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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포럼 81회 이기영 목사님의 <아가서 1장> 독후감
이름 : 곽은서
제출일 : 23년 2월 7일 (화)
1장 요약
“솔로몬의 아가라” (아 1:1)
‘아가’는 ‘노래 중의 노래’입니다.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니” (아 1:2상)
탕자의 비유와 요나서의 주제는 보편적 사랑, 본질적 사랑, 일방적 사랑입니다. 그리고 아가서의 주제는 개별적 사랑, 상대적 사랑, 상호적 사랑입니다. 사랑의 탁월함과 특별함을 만나면 그 사랑을 더 알고 더 얻고자 하는 추구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탁월하고 특별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니’라는 이러한 기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위한 구주뿐만 아니라 나의 주님을 알고 얻고 소유하기를 원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아가서는 개별적인 사랑, 상호적인 사랑, 상대적인 사랑을 추구합니다. 이처럼 사랑은 날마다 자라나야 합니다(엡 3:18~20). 이것은 아가서 전체의 주제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진보를 말하지만 반드시 가져야 할 질문은 ‘나는 계속해서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있는가?’입니다. 올바른 영적인 추구는 자기 사랑이 아니라 주님만 사랑하는 사람으로 성장시켜 갈 것입니다.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아 1:2하)
포도주는 세상이 주는 행복과 만족, 유희, 즐거움, 기쁨 등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전혀 비교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이 포도주를 목적하지 않고 주님을 목적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어떠함을 내가 알았기 때문에 ‘나는 주님의 사랑을 목적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내게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전도서의 기자는 포도주의 헛됨을 말합니다(전 1:2, 유한함). 왜냐하면 유한하고 잠시뿐이기 때문입니다. 그 유한함 속에서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유한한 것을 목적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 영원할 수 없는 인생의 본질적인 목마름에 대해 말씀합니다(요 4:13~14). 사도 바울은 이 포도주의 무기력함, 무능함을 말합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포도주를 통해서 삶의 만족과 기쁨, 성취 등을 원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추구가 다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의를 추구합니다(빌 3:7~14). 우리는 포도주를 향한 우리의 목마름을 멈추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목적하는 동일한 추구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영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음으로 그를 얻음으로 완성되고 언제나 이 질그릇 안에 보배를 가지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고백하는 삶입니다.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아 1:3)
처녀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목적하고 그분을 추구합니다. 먼저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여 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서는 날마다 성령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우리가 그분을 흠모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름답고 향기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라고 말씀합니다. 그분의 이름에서도 동일한 향기로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이름은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1)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그분이 가진 이름이 아름다움을 발견했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입니다. 그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성령으로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성령으로 나셨습니다. 예수는 ‘여호수아’와 동일한 이름으로 ‘여호와와 구원’이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예수라는 이름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그 이름을 가지고 우리 중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도 부릅니다.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2~23). 그 이름이 쏟은 기름과 같이 향기롭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향기롭고 아름다운 분이시며, 그분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갈 5:22~23). 그뿐 아니라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그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은 이제 세상이 아니라 나의 예수님, 나의 그리스도가 됩니다. 그를 믿는 자마다 그 이름을 가졌습니다. 그 이름은 쏟은 향 기름 같다고 했습니다. 그 이름을 가진 자마다 이게 그러한 성령의 은혜 안으로 들어가고 그 이름의 은혜 안으로 들어가는데 그 이름이 쏟아졌습니다.
쏟아졌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쏟은 향기름 같다는 것은 그가 이미 죽으셨음을 말합니다. 그 죽으심을 통해서 그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나의 구세주이며 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알고 믿고 깨달은 자마다 처녀들이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는 것입니다.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아 1:4)
아직은 예수님이 신랑이 아니라 왕이십니다. 이 예수님이 신랑이 되고 내가 신부가 되는 것은 아가 3장에 나옵니다. 그 부활생명과 함께 하면서 비로소 예수님이 이제는 왕이 아니라 신랑으로 그리고 나는 신부로서 확인됩니다. 그러나 아직은 왕입니다. 침궁을 자칫 신랑과 신부와 함께 하는 곳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아직은 아닙니다. 아직은 왕이십니다. 그분은 아직 내 안에서 발견되고 있지 않습니다. 만일 그분이 내 안에서 발견된다면 아가 2장에 나타나는 갈등이 없을 것입니다.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여기에서 ‘너’는 왕입니다. 내가 아무리 달려간다고 할지라도 나를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나를 이끌어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합니다. 주님이 내게 당신을 깊은 것까지 알도록 가르쳐 주시고 보여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주님을 조금도 알 수 없습니다.
