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이로 하여금 눈을 뜨기 힘들게 만드는 광선의 회오리 그리고 그 근처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베이는 듯한 바람, 이윽고 그 맹렬하고 사나운 회오리가 멈추자 그 중심에 롱소드를 들고있는 한 남자가 서있었다.
" 이런 게 동방의 무사들이 쓰는 검술이야. 대단히 빠르지? 사실 칸다루스나 웨스트마치에서 쓰는 소드는 동방의 소드보다 검신이 두텁고 넓은데다가 무엇보다 무거워. 따라서 이런 고속의 검술에는 적합하지 않지. "
소드 한 자루로 눈부신 검광의 회오리를 일으켰던 남자가 그의 앞에서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또 다른 남자에게 말했다.
" 물론 빠른 것만이 검술의 최선은 아니지. 한번의 휘두름에 담긴 무거움, 상대의 뼈를 일격에 끊어내는 강력함, 이런 것을 동방검술에서 보기 힘들어. 그렇지만 나는 검술을 배우는 사람들이라면 꼭 한번쯤 동방검술을 연마해 보기를 권한다. 왜인지 알아? "
남자의 질문을 받은 또 다른 남자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대답했다.
" 시야를 넓히라는 뜻인가? "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검은 모든 무기의 기본이야. 당연한 얘기지만 기본기가 확실한 사람은 어느 무기던 금방 익숙해질 수 있어. 여러가지 검술을 연마한다고 강해지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기본기에는 확실히 도움이 되지. 이런 양날의 롱소드를 쓰던 한쪽 날의 세이버를 쓰던 더 나아가 북부의 바바리안들이 쓰는 콜로서스 블레이드를 쓰던 말이지. "
" 바바리안 말인가? 내가 듣기론 그자들이 쓰는 검은 웬만한 파이크나 랜스만큼 길고 크다고 하던데. "
" 그렇지. 너도 만일 바바리안 적을 갖게 된다면 기억해둬. 그들은 뼛속부터 타고난 전사들이다. 지독하게 강력하고 지독하게 격렬하지. 특히나 훨 윈드라는 기술은. "
" 그 말은 너는 바바리안 적이 있었단 말인가? "
또 다른 남자의 질문을 받고 롱소드를 들고있는 남자가 싱긋 웃었다.
" 있었다고 해두지. "
" ? "
" 더 이상 이 세상에 살아있지 않으니까 말야. 거의 반나절 동안 겨루다가 내 검에 죽었지. "
또 다른 남자의 눈이 반짝거렸다.
" 그럼 너는 셉터 (Scepter)를 쓰지 않고... "
소드를 든 남자가 다소 멋적어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 하하하, 그 당시 나는 동방원정 이후 한참 소드에 빠져 있었단 말야. 그래서 떠돌이 모험가로 꾸미고 결투를 신청해서 소드 대 소드로 대결했지. 셉터를 사용하거나 오오라를 발현하면 내 신분이 드러나기도 할 테고 소드를 연마한 보람이 없잖아. 그때의 나는 동방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오히려 패배를 갈구하는 검객이라고 하던가 한번 그렇게 되보고 싶었다고. "
또 다른 남자의 조용한 얼굴 위로 놀라움과 감탄 그리고 짧은 순간 부러움의 표정이 스쳐갔다.
" ...대단하군. 손에 익은 무기와 오오라도 쓰지 않고 바바리안을 이겼다니... 나라면... "
롱소드를 들고있는 남자가 또 다른 남자의 어깨를 툭 쳤다.
" 이봐, 네 녀석은 근성이 있잖아. 내가 가장 존경하는 게 너 같은 악바리라고. 뭐 나만해도 네 녀석이 불과 3개월만에 상급사제단에 들어올지는 상상도 못했다. 아마 유사이래 최단시간 내의 진급이었을 거다. "
또 다른 남자가 묵묵히 중얼거렸다.
" 너 다음으로 말이지.... "
롱소드를 들고있는 남자는 그의 말을 못 들은 듯 툭툭 몸을 털고 소드를 검집에 집어넣었다.
