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4월 6일 LG생명과학 연구소는 국산 신약 <펙티브>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미국 FDA로부터 신약 승인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전 세계적으로 FDA로부터 신약 승인을 받은 나라는 불과 10여 개국에 불과 하다고 하는데 금번 <펙티브>의 개발은 한국 제약 100년사에 일대 혁명이 아닐 수 없다. <펙티브>는 기관지나 폐렴에 종래 항균제로 듣지 않는 악화된 만성 염증에 탁월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흔히 페니실린을 20세기 3대 발명의 하나라고 하는데 그 페니실린 계통의 기존 내성을 가진 폐렴 구균에도 <펙티브>는 뛰어난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참고로 이 <펙티브>는 해외에서만 연간 8백억 원 이라는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이 기적의 신약 하나 때문에 갑자기 일약 세계 10위권 제약국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 지난 5월 29일(2003년), LG그룹은 이 기적의 신약 <펙티브>개발 리셉션을 가졌는데 이 자리에는 구본무 LG그룹 회장을 비롯하여 고친 국무총리, 보건복지부 장관, 과학기술부 장관 등 3백 여명의 각계 인사들이 참석했다. 그런데 이 뜻 깊은 자리에는 <펙티브>개발의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던 주인공 홍창용 박사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홍창용 박사는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고 1993년 LG연구소에 입사하여 이 신약재발을 주도했는데 그는 이미 하버드 시절부터 신약개발에는 독종이라는 소문이 날 정도로 그의 연구는 밤과 낮을 잊은 채 오직 신약 개발에만 몰두했다.
그러나 홍창용 박사는 인류 건강증진을 위해 세계 제약업계가 감탄하는 신약을 개발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엄청난 병마에 시달리는 몸이 되었다. 홍박사는 현재 뇌종양으로 두 번이나 수술을 받고 뒤늦게 신앙에 크게 의지하며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홍박사는 2년 전 부인과 딸의 끈질긴 전도로 교회 출석을 하고 있지만 예배 시간에 실제로 기도나 찬송은 일체 하지 않고 그야말로 목석같이 자리에 앉아만 있을 뿐이다. 예배가 끝나면 부인과 딸이 하도 답답해서 오늘 설교가 어떠했느냐고 물어보면 그의 답변은 2년간 한결같이 딱 한마디 "들을만하다"라는 말뿐이다.
그러나 예배에는 무관심 이지만 설교하는 목사에 대해서는 매우 호감을 가진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출석하는 대전유성구 도룡동 <늘사랑침례교회> 정승룡 목사가 자기보다 나이도 적고 더 젊으니까 우선 대화하기가 편하다는 것이다. 한편 홍박사의 미지근한 신앙생활에 가장 애를 태우는 사람은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중인 딸이다. 딸은 아버지가 확실한 믿음을 갖고 교회생활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다. 한편 홍박사는 자신이 뇌종양이란 것을 병원에 가기 전에 이미 알았다. 즉 2002년 6월 오른쪽 다리에 자주 힘이 빠지는 것을 보고 병원을 찾아 의사에게 미리 자신의 머리에 뇌종양이 생겼다면서 MRI 촬영을 요청했다. 결과는 그가 예측한대로 큰 종양 덩어리가 그것도 수술하기가 매우 어려운 부위에 있었다.
홍박사가 자신의 병을 미리 예측한 것은 과거 자기 어머니가 이미 뇌종양으로 고생한 것을 항상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한편 홍박사는 10시간이 넘는 대수술이 끝난 뒤 의식은 돌아왔지만 가족들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카톨릭 의대 간호학과 출신인 부인 강우경 집사는 뇌종양 수술 후 바로 정상으로 돌아 오기는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고 미리 마음의 준비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강우경 집사는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남편의 쾌유를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여 유치부 어린이에서부터 할아버지까지 전 성도가 기도에 동참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멀리 러시아에 간 선교사에서부터 국내 대형교회 목사들에게 기도를 부탁, 무려 4만 명 이상의 성도들이 홍박사의 회복을 위한 기도의 동역자들이 되었다.