누구라도 혼자서 영적인 추구를 가지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여 사모함으로 열심을 내지만 이 길은 혼자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이 길은 비록 개별적이지만 또한 동시에 함께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달려가는 것은 같은 추구를 가지고 같은 사랑을 목격하는 “우리”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찌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아 1:5)
아가 1장 4절까지는 그 시선이 내가 사랑하고 내가 목적하는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그러지 못합니다. 그 초점에서 눈을 떼면 보이는 것이 나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 곧 왕의 침궁에 들어가면 그 침궁의 아름다움과 밝음이 저절로 나를 보고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알고 얻고 소유하고자 하는 그 추구를 가진 사람마다 그 안에서 너무나 부적절한 나 자신을 봅니다. 이제 이 여인의 시선이 주님에게서 나로 옮겨지고 있음을 봅니다.
‘검다’는 것은 원래의 나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나면 우리 자신들이 원래부터 죄인이었음을 알지 못하고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질적으로 내가 죄 가운데 태어난 죄인인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붙잡으려고 들지 아니하고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려고 하고 내가 하나님의 일을 행하고 내가 선을 행하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자신의 검음을 발견합니다. 이 여인도 왕의 침궁에 들어가서 나의 검음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고 나서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만이 내가 검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결코 내가 검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나의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만 보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라고 말씀한 것처럼 날마다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구원의 은혜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나의 죄성을 왕의 침궁 안에서 그분의 은혜 안에서 볼 때마다 구원의 은혜가 넘쳐나고 처음 사랑이 넘쳐날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검은데 왕은 나를 왜 아름답다고 하시는지, 내가 이렇게 검은데 그분은 왜 나를 사랑하고 나를 받아들였는지, 그분은 나처럼 검은자를 왜 의롭다하시고 나를 그 침궁에 이끌어 들이시며 나를 인도하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지 깨닫고 감사하며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날마다 이 추구를 가진 사람은 언제나 구원의 즐거움을 가진 자가 되고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은혜가 놀랍다고 일평생 구원의 노래를 부르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검음을 날마다 그 빛 안에서 왕의 침궁 안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게달의 장막’은 ‘어두운 방’을 의미합니다. 내게 드러나는 것은 날마다 죄입니다. 사도 바울은 전에도 죄인 중의 괴수였고 지금도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달라지거나 변한 것이 없이 나는 여전히 죄인 중의 괴수에 불과합니다. 나는 모든 사도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이고 모든 성도들 중에 작은 자 중에 더 작은 자에 불과합니다. 나는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에게 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는 게달의 장막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나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은 솔로몬의 휘장입니다.
‘솔로몬의 휘장’은 세마포로 지어져 있습니다. 하늘에서 예수님과 교회가 혼인잔치가 베풀어집니다. 이때 신부의 옷은 세마포 옷입니다. 그리고 세마포 옷은 성도의 옳은 행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의 옳은 행실은 게달의 장막 같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솔로몬의 휘장으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은 성령의 열매로 말미암아 우리가 입게 되는 신부의 단장으로서 세마포 옷이 아니라, 구약으로 돌아가서 솔로몬의 휘장 즉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성전으로 삼으신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게달의 장막 같은 나는 사람들이 알고 내가 아는 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사랑 안에서 나를 의인으로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보고 사람들이 아는 나는 검고 게달의 장막 같은 모습이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솔로몬의 휘장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고 하나님이 아시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나입니다(롬 5:20).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할찌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아 1:6)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있는 자, 하나님이 그 속에 계신 자는 자기 스스로가 죄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10)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합니다. 하나님의 빛은 내 죄를 알게 하고 내 허물을 들추어냅니다. 앞서 드린 대로 우리는 그분의 침궁에 들어갈수록 우리는 그의 밝은 빛 거룩함 앞에 노출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날마다 내가 죄인 중의 괴수임을, 나 자신이 어떠함을 또다시 봅니다. 즉 날마다 그 빛 비춤 아래서 내가 죄인 중의 괴수임을 보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어미’는 영적 예루살렘을 의미합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갈 4:26~28).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사람들이 교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 약속 안에 있지 아니한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교회 안에 있어도 어미의 아들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다만 여전히 육체를 따라 난 자들에 불과합니다. 