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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막9:21~29)
오랜 만에 다시 마가복음으로 돌아왔습니다. 지금 우리는 마가복음 9장을 살펴보고 있는데, 잠시 기억을 되살려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셨을 뿐 아니라,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옴으로 앞으로 걸어가실 십자가의 길이야말로 참된 구원의 길임을 다시 한 번 확증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세, 엘리야와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죽으실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이처럼 산 위에서는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에 대한 준비가 비장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시각 산 아래에서는 제자들이 귀신들린 소년을 고쳐주지 못해 쩔쩔매며 논란에 휩싸이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치유하심을 바라고 한 아버지가 귀신들린 소년을 데리고 산 아래로 왔는데, 하필이면 그때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대신 나섰는데, 그들은 소년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간단하고 쉬운 일로 여겼습니다. 이미 둘씩 파송을 받아 각 마을로 흩어졌을 때에 이러한 사역들을 감당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자신이 있었고, 또한 한편으로는 그 때의 기분을 다시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마음에 다소 흥분되기도 하였겠지요.
이렇게 해서 몇몇 제자들이 먼저 나섰지만 보기좋게 실패하고 맙니다. 이를 지켜본 다른 이들이 그것도 제대로 못하느냐며 면박을 주고 나서는데 연거푸 실패를 하지요. 결국 아홉 명의 제자들이 모두 함께 힘을 합하여 귀신을 내쫓으려 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교만해진 제자들은 하나님이 아닌, 자신들의 힘과 경험을 의지하였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는 서기관들이 그들을 공격하였고, 서로 간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십자가를 향한 굳은 결의를 다지며 산을 내려오시는 주님께서 뜻하지 않은 소란스러움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무슨 일인지 자초지종을 물으셨습니다. 하지만 꿀먹은 벙어리가 된 제자들은 차마 자신들의 부끄러운 실패에 대하여 예수님께 아뢰지 못합니다. 그리고 대신 소년의 아버지가 거기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간략하게 경과보고를 하였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책망하시며,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고 하시는 것까지 지난 번에 함께 살펴보았었지요.
자,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나왔는데, 갑자기 아이가 발작을 일으킵니다. 귀신이 예수님을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시겠지만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맨 처음 하신 일이 동역자인 제자들을 부르신 것이었지요. 그리고서 안식일을 맞아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때에 더러운 귀신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1:24). 또한 5장에서 풍랑을 헤치고 거라사 땅에 이르렀을 때에도 주님께서 배에서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무덤 가운데 거하던 군대 귀신 들린 자가 달려나와 큰 소리를 지르며 거의 동일한 말을 하였지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소서”(5:7).
공생애 처음과 중반에 이어 이제 마지막에 이르렀는데, 한결같이 귀신은 이처럼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무리는 물론, 예수님을 그림자같이 수행하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생생하게 듣고 그 구체적인 역사를 경험한 제자들은 여전히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은 영을 알아본다고 하지요. 분명 귀신 뿐만 아니라 인간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영적인 존재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깨닫지 못하는 것은 딱딱하게 굳어진 마음과 죄악들이 가려서 이겠지요.
언제나처럼 또다시 귀신이 발작을 일으켜 몸을 부르르 떠는 가운데 온갖 욕설을 내뱉으며 소리를 지르고 땅에 엎드러져서 떼굴떼굴 구르며 입에 하얀 거품을 무는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너무도 힘들어하지만 정작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더군다나 마지막 소망의 끈을 붙잡고서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지만, 그의 제자들을 통해 이 또한 헛된 바람에 불과하였음을 명백히 밝혀졌고, 이제는 어디에서도 소망을 찾을 수가 없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결국 제자들의 실패로 인해 마지막 소망의 불씨가 꺼져버렸고 그리하여 좌절의 늪에 빠진 아버지는 사실 그가 원래 도움을 구하려 하였던 당사자인 예수님께서 앞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도와 달라고, 어서 귀신을 쫓아내고 내 아들을 온전케 해달라는 등의 아무런 간구를 하지 않습니다. 앞서 보았던 것처럼 이미 아버지는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던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 또한 자신의 아들을 귀신의 얽매임으로부터 구해줄 수 없다고 생각하고 포기를 하였지요.