홍박사는 수술 후, 1주일간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다가 1주일 후부터 그의 입술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그러나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찬송가를 듣고 의식을 회복 말문이 열렸다.
담당 의사의 지시에 따라 언어 훈련과 책 읽기를 강행 시켰지만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도 읽지 못했다. 어떤 때는 부인이 평소 남편이 애창했던 유행가를 불러 주면서 따라 부르라고 온갖 노력을 해도 역시 무표정 이었다.
수술 후, 1개월간 불안과 초조로 시간을 보내던 강우경 집사는 이러다간 영영 벙어리가 될 것 같아 어느 날 평소보다 더 간절하게 기도를 하던 중, 갑자기 찬송가를 펼쳤는데 411장이었다.
강집사는 남편에게 찬송가 411장을 큰 소리로 불러 주었다.
"예수사랑 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권세 많도다
날 사랑 하심 날 사랑 하심
날 사랑 하심 성경에 써있네"
이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자 남편의 얼굴에 갑자기 경련이 일면서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깜짝 놀란 부인이 찬송가 책을 남편에게 가까이 보여주며 같이 부르자고 했다. 그러자 남편의 입에서 찬송가가 흘러나왔다. 부인은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울면서 찬송을 힘차게 부르는데 남편은 가사도 곡도 정확하게 부르고 있었다.
단번에 2절, 3절을 부르고 4절을 부를때 남편도 울면서 불렀다.
"세상사는 동안에 나와 함께 하시고
세상 떠나 가는 날 천국가게 하소서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
찬송이 끝나자 부부는 부둥켜 안고 소리 내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런데 부인은 울면서도 갑자기 머리에 떠 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럼 지난 2년 동안 교회에 나가면서 예배 중에 항상 꿀 먹은 벙어리같이 묵묵부답으로 앉아만 있었는데 결국2년간 자기 마음속으로는 항상 찬송가를 따라 부르면서도 나를 속였단 말인가" 그러나 강우경 집사는 일편 섭섭한 마음도 잠깐이었고 순간적으로 강한 느낌이 왔다. 그것은 바로 그 동안 억지로 예배에 참석하는 남편에게 하나님은 강권적으로 총명한 남편의 두뇌에 찬송가를 그 동안 꾸준히 기억시켜 온 것이라고 판단했을 때 강우경 집사는 다시 한번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에 감탄했다.
유행가도 불러주고 온갖 웃기는 이야기 등을 다해주며 제발 말 한마디만 해달라고 그렇게 애원했지만 그런데 꾹 다물고 있던 그 입에서 갑자기 찬송가가 나오다니‥‥‥
홍박사는 이날 찬송가를 부르고 난 후부터 정신이 밝아진다면서 언어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홍창용 박사가 병석에서 털고 일어났을 때 부인 강우경 집사를 놀라게 한 사건이 또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시어머니의 교회 출석이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교회 출석을 위해 20년간 기도했는데 그 시어머니가 아들의 뇌종양 수술을 보면서 특히 찬송가 때문에 말문이 터지는 것을 보고 교회 출석을 결심한 것이다.
시어머니는 40년간 미신에 유혹되어 무당과 중을 그렇게도 좋아했다면서 경기도 평촌의 <주님의 교회> 김성일 목사를 찾아가 그 동안 보물처럼 간직했던 온갖 귀신 부적들을 불태웠다.
며느리 강우경 집사는 고부간의 갈등 중에 특히 신앙 갈등이야말로 겪어 보지 않는 사람은 모른다면서 금번 시어머니의 교회출석은 남편의 교회 출석보다 더 기뻤다고 했다.
한편 수술 후유증에서 빠르게 회복한 홍박사는 한달 후 퇴원하자마자 다음날 바로 연구실로 출근했다. 주위에서는 좀더 푹 쉬라고 했지만 그의 연구실 방은 밤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홍박사는 수술 6개월만인 2003년 1월 연구소에서 다시 쓰러져 2차 수술에 들어갔다. 뇌종양은 1차 때 제거 한 것보다 더 크게 퍼졌지만 수술이 끝나자 1차 때보다 빨리 의식이 회복되어 의료진과 가족들을 일단 안심시켰다. 그러나 2차 수술 후에는 언어 기능 회복이 늦어져서 부인과 대화도 간신히 하고 있었는데 특히 성경을 자주 읽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강우경 집사는 남편이 두 번째 수술실로 들어 가던 날 인간적인 판단으로는 이것이 남편과의 마지막 이별의 장면이라고 생각되었지만 그러나 "내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남편의 생명을 더 연장 시켜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고 기도했다.
