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urice Jarre/ Lara's Theme
Staff & Cast
제작 ........... 카를로 폰티 (Carlo Ponti)
감독 ........... 데이비드 린 (David Lean)
원작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Borris Psternak)
촬영 ........... 프레드릭 영 (Frederick Young)
음악 ........... 모리스 자르 (Maurice Jarre)
의상 ........... 필리스 달턴 (Phylis Dalton)
지바고 ......... 오마 샤리프 (Omar Sharif)
라라 ........... 줄리 크리스티 (Julie Christie)
코마로프스키 ... 로드 스타이거 (Rod Steiger)
파샤 ........... 톰 커티네이 (Tom Courtenay)
토냐 ........... 제럴딘 채플린 (Geraldine Chaplin)
1965년 MGM 작품
줄거리
8세의 나이에 고아가 된 유리 지바고(Yuri : 오마 샤리프 분)는 그로메코가(家)에 입양되어 성장한다.
그는 1912년 어느 겨울 밤, 크렘린 궁성 앞에서 노동자들과 학생들이 기마병에게 살해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이후 그는 사회의 여러 뒷면들을 접하게 되고, 의학을 공부해 빈곤한 사람들을 돕고자 꿈꾼다. 그는 그로메코가의 고명딸 토냐(Tonya : 제랄린 채플린 분)와 장래를 약속하면서 열심히 의학실습에 몰두하는데 운명의 여인 라라(Lara : 줄리 크리스티 분)와 마주친다. 그녀는 어머니의 정부 코마로프스키(Komarovsky : 로드 스테이거 분)에게 정조를 빼앗기자 사교계의 크리스마스 무도회장에서 코마로프스키에게 방아쇠를 당겨 총상을 입힌다. 유리는 다시 한번 이 여인에게 호기심을 느낀다.
그러나 라라에게는 혁명가 파샤(Pasha/Strelnikov : 톰 카우트네이 분)라는 연인이 있었다.
1914년 1차대전이 일어나고 군의관으로 참전한 그는 우연히 종군간호부로 변신한 라라와 반갑게 해후한다. 1917년 혁명정부가 수립된 러시아에서 유리와 같은 지식인은 제일 먼저 숙청될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우랄 산맥의 오지 바리끼노로 숨어든다.
궁핍하지만 평화가 감도는 전원 생활을 보내다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시내 도서관을 찾은 그는 우연히 그 근처로 이주해온 라라와 다시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는데...
Ernesto Cortazar / Lara's Theme
영화 「닥터 지바고」는 물론 지바고와 라라의 사랑 이야기이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전쟁·혁명·운명·결혼 등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지저분할 것 같은 부도덕한 사랑 이야기를 어쩌면 이렇게도 아름답게 승화시킬 수 있을까....
Doctor Zhivago
닥터 지바고
제작자는 카를로 폰티, 데이비드 린 감독에 로버트 폴트가 각본을 맡았다.
원작은 노벨상이 주어졌으나 소비에트작가동맹에서 제명되어 사퇴하지 않을 수 없었던 B.파스테르나크의 작품이다.
촬영은 대부분 에스파니아에서 했고, 겨울 장면은 핀란드에서 찍었다.
데이비드 린 감독은 전편을 아름답고 유려한 화면구성으로 진행시켜 영상에 의한 대하 로망을 펼쳤다.
발랄라이카의 음색을 살린 모리스 자르의 (라라의 테마)는 이것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아카데미 각본상·오리지날작곡상·촬영상·미술상·의상상을 수상하였다.
한국에서는 1968년 처음 개봉되었다.
영화 음악과 작곡가에 관한 이야기
러시아 혁명을 배경으로 한 '닥터 지바고'에서 음악을 담당한 프랑스의 작곡가 모리스 자르는 기타와 비슷한 러시아의 민속 현악기 발라라이카가 멜로디를 연주하는 식의 편곡으로 '라라의 테마'를 선보였다.
또 이곡은 영화 전편에 각기 다른 감각의 편곡으로 흘러 감동적인 멜로디는 기억에 오래 남게 되었다.
프랑스의 리용에서 태생(1924.9.13일) 모리스는 16세 때 파리 음악원에 진학했고, 그 후 명문 소르본 대학에서 수학했다. 그 후에는 파리 국립극장의 음악 책임자로 활동하다 51년부터 단편 영화의 음악을 작곡하면서 영화음악 작곡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초기에 모리스는 단편영화와 도큐멘터리의 음악을 담당했다.
그러다가 61년 '시벨의 일요일'(Cybele Ou Les Dimanches De Ville D'avray)에서부터 극영화 작곡가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후 모리스는 헐리우드로 진출하여 61년 '사상 최대의 작전'(The Longest Day)과 62년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Of Arabia)의 음악으로 스케일이 큰 대작 영화음악 작곡가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모리스 영화 음악의 특징은 타악기를 유효 적절하게 구사하는데 있다.
그의 타악기 활용 솜씨는 파리 음악원 재학 시 지도 교수였던 아르튀르 오네겔의 영향 때문이다. 모리스는 음악원 재학시 지휘법과 작곡법, 전자 음악 등을 두루 관심있게 익혀나갔으나 전공은 타악기였다.
