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사람이 나이가 들면 그를 산중에 가져다 버리는 풍습이 있었다. 한 아들이 자신의 어머니가 일흔 살이 되었으므로 늙은 어머니를 버리기 위하여 그를 지게에 지고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서는, 약간의 음식과 늙은 어머니를 지고 왔던 지게를 놓아둔 채 되돌아 가려고 하였다. 그러자 그를 따라왔던 그의 어린 아들이 그 지게를 다시 지고 오기에, 그는 아들에게 왜 지게를 다시 지고 오느냐고 물었다. 어린 아들이 “저도 아버지가 늙으면 이 지게에 지고 와서 버려야 하기 때문에 가져왔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말에 그는 크게 뉘우치고 늙은 어머니를 다시 집으로 모셔 간 뒤에 잘 봉양하였다. 그로부터 고려장이라는 악습은 없어졌다고 한다. -중국의 <효자전(孝子傳)> 원곡(原穀) 이야기- |
고려 시대에는 '고려장'이란 풍습이 있어서 부모가 늙고 병들면 자식들이 지게에 엎고 갖다 버리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처럼 부모에 대한 효를 강조하는 나라에서 실제로 있었던 풍습인가?
과연 고려 시대에 이 '고려장'이 있었던가?
고려장은 전근대의 한국의 전통인 것처럼 알려져있으나, 사실 이런 장례풍습은 한국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 장사 꺼리를 떼러 새벽기차를 타신 우리들의 어머니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라면 이 한몸쯤이야...
남자들도 힘든 무연탄 운반일 조차 마다하지 않으신 어머니
새벽부터 저녘 늦게까지 하루종일 힘든 노동을 하시는 어머니
당신의 몸보다도 더 큰 짐을 이고 들고
기차를 타기위해 급히 발검음을 옮기는 어머니...
보잘 것 없는 물건들이지만 장사를 하기위해
이고 들고 시장으로 가시는 우리들의 어머니...
돈이 될만한 것은 내다 팔아야 했던 우리들의 어머니...
험하고 힘든 일이라도 가족을 위해서라면
마다 할 수 없었던 우리들의 위대한 어머니...
추운 겨울날에 먼곳에서 손주라도 찾아 왔는지
오랫만에 만연의 넉넉한 웃음을 지으시는 우리들의 어머니
현대판 고려장 사례 1
시어머님께서 6개월전에 한 많은 세상을 뒤로 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저 시집오고 5 년 만에 치매에 걸리셔서 저 혼자 4 년간 똥오줌 받아 내고, 잘 씻지도 못하고, 커가는 초등학생 우리 아들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면서, 시어머니 곁에서 쪼그려 잠들고, 남편 품에 단 한 번도 제대로 포근하게 잠들지 못하면서, 똥 눌 힘이 없으셔서 변을 못 누실 땐 제 손가락으로 파내는 일도 거의 매일이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지탱해 왔던 것은 진실된 마음으로 그 4년간 베풀어주신 저에 대한 우리 시어머니 사랑 덕분이었습니다.
제 나이 40살 먹도록 이렇게 선하고 지혜롭고 어진 우리 시어머님를 본적이 없습니다.
이제 40대의 아줌마가 되어버린 저는 어려서
알콜 중독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 계시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견디다 못해 제가 10살 때 집나가서 소식 없는 엄마..
상습절도로 경찰서 들락날락 하던 오빠.. 이런 불행한 가정에서 자라온 저는 가족의 사랑이라는 것은 저에게 사치품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런 제가 현재의 남편과 결혼하여 시어머님을 모시게 된 것은 어느날 갑자기 시어머님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부터입니다.
부모 정 모르고 큰 저는 그런 자상하신 우리 시어머님께 반해,
신랑과 같이 독립해 살고 있던 아파트를 처분하고
어머님 댁 들어가서 우리 아들과 함께 4명이서 살게 되었습니다.
