐가 될지 모르는 거지요.
사실은 모든 존재가 그렇게 수많은 생을 형태만 변하지 그 질량은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계속 그렇게 변화하고 변화하면서 흘러 왔지요, 지금까지 그렇게 흘러 왔습니다. 지금까지 흘러왔고 계속 흘러가고 있고요. 모든 존재가 다 그렇습니다.
삼라만상이 안 그런 게 없어요. 여기서는 석가모니 당신만 이렇게 옛날 대통지승불의 아들이 되어서 어쩌구 저쩌구 한 게 아니에요.
여기 꽃 한송이도 그런 세월을 거쳐 왔고 우리 모두가 또 그런 식으로 다 거쳐 왔습니다. 그렇게 안 거쳐 온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사실은요,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그 양은 더 불어나지도 않고 줄지도 않습니다. 본래 있는 양 그대로에요. 그것이 모양이 변하고 형태가 변할 뿐이지요.
예를 들어서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기도 하고, 눈이 되기도 하고, 수증기가 되기도 하고, 수분만 가지고도 여러 가지가 되지요.
예를 들어 수분이 음식 속에도 들어갈 수 있고 꽃 속에도 들어갈 수 있고, 식물 속에 동물 속에 온갖 분야로 다 굴러다니면서 전전한다고요.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도 그런 세월을 전전해 왔고 꽃 한 송이도 그렇게 전전해 왔고, 산에 있는 이름 없는 돌멩이 하나도 많은 세월을 그렇게 흘러 왔어요.
지금 예를 들어서 어떤 조각품, 석조물이 천 년이 넘었다고 해서 국보니 뭐니 하고 있지요. 그렇게 이름 없는 돌멩이도 천 년이 넘었어요. 천년이 뭐야? 수 억만 년이 되었을 거예요.
사람이 가공한 그 시간부터 따져서 천년이 넘은 국보니 하는 것이지 가공한 이전에도 돌이야, 수 억만 년을 돌로 있었는데 그 역사는 사람들이 생각을 안 한다고요. 사람이 조각한 그 순간부터 말하자면 계산을 해 가지고 역사가 오래됐다 어쨌다 그러지요.
있는 것을 전부 국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요.
석가모니의 살아오신 역사를 생각하면 나 또한 모르고 기억이 안 되어서 그렇지 수많은 세월동안 어떤 많은 인연들을 지으면서 만나고 헤어지고, 헤어지고 만나면서 살아 왔는지 알 수가 없는 거지요.
그리고 우리가 수용 하는 모든 물질들, 모든 사물들 하나하나,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 돌 하나, 전부가 다 그런 길고 긴 역사를 그야말로 변화무쌍한 세월을 거치면서 살아왔지요. 형태만 바꿔가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질량은 변함없이 그대로 수억만 년을 그렇게 내려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이런 것까지도 생각을 하면서 법화경을 읽어야 옳지 않은가 하는 그런 생각입니다.
석가모니 당신 이야기는 여기까지 했고 그 다음부터는 제자들과 관계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125.
제비구(諸比丘)야 아등위사미시(我等爲沙彌時)에, 여러 비구들아. 우리들이 사미가 되었을 때에,
그 열여섯 사람을 말하는 거지요. 우리가 사미가 되었을 때에
각각교화무량백천만억항하사중생(各各敎化無量百千萬億恒河沙等衆生)하야, 각각 교화했다. 누구를? 무량 백천법만억항하사중생들을 교화했다.
종아문법(從我聞法)하고, 그때 사미가 되었을 때 나에게서 법문을 듣고
위아뇩다라삼먁삼보리(爲阿耨多羅三藐三菩提)어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해서, 또 다른 큰 깨달음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정진했었다.
126.
차제중생(此諸衆生)이, 그때 그 많은 중생들이
우금유주성문지자(于今有住聲聞地者)를, 지금 성문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아상교화아뇩다라삼먁삼보리(我常敎化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노니. 지금 이렇게 부처님 제자로 있는 사람들을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써 교화하니
시제인(是諸人) 등(等)이 응이시법(應以是法)으로 점입불도(漸入佛道)니라, 이 사람들이 마땅히 이 법으로써 점점 차츰차츰 불도에 들어간다.