" 자, 가자고. 조금 있으면 교리 시간이다. 아아, 이 나이에도 하루에 한번씩 교리공부라니 정말 따분한데. 어차피 배우는 건 어릴 때의 주일학교랑 다르지도 않은데 말야. 자카룸과 그의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는 토끼풀 같은 거다, 한 몸에 잎이 세 개 달려 있듯이, 이런 거 말이지. "
아주 간단하게 자카룸의 삼위일체론을 토끼풀론으로 만들어 버린 그는 곧 있을 교리시간이 맘에 안 드는지 기지개를 늘어지게 피더니 투덜대며 저쪽으로 걸어갔다.
또 다른 남자는 물끄러미 멀어져 가는 남자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신의 롱소드를 뽑아 들었다. 그는 조금 전 투덜대며 걸어간 남자가 보여준 검광의 회오리를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그 궤적을 그려보았다.
그가 짧은 기합과 함께 막 검을 휘두르려는 찰나 그 사이에 꽤나 멀리까지 걸어간 남자가 소리치는 게 들려왔다.
" 이봐, 데브란트! 교리 시간 되기 전에 뭐 좀 먹으러 가자! 빨리 와! "
데브란트라고 불리운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곧 롱소드를 검집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멀리서 그를 부르고 있는 남자에게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그 남자가 다시 소리쳤다.
" 야, 너 빨리 못 뛰어와! 비거(Vigor)는 어디까지 익혔나 상관한테 한번 보여봐라! 나는 그냥 뛸 테니 취사장까지 달려서 지는 사람이 교리 시간에 과제 해주기다! "
남자는 말을 마치자마자 냉큼 달려가기 시작했다.
데브란트는 잠시 멍하게 그런 그를 보다가 곧 정신을 차렸다.
" 비거. "
데브란트의 발 밑에서 수십 개의 황금색 빛줄기의 오오라가 형성되더니 곧 데브란트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속도로 남자가 사라진 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데브란트의 뒤로 흡사 한 마리 준마가 질주라도 하는 듯이 흙먼지가 뿜어져 나왔다.
데브란트는 저 만치서 달려가는 남자의 등을 보며 미소를 짓더니 소리쳤다.
" ....! 네가 비거를 쓰지 않으면 과제는 모두 네 몫이다! "
" ....! "
" ..... "
" 정신이 드십니까? "
진한 갈색 머리를 뒤로 묶어 맨 여자가 그를 내려다보며 걱정스럽다는 듯이 묻고 있었다.
" 괜찮으세요? "
얼굴 전체가 땀으로 범벅이 된 남자, 데브란트가 무엇인가를 잡으려는 듯 허공을 움켜쥐고 있는 자신의 팔을 천천히 내렸다.
데브란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어느 방안의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벽과 천장은 대패질이 잘 되지 않은 듯 다소 거친 나무판자로 지어져 있었고 침대 옆의 작은 테이블, 방 한구석의 옷장을 제외하면 방안에는 특별한 장식이나 가구가 없는 걸로 보아 아마도 테번 (Tavern 여관) 의 방인 듯 했다.
그리고 침대 옆에서 데브란트를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는 여자가 있었다.
데브란트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일어난 그의 눈에 침대 아래로 그의 파손된 브레스트 플레이트와 롱소드, 부츠 등 그의 무장들이 보였다.
그의 상체는 오른쪽 어깨를 제외하고는 긴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 여기는 어디입니까? "
데브란트의 입에서 갑자기 말이 흘러나오자 여자가 깜짝 놀랐다.
" 아, 여기는 루트 골레인의 여관입니다. "
" 그렇군요. 당신은 로그가 아닙니까? "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습니다. 보이지 않는 눈의 자매 아리스라고 합니다. 기사님이 저희 캠프를 떠나실 때 와리브 씨의 상단을 호위하며 이곳까지 같이 왔습니다. "
아리스는 호위란 말이 나오자 다소 부끄러운 듯 시선을 돌렸다.
그녀와 다른 로그 둘은 그 흉폭한 바바리안의 일격에 순식간에 쓰러지고 무기마저 잃어버리지 않았던가.
호위를 맡은 건 그녀들이었지만 그녀를 구한 건 이번에도 그녀의 앞에 부상을 입은 채 누워있는 이 기사 혼자였다.