신랑 10살도 되기 전에 과부 되어, 자식 다섯을 키우시면서도
평생을 자식들에게조차 언성 한번 높이신 적이 없다는 어머님...
50 넘은 아주버님께서 평생 어머니 화 내시는걸 본적이 없다 하시네요.
바쁜 명절날 돕진 못할망정 튀김 위에 설탕병을 깨트려 튀김도 다 망치고 병도 깬 저에게 1초도 망설임 없이 "아무소리 말고 있거라" 하시고는
늙으면 죽어야 한다며 당신이 손에 힘이 없어 놓쳤다고 하시던 어머님.........
단거 몸에 안 좋다고 초콜렛 쩝쩝 먹고 있는 제 등짝을 때리시면서도
나갔다 들어오실 땐 까만 비닐 봉지에 군것질거리 꼭 사들고
"네째딸 우리 공주야~ 엄마 왔다~" 하시던 우리 시어머님..
시어머님과 신랑과 저. 셋이 삼겹살에 소주 마시다
셋다 술이 과했는지 안하던 속마음 얘기 하다가,
자라온 서러움이 너무 많았던 저는
시 어머니 앞에서 꺼이꺼이 울며 술주정을 했는데,,,
그런 황당한 며느리를 혼내긴 커녕
제 손을 잡으며, 저보다 더 서럽게 우시며,
얼마나 서러웠노,, 얼마나 무서웠노..불쌍한 것!!!!!
처음부터 니가 내 딸로 태어났음 오죽 좋았겠나,,
내가 더 잘 해줄테니 이제 잊어라..잊어라...하시던 우리 시어머님...........
명절이나 손님 맞을 때 상 차린거 치우려면
"아직 다 안 먹었다 방에 가있어라" 하시곤
소리 안나게 살금 살금 그릇 치우고 설겆이 하시려다 저에게 들켜
서로 니가 왜 하니? 그러시는 어머님은 며느리 놔두고 왜 설겆이를 하세요?
실랑이 하게 됐었죠...
제가 무슨 그리 귀한 몸이라고..
일 시키기 그저 아까우셔서 벌벌 떠시던 우리 시어머님!!!!!!
치매에 걸려 본인 이름도 나이도 모르시면서도
험한 말씨 한번 안 쓰시고
그저 곱고 귀여운 어린 아이가 되신 우리 시어머님...
어느 날 저에게 " 아이고 이쁘네~ 뉘집 딸이고~~" 하시더이다.
그래서 저 웃으면서
"나는 정영X여사님 (시어머님 함자십니다) 딸이지요~
할머니는 딸 있어요~?" 했더니 "있지~~
김방X(제이름)!!!!! 나에게 시집온 우리 막내딸~ 위로 아들 둘이랑 딸 서이가 있어도
가장 예쁘고 맴씨 고운 우리 막내 딸 김방x가 있지 !!!!!!!~"
그때서야 펑펑 울며 저는 깨달았습니다.
이분 마음속엔 제가, 딸 같은 며느리가 아니라
막내시누 다음으로 또 하나 낳은 막내 딸이었다는걸...
저에게...
"니가 내 제일 아픈 손가락이다" 하시던 말씀이 진짜 였다는걸...
정신있으실 때, 어머님께 저는 항상 감사하고 사랑하고
잘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제가 정말 이분을 진짜 엄마로 여기고 대했는지...
왜 더 잘하지 못했는지, 왜 사랑하고 고맙단 말을 매일 매일
해드리진 못했는지.......
지금 입장에서는 후회가 막심한 것을........
형편 어렵고 애가 셋이라 병원에 얼굴도 안 비치던 큰형님..
큰형님이 돌보신다 해도 사양하고 제가 했어야 당연한 일인데,
왜 엄한 형님을 미워했는지..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사무치고 후회되어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밤 11시쯤,, 소변보셨나 확인 하려고 이불속에 손 넣는데
갑자기 제 손에 만원짜리 한장을 쥐어 주시더군요..