그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차츰차츰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부처의 인격을 완성해 가고 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게 하루아침에 되겠습니까?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에요. 부처님은 이 많은 세월을 거쳐 오면서 비로소 부처님이 되었다, 그러니까 너무 조급하게 생각할 것도 없고, 그냥 이렇게 우리가 마음을 내어서 인연을 맺어 놓으면 되는 거예요. 세월이 흘러가면 저절로 되는 거지 억지로 하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빨리 되는 것도 아니라는 거지요. 이렇게 느긋하게 생각해야 된다는 거지요. 석가모니 부처님을 보세요. 얼마나 오랜 세월을 그렇게 살아왔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부처님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성문제자들을 보고 하는 소리에요.
응당 이 법으로써 점점 불도에 들어갈 것이다, 걱정하지 말라 이거에요.
16왕자였을 때 그 때에 나에게서 법화경을 공부하고 오늘 또 이 자리에 앉아 있는지, 나는 성불하여 부처가 되었는데 아직도 제자로 앉아 있느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127.
소이자하(所以者何)오 여래지혜(如來智慧)는 난신난해(難信難解)니라, 무슨 까닭이냐? 여래의 지혜란 믿기 어렵고 이해하기가 참 어려운 것이니라.
법화경은 워낙 어려워서 옛날에 내가 십육사미였을 때, 그때에 법화경을 나에게 공부했다고 해서 아무나 그렇게 쉽게 되겠느냐? 그러니 내 밑에 제자가 되어 오늘 다시 법화경을 들을 수 있다는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다행이냐는 그런 뜻이 담겨져 있어요.
그때 제자가 지금의 제자예요. 석가모니 부처님이 묘법화경을 설할 때 바로 앞에 앉았던 제자가 옛날에 대통지승불 당시 때의 제자라, 바로 그 제자에요.
바로 그 제자들의 역할과 지금의 인연들을 모아서, 말하자면 회통시키는 그런 이야기가 됩니다.
128.
이시소화무량항하사등중생자(爾時所化無量恒河沙等衆生者)는, 그때 교화한 무량항하사 중생들은,
그때 내가 대통지승불의 아들이 되어 열여섯왕자 중 하나로 법화경을 가지고 많은 중생들을 교화했는데 그들이 누구이냐?
여등제비구(汝等諸比丘)와, 앞에 있는 여러분 비구들과
급아멸도후미래세중(及我滅度後未來世中)에 성문제자(聲聞弟子) 시야(是也)니라, 그리고 내가 멸도한 후의 미래세의 중생과 성문제자이니라.
내가 열반에 든 후 미래세 중에 있는 부처님의 법문을 듣는 성문제자, 성문이라 하는 것은 법의 소리를 듣는 제자이지요.
이런 제자는 바로 오늘의 우리입니다. 그 사람들, 미래세의 성문제자들이 바로 이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부처님 당시 때의 제자들도 옛날 대통지승불 때의 십육왕자 밑에서 공부했던 사람이고, 미래세라고 했기 때문에 오늘 우리이지요, 오늘 우리도 역시 저 십육왕자의 제자로서 그때도 역시 법화경 공부를 했다는 이런 뜻이 여기에 담겨 있어요.
미래세 성문제자가 이것이다, 라고 하는 말에는 그런 뜻이 담겨 있어요.
129.
아멸도후(我滅度後)에 부유제자(復有弟子)가, 내가 멸도한 이후에 다시 제자가 있어 가지고,
제자는 거기에 제자 제(弟)자가 되어야 해요. 글자가 좀 그렇지요. 저 위에 성문제자 할 때도 그렇고, 위에 점이 두 개 있는 제(弟)자 여야지 여기는 차례 제(第)자가 되어 있지요. 제자(弟子)라고 할 때는 위에 대 죽(竹) 대신에 점이 두 개 있어야 제자(弟子)의 제(弟)자입니다. 요것이 아마 안 고쳐졌을 거예요.