어미의 아들들을 말하는 것은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들들로 난자들입니다. 이 약속 안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어미의 아들들입니다.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는 표현에서 내 어미의 아들들은 교회 속에서 권력자이며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기들의 포도원을 위하여 일하고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객관적인 일을 통해서만 다만 아는 자들에 불과합니다. 이 포도원이 하나님의 나라이고, 이 포도원을 위하여 일하는 것만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몰라서 이것이 하나님의 일인 것 마냥 열심히 포도원에서 일했습니다. 그러면서 거무스름한 내 자신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침궁에 들어가 보니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나의 포도원은 주님이 내게 주신 포도원입니다. 정작 나 자신은 어미의 아들들의 포도원에서, 어미의 아들들의 포도원지기로 일하느라고 정작 나 자신의 포도원은 돌보지 못한 것입니다. 객관적인 열심에만 치우치다보니 주관적인 열심인 나 자신의 영적인 성장과 변화는 없고 나 자신의 영적인 열매는 없는 것입니다. 어미의 아들들의 포도원에서는 이런저런 많은 업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의 포도원은 내가 전혀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아직 본성적인 죄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사람들 앞에 감추는 데만 급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는 나와 사람들이 아는 내가 같아짐이 마땅한데, 나는 하나님이 아는 나는 검고 게달의 장막 같은데 사람들 앞에서는 그렇게 보이지 않기를 원하고 그것을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이러한 일들을 바르게 분별하지 못하면 우리는 자칫 아가 1장에서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아 1:6)라는 이러한 탄식의 자리에 늘 머물러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외적인 일이라는 것이 참으로 헛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그것에 우리가 휘둘리거나 심취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내 포도원을 바르게 돌볼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지각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 같이 되랴” (아 1:7)
‘먹이는 곳’은 영적인 양식입니다. 그 추구를 위하여 반드시 주의 공급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공급하심을 원하지만 어떻게 먹는지, 어디서 먹이시는지를 모릅니다.
‘오정’은 낮의 완전한 시간을 의미하며 완전한 쉼을 말합니다.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은 완전한 쉼, 온전한 안식이라고 이해합니다.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 같이 되랴’ 양떼는 주님의 양떼가 아니라 ‘네 동무의 양떼’입니다. 여기에서 동무는 주님의 동무들, 주께서 쓰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양떼와 주님의 동무의 양떼는 다릅니다.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아 1:8)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양떼의 발자취는 네 동무의 양떼가 아니라 주님의 양떼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하나님만을 붙좇은 것만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서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럼으로써 내가 주님의 양떼가 되어 주님이 양떼를 먹이시는 곳, 정오에 쉬게 하는 곳에 나도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곳을 나도 알고 얻기를 원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추구는 여기에 있습니다. 단순하게 주님의 동무의 양떼로써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주님으로부터 주님의 양떼가 되어서 직접적으로 주님을 만나 그분에게서 얻고 그분에게서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엘리사처럼 엘리야를 붙좇을 뿐 아니라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삼고자 하는 열정과 추구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아가 1장 8절에서 바로 응답됩니다.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찌니라”(아 1:8).
여기에서 ‘여인 중에’는 예루살렘 여자들입니다. 그들은 구원받은 것으로 충분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어여쁜 자야’라고 말씀하는 이유는 그에게 보이는 추구때문입니다.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린 자 같이 되랴”(아 1:7) 또 그에게 있는 분별 때문입니다. 이 분별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실상을 알고 추구합니다. 이 분별을 가지고 주님의 사랑이 그가 세상에서 그동안 경험한 어떤 것보다도 좋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여인이 ‘어여쁘다고’라고 인정받는 것은 분별하고 추구할 뿐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아는 자는 사랑합니다.
사랑을 받고 주신 사랑을 아는 자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아가 1장에 나타나는 칭찬은 그가 보여준 덕목들 때문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내 어미의 아들들’에 의해서 핍박을 받기도 합니다. 갈라디아서에는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갈 4:29)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삭을 핍박한 자는 이스마엘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에게 핍박이 있다고 하여도 나를 판단하시는 분은 세상 누구도 아니며 오직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보시기에 내가 어떠한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양떼를 쉬게 하는 곳은 온전한 쉼입니다(히 12장). 이미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쉬는 것 같이 온전히 쉰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양떼를 쉬게 하는 곳과 양떼를 먹이시는 곳을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추구했습니다. 그리고 응답을 바로 받았습니다. 그 길은 양떼의 발자취입니다. 양떼의 발자취는 하나님의 보이는 간증입니다. 이 간증은 성경 속에도 있습니다. 발자취는 따라가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면 그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그 양떼들이 모였고 또 목자들이 있습니다. 공동체가 있는 것입니다.