"이게 뭐에요?" 했더니 소근 소근 귓속말로
"아침에~ 옆 침대에 같이 병 치료했던 거시기 할매 퇴원 하고
침대정리 하는 것을 보니 침대 밑에 만원 한 장 떨어져 있드라~
아무도 몰래 니 맛 있는거 사묵어래이~" 하시는데 생각해보니
점심때쯤 큰아주버님도 왔다 가셨고, 첫째, 둘째 시누도 다녀갔고..
남편도 퇴근해서 "할머니~ 잘 있으셨어요~?"
(자식들 몰라보셔서 언젠가부터 그리 부릅니다) 인사하고 집에 들어갔는데...
아침 7시에 퇴원한 할머니가 떨어트린 돈을 주으시곤
당신 자식들에겐 안주시고 갖고 계시다가 저에게 주신거였어요.
우리 시어머님한테는 제가 가장 예쁜 막내딸로 인정 받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곤 그날 새벽 화장실 다녀오다가 느낌이 이상해
어머님 코에 손을 대보니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한 많은 이세상을 뒤로 한 채 돌아가셨더군요....
아이고 이를 어쩌나!!!!!!!!!!!!!!!!!
장례 치르는 동안 제일 바쁘게 움직여야 할 이 막내 며느리가
아니
정영X 시어머니의 막내 딸인 제가 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가시는
우리 어머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울다 울다 졸도를 세번하고 누워있느라 어머님 가시는 길에도
게으름을 피웠네요...
어머님!!!! 정말 죄송합니다!!!!
어머님을 닮아 시집살이가 뭔지 구경도 안 시킨 시 아주버님과 시누이 셋.
그리고 남편과 저..
서로 부둥켜안고 서로 위로하며, 어머님 안 슬퍼하시게
우리 우애 좋게 잘살자 약속하며 그렇게 어머님 저 세상으로 보내드렸어요..
오늘이 꼭 시어머님 가신지 180일 째입니다..
어머님께서 매일 저 좋아하는 초콜렛, 사탕을 사들고 오시던
까만 비닐봉지.
주변에 널리고 널린 까만 비닐봉지만 보면 눈물이 납니다..
어머님이 주신 꼬깃꼬깃한 만원 짜리를 배게 밑에 넣어두고..
매일 어머님 꿈에 나오시면 저승길 가시는 길에 용돈 하라며
사랑한다고... 감사하다고 말씀해드리려 준비하며 오늘도 잠자리에 듭니다.
다시 태어나면 처음부터 어머님 딸로 태어나길 바라는건
이 못난 며느리의 너무 큰 욕심이겠죠...
부디 저를 친딸보다도 더 사랑해 주신 저희 시어머님 좋은 곳으로 가시길..
다음 생에는 평생 고생 안하고
평생 남편 사랑 듬뿍 받으며 사시길 기도 해드릴께요.
부디 편안하게 자식들 걱정말고 막내딸 걱정말고 편안하게 가시기를
두손 모아 기도 드립니다.....
2011년 4월 19일
막내 며느리 아니
막내 넷째딸 올림
현대판 고려장 사례 2
젊은 시절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노파는,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오만가지 풍상을 겪으면서 파란만장하게 살아왔다.
허리뼈 부러지도록 자식들을 다 키워내고 보니, 노파는 자신이 너무 늙었음을 알았다.
노파는 한 아들 내외의 집에 얹혀살았다.
칠순이 되어서도 텃밭에 나가 고추 따고 김매는 일을 하던 동안은, 아들 내외의 잔소리가 그리 심하진 않았다.
한 해 두 해 덧없고 야속한 세월이 흐르면서, 노파는 청력도 약해지고, 눈도 점점 침침해 갔다.
이젠 잡일도 못하게 되었다.