불문시경(不聞是經)하고, (제자가) 이 경전을 듣지 못하고
부지불각보살소행(不知不覺菩薩所行)하며, 보살이 행해야 할 바를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면
자어소득공덕(自於所得功德)에, 스스로 자신이 얻은바 공덕에 생멸도상(生滅度想)하야, 자신이 지은 작은 공덕을 가지고 최고라고 생각하는 그런 생각을 내어서
당입열반(當入涅槃)하면, 마땅히 열반에 들어가면,
그걸로 인생을 끝낸다 이거에요.
거기에 불문시경(不聞是經)이라는 말이 중요해요. 이 경전은 여기서 무슨 경전이지요? 예, 바로 법화경입니다.
부처님이 멸도한 후에(이부분은 잘 들어야 되는 경우에요) 다시 또 어떤 제자가 있어서, 부유제자(復有弟子)라고 하는 말은 다시 또 어떤 제자가 있어서,
지금 이 자리에서 공부하는 이 제자들은 아닙니다. 이 제자들은 저 앞에 미래세 중에 성문제자라는 그 제자이고, 부유제자라고 하는 것은 다시 또 어떤 제자가 있다, 라고 하는 것은 법화경과 인연 없는 제자를 말하는 겁니다.
법화경과 인연이 없는 제자들은 얻지 못할 것이다. 그게 뭐에요? 부유제자는 이 법화경을 듣지 못하고서 보살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를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해요. 법화경을 공부해야만이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된다는 것을 비로소 안다는 것입니다. 보살로서 어떻게 생활해야 한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는 그런 뜻이 포함되어 있어요. 아주 중요한 대목입니다.
그 위에 줄은 법화경을 공부한 제자이고, 밑에 줄은 법화경을 공부하지 못한 제자입니다.
부처님의 제자라고 한결같나요? 다 다르거든요.
그저께 어떤 스님이 오셔서 법문을 했는데 하도 할 말이 없으니까 궁한 법문을 한다고 이렇게 말했어요. “나는 스님이니까 아무렇지도 않대. 중놈들이 다 잘못하지 스님들은 아무렇지도 않아.”
그런 말을 듣고 내 어떻게나 우습든지, 하도 궁한 변명을 한다고 하는 말이 “거 싸우는 놈들은 전부 중놈들이야. 스님들은 한 놈도 안 싸운다고. 신도님들은 그리 알면 큰일 난다고. 거기 스님들은 한 명도 없고 전부 중놈들이지, 스님들은 거기 근처도 안 간다고, 그러니 전부 그리들 알아요. 나는 스님이니까 아무렇지도 않아.”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에요. 오죽 궁하면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마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에요. 법문 잘 하는 스님이 그런 말을 했어요. 여기에서도 갔던 사람들은 들어서 알 거에요. 그렇게라도 해서 좀 풀어야지요. “거 중놈들끼리 싸우는 일에 우리 스님들은 아무 관계도 없다고~” ^^*
아이고~ 참, 얼른 들으니 말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거기 속아넘어가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싶기도 하고.....^^*
그런데 그 얘기를 들으니 조금은 괜찮더라고요. 그 얼마나 연구하다가 그런 소리가 나왔을까?
법회는 하겠다고 약속은 미리 해 놨지, 안 갈수는 없지, 그리고 야단은 터졌지, 그러니까 가기는 가야지, 가서 뭐라고 변명을 하기는 해야겠지. 그러니까 한다는 소리가 이렇게 나왔어요. 그런데 법문 치고는 괜찮더라고요.
그러니까 싸우는 사람들은 법화경 공부를 못한 모양입니다.
이 경전을 듣지 못하고 보살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지를 못하고, 깨닫지를 못하며 자어소득공덕(自於所得功德)에, 스스로 자신이 얻은 바 공덕에, 자신이 스스로 얻은 자그마한 공덕이지요.