아리스는 석양이 내려앉던 그 산길의 일전, 바바리안과 네크로맨서 그리고 데브란트의 대결이 떠오르자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보이지 않는 눈의 자매 로그는 결코 전투를 두려워하지 않는 일족이다. 대륙 제일의 궁사일족이라는 호칭이 그것을 증명했고 가장 빠른 화살이라는 페라포세 또한 그러했으며 지금의 리더 카샤와 그 밑의 로그들 모두 어려서부터 활과 함께 자라고 화살을 가지고 놀며 자랐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공포의 군주 디아블로를 죽이기 위해 페라포세가 떠나고 소식이 묘연해진 후부터 그녀의 일족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페라포세를 찾기위해 몇 차례씩 트리스트람으로 파견한 수색대들은 한번도 돌아오지 않았고 그 일로 인해 제사장 아카라와 카샤 사이에 수 차례씩 다툼이 있었다. 그러한 일을 겪으며 어떤 이들은 카샤와 아카라의 지도력 자체에 회의를 품고 심지어 일족을 떠나는 이들도 생겼다.
그리고 고뇌의 여신이자 지옥의 7대 악마중 하나인 안다리엘이 몬스터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가뜩이나 페라포세의 실종 이후 흔들리던 로그 일족은 안다리엘과의 전투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급기야 성지 타모에의 사원과 마을에서도 후퇴해서 블러드무어 평원에 캠프를 차려야 했다.
이제 갓 성인이 된 아리스에게는 그런 고난들이 절망 자체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녀도 다른 수많은 로그들처럼 몬스터와 싸우다 죽거나, 도망치다가 죽는 게 그녀의 얼마 안 남은 삶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눈앞의 이 기사가 나타나서 그녀가 생각했던 예정된 운명을 바꿔 놓았다. 그것도 단지 혼자의 힘으로.
그리고 그는 또 한번 바바리안과 네크로맨서라는 산적들과 혈투를 벌여 그녀들의 체면을 지켜 주었다.
아리스는 데브란트가 그들을 쓰러뜨리고 정신을 잃은 지난 일주일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간호했다.
자신은 상상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이 기사가 때로는 고열을 쏟고 때로는 고통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그런 데브란트를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간호하며 그녀는 이제까지 한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싹트는걸 깨닫고 있었다.
데브란트는 손끝에 힘을 한번 주어보고 천천히 목과 어깨를 돌려보았다. 다행히 몸을 못 쓸 정도의 부상을 입은 건 아닌 듯 약간 결리는걸 빼면 그의 몸은 와리브와 여행할 때보다 더 나아진 듯 했다.
데브란트는 자신의 몸을 덮고있던 시트를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침대 아래쪽에 있는 자신의 허름한데다가 군데군데 깨져버린 무장을 하나씩 챙겨 입었다.
그런 데브란트를 약간 당황한 듯이 지켜보던 아리스가 말했다.
" 저 기사님, 몸은 이제 괜찮으신지... "
예전의 그 묵묵한 표정으로 돌아온 데브란트가 건틀렛을 들어올리며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 괜찮습니다. 돌봐주신 것 감사합니다. "
" 아, 아닙니다. "
건틀렛을 조이던 데브란트가 문득 생각난 듯이 그녀를 돌아보고 말했다.
" 제 무장과 옷을 정리한 건... "
" 아, 그..그건 제가... "
로그캠프에 나타날 때부터 안다리엘과의 전투 그리고 바바리안, 네크로맨서와의 결투를 거치며 낡을 데로 낡아 버리고 피까지 뒤집어쓴 데브란트의 옷과 무장이 깨끗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봤자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10년은 입은 무장이라고 생각할 만큼 허름한 모양이었긴 하지만.
데브란트는 말없이 무장을 모두 챙겨 입고 방문 쪽으로 나섰다.
아리스도 덩달아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나서 그를 따라갔다.
그녀는 일주일간이나 꼬박 누워있던 사람이 일어나자마자 금방이라도 싸우러 갈듯 무장을 갖추고 나가려고 하자 당황했다.