이번에도 대심방을 하면서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상처를 받아서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졌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습니다. 늘상 사무실에 가스펠을 틀어놓고 있지만 너무나도 비인격적이고 도무지 용납하는 행동들을 하여서 이제는 가스펠 듣는 것조차 힘들게 만드는가 하면, 동료가 갑자기 죽어 다들 조문을 가는데 나몰라라 하는 것은 물론 오히려 사람들이 조문가고 없으니 제일 비싼 것 시켜먹자고 말하는 무정한 사람까지...
사람들을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합니다. 결국 주변에 먼저 믿은 사람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는 것이지요. 지금 산 아래 아홉명의 제자들로 인해 소년의 아버지가 이미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단정짓고 더 이상 희망을 품지 못하고서 포기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마음대로 살아서는 안되는 이유가,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할 이유가, 그리하여 우리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며 주의 복음과 사랑을 나타내보이는 삶을 살아야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무엇 때문에 이렇게 소란스럽게 변론하느냐고 물으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 또한 언제부터 아이가 귀신들렸는지 몰라서, 호기심에 질문한 것이 아니지요. 아버지로 하여금 그동안 고통 가운데 보내온 아들의 삶을 돌아보고 다시금 그가 어떠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이 자리 가운데로 나아왔는지를 기억하게 하시고자 함이었지요. 하지만 아버지는 그가 ‘어릴 적부터 그러하여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물과 불에도 자주 던졌노라’고 답변을 할 뿐, 거기에서 끝입니다.
물과 불에 던졌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죽음의 위기 가운데 처했다는 것인데, 아들의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되뇌이기는 하였으나 아버지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어떠한 각오와 심정으로 이 자리 가운데 나오게 되었는지를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선 겨우 예수님께 한다는 말이 ‘그래도 혹시 무엇인가를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달라’는 것이 전부이지요. 이 말이 무슨 의미인가요? 이미 당신의 제자들을 통해 당신 또한 귀신을 쫓아내거나 고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 잘 알고 있는데, 그러니 혹 조금이라도 우리를 위해 뭔가 행하실 의향이 있다면 도와달라고... 그는 18절에서처럼 ‘귀신을 내쫓아달라’고 하지 않고, 그저 도와달라고만 합니다. 그리고 이 말의 의미는 평소보다도 심한 발작을 일으켜 힘들어 하는 아이가 조금이라도 진정이 되고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가능하면 팔과 다리를 좀 붙잡아 달라는 그런 정도의 도움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이미 실패한 자신의 제자들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을요. 따라서 이러한 가운데 예수님께서 하셔야만 했던 일은 무엇보다 그 아버지에게 있던 이러한 절망과 불신을 몰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소 책망하는 듯한 어조로 강하게 말씀하시는데, 23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의 이 책망에 다시금 정신이 번쩍 든 아버지는 처음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이 자리로 나왔을 때의 마음을 회복하였고, 정말로 마지막이라고 하는 그 간절함과 절박함으로 부르짖어 간구하였습니다. “내가 믿습니다, 주님.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십시오”(24)... 아마도 소리를 지르며 발작을 일으켰던 귀신의 소리보다도 훨씬 더 컸을 것입니다.
이미 불가능하다고 단정지으며 포기하고 체념하였던 일에 대하여 다시금 희망을 품는다고 하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아버지는 다시금 그 일을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게 해달라고, 다시금 소망을 품을 수 있게 해달라고 자신의 연약하고 부족한 믿음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며 주의 도우심을 구하였습니다. 물론 중간에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고 자신들의 경험을 믿었던 제자들의 어리석은 교만함 때문에 어려워진 것이 사실이지만, 여하튼 이렇듯 의심하고 포기하며 갈팡질팡하는 듯한 믿음을 가진 자에게 예수님께서는 야단을 치고 책망을 해서라도 정신을 차리게 하셨고, 다시금 그가 처음 예수님을 찾아 나왔을 때의 그 간절하고 절박하였던 믿음을 회복하여, 부르짖고 간구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주님께서는 만나주시기를, 응답해 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이지요.