새끼는 아주 어린아이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양이 아니라 염소입니다. 천방지축 어린아이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도 나보다 못한 이들을 돌봐주고 세워주어야 합니다. 정말로 아무것도 분별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들을 먹여야 합니다. 그래서 객관적인 구속사 안에서 주관적인 구속을 이루어가는 원칙을 가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주님 앞에 다른 사람들을 먹일 만큼 위치와 준비가 되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가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나의 가르침과 섬김을 필요로 하는 염소새끼가 보입니다.
그런데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를 벗어나면 안 되고 나는 여전히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되고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내 염소 새끼를 먹여야 합니다.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꿰미로 아름답구나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 (아 1:9~11)
‘만들리라’는 미래형으로 앞으로의 계획입니다. 1장 9절과 10절은 천연적인 아름다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연적인 것들이 하나님 나라를 얻는 데는 아무 소용이 없어서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연적인 것들도 참 귀하게 보십니다. 술람미 여인이 이러한 성향을 통해 영적인 것, 참된 것, 거룩한 것, 아름다운 것을 깨닫게 될 때 아주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그러한 모습을 보입니다.
천연적인 아름다움은 ‘바로의 병거의 준마’입니다. 항상 애굽은 세상을 의미하고 바로는 이 세상 임금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세상적이고 천연적인 아름다움으로 보는 것입니다. 병거가 일천 사백이요 마병이 일만 이천인데 애굽에서 돈을 주고 사 온 것입니다. 그래서 아가서에서 말씀하는 대로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한 것이 천연적인 아름다움인 것입니다.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으매 병거가 일천 사백이요 마병이 일만 이천이라 병거성에도 두고 예루살렘 왕에게도 두었으며 왕이 예루살렘에서 은을 돌 같이 흔하게 하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 같이 많게 하였더라 솔로몬의 말들은 애굽에서 내어왔으니 왕의 상고들이 떼로 정가하여 산 것이며 애굽에서 내어올린 병거는 하나에 은 육백 세겔이요 말은 일백 오십 세겔이라 이와 같이 헷 사람의 모든 왕과 아람 왕들을 위하여도 그 손으로 내어왔더라” (왕상 10:26~29)
‘준마’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고상함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성품이나 성격이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바로의 준마는 이 자태를 가진 말들입니다. 그러므로 고상하다는 것을 주님께서 아름답다고 칭찬하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두 뺨은 그의 천연적인 성품이 아름답고 훌륭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 아름다움은 ‘땋은 머리털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머리털은 은사를 말합니다. 여기에서 은사는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된 것이 아니라 천연적인 은사를 의미하며 달란트, 재능, 능력이라고도 합니다. 그는 참으로 천연적인 능력이 많이 보여집니다. 지혜롭거나 언변이 좋거나 음악적 재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땋았다는 것에서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땋은 머리털은 그가 훈련으로 인해서 정돈되어진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보석도 그 보석 자체보다는 그 보석이 어떻게 연마되었는지에 따라서 그 가격이 결정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받아가진 그 은사들이 학습과 훈련을 통해서 잘 정돈되어졌을 때 비로소 그것이 아름답습니다. 사람에게 다 재능이 많다고 해서 그것이 훌륭한 것이 아니라 그 재능이 어떻게 학습되고 훈련되었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세상은 사람들의 재능을 어찌하든지 발견하고 훈련하여서 그것이 땋은 머리털처럼 잘 정돈되어지도록 하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천연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들이 영적인 일에도 민첩합니다. 바로의 준마처럼 빠릅니다. 물론 그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추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훼방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한 자아를 처리하십니다.