" 저, 기사님. 와리브씨는 이곳의 상인들을 만나러 가셨는데 기사님이 깨어나면 꼭 만나겠다고... "
데브란트는 아리스의 말을 들었는데도 신경 쓰지 않고 방문을 걸어 나갔다. 그의 목적지는 루트 골레인이였고 이제 그곳에 도착한 지금 와리브는 더 이상 그와 상관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방문 밖으로 나온 데브란트의 눈앞에 시끌벅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있던 방은 여관의 2층이었는데 1층은 술을 마실 수 있는 펍(Pub)이었다. 해가 저물었기 때문인지 펍 안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몰려 있었고 저마다 술잔을 기울이며 얘기하고 있었다.
루트 골레인은 서쪽으로는 타모에 지역의 산간지대와 동쪽으로는 사막과 바다가 맞닿은 교역도시였다. 따라서 이 지역은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늘상 여관마다 성황을 이루었는데 그런 점을 고려한다면 오늘 이 펍은 그리 장사가 잘되고 있는 건 아닌 듯 비어있는 테이블이 곳곳에 보였다.
여느 때라면 하루의 장사를 끝낸 상인들과 항해를 마친 선원들이 어우러져 술잔과 고함소리, 웃음소리로 훨씬 더 시끄러워야 했다.
그런데도 그나마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는 건 펍 한가운데의 테이블에 모여 앉은 서너 명의 사람들 때문이었는데 그중에는 상단의 표시인 회색모자를 눌러쓴 와리브도 있었다.
" 이봐, 엘직스. 이게 어떤 물건들인지 알아? 내가 타모에의 로그캠프서부터 마법을 쓰는 몬스터들과 북부 바바리안과 네크로맨서의 산적떼들(?)을 헤치고 죽음을 무릅쓰고 가져온 물건들이라고. 그런데 이걸 고작 500 질(Gill) 에 넘기라는 건 네 놈이 산적보다 더한 놈이라는 말밖에 안된다, 이 도둑놈아! "
" 어허, 너 못 본 사이에 기드랑 같이 다녔냐? 무슨 허풍이 그리 심해? 뭐, 마법을 쓰는 몬스터? 바바리안과 네크로맨서 산적? 이 녀석이 누구를 바보로 아나. "
" 뭐야, 이 녀석이 날 보고 기드라니! 나랑 그따위 사기꾼 허풍장이 녀석을 비교해? 너 이 녀석, 여기서 맨날 모래만 파먹고 살더니 이제 눈까지 삐었구나. "
" 뭐? 이 놈이 근데 아까부터 반말이야! 너 언제부터 어른 대하는 태도가 그렇게 됐냐? 앙? "
" 웃기지마, 너 나랑 동갑인 거 내가 다 안다. 너야말로 사람들 등치고 다니니까 그 나이에도 그렇게 머리가 벗겨지고 겉늙어 보이지. "
" 이놈이 듣자듣자 하니까! "
" 자아 자, 엘직스씨, 와리브씨. 진정들 하세요. 우리 조금씩 양보해서 가격을 타결해 보죠. "
와리브가 자신과 핏대를 올리며 말다툼을 벌이던 엘직스를 말리는 여자를 홱 돌아보며 말했다.
" 파라, 당신도 그렇소. 내가 당신 때문에 특별히 저 무거운 보석과 철광석을 어렵게 가져 왔는데 예전 가격의 삼분의 일 가격에 사겠다니 이건 너무 심하지 않소. "
엘직스라는 상인이 콧방귀를 뀌며 팔짱을 끼고 돌아앉았다.
" 흥, 너야말로 산에서 몇 달 다람쥐만 쫓다보니 세상 돌아가는걸 모르는구나. "
" 뭐야? 이놈이... "
파라라고 불린 여자가 다시 일어나 와리브와 엘직스를 진정시켰다.
" 와리브씨, 잠시 앉아서 제 얘기를 들어주세요. 자, 여기 김 빠지기 전에 맥주도 한잔 드시고. "
와리브는 여전히 분이 안 풀리는 듯 의자가 부서져라 털퍼덕 앉더니 씨근덕거리며 맥주잔을 들었다.
" 흠흠, 와리브씨. 제가 말씀드리지요. 일단 저도 숨 좀 돌리고. "
겨우 와리브와 엘직스를 진정시킨 파라가 한숨을 내쉬며 자기 앞에 놓인 맥주잔을 들어 가득 차있던 맥주를 한번에 비워 버렸다.