불교를 믿어 가지고 ‘아, 불교는 이러이러한 것을 말하는구나’ 하고서 거기서 멸도상을 내어가지고서는 마땅히 열반에 들어가거든...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는 거지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130.
아어여국작불(我於餘國作佛)하야, 내가 다른 나라에서 작불을 해 가지고, 부처가 되어 가지고서
갱유이명(更有異名)하리니, 다시 다른 이름으로서,
석가모니가 아니고 그때는 다른 이름의 부처가 된다는 말이지요.
시인수생멸도지상(是人雖生滅度之想)하야 입어열반(入於涅槃)이나 , 그때 이 사람들은, 이 사람들은 그 앞에 나왔던 법화경을 못들은 사람들이에요. 자기가 얻은 그 공덕이 최고라고 생각하나, 예를 들어 기도를 열심히 해서 우리 아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고서는 나는 불교에서 건질 것은 다 건졌다, 더 이상 불교를 믿을 것이 없다는 이런 생각을 만약에 하는 사람이 있다면 부처님은 어떻게 하느냐?
그때는 석가모니라고 하는 이름으로는 통하지 않으니까 다른 이름의 부처가 되어서 이 사람들을, 멸도의 상을 내어 열반에 들긴 했으나, ‘나는 불교에서 얻을 것은 다 얻었다, 이걸로 만족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어피(而於彼) 토(土)에 구불지혜(求佛智慧)하야, 내가 다른 국토에 가서 부처의 지혜를 구하여 가지고서
득문시경(得聞是經)하리니, 이 경전을 얻어 듣도록 하리니,
법화경을 듣도록 한다는 말이지요.
불자가 한 번 되어놓으면 도망 갈래야 도망갈 방법이 없어요. 부처님이 끝까지 쫒아가서 법화경을 가지고 교화를 한다는 이런 말이에요. 이게 그런 모양이에요.
내가 석가모니라 하니 네가 조금 밖에 안 듣겠다하니 나는 그때에 다른 이름으로 부처가 되어서 너에게 쫒아가서 너를 교화할 것이다.
이어피(而於彼) 토(土)에, 네가 태어난 그 곳, 다른 세상에 가서 이 경의 가르침을 펼 텐데 그 때 너는 이 경의 가르침을 만나게 된다 이거에요.
구불지혜(求佛智慧)하야 득문시경(得聞是經)하리니, 그때에 이 경전을 얻어 듣게 될 것이니
유이불승(唯以佛乘)으로 이득멸도(而得滅度)요, 불승으로써 멸도를 얻을 것이요,
불승으로서 제도가 된다 이말입니다.
갱무여승(更無餘乘)이니, 다시는 다른 승이 없으니,
이승이나 삼승, 성문 연각 그런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이제 무슨 말인가 하면은요, 법화경은 불교의 모든 가르침 중에서 아주 궁극적인 가르침입니다. 최고의 가르침이지요. 마지막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이 경을 설하고 나서 열반에 드셨으니까요. 부처님께서 할 소리 다 하시고 이제 열반에 드신 그런 이야기가 되는 거지요.
그럼 뭔 말인고 하니, 너희들이 알아듣든 말든 간에 너희들 자신이 부처인줄 아는 것, 이것만이 너희들이 살 길이다. 너희들이야말로 부처라고 하는 사실, 이것을 알아야 너희들이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이 있고, 이것을 아는 것이 너희들이 살 길이다. 이것이 인간최고의 이상이다, 라고 하는 그 이야기입니다.
너는 관심이 있건 없건, 마음에 들든 안 들든 간에 너는 부처야.
부처인줄 알든 말든, 부처가 싫던지, 부처를 원수라고 생각하든지 말든지 너는 부처야, 그런 뜻입니다.
