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우리교회 식구 여러분, 그리고 우리교회이야기 식구 여러분!
여름이 다 지나갔습니다. 어느 날 하루 사이에 바람의 느낌이 달라졌습니다. 더운 기운이 바람 속에서 싹 빠져 나가고, 상쾌한 선들바람으로 바뀐 것이 느껴졌습니다. 하기야 절기상으로 가을이 시작한다는 입추도 지났고, 모기의 입이 비뚤어진다는 처서도 지났으니 가을입니다. 바라기는 올해는 비가 많이 와서 농작물들에게 햇빛이 많이 모자랐는데, 이제라도 뜨거운 햇빛을 주셔서 꽉찬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올 여름 우리 사회를 흔들어 놓은 화두는 “물”과 “밥”입니다.
물과 밥, 이 두 가지는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니 특별히 화두가 되어야 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늘 하던 이야기이니까요. 그런데 특별히 화두가 된 것은 무엇인가 평상시와는 다른 문제가 생겼다 뜻이기도 합니다.
“물”은 사람에게 뿐 아니라 온 생명체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물이 있어야 온 세상이 살아 움직입니다. 온 우주에서 지구가 생명유기체로 존재하는 것은 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하수와 비가 지구상에 살아가는 생명들에게 물을 공급하지요. 자연의 순리대로 움직여 지구상의 생명체들을 품어오던 물의 순환에 문제가 생긴 것은 전 세계적인 기후변화 때문입니다. 한 시간 안에 100밀리가 넘게 내리는 올 여름 비는 양동이로 물을 붓는 것과 같습니다. 제 어릴 적에는 장맛비도 그렇게는 오지는 않았다고 기억됩니다. 비가 내리면 땅이 그 비를 받아 들여야 하는데, 대도시 특히 서울은 비가와도 땅이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온 도시가 건물과 포장된 도로로 가득 차 있어서 하수도 시설의 수용 한계를 넘으면 그냥 넘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자연의 힘을 간과하고 사람들의 머리로 계산하여 산도 깎고 굴도 뚫고 강의 흐름도 바꾸며 개발했다는 것이 화를 불러 들였습니다. 산의 토사가 밀려들어와 아파트 3층까지 휩쓸어 버릴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사람이 죽고, 재산상의 피해가 나자 해결책도 없이 여기저기서 떠들어 대었습니다. 아마도 곧 흐지부지 잊혀지고 말겠지요. 그런데 한가지 분명한 것은 “물은 산을 넘고, 골짜기를 타고 내려가서, 주님께서 정하여 주신 그 자리로 흘러갑니다.(시편 104:8)”라는 것입니다. 정해진 그 자리, 자연의 자리, 그것으로 되돌리는 노력을 하지 않는 한 이것은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되풀이 될 것입니다. 내게 그런 일이 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물이 있어야 살지만 물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삶입니다.
물난리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이어진 화두가 “밥”입니다. 하기야 먹는 것에 관한 화두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살려고 먹느냐? 먹으려고 사느냐?”는 명제가 보여주듯이 먹는 것과 사는 것은 늘 함께 있기 때문에 밥에 관한 이야기는 일상적인 것이지요. 경제적으로 사는 것이 넉넉해지면서 먹는 것에 관한 화두는 좀 더 우리 삶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어디에 가면 맛있는 밥집이 있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건강해지려면 꼭 먹어야 하는 음식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안내와 오늘 저녁 반찬걱정까지 해 주는 형편이니까요.
그런데 올 여름의 화두 “밥”은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녀들의 밥에 관한 것입니다. 서울시 교육감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무상급식’을 하겠다고 하는 것에 대해 ‘무조건 적인 무상급식은 복지 포퓰리즘을 가져와 나가라 망할 것이다’라는 반대 의견이 나온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돈이 있는 학생에게까지 무료로 밥을 주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이 있는 50%는 돈을 내고 밥을 먹고, 돈이 없는 50%는 무상으로 먹으라는 것이지요. 이 논쟁이 찬성과 반대를 묻는 주민투표까지 갔습니다.
“돈이 있는 학생은 돈을 내고, 없는 학생은 무상으로”라는 주장은 타당성이 있어 보입니다.
밥을 안 먹인다는 것도 아니고, 없는 학생에게는 그냥 준다는데 왜 굳이 다 무상으로 해야 한다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어른들의 이야기도 맞는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무상으로 먹을 때는 그것은 어느 학생에게나 ‘권리’가 됩니다. 도움을 받아야 되는 차상위 계층의 사람으로서 시혜로 받아먹는 것이 아니라 서울에서 학교 다니는 어린이, 학생들이라면 누구에게나 밥 먹는 것이 당연한 권리가 되도록 하자는 것이지요. 이것은 경제 사정에 의해 편을 가르는 것이 아닌 평등한 권리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친환경 재료로 우리 자녀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건강한 국민을 양육해 내는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밥을 먹으면 되었지, 왜 그렇게 복잡하게 외골수로 생각하느냐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밥을 ‘권리’가 아닌 ‘시혜’로 먹어야하는 이들의 마음을 우리가 헤아려주어야 합니다.
돈이 문제라는 말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 집이나 자식 먹이는 것이 먼저입니다. 우리 아이들을 건강하게 자라도록 하는 것이 개발사업보다 우선되어야 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형제가 많은 집 셋째 딸입니다. 부자도 아닌 집에서 아이들을 모두 교육시키고 싶어 하셨던 부모님 덕으로 형제들 모두가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게는 작은 아픔이 있었습니다. 제가 중학교 갈 때는 중학교 입시가 인생을 결정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좋은 중학교는 곧 좋은 대학교 입학을 의미했었으니까요. 6학년 담임선생님은 저를 아주 예뻐하셨습니다. 저를 상위권 학교에 넣고 싶으셨던 선생님은 당신이 하는 과외공부 그룹에 저를 넣으라고 어머니께 권하셨습니다. 어머니는 그럴 형편이 못된다고 하셨지만, 선생님은 과외비를 받지 않겠으니 꼭 보내라고 강권하셔서 선생님 댁으로 과외공부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물론 제가 돈을 내지 않는 것을 비밀로 해 주시기로 했고요. 비밀은 오래 가지 않았고, 아이들은 저를 무시하고 왕따를 시켰습니다. 죽을 맛이었지요. 가기 싫다고 어머니께 말씀도 드려보았지만, ‘선생님께서 오라고 하니 가라’고 하시니 집을 나서는 수밖에요. 시혜, 누가 들으면 기가 막히게 좋은 것이지요. 담임선생님이 공짜로 공부 시켜 준다는데 그것처럼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요. 그런데 제게는 고통이었습니다. 견디다 못해 집을 나서기는 하지만, 차비로 만화방에 가서 시간을 죽이다 돌아오는 시간에 딱 맞추어 집에 돌아왔지요. 물론 들통이 났고, 야단도 맞았고, 중학교는 떨어지고...... 그 때 저는 확실히 알았습니다. 평등한 권리가 아닌 시혜는 상처가 된다는 것을. 시혜는 차별에서 시작되지요.
어떤 교회에서 차별 정책에 꼭 투표하러 가라고 교인들을 독려하고, 문자도 보냈다고 합니다. 오늘 이 상황을 보시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하실까요?
“주님은 하늘을 구름으로 덮으시고 땅에 내릴 비를 준비하시어 산에 풀이 돋게 하시며,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이를 주신다.(시 147:8-9).”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