" 휴우, 시원하네. 음, 와리브씨.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
" 저 놈은 그런 어려운 말은 모를걸. "
" 카악! 흐읍! "
엘직스가 끼어들어 톡 쏘아붙이자 발끈 하려는 와리브의 입에 파라가 맥주잔을 들어서 같다 붙였다.
" 그러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
" 나도 같이 좀 들읍시다. "
굵직한 목소리가 파라의 등 뒤 넘어 펍의 입구에서 들려왔다.
머리에는 터번을 둘러메고 구릿빛으로 그을린 피부에 크고 건장한 체구의 사나이가 펍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와리브가 반색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메시프! "
메시프라고 불린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싱긋 웃더니 뚜벅뚜벅 걸어왔다.
" 여어, 와리브. 잘 있었나? "
" 이게 얼마만이냐, 메시프 선장. 하하하, 바다에 빠져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
" 하하, 네 놈도 마차바퀴에 안 깔려죽고 살아 있었구나. "
와리브와 메시프 선장이라고 불린 남자가 서로 반갑게 포옹하고 호탕하게 웃었다.
인사가 끝나자 원래 아는 사이인 듯 메시프와 파라, 엘직스도 간단히 인사를 나누더니 메시프도 자리에 동석했다.
" 방해가 안된다면 나도 같이 좀 들어도 되겠소, 파라? "
파라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 그야 물론이지요, 메시프 선장. 당신이나 와리브씨 모두 우리 상인길드의 고객이니까요. "
얼핏 봐서는 메시프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엘직스는 또 끼어들어 딴지를 걸고 싶은 눈치였으나 덩치가 우람한 메시프가 나타나자 참고 있는 듯 했다.
파라가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 와리브씨나 메시프 선장도 요즘 느끼셨겠지만 저희 루트 골레인의 상인길드가 예전의 가격대로 거래를 안 하는걸 아셨을 겁니다. "
와리브와 메시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 물론 이건 우리 길드가 담합해서 물건값을 내려 이득을 보자고 하는 게 아닙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요즘 시세가 한마디로 미쳤다고나 할까요, 하여간 그렇습니다. "
와리브와 메시프의 얼굴에 똑같이 의문스럽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 시세가 미쳤다 싶을 정도로 경제가 엉망이 된 건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루트 골레인은 동쪽의 쿠라스트와 서쪽의 타모에 나아가 웨스트마치를 잇는 삼각무역의 중심지이고 따라서 대다수의 주민들이 상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사막지대라서 농사를 짓기가 불가능하고 금광이나 다른 광물이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무역만이 도시가 생존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삼각무역의 한 축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
파라가 와리브를 보더니 말했다.
" 와리브씨가 잘 아실 겁니다. 몇 달 전부터 서쪽에서 들어오는 상단들이 끊기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쪽의 물건을 사서 다른 한쪽의 물건과 교환하거나 매매하는 소규모 상인들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와리브씨의 말 대로라면 서쪽 타모에에 나타났다는 안다리엘이라는 악마와 몬스터들의 출현이 이것을 설명해 줍니다. 이것이 첫번째 이유죠. "
스스로 그 이유를 잘 알다못해 몸소 체험한 와리브가 진절머리 난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 두번째 이유는 우리의 생존과 바로 직결되는 이유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사막지역에서 담수가 솟아나는 지역은 루트 골레인 외에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런데. "
파라가 잠시 말을 끊더니 다시금 모두를 둘러 보았다. 다른 테이블의 손님들도 어느새 말소리를 낮춰가며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 몇달 전부터 루트 골레인에서 솟아나던 담수의 양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급격하게. "
와리브와 메시프의 낯빛이 변했다. 물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필수품이다. 물이 없는 곳에는 어떤 인간도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 따라서 지역주민들은 장사고 뭐고 다 내팽겨둔채 물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이미 루트 골레인을 떠나기까지 했습니다. 당연하지요. 물이 없으면 이 도시도 곧바로 주변의 사막처럼 되버릴 테니까요. "
와리브가 심각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
" 루트 골레인의 물은 땅 밑으로 흐르는 지하수로 충족되어 왔습니다. 이곳은 고대 호라드림의 마법사들이 개척한 도시로써 고대의 감옥이 있다고도 하지요. 그래서인지 루트 골레인의 지하에는 불가능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거대한 지하수로(Serwer Level)가 있습니다. 마법이 아니면 불가능한 고대의 유산이지요. 이 시설을 이용해서 우리는 해수와 담수를 차단해서 물을 구해왔던 것입니다. "
파라가 어두운 표정이 되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그런데 그것이... "
" 나라면 말하지 않겠소. "
또 다시 파라의 등 뒤 넘어 펍의 입구에서 어떤 목소리가 파라의 말을 멈추게 했다.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돌아본 엘직스와 파라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엘직스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 젠장, 영주의 병사들이군. "
붉은 레더쟈켓에 검은색 체인아머를 입은 병사 두 명이 펍 안으로 들어왔다. 그중 파라의 말을 막은 병사가 앞으로 나서더니 말했다.