강우경 집사는 새벽 6시부터 9시까지 남편에게 성경 읽기, 기독서적 읽어주기 등 영성훈련을 꾸준히 실시하고 있는데 근간에는 남편께서 자신도 꼭 방언의 언사를 받고 싶다고 한다.
한편 홍박사의 뇌종양 수술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하버드대학교의 은사인 퀴시 요시로 교수를 비롯한 LG연구소 연구원 부부들 그리고 연구소 여직원들이 홍박사의 쾌유를 비는 문자 메시지를 쉴새 없이 보내 주어 힘들게 간호하는 강집사에게는 큰 힘이 되고 있다. 그런데 홍박사의 언어 기능 회복이 예상외로 늦어지자 그를 수술했던 병원에서는 다시 입원을 시켜 물리치료를 하고 있다.
한편 필자가 지난 5월 27일(2003년) 그의 입원실을 찾았을때 44세의 나이지만 아직도 청년의 모습이었으며 필자가 잠시 기도를 하자 그의 얼굴 모습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홍박사는 가끔 병실 창 너머로 흘러가는 초여름의 품게 구름을 볼 때마다 깊은 명상에 잠긴다고 했다. 어느 날 강우경집사가 홍박사에게 지를 읽어 주었는데 특히 월남 전선에서 우리 국군 장병이 전투 중에 군복 상의 포켓에 넣어둔 성경이 총알을 막아서 살아났다는 실화를 듣고 매우 긍정적인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KBS로고스 5호 전쟁과 성경)
홍창용 박사는 기독교의 윤리서 라고 하는 성경의 '야고보서'와 그리고 인간의 한계성을 넘어 혹독한 시련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욥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특히 야고보서 4장 14절의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라는 구절을 좋아한다.
그렇다.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들은 자기의 운명이 언제까지나 항상 풍성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인생을 보낼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들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의 말씀은 영원히 존재한다. "(현대인의 성경 베드로전서 1장 24절).
김장환 목사의 월드컵 4강 진출 예언과 하나님의 섭리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개최한지 1년을 맞이하여 신문과 방송에서는 그날의 감회를 되새기는 특집 프로그램이 우리국민들을 다시 한번 감동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기독교인들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특별한 행사를 한가지 기억할 것이다. 다름아닌 서울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거행된 2002년 부활절 연합예배의 김장환 목사의 설교다. 상암 월드컵 경기장이 준공되어 대규모 첫 행사로 부활절연합예배가 2002년 3월 31일 오후 3시에 거행되었다. 그날 극동방송 사장 김장환 목사의 설교 중 후반부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2002월드컵 경기 2개월을 앞두고 아직 어떤 행사도 개최하지 않는 이 경기장에서 제일 먼저 부활절 연합예배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서 하나님께서 한국 축구를 반드시 승리하게 해 줄 것으로 확신합니다" 라고 했다. 관중석을 꽉 메운 성도들의 입에서 일제히 아멘 이라는 큰소리가 나왔고 모두가 비장한 모습의 표정들이었다. 김장환 목사는 이어 공동 개최국인 일본의 경우 어느 경기장에서도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곳이 없는데 우리는 이 훌륭한 경기장을 준공하여 제일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데 하나님께서 어찌 무심하시겠느냐고 했다. 또한 김목사는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기상천외라 할 수 있는 설교를 했다. 즉 "미국 팀에게는 죄송하지만 자살골 하나만 얻고, 폴란드에게는 패널터킥 하나, 포르투갈에는 1대 0으로 이기면 우리는 8강을 거쳐 4강으로 올라가고 또 결승전까지도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하고 외쳤다. 그러자 스탠드의 수많은 성도들은 큰 소리로 "아멘" 하고 외치면서 일제히 폭소가 터져 나왔다. 필자는 극동방송 비서실장이 보내준 그날의 비디오 테입을 면밀히 관찰해 보았는데 우리나라 축구의 4강 진출을 확신한다는 김목사의 그 외침에 관중석의 수많은 성도들 중 엄숙한 표정으로 또한 긍정적으로 아멘 이라고 화답하는 성도는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박장대소 했다. 