우리들 소견으로야 부처되기 바라는 사람이 여기 누가 있어요. 이 가운데도 한 사람도 아마 없을 거예요. 부처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없지 싶어요. 억지소리인지 몰라도요. 솔직히 부처님에 관심 있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우리가 살아가는 데 건강하고 좀 더 편안하고, 작은 소망 이루면 그걸로 오케이지요. 뭐. 그 다음 다른 거 더 바랄 게 사실은 뭐 있나요.
맘이 조금 큰 사람들, 공부를 좀 많이 한 사람들은, 아 인생이 뭔가 궁금한데 인생의 실상을 좀 깨달았으면 좋겠다, 삶이란 게 궁금하다, 라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보다 더 다른 차원의 삶을 생각하는 사람들도 물론 많이 있겠지요.
사람들에 따라서 이야기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은 그러나 여기 이야기인즉슨, 그렇게 작은 소박한 꿈을 가지고 그것이 인생의 최고 가치라고 생각하든 말든 너는 부처야, 아무리 소박한 생각을 해도 그래도 너는 최고의 이상인 부처로 살아갈 수밖에 없어 라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내가 할 이야기는 그것으로서 마지막이라고 부처님께서 법화경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결국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부처의 경지 그것을 터득함으로 해서 비로소 최고의 삶의 가치를 누리는 것이지 그 이외는 다른 거 하나도 없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유이불승(唯以佛乘)으로, 오직 불승으로서, 부처의 경지로서 제도를 얻고, 성불하고, 이런 말이지요.
갱무여승(更無餘乘)이라, 다른 것은 전혀 없다는 거지요. 다른 어떤 성공, 작은 것도 성공은 성공이지만 그건 아직도 중간과정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것을 비유로서 밑에 설명을 합니다. 화성이라고 해서 진짜 비유가 나오지요. 비유를 들게 되는 그런 이치를 다 이야기 해놓고 나중에 비유를 들지요.
제제(除諸) 여래(如來)가 방편설법(方便說法)이니라, 이것이 또 중요한 말인데요, 제한다, 제외한다는 말입니다. 무얼 제외하느냐? 여러 부처님들이 방편으로 설한 것은 제외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팔려고 내어놓은 집이 팔렸으면 그것으로서 불교에서 이룰 만한 소원을 이룬 게 아니냐고, 그럼 됐다고, 불교는 그걸 목적으로 하는 거 아니냐고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시거든요. 그런 말씀을 왜 하냐? 그건 방편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 말이 지금 그 사람에게 딱 해당되니까요. 그렇게 방편으로 이야기 한 것은 제외한다는 말입니다.
방편이야기는 수두룩하거든요. 중간과정으로 그 사람 수준에 맞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기 법화경에서는 사실 부처로서의 삶이야말로 진짜 우리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이상이다, 라는 이야기를 주로 하고 있습니다. 법화경의 주된 뜻은 그거에요.
여기에서 제제(除諸) 여래(如來)가 방편설법(方便說法)이라, 여러 부처님들이 방편으로 설하신 것은 제한다고 했어요. 방편으로 별별 이야기를 다 했는데 그것은 제외한다 이거에요.
유이불승(唯以佛乘)으로 이득멸도(而得滅度)하여 갱무여승(更無餘乘)이라, 다시는 다른 승이 없다고 그랬거든요. 그러면 앞뒤로 말이 안 맞잖아요. 성문도 있고 연각도 있고 온갖 승들이 많이 있는데 앞뒤로 말이 안 맞거든요? 그건 뭐냐? 여래가 방편으로 설한 것이니까 봐 줄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131.
제비구(諸比丘)야 약여래(若如來)가, 여러비구들이여, 여래가
자지열반시도(自知涅槃時到)하고, 스스로 열반에 이른 때를 알고 중우청정(衆又淸淨)하야, 대중들도 또한 청정해서
대중들도 아주 훌륭하다는 말이에요.
신해견고(信解堅固)하며, 믿고 이해하는 것이 아주 튼튼하며
요달공법(了達空法)하야, 온갖 법이 공한 것을 다 요달하여,
본래 있다고 하더라도 있는 게 본질적으로는 다 텅 빈 것이고 있는 것은 인연의 이치에 의해서 잠깐 동안 있는 것이라고 하는 그런 도리를 환하게 다 통달하여 안다는 것이지요.