" 파라, 우리 도시의 문제를 외부인들에게 함부로 공개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
파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하지만 그리즈, 이분들은 오랫동안 우리 도시와 거래해온 분들이라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
영주의 경비병이라는 신분과 그들이 손에 들고있는 번쩍이는 파이크는 별로 신경쓰이지 않는 듯 파라는 태연자약했다.
그리즈라고 불린 병사도 파라와는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은 듯 파라를 보지 않고 와리브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 와리브씨, 물어볼게 있소. "
와리브가 약간 당황한 듯이 말했다.
" 뭐, 뭡니까? "
" 당신의 상단이 우리 도시에 들어올 때 신분이 확인되지 않았던 부상자는 지금 깨어났소? "
그리즈라는 병사가 찾아온 목적은 다른 누구도 아닌 데브란트였다.
와리브는 더 당황하여 말했다.
" 아직 잘 모르겠는데 왜 그러시오? "
" 도시 경비를 맡고있는 책임자로서 그자의 신분을 확인해야겠소. 신분이 확실하지 않으면 우리와 함께 가서 영주님을 만나야 하오. "
와리브가 난감한 표정이 되어 망설이고 있는데 위층에서 데브란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나를 찾는 겁니까? "
데브란트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의 뒤로 뜻밖에 나타난 영주의 병사들 때문에 당황한 아리스가 초조해 하며 따라 오고 있었다.
그리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소. 당신은 신분을 확인할만한 증서가 있으시오? "
데브란트가 고개를 저었다.
" 없소. "
" 그럼 우리가 영주님께 보고하는데 동행해 주셔야겠소. "
데브란트의 실력을 잘 알고있는 와리브와 아리스는 데브란트에게서 어떤 반응이 나올지 몰라 조마조마해 하고 있었다.
다만 한 사람은 데브란트가 동행을 거부하여 병사들과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앞으로 어떻게 루트 골레인에서 장사를 해먹을 지에 대해 좀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면 또 한 사람은 데브란트의 안위에 대해서만 걱정하고 있었다.
데브란트가 대답했다.
" 그렇게 합시다. "
그리즈가 고개를 끄덕이며 거만한 눈초리로 파라와 와리브 등을 한번 훑어보더니 펍 밖으로 먼저 나갔다.
엘직스가 기분 나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 젠장, 돈 받고 고용된 용병 주제에 언제부터 우리 도시 운운이야... "
데브란트가 그리즈를 따라 나가려는데 와리브가 그를 붙잡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 저 기사님, 원래 관리들이란 공경 받을줄만 알지 남을 대하는 건 자기 멋대로 랍니다. 그러니까 영주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기사님께서 너그럽게, 그냥 너그러어~업게 받아들이세요. "
유난히 '너그럽게'를 강조하는 와리브에게 데브란트가 보일 듯 말듯 고개를 끄덕이고 펍의 밖으로 나갔다. 아리스가 걱정스런 시선이 그런 그를 줄곧 쫓았지만 데브란트는 아예 그런 그녀가 아예 보이지도 않는 듯 했다.
와리브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 조심해야 할텐데. "
메시프 선장이 와리브를 보며 말했다.
" 보아하니 그냥 떠돌이 모험가인가 본데 별일이야 있겠나? 너무 걱정하기 말게나. "
와리브가 고개를 저었다.
" 아니... 저 사람말고 영주말야. "
와리브의 말에 모두들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파라만이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