그날의 모든 성도들은 김장환 목사의 설교가 너무 뻥튀기?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날 부활절 연합예배에 참석했던 창천교회 이형모 장로는 그날의 분위기를 설명하면서 "우리 축구가 이번에는 최소한 16강에는 들어가야만 개최국으로서 체면이 서기 때문에 이날 스탠드를 꽉 메운 성도들은 예배가 시작되기 전부터 우리 축구의 16강 진출을 염원하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장환 목사는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가 일어나면 16강이 아니 라 4강에도 거뜬히 올라갈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4강 진출을 공식 선언한 것이다. 특히 당시로서는 즉 월드컵 경기 개최를 아직도 2개월을 앞두고 수많은 관중 앞에서 그것도 방송이 되는 중요한 부활절예배에서 마치 우리나라가 4강 진출이 이미 확정된 것 같이 설교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김목사의 설교가 바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는 중요한 예언이기 때문에 결국 김목사 설교에 하나님 이 책임을 져 주시기로 결정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실제로 우리가 4강으로 올라간 후 다음날 극동방송 직원들의 예배 설교를 하던 김장환 목사는 크게 흥분된 표정이 아니었다. 즉 "하나님께서 이미 4강으로 올려 준다고 했는데 왜 그렇게들 흥분을 하고 있느냐"고 했다. 한편 16강이 아닌 몇 번을 뛰어 넘어 4강 진출을 확신한다는 김장환 목사의 그날 설교에 성도들의 폭소가 나온 것은 마치 성경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99세가 된 아브라함에게 89세 된 그의 아내 사라를 통해 아들을 줄 것이라고 했을 때 사라가 웃었다는 성경 구절을 생각나게 한 셈이 되었다.
더 자세히 언급하면 성경 창세기 15장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이 기록되어 있다. 즉 아브라함이 "주께서 나에게 자식을 주시지 않았으므로 내 집안의 종이 내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그 사람은 네 상속자가 되지 않을 것이며 네 몸에서 태어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처 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가 없었든지 자기가 데리고 있던 이집트 여종 하갈을 남편과 동거케 하여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게 했다.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 86세였다. 그 후 13년이 지나 아브라함의 나이 99세가 되던 어느 날 하나님은 과거 아브라함과 약속한대로 앞으로 1년 뒤에는 아내 사라를 통해 아들을 줄 것이라고 했다.
그때 아브라함은 속으로 웃으며 "100세가 된 사람이 어떻게 자식을 낳을 수 있을까?"하고 중얼거렸다.
한편 아브라함의 처 사라는 특히 남편보다 더 부정적이었다. 현대인의 성경 창세기 18장 11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는 갱년기도 지났으므로 혼자 속으로 웃으며 "내가 노쇠하였고 내 남편도 늙었는데 내가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겠는가?"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한대로 꼬부랑 할머니 사라에게서 아들 이삭을 탄생케 하여 아브라함의 후사가 되게 했다. 이때 여종 하갈에게서 태어난 아들 이스마엘의 나이는 14세였다. 그러나 본처에게서 아들 이삭이 태어났으므로 부득이 종의 몸에서 태어난 이스마엘은 어머니와 함께 집에서 쫓겨나게 된다.
오늘날 중동전쟁의 불구대천 원수의 불행의 역사는 여기서부터 기록되기 시작했다. 만일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지켰더라면 철천지 원수가 된 이복형제의 탄생도 없었을 것이요, 오늘날 종교적 갈등으로 인한 세계 곳곳의 무자비한 테러도 없었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5장 24절)
하나님께 개선 귀국 신고를 했던 고 정득만 장군의 신앙
1972년 당시 월남전을 통해서 세계 전략가들에게 큰 감동을 준 작전중의 하나가 한국 맹호부대의 안케패스작전을 들 수 있다. 월남의 안케패스를 지나는 19번 도로는 군수물자와 차량행렬이 매일 수 백대씩 통행하는 1급의 병참선이다.