술람미 여인은 땋은 머리털로 뺨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목이 구슬꿰미로 아름답습니다. 목의 곧음은 교만하다, 강퍅하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녀의 이 목은 곧은 목이 아니라 구슬 목걸이로 가려져 있습니다. 인간 본연의 강퍅하고 교만함이 있는데 그것이 잘 절제된 것입니다. 구슬은 진주를 의미하는 것으로 진주는 연단되어서 잘 절제되어짐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꿰어져 있는 것을 보아 그의 성품이 잘 조직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이 여인에게는 천연적인 많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칭찬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 중에서 아름답고 세상에서 칭찬할 만한 모습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들로 하나님 나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우리에게 온전한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는 삼위 곧 성부, 성자, 성령입니다. 금은 하나님의 신성, 거룩함을 의미하고 사슬은 금이 많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새로운 자아가 필요한데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그 성품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불로 연단하여 그를 부요케 하십니다. 이것이 사슬로 표현되는 것은, “땋은 머리, 구슬꿰미” 등 모든 은사나 성품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하나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서로 꿰어져 있는 것이기에 사슬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금사슬을 은을 박아서입니다. ‘은’은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말합니다. “사슬”은 의의 면류관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구슬꿰미는 온유함을 말합니다. 진주는 고통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사람은 고난을 통해서 겸손해져 갑니다.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아무리 아름답고 선하고 의롭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추하고 더럽고 악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는 하나님 나라에서 아무런 분깃도 얻을 수가 없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 (아 1:12)라는 말씀은 누가복음 7장 말씀을 통해서 이해가 됩니다. 적게 사함을 받은 자는 사랑을 적게 받고 많이 사함을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상에 앉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나도 기름 향기가 발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찬을 통해 주님을 기념하라고 하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상에 앉아서 주의 사랑이 내게 어떻게 주어졌는지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야만 나의 나도 향기가 발하게 됩니다. 주님 앞에 향유를 부었던 여인처럼 많이 사함을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합니다.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아 1:12)라는 말씀은 일회적으로 체험되어서는 안 됩니다. 날마다 체험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내 안에서 일회적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랑은 지속적으로 내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에베소 교회가 됩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 (아 1:13)
‘품’은 가슴을 의미합니다. 워치만 니는 가슴을 말할 때에 데살로니가전서 5장 8절을 인용합니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8)
‘흉배를 붙이고’라고 하는데, 흉배는 가슴에 믿음과 사랑으로 붙입니다. 믿음은 주님을 얻게 하고, 사랑은 얻은 것에 대한 반응입니다. 우리의 가슴에는 믿음으로 주를 얻고 그 얻은 것에 대한 반응으로 날마다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가슴의 자리는 느낌의 자리입니다. 믿음으로 느끼고 사랑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를 얻으면 그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 줄 압니다.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 (아 4:5)
쌍태는 쌍둥이입니다. 그리고 노루는 민감함을 말합니다. 쌍태는 믿음과 사랑을 의미하며 믿음과 사랑은 균형이 잘 맞아야 합니다. 몰약’은 주님의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니고데모는 몰약을 주님의 시체와 함께 묻었습니다. 이것은 장례지낼 때 시체가 부패하지 않기 위해서 함께 씁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라는 것은 다시 말하면 여인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가슴이 반응합니다. 그녀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얻습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주님께 반응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 십자가는 주님이 나를 위해서 죽은 장소일 뿐 아니라 내가 죽은 장소입니다. 주님의 죽으심 안에서 나를 보고 나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라고 말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아 1:14)
‘엔게디’는 광야입니다. 포도는 꽃이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포도원은 꽃이 없는 곳입니다. 그곳에 아름답고 짙은 향기를 가진 ‘고벨화 송이’는 꽃이 피어 있습니다. ‘고벨화 송이’는 아름답고 짙은 향기를 가진 꽃입니다. 유대의 여인들은 이것을 자기의 옷에 달아서 장식품이나 장식물로 삼습니다. 다시 말하면 엔게디 포도원은 꽃이 없는 광야 같은 곳입니다. 그곳은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천연적인 나 자신, 사람들 앞에서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나 자신을 말합니다. 이러한 나를 발견한 것은 내 가슴에 몰약 향낭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내 품에 몰약 향낭을 품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엔게디 포도원이라고 표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십자가를 통과하면서 주님을 사랑하게 될 뿐 아니라 그 십자가를 통과하면서 육체의 신뢰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되어집니다. 오늘 이 여인은 그것을 “엔게디 포도원”으로 비유합니다. 광야에 있는 포도원에는 꽃이 피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아름다운 고벨화 송이가 피어 있습니다. 고벨화 송이는 바로 주님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경험한, 내 품의 몰약 향낭을 경험한 사람은 자기를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장식품이 됩니다. 나의 자랑으로 삼습니다. 이제 내 품에 몰약 향낭을 가졌으니 이제 세상을 향해서 나타내고 드러낼 것은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아 1:15)
아가 1장 14절까지는 여인이 왕에게 하는 말이었다면 이 구절은 왕이 여인에게 하는 말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내게 하신 말씀입니다.
