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대구시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권영호
[영화, 詩·그림을 만나다] 블레이드 러너 | ||||||||||
1984년쯤으로 기억된다.
늦은 밤 TV에서 희한한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주적주적 비가 내리는 도시 뒷골목, 허름한 경찰이 뭔가를 쫓아다니고 있었다. 흔한 악당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인조인간이었다. 그들은 행성을 탈출해 4년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지구에 온 리플리컨트(Replicant)들이다.
워낙 정교해 진짜 인간과 구별하기도 어렵다. 그들을 쫓는 전문 경찰이 블레이드 러너, 고독한 사냥꾼 데커드가 그들을 쫓는다. 음울한 분위기에 신비로운 음악, 디스토피아적인 미래관에 사로잡혀 영화를 본 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눈만 감으면 리플리컨트 로이가 비를 흠뻑 맞으면서 나직하게 말하던 대사가 떠올라 뒤척였다.
나중에 이 영화가 ‘블레이드 러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저주받은 걸작’은 뛰어난 수작이지만, 관객들로부터 냉대를 받은 작품을 일컫는 말이다. 이 말은 ‘블레이드 러너’를 두고 하는 말이다. 1982년 당시 스티븐 스필버그의 달콤한 SF영화 ‘이티’에 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26년이 지난 지금, 전 세계 관객들은 ‘이티’보다 이 영화를 기억하고, 또 열광하고 있다.
과연 우리의 기억은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우선 ‘블레이드 러너’가 던진 질문이다. 인조인간들은 모두 조작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어릴 적 어머니의 기억도 가짜고, 태어나던 기억도 모두 다른 진짜 인간의 기억이 주입된 것이다. 그 기억을 믿고 있던 자신이 사실은 인조인간이고, 기억도 모두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얼마나 절망했을까.
영화에서 레이첼(숀 영)은 자신이 진짜 인간이라고 믿고 있다. 나 기억이 있어, 어릴 때 엄마랑 놀기도 했어. 기억이 있기에 영혼이 있고, 영혼이 있기에 나는 사람이야. 그러나 데커드는 잔인하게 대꾸한다. “이식된 거야. 그것은 회장 조카의 기억이야.” 레이첼의 커다란 눈동자가 흔들린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그럼 엄마는? 엄마랑 같이 놀던 그 순간은?
데커드를 구하고 최후를 맞는 인조인간 로이(룻거 하우어)의 모습은 오랫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난 네가 상상도 못할 것을 봤어. 탄호이저 기지에서 빛으로 물든 바다도 보았지. 이제 그 기억이 모두 사라지겠지. 빗속의 내 눈물처럼. 이제 죽을 시간이야.”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장열하게 ‘임종’을 맞는 모습이 그리 처연할 수 없었다. 그는 ‘죽을 시간’(time to die)이라고 했지만, 영화 속 그의 최후는 ‘폐기 처분’ 또는 ‘제품 회수’란 뜻의 ‘retirement’다. 단지 인조인간이란 이유로 ‘죽음’으로 불리지도 못한다.
기억이 없다면 영혼도 없는 것일까? 그러나 로이는 그 어떤 인간도 하지 못한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역설하고 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우광훈은 ‘나, 기억이 있다’는 시로 기억과 생명에 대한 성찰을 풀어냈다. ‘입속으로 마침내 가늘고 긴 호수가 드리워졌다’고 죽음을 은유한 것은 그가 동생의 죽음을 얼마나 안타깝게 지켜보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밤이면 TV도 끈 채 엄마랑 고도리만 쳤다’는 대목은 죽음을 받아들이기도, 부정할 수도 없는 살아남은 이의 절절함이 묻어난다.
영화를 본 후 시인은 “저 역시 통속하고 희미한 기억, 그 은밀하고 단편적인 인상의 기록들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그런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잔인하게 느껴지는 하루였다”고 했다.
화가 손파는 산성비 내리는 영화 속 거리를 차가우면서도 혼란스러운 붓터치로 그렸다. 콘트라스트 강한 문명과 인간의 대비가 쏟아지는 빗줄기와 함께 인상주의적 표현으로 그려냈다.
‘나를 나라고 말할 수 있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 물음이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캔버스에 어지럽게 그려져 있다. 정말 나는 누구인가. 도대체.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1982) 감독:리들리 스콧 출연:해리슨 포드, 숀 영, 룻거 하우어 러닝타임:117분 줄거리:2019년 11월 LA. 400층 높이의 건물들로 가득 찬 거리와 번쩍이는 네온등, 끊임없이 산성비가 내리는 도시. 지구의 파괴와 엄청난 인구증가로 인해 다른 행성으로 식민지 이주가 본격화된다. 한편, 2주 전 남자 셋, 여자 셋이 식민 행성에서 탈출, 23명을 죽이고 우주선을 탈취하여 지구로 잠입한다. 이들은 외견상 진짜 인간과 구별이 불가능한 복제 인간 리플리컨트. 때문에 수명이 4년으로 제한되어 있다. 그들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창조주(제조회사 창업자)를 찾아가고, 이들을 전문적으로 검거하는 경찰인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해리슨 포드)가 뒤를 쫓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