작곡가들은 자신이 전공한 악기를 편곡 과정에서 즐겨 사용하는 버릇이 있게 마련인데, 그의 경우는 드럼과 팀파니는 물론 캐스터네츠/그로켄/마림바/첼리스타 같은 타악기를 즐겨 활용하고 있다. 그의 사운드트랙 앨범을 관심있게 들어보면 그 특징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모리스는 타악기뿐 아니라 기타와 하프 등 손으로 뜯는 악기도 곧잘 활용한다.
확실히 그는 손으로 두드리거나 뜯어야 소리가 나는 악기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닥터 지바고'에서 현악기인 발라라이카를 사용한 것도 그런 경향을 잘 보여주는 예의 하나이다.
물론 '닥터 지바고'가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이기 때문에 모리스와 어울리도록 러시아 민속악기를 사용했다고 할 수도 있다.
“Lawrence Of Arabia”(1962)의 촬영을 끝내자마자 “Pasternak”의 소설을 읽고,
바로 다시 (前作과) 같은 팀을 구성해 제작에 착수한 “David Lean“(1908-1991, 영국) 감독(卿)은
이태리의 명배우, “Sophia Loren”의 남편이자 거물 제작자(이 영화의 공동제작자)인“Carlo Ponti”(1912, 이태리)가 요구한 “Sophia Loren”의 "라라"역 기용을 그 큰 키 때문에 단번에 거절하였다고 하지만, “토냐”가 역에서 입었던 분홍색 코트도직접 고르는 등, 아주 세밀한 분야까지 일일이 다 신경을 쓰고, 또 700 P. 분량의 원작소설을 284 P.로 각색(“Robert Bolt”가 미국 아카데미 각본상)하는 데만 1년을
소요할 정도로 모든 작업에 완벽한 준비를 하였다고 한다.
(1964년12월부터 1965년10월까지 촬영, 같은 해 12월22일 처음 개봉)
혁명 같은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사건들 보다는 한 인간, "지바고"의 러브스토리에 더욱 초점을 맞춘 “Lean“감독의 예상은 적중하여 초기의 평단의 악평에도 불구하고 대대적인 흥행성공을 하게 된다.
그리고 1966년, 제38회 미국아카데미상에서,비록 감독상과 작품상을 “The Sound Of Music”(1965)에 넘겨주었지만,5개의 상을 휩쓸면서 “David Lean“ 생애의 최고의 대표작이 되었고,
1991년의 그의 장례식에서도 바로 이 영화의 대사가 낭송이 되었다고 한다.
“Maurice Jarre”(1924, 프랑스 리옹) 는 “David Lean“감독과 “Lawrence Of Arabia”로 이미 1963년에 손을 맞잡고 아카데미상을 수상한바있지만, 3년 후, 이 영화로 또 다시 그 영예를 누리게 된다.
"Lara's Theme"은 정말로 유명해 질수밖에 없는 너무나도 훌륭한 영화음악의 걸작이다.
이 "Lara's Theme"은 영화가 개봉을 하고 나서 이후, “Somewhere My Love”라는제목으로
“Ray Coniff & The Singers”를 비롯하여 수많은 유명 가수들이 부른 인기 팝송이 되기도 하였다.
Ray Coniff & The Singers / Somewhere My Love
(한 두 나라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서 좌우의 이념갈등이 사라진,지금 생각해보면 도대체 자국에서 자기가 심혈을 기우려 쓴 소설을 출판조차도 하지 못하고, 또 외국에서 간신히 출판을 한 소설로 그 영광스러운 노벨상까지 받게 되었는데, 그나마도 정권의 압력으로 그 상을 받을 수 없었으며, 오히려 그 일로 해외추방의 위기까지 겪었다는 게 도대체 사실로 믿어지기나 할까?
그러나 1957년에 이태리에서 처음 출판이 된 소설, “Doctor Zhivago”의 저자,
“Boris Pasternak”(1890-1960, 러시아 모스코바)에게는이 모든 것이 (서글픈) 현실이었고 사실이었다.
러시아 혁명의 나쁜 점만을 강조하여 자국의 치부를 드러내었고, 당시의 혁명의 주체이었던 인민들을 중상모략 하였다는 것이 1958년에 있었던 “Pasternak 탄핵운동”의요지였지만, 주겠다고 한 노벨상(1958 년) 수상은 고사하고, 작가동맹에서도 퇴출시켰고, 국외로 추방시키자면서 먹고 살길마저 막아, 2년 후,
결국 남의 집에서 자신이 쓴 마지막 소설의 주인공, “Zhivago”처럼 외롭고 쓸쓸하게병사하도록 만든 그 서슬이 시퍼렀던 사회주의 종주국의 공산당 정권 역시 이제는 모두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그러나 그렇게 반대하였던“Doctor Zhivago”는 1959년, “Pasternak”가 와병중일 때, 의외로 브라질에서 먼저 TV 시리즈(“Doutor Jivago”)로 방영이 되면서일반인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고, 또 그가 죽은 지 5년 후, 1965년에 발표가 된이 “David Lean“감독의 대작 영화, ”Doctor Zhivago” 로 해서 대부분의 전 세계인들이 알게 되는 명작으로서 또 한편으로는 (서글픈)역사의 증거물로서 영원히 우리들 곁에 남게 되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B.Pasternak)
"모든 일에서 극단에까지 가고 싶다.
일에서나, 길에서나 마음의 혼란에서나....
재빠른 나날의 핵심에까지 그것들의 원인과 근원과 뿌리 본질에까지 운명과 우연의 끈을 항상 잡고서
살고, 생각하고, 느끼고, 사랑하고 발견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