심입선정(深入禪定)하면, 선정에 깊이 들어갔거든
편집제보살(便集諸菩薩)과 급성문중(及聲聞衆)하야, 곧 여러 보살과 성문대중들을 모아가지고서
위설시경(爲說是經)하리니, 이 사람을 위해서 이 경을 설할 것이니
법화경을 설한다는 것이지요.
세간무유이승(世間無有二乘)이 이득(而得) 멸도(滅度)요 유일불승(唯一佛乘)이라사 득멸도이(得滅度耳)니라, 여기가 법화경의 요지입니다. 세상에는 이승이 있어 가지고서 멸도를 얻는 게 아니요, 부처로서의 삶을 살아야 완전한 제도를 얻는 것이다.
저 앞에 금방 읽은 위에 첫줄에도 유이불승(唯以佛乘)으로 이득멸도(而得滅度)하여 갱무여승(更無餘乘)이라했는데 이것도 법화경의 요지가 되지요.
그리고 방금 나온 부분, 세상에는 이승이 있어 가지고서 멸도를 얻는 게 아니다, 이건 뭔 말인고 하니 본래 완전무결한 부처이지 다른 조그마한 꿈을 가지고 살려고 하는 그게 아니라는 거지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승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작은 꿈을 말하는 거지요. 그걸 가지고서 인간으로서 누릴 행복을 다 누렸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유일불승(唯一佛乘)이라 오직 일불승, 부처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이 말입니다. 오직 일불승, 부처의 경지로서의 삶을 살아야 성공한 것이다, 이득멸도, 멸도라 하는 것은 자기 제도이지요. 완전한 제도를 얻은 것이다.
부처로 사는 이 길이 아니면 인간으로서 사는 완전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가 없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완전한 인간인 줄을 알아라, 본래로 완전무결한 그런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부디 좀 알고 살아라. 그거 아는 게 최고의 목적이다고 그것이 최고의 이상인데 왜 조그마하게 사느냐는 거지요.
예를 들어서 백만 원을 가지고 있는데 백만 원을 다 쓸 생각을 해야지 왜 만 원 짜리, 이만 원짜리로만 쓰느냐는 거지요. 그렇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소질을 일깨워주는 그런 이야기지요.
부처님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소질을 한껏 다 계발하신 분이고, 우리는 계발이 덜 되었어요. 계발이 덜 되어도 이만 저만 덜 된 게 아니고 조금밖에 계발을 못해서는 정말 좋은 보물을 가지고서도 아주 조금밖에 못 쓰고 사는 그런 처지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네 속에 있는 그런 보물을 한껏 계발해서 잘 써야지 하는 그런 뜻으로 당부하고 있는 거지요.
132.
비구당지(比丘當知)하라, 여래방편(如來方便)으로, 비구야 마땅히 알아라. 여래는 방편으로
심입중생지성(深入衆生之性)하사, 깊이 중생들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지기지락소법(知其志樂小法)하야, 소법을 그 뜻으로 좋아하는 줄을 알고는,
소법을 뜻으로 즐긴다, 여기 그래 놨어요, 우리들은 꿈이 작아요. 좋은 표현으로 소박하다고 그러지요. ‘아이구, 나는 별 꿈 없어. 중생으로 사는 것이 나는 좋아’ 이런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중생으로 살면서 크게 걱정 없으면 됐지 뭐. 내 속에 아무리 큰 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까짓 능력 계발할 게 뭐 있나, 나는 조그마하게 그냥 살란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부처님은 방편으로 중생들의 성품 속에 들어가서 환히 알거든요. 사실이 보면 또 그렇고요. 어릴 때 많이 들어왔지요. 꿈을 크게 가져라, 꿈을 원대하게 가져라, 포부를 크게 가져라, 시야를 넓혀라. 그런 소리를 아무리 많이 듣고 많이 했어도 보면 조그맣게 그렇게 산다고요.