이 문제의 고갯마루에 월맹군 최강의 전투부대인 3사단 12연대가 은밀하게 침투함으로써 19번 도로가 차단되고 말았다. 월남 중심부를 동서로 연결하는 대동맥인 이 19번 도로를 다시 개통시키지 못하면 월남이 동서로 두 조각이 나는 것은 물론이고 미군과 한국군의 안전이 위태로울 뿐만 아니라 월남 해역에 있는 미 해군 함대의 작전까지도 제한을 받게 되는 등 월남전쟁의 운명이 판가름 나는 상황이었다.
이와 같은 중요한 안케령 19번 도로를 개통시키기 위해서는 윌맹군이 점령하고 있는 638고지를 탈환해야 하는데 이 탈환작전을 한국의 맹호부대 특공대가 담당했다. 대규모 정글로 뒤덮인 안케패스의 고갯마루 능선은 과거월남이 프랑스 식민지로 예속되었을 때 프랑스 1개 여단병력이 전멸 당했던 비극의 험산준령이다. 그만큼 월남전쟁에서 중요한 병참보급로의 심장이요 동맥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도 이 19번 도로를 빨리 개통시키라는 전통을 보낼 만큼 월남전역의 위기를 느끼게 했다. 그러나 작전을 개시한지 10여 일이 지났지만 쌍방간의 전투만 치열했지 진퇴가 없었다.
한편 안케패스 첫날부터 각 연대교회는 작전이 승리할 매까지 기도회를 계속 가졌고 주일이면 정득만 사단장은 새벽5시, 오전 10시, 오후 7시 예배에 각각 참석했으며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는 전투장병들의 통성기도는 어느 포병부대의 포 사격보다 맹렬했고 그 기도의 열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당시 본국의 정득만 사단장이 출석했던 영락교회 1만 5천명 성도들은 맹호부대 1만 5천명 장병들을 위하여 1대1의 기도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필두로 한국의 전교회가 기도부대가 되어 주월 한국군 장병을 위한 기도운동이 일어났다. 정득만 사단장은 성경책이 눈물에 흠뻑 젖도록 기도를 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우리 맹호부대의 목자 되시는 여호와여 사망의 음침한 안케패스 골짜기에서 우리로 하여금 해 받음을 면케 하소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안위하시옵소서.'
1972년 4월 24일 새벽 4시 갑자기 짙은 안개가 적의 진지638고지를 뒤덮었다. 바로 이때 사단장의 공격명령이 성난 맹호특공부대에 내려졌다. 전광석화에 태풍이 몰아부친 것같이 또한 마치 동물의 왕국에서 성난 표범들이 먹이를 발견하고 질풍처럼 종횡무진으로 달리는 것 같이‥‥‥‥.
이렇게 해서 난공불락의 안케령 638고지는 탈환이 되고 끝까지 저항하던 월맹군은 705구의 시체를 버려둔 채 퇴각함으로써 안케령 19번 도로는 드디어 개통되고 월남전의 숨통이 트여졌다. 뒤이어 오전 11시 안케패스작전의 승전보는 전세계로 퍼져 나갔으며 박정희 대통령은 정득만 장군에게 격려의 친서를 보냈다.
1972년 대구 비행장에 개선 귀국한 정득만 사단장의 첫 인사말은 '오늘 우리 맹호부대가 개선하기까지 우리 부대를 지켜주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와 귀국 신고를 드립니다' 라고 했다. 조국과 민족 앞에 드리는 승전보의 첫 귀국 보고의 상대자는 대통령이나 국민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이었다.