이 아버지의 간구에 응답하신 예수님께서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셨습니다.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25). 그런데 무슨 일이 발생하였나요?... 이어지는 26절을 보면, 예수님의 이 명령에 귀신은 앞서보다 더욱 크게 소리를 지렀고, 더욱 심한 경련을 일으키더니 결국 그 자리에 쓰러져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본 많은 사람들은 이 아이가 죽었다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순간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사실 처음부터 되지도 않을 불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쓸데없는 희망이나 괜한 기대감을 줬다가 빼앗아 가는 것처럼 잔인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차라리 제자들이 실패하였을 때, 그리하여 마음을 접었을 때 그냥 포기하고 돌아가도록 내버려두시지, 사람 마음 가지고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괜한 기대감만 잔뜩 갖게 하시더니 이게 뭐란 말입니까? 이토록 극과 극을 계속해서 오가야만 했던 아버지의 마음은 오죽이나 힘들었을까요? 비록 짧은 순간이었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는 극도의 번민과 갈등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말을 하지 못하면 어떻습니까? 듣지 못하는 것이 무슨 대수인가요? 그래도 살아서 곁에 있어주는 것이 얼마나 대견하고 기특한데요. 아무렴 귀신들이 아들이 죽은 시체보다야 훨씬 더 나을 수밖에요. 정말로 연약한 모습이지만, 그래도 이 아이야말로 어쩌면 아버지의 삶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으로 인해 그 아이가 죽은 듯 합니다. 순간 눈앞이 깜깜해지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겠지요. 그런데 이때 예수님께서 그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죽은 것 같았던 아이가 주님의 손을 잡고 일어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믿음에 대해 많은 오해들을 하는데요. 마치 믿기만 하면 즉시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질병이 나으며, 고난이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지요. 하지만 때때로 믿음은 우리를 더 큰 시험과 고난으로 밀어넣기도 합니다. 마치 더욱 크게 소리를 지르고 심한 발작을 일으키며 급기야 죽은 듯이 보이는 것처럼 말이지요. 상황이 개선되기는커녕 더욱 악화되고, 그나마 실낱같이 있던 희망마저 사라져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고, 이제는 끝났다고, 더 이상 소망을 가지는 것은 어리석고 무모한 것이라고, 이제는 포기하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듯 그동안의 삶과 세속적인 가치관을 철저히 내려놓고 죽어질 때 비로소 주님께로 말미암은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역으로 말하면 주님으로 말미암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이렇듯 죽어야만 한다는 것이지요.
사실 오늘 사건에서는 소년의 치유 자체보다 믿음이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책망하시고(19), 아이의 아버지에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독려하시며(23), 이에 아버지가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라고 부르짖어 간구하는(24) 것 등을 통하여서 말입니다.
그런데 사건이 마무리되고 집으로 들어간 후,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찌하여 자신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29절에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답변하시지요. 오늘의 사건에서 계속 강조하였던 믿음이 기도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믿음의 기도만이 하나님의 능력과 치유의 통로가 되어진다는 것이지요.
이렇듯 믿음과 기도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기도는 결국 우리의 믿음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믿음이 없는 기도는 공허한 메아리이고 시간낭비에 불과하여 아무런 역사도 일으키지 못합니다. 여기서 제자들의 실패의 원인이 명확해지는데, 결국 그들은 믿음의 기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자신들의 경험을 의지한 채 교만함으로 구하였으니까요. 그들은 귀신을 제어하고 내어쫓는 능력이 마치 자신들 안에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인데 말입니다. 능력은 우리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다만 우리는 그 통로일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겸손해야만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올바른 통로가 되기 위하여 막힌 것이 없도록 깨끗해야할 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 기도에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도 자체가 하늘 문을 여는 하나의 주문이나 마술이 아니며, 결국 궁극적으로 치유하는 모든 힘의 원천은 하나님이시지요. 이제 뒤로 갈수록 더욱 이 믿음과 기도의 중요성이 커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절정이 겟세마네에서의 주님의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금 우리의 믿음을 돌아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마치 제자들처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일들을 마치 내가 한 것인 양 착각할 뿐아니라, 심지어 다른 사람들이 주님께로 나아오는 것을 방해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또한 늘 현실의 벽 앞에 부딪혀서 믿음을 접고 타협하며, 오늘도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그저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다시금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임을 기억하며, 나아가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라고 부르짖었던 한 아버지의 고백이 또한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이성과 사고의 한계를, 불가능하다고 하는 현실의 벽을, 소망을 잃고 쓰러져 있는 좌절과 절망 속에서 한숨과 탄식 등 이 모든 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구원의 능력이 예수님께 있음을 믿고 나아가길 원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주님께서 야단을 치시고 책망을 하셔서라도 이 믿음을 회복하길 원하심을 알고, 오직 예수님만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기도로 그분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며 좌절과 절망을 넘어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80513. 주일.
숲속의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