비둘기 눈은 볼 수 있는 눈 곧 밝은 눈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안목을 가진 것입니다(마 13:16~17, 마 16:16, 마 6:22~23). 영적 안목을 가지고 여인은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추구하여 왔습니다. 그가 어떤 분인지를 보았고 알았기에 그를 사모하고 추구하여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지만 그 눈이 아름답다고 칭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비둘기 눈을 영적인 안목에서 다루기보다는 단일 초점으로 다루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안목을 주셨어도 두리번거리거나 이것저것 곁눈질 하는 사람은 비둘기 눈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눈은 아름답지 않습니다(롬 8:5~6).
우리가 영적인 안목을 갖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영적인 안목이 열려져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고 그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도무지 보지 못하는 영생과 장차 되어질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감추어진 것 곧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 초점을 고정시키고 주님을 목적하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단일초점의 의미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 (아 1:16~17)
아가 1장에서 2장 1절까지는 여인의 노래라고 구별합니다. 앞에서 여인은 주님에게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 같이 되랴”(아 1:7)는 질문과 탄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탄식은 여인에게 양떼를 발자취를 따라오라는 응답을 받게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양떼를 먹이는 것과 쉬게 하는 곳을 만나게 됩니다. 여인은 지금 그 인도하심을 받아서 그곳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아 1:17)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기쁨이 넘치는 상태입니다. 주님의 침궁 안에서 나의 주님을 경험하고 사랑의 사귐을 주님과 함께 나누고 또한 그 상에 앉아서 주님으로 충분히 배부르니 ‘주님은 나의 사랑입니다. 당신은 참으로 아름답고 또한 당신은 나의 기쁨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그는 침궁, 그 상에서 그리고 “침상”을 말합니다. 침상은 눕는 곳, 쉬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이 푸릅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라고 노래합니다. 다윗 역시 주님의 상에 앉은 자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나의 목자가 되시니 나는 당신으로 인해 부족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당신이 내게 주는 그 무엇으로 부족함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2)라고 말합니다.
침상이 푸르다는 것은 완전한 안식, 평안, 쉼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내가 행복하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내가 배부르다면 이제는 쉬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에서 “푸른 초장에서 먹이시고”가 아니라 “푸른 초장에서 누이시고”라고 말씀합니다. 물가도 물을 마시는 곳이 아니라 “쉴 만한 물 가”입니다. 목자이신 그분으로 말미암아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분이 주시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는 부족함이 없고 만족했으니 푸른 초장은 나의 밥상이 아니라 내가 쉬는 곳입니다.
또한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라고 고백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에도 주님으로 인하여 안위하고 내 마음이 평안합니다.
우리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배부름, 만족을 얻는 자가 되어지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나의 주님을 더 얻는 자가 되어져서 그분과 사랑의 사귐과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늘 골방에서 그분을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하지만 또한 동시에 우리는 그분 안에서 온전히 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서 광야에 나갔을 때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시 3:5)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주어진 환경이 그로 잠 못 이루지 않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그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전히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푸른 초장을 만나고 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나의 푸른 초장이 되십니다. 그래서 그곳에 가서 평안과 쉼을 얻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온전한 쉼을 얻을 수 있는 자리는 주님과 함께 하는 주님의 침상입니다(빌 4:6~7). 주님과 함께 하는 침상은 나에게 어떤 것보다도 참된 평안을 가져다줍니다. 주님을 부르고 주님과 함께 있으니 그것으로 나는 평안합니다.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
예루살렘 성전은 백향목과 잣나무로 지어졌습니다. “또 레바논에서 백향목과 잣나무와 백단목을 내게로 보내소서 내가 알거니와 당신의 종은 레바논에서 벌목을 잘하나니 내 종이 당신의 종을 도울찌라”(대하 2:8)
“우리 집은” 주님과 함께 거하는 그곳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주님과 함께 거하는 그곳이 우리 집입니다. 우리는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찬송합니다. 백향목은 예수님의 인성을 상징하고, 잣나무는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인성은 크고 높고 견고한 것이며, 잣나무는 죽음의 마을에서 나와서 그것은 언제나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무덤 곁에는 잣나무가 심겨진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전은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통해서 지어졌습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엡 2:20~22)
인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성전의 모퉁이 돌이 친히 되셨고 우리는 그분 안에서 그리고 성령 안에서 성전으로 지어져 갑니다. 특별히 아가서에서는 “우리 집은”이라고 말합니다. 언제나 우리의 거처는 예수님과 함께 지어져 갑니다. 오직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거처를 가지고 있을 뿐이고 오직 그분과 함께 지어져 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성전으로 하나님의 거처가 되기 위해서 지어져 가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합니다.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아 2:1)
‘샤론’은 평원을 의미하고, ‘수선화’는 들풀을 의미합니다. 나는 평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뿐 아니라 골짜기의 백합화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는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 6:28)고 말씀합니다. 골짜기의 백합화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 살아가고 그의 보살핌과 도우심으로 살아가는 나는 그만한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샤론의 흔히 보이는 들꽃에 불과한 나인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참으로 골짜기 가운데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고 그의 보살핌과 도우심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 6:29)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샤론의 수선화’는 모든 사람들 속에서의 나입니다.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고 특별할 것이 없는 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가운데 보호하심과 돌봄을 받고 있는 나를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 2장 3절과 4절에서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라는 간증을 갖게 만듭니다.