탐착오욕(耽著五欲)일새, 그래서 오욕에만 탐착해 있어,
그저 즐거움꺼리 거기에만 탐착해 가지고서
위시등고(爲是等故)로 설어열반(說於涅槃)하나니, 그런 것을 부처님이 다 알아, 이런 사람을 위해서 부처님이 열반을 이야기하시니,
열반은 방편으로 말한 거예요. 열반은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요. 안온한 인생, 편안한 인생입니다. 참으로 인간다운 인간으로서 사는 것은 부처의 삶이고 그저 편안하게 사는 것은 열반이에요. 고생스럽고 힘들더라도 참으로 인간다운 인간으로서 살라고 하는 것, 이게 말하자면 법화경의 취지이지요. 참으로 인간다운 인간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나’라고 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한껏 다 피우면서 산다는 그런 뜻이지요.
그런데 열반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열반은 번뇌도 없고 어려움도 없고 고생스러운 것이 하나도 없어서 그저 편안하고 안온한 그런 인생으로 사는 것, 그것이 열반입니다.
부처님은 그런데 그 이야기를 또 해요. 왜냐? 그런 이야기를 해야 중생들이 좋아하니까요. 그런 것을 바라는 중생들이 워낙 많으니까요. 그래서 소법을 좋아하고 오욕에 탐착하는 것을 부처님이 안다는 거예요.
이런 사람을 위한 까닭에 내가 열반을 이야기한다고 했어요.
시인약문(是人若聞)이면 즉편신수(則便信受)니라, 이 사람들이 만약에 들으면 곧 믿고 받아 들이니라,
아, 거 참 내가 즐겨 바라던 바이다. 이제껏 내가 고생스럽고 말이지, 머리 속이 괴로워 죽겠는데 어떻게 편안한 인생이 있다고 하니 그 얼마나 좋으냐, 해서 곧 믿고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하더라도 번뇌망상 다 떠나버리고, 이것 저것 가족 친지들까지 다 버리고 지 한 몸 편안하려고 나무 밑에 들어가 과일 하나 따먹고 가만히 앉아있으면 안온하거든요. 지금도 인도에 가면 그런 사람들이 많은데 정말 살았는지 죽었는지 가서 찔러보고 싶은 그런 마음이 날 정도로 가만히 있어요.
이런 사람들은 완전한 열반은 아니면서도 그래도 어느 정도 열반의 맛을 보거든요. 그런데 그런 뜻으로도 부처님은 이야기를 합니다.
첫댓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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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히 읽습니다. 은우님. ()
감사합니다 _()()()_
이득(而得) 멸도(滅度)요 유일불승(唯一佛乘)이라사 득멸도이(得滅度耳)니라...은우님,고맙습니다._()()()_
중간과정을 계속 거쳐서 궁극의 목표인 부처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은우님 고맙게 잘 읽고 공부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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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의 지나온 세월이 한량없다,, 감사합니다. 큰스님, 은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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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間無有二乘이 而得滅度요 唯一佛乘이라사 得滅度耳니라.... 세상에는 이승이 있어 가지고서 멸도를 얻는 게 아니요, 부처로서의 삶을 살아야 완전한 제도를 얻는 것이다...은우 님! 수고하셨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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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세간무유이승(世間無有二乘)이 이득(而得) 멸도(滅度)요 유일불승(唯一佛乘)이라사 득멸도이(得滅度耳)니라..........
세상에는 이승이 있어 가지고서 멸도를 얻는 게 아니요, 부처로서의 삶을 살아야 완전한 제도를 얻는 것이다.
대통지승불의 16왕자가 모두 무상도를 얻고 시방에서 설법하고 있는 데 석가모니 부처님도 16왕자중의 막내
그 때 교화한 중생들이 석가 모니 현전에서 법화경을 듣는 제자와 석가모니 멸도후 법화경을 만나는 제자들-우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