생과 사가 교차하는 전장에서 바로 하나님이 그들의 방패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한편 정장군은 개선 귀국 후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한 것을 감사 드리며 둘째는 같이 싸워준 전사자들의 회생이 있었기 때문이며 셋째는 국민들의 성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박정희 대통령께서 격려를 해 주었기 때문에 오늘의 개선 귀국이 있었습니다”‥‥‥‥
정장군의 모든 영광은 항상 하나님이 1순위였다. 그러나 다른 장군들은 당연히 제일 먼저 "대통령 각하의 하해(河海)와 같은 은택으로 무사히 귀국했음을 감사 드립니다" 라고 말했을 것이다. 정장군의 귀국 인사가 언론에 자주 보도되자 불만이 많은 사람은 육영수 여사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개선 귀국한 10여명의 장군들을 부부동반으로 청와대에 초청했는데 칵테일 파티장에서 육영수 여사는 정장군의 부인 김옥희 권사에게 다가와 "남편은 저렇게 말랐는데 남편 대접은 안하고 혼자만 먹느냐"고 의미 심장한 말을 했다.
한참 후 이번에는 박대통령이 정장군에게 "내가 과거 육군대학에 교육을 받으러 갔을 때 당시 교관이었던 정장군 밑에서 내가 교육받았던 일 기억나시오”‥‥‥‥
정장군 부부는 이날 농담도 진담도 아닌 이상한 말들이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것을 보고 앞으로 있을 중장 진급은 물 건너간 것으로 판단했다. 정득만 장군이 월남전에서 탁월한 지휘력을 보인 것에 감동을 받은 대통령이 격려의 친서까지 보냈는데도 그 은혜에 대한 순서를 제일 뒤로 미루었으니 박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심기가 불편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이 당시 어느 군종감이 정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군의 통수권자인 대통령을 제쳐놓고 어떻게 언론에다 그런 말을 함부로 했느냐고 걱정을 했다. 정장군은 월남에서 사단장으로서 그 흔한 훈장 하나도 못 받았다.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미국의 포드 대통령이 주한 미 8군 사령관을 통해 미국정부가 수여하는 훈장을 전달했다. 이에 당황한 우리 정부는 한달 뒤 정장군에게 을지 무공훈장을 수여했는데 이러한 당시의 정황을 보아 정장군이 대통령으로부터 거리가 벌어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셈이다.
흔히 개선 장군이 귀국하면 통치권자는 1차로 그 장군을 퇴역시키거나 또는 한직(關職)으로 보내는 것이 세계 전쟁사에 항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채명신 주월 한국군 사령관이 온 국민들의 존경을 받으며 귀국, 곧 참모총장이 될 것으로 군대에서는 널리 알려졌고 또 그렇게 믿었는데 결과는 2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날 국방부 회의실에서 문을 박차고 나온 채명신 장군은 매우 분노에 찬 얼굴로 기자회견을 일체 거절하고 차에 올랐다. 한편 정득만 장군은 자신이 예측한대로 소장에서 전역, 1982년 12월 6일 서울 영락교회 장로가 되어 영락교회 50주년 기념 사업회 회장으로 취임, 남은 여생을 교회 봉사에 매진했다.
한편 정장로의 부인 김옥희 권사는 4대째 장로 집안의 따님으로 정득만 청년 장교와 결혼을 했다. 이때 처가에서는 사위될 분이 신앙이 없다는 이유로 혼사가 어려움에 처하자 정득만은 전방 군인교회에서 급히 학습 세례를 받고서야 결혼식을 올렸다.
처음에는 결혼을 위해서 교회를 다녔지만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전지 전능한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인간의 생사화복과 국가의 흥망성쇠가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그는 월남전정을 통해서 철저하게 깨달았다고 한다. 정독만 장로와 부인 김옥희 권사는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둘째 아들 정성훈 목사가 부산 동래 중앙교회 담임목사로 있으며 특히 숭실대학교 명예교수인 안병욱 교수는 정득만 장로의 따님이 자신의 아들과 결혼하여 며느리가 된 것을 너무나 기쁜 일이라면서 친딸보다 더 사랑한다고 했다.
끝으로 정득만 장로는 1999년 6월 28일 73세로 세상을 떠나기 몇 일전 부인 김옥희 권사에게 유언을 남겼다. "만일 내가 하나님을 믿는 가정에서 자란 당신과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일찍 망했을 것이오. 신앙생활 잘 하다가 훗날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글 : 김수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