2장 독후감
1. 아가서 1집을 읽고 묵상하며 술람미 여인의 추구와 사도 바울의 영성을 함께 학습하고 묵상하였습니다. 본질적 사랑, 일방적 사랑, 보편적 사랑에서 상대적 사랑, 상호적 사랑, 개별적 사랑(특별한 사랑)으로 발전되어 날마다 깊고 넓은 영성으로 성장하길 소원합니다. 23년에도 학습과 훈련과 연단과 실제를 통해 지속적으로 주님을 목적하고 성장과 변화에 힘쓰며 주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복된 영성인이 되도록 추구하겠습니다.
금년에는 술람미 여인이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신랑이신 주님을 더욱더 사랑하며 추구했던 것처럼, 저 역시 기본과정에 충실하고 영적 원리에 맞추어 영성형성에 더욱 힘쓰고자 뜻을 정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맡기신 공동체에 이 원리를 적용하면서 함께 세워주고 세워지는 복된 공동체가 되길 소망합니다. 영성의 길은 개별적이고 동시에 함께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2. 포도주의 헛됨과 목마름에 대해 묵상하며 시간을 아끼는 지혜를 얻기를 소원합니다. 포도주가 가져다주는 기쁨은 헛되며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은 유한합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한 므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에, 헛되고 유한한 것에 허비하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그 대신 세월을 아끼라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성령의 지도와 인도함을 받아 주님을 바르게 사랑하고 섬기는 복된 일상이 되도록 더욱 힘쓰겠습니다(전 3:12~13). 남은 인생이 주님을 알고 얻고 소유하며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는 삶이 되도록 게으름을 극복하고 더욱 훈련에 힘쓰겠습니다.
3. “술람미 여인이 주님의 빛 안에서 검으나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주님의 빛 비춤 안에서 자신의 실상을 바르게 발견하고 겸손을 유지했습니다(딤전 1:15, 엡 3:8, 고전 15:9~10). 다시 말해 사람들이 보고 사람들이 아는 나는 검고 게달의 장막 같은 내 모습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솔로몬의 휘장과 같은 것입니다(롬 5:20).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고 하나님이 아시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나입니다.” 이 주제를 통해 겸손을 유지하는 삶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빛 비춤을 통해 주님을 바르게 알고 나 자신을 바르게 하는 영성인이 되도록 더욱 힘쓰겠습니다.
4. “현대교회가 영성을 잃어버리게 된 가장 큰 위기의 시대가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영적 성장을 바르게 추구하지 않고 외적 부흥에만 몰두하는 영적 지도자들에게 있습니다. 그들은 맡겨진 양떼를 돌봄에 있어서 그들이 바르게 성장하고 성숙해가도록 돕지 아니하고 오히려 성장과 성숙을 방해하거나 방관하거나 방치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의뢰하고 섬기도록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와 주님의 사람들을 바르게 섬기는 영적 지도자가 되기 위해 생명의 흐름 안에 거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 생명을 공급받고 주님의 사람들에게 생명을 허비하는 복된 삶이 되도록 더욱 추구하겠습니다(엡 4:11~16).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지혜로운 종의 비유의 말씀과 사도 바울의 헌신을 마음에 새기고 주님께 영혼을 얻어드리는 영성인이 되도록 영성훈련에 더욱 힘쓰겠습니다(눅 12:42~48, 마 24:45~51, 고후 11:1~3, 갈 4:19).
5.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1장과 12장에서 보여준 자기 자랑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첫째, 사도 바울의 자랑은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마음을 도적질하는 잘못된 지도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단의 일꾼으로써 성도들의 마음을 도적질하여 하나님이 아닌 자기들을 섬기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도 바울은 무익하나마 부득불 자신의 수고, 봉사, 헌신, 영적 체험을 자랑합니다. 이러한 자랑은 성도들로 하여금 더욱 더 주님을 사랑하고 바르게 섬기도록 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이 부득불 무익하나마 자랑하고 있는 것은 양떼의 발자취입니다. 그의 동기와 목적이 오직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바울 되게 하신 그 주님이 나의 주님이시고 그 주님이 내 안에서 나를 대신하여 사시는 그분이니까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바울의 영성을 배우는 것입니다.
셋째, 사도 바울은 영적 체험을 자랑할 뿐만 아니라 자기의 약함을 자랑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 11장에서는 자신의 지혜에 대해서 말하고, 12장에서는 본인에게 있는 여러 계시들과 체험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는 셋째하늘에 또 하나는 낙원에 다녀오는 다른 체험을 말합니다.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보고 들은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랑하는 것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사단의 일꾼들 때문입니다. 그들도 똑같이 그것을 자랑하여 자신을 우러르도록 하여 자기를 따르도록 사람들을 속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단의 일꾼들이 자기 모임에 사람들을 가둬 두기 위해서 가장 많이 하는 자랑 중의 하나는 은사나 능력이나 혹은 체험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것들을 통해 자기를 과시하거나 자기를 높입니다. 심지어는 우상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고후 12:5)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나를 위해서는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이런 자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하는 것이고 예수로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랑을 통해서 영광을 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나를 위해서는 약함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에서 나는 천연적인 바울입니다. 천연적인 말은 아가서를 이해함에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천연적인 나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보기에 칭찬할 만하고 우러를 만한 것인지 몰라도 성령의 빛 비춤 속에서는 질그릇에 불과한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니라 나를 나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경계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겸손을 날마다 시간마다 순간마다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딤전 1:15, 엡 3:8, 고전 15:9~10, 빌 3:3).
6. “술람미 여인에 대해서 그를 아름답다는 것은 천연적인 것을 의미하지만 주님 앞에서는 아무런 가치와 소용이 없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고 순전하게 하시려고 오늘도 날마다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금사슬의 문제이며, 흠이 없고 순전하다는 것은 은을 박는 것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연단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엡 4:22~24, 요 15:4~5, 고전 3:9~15). 하나는 옛사람을 벗는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새 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통해 지속적으로 십자가의 역사를 통해 옛 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는 삶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시고 구원에 참여하도록 하시기 위해 열심을 내시기에, 그 열심 안에서 바르게 반응하여 더욱 힘써 구원을 이루고 구원에 참여하는 영성인이 되도록 추구하겠습니다(골 1:28~29, 고후 5:14~17, 고후 11:1~3, 빌 2:12~14, 엡 1:4~5, 빌 1:6, 살전 5:23~24). 하나님의 기대하심과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믿고 소망하며 더욱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성인이 되도록 영적 원리(원칙)에 충실하겠습니다(고후 5:8~10, 딤후 4:7~8).
7.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이 주제를 묵상했습니다. 남은 생애동안 주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쉼을 가진 자가 되어 주의 나라에 바르게 참여하는 복된 영성인이 되길 소망합니다.
“침상은 눕는 곳, 쉬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이 푸릅니다(시 23:1~2). 침상이 푸르다는 것은 완전한 안식, 평안, 쉼을 의미합니다(마 11:28). 주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내가 행복하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내가 배부르다면 이제는 쉬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푸른 초장에서 누이시고”라고 말합니다. 물가도 물을 마시는 곳이 아니라 “쉴 만한 물 가”입니다. 목자이신 그분으로 말미암아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분이 주시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는 부족함이 없고 만족했으니 푸른 초장은 나의 밥상이 아니라 내가 쉬는 곳입니다. 또한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에도 주님으로 인하여 안위하고 마음이 평안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그의 푸른 초장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배부름, 만족을 얻는 자가 되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나의 주님을 더 얻는 자가 되어져서 그분과 사랑의 사귐과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늘 골방에서 그분을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하지만 또한 동시에 우리는 그분 안에서 온전히 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시 3편~4편, 시 57편, 마 11:26~30, 엡 6:10~18). 다시 말해 우리가 온전한 쉼을 얻을 수 있는 자리는 주님과 함께 하는 주님의 침상입니다(빌 4:6~7). 주님과 함께 하는 침상은 나에게 어떤 것보다도 참된 평안을 가져다줍니다. 주님을 부르고 주님과 함께 있으니 그것으로 나는 평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