종종 식탁에서 손이 너무 심하게 떨려, 그녀의 숟가락에서 완두콩이 떨어지거나 국물이 식탁으로 흘렀다.
그녀가 물 한 컵을 엎지른 어느 저녁식사 시간,
아들 내외는 이정도면 충분히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했다.
그 저녁 이후, 며느리는 방 한구석 쓰레기통 옆에 작은 밥상을 가져다 놓았다.
노파는 따로 조촐하게 차려진 밥상 앞에 외떨어져 앉아,
방을 가로질러 가족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따금 아들 내외는 식사 도중에 그녀에게 말을 하기는 했지만,
그 말은 보통 그녀가 숟가락이나 그릇을 방바닥에 떨어뜨리는 것을 꾸짖기 위한 것이었다.
노파는 갈수록 수척해져갔고, 눈앞이 가물가물하면 문 아닌 엉뚱한 곳에 헛손질을 짚기도 했다.
창문을 헛짚어 유리창 하나가 깨지던 날, 아들 내외는 참을 만큼 참아도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아들과 며느리는 방 안에 노파를 가두고, 나오지 못하도록 문을 밖에서 잠갔다.
문이 열릴 때는, 노파의 방에 있는 요강을 화장실에 가져다가 처리할 때와, 예전 쓰레기통 옆에 밥을 차려주었던 그 밥상을 방안에 들여놓고 내갈 때 뿐이었다.
그녀의 방은 눅눅하고 어두침침한 습기에 젖어갔다.
천장 구석에 거미들이 거미줄을 치기 시작했고, 벽지에는 곰팡이가 깔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는 결국에 한 많은 이세상을 뒤로 한 채 이 세상을 마감하고
만 것이다!!!
아들은~~~~~~~~~ 이하 생략
양쪽으로 자식을 품고 젖을 먹이는 어머니(1965년 부산)
길거리에서 아이와 함께 고구마를팔고 있는 우리들의 어머니(1959년)
아이를 들쳐업고 장사하기 위해 황급히 물건 떼러가는 어머니(1961년 부산에서)
오랫만에 생선을 사서 아이를 어우르고 있는 어머니(1962년 부산에서)
신문, 잡지, 옥수수를 팔고 있는 어려웠던 그 시절(1967년 부산에서)
아이를 품에 안고 너무나 힘겨워 하는 어머니(1971년)
사는게 왜 이다지도 고달픈지...
아무도 물건을 사는 이 없는 자판에서 졸음은 밀려오는데...(1974년)
자장면이 있던 시절 길거리에서 한그릇을 사서
앉지도 못하고 서서 아이와 나눠먹고 있는 우리들의 어머니(1975년)
가족들의 밥을 짓고 있는 어머니(1976년)
등에 업은 손자가 배고플세라 힘들게 서서 밥을 먹이는 위대한 우리들의 어머니
※
신(新) 고려장의 서글픈 모습 '---김형영 시인---
- '따뜻한 봄날-
'세상이 온통 꽃 핀 봄날/어머니 좋아라고/아들 등에 업혔네. 어머니는… 꽃구경 눈감아 버리더니/한 움큼 한 움큼 솔잎을 따서/가는 길바닥에 뿌리며 가네./어머니,지금 뭐하시나요? /꽃구경은 안하시고 뭐하시나요? /솔잎은 뿌려서 뭐하시나요? /아들아,아들아,내 아들아/너 혼자 돌아갈 길 걱정이구나. /산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
현대판 고려장이 실행되고 있다기에 씁쓸한 마음 그지없다. 엊그제 뉴스에 90세인 노모지만 신체 건강하고 정신력 또한 뚜렸한 편인데 늙었다는 이유 하나로 친어머니를 노인보호시설에 강제적으로 보내는걸 목격한 주위분들의 목격담에 의하면 "자식들과 함께 살게 해 달라고" 울며불며 애원하는 엄니의 울부짖음에 눈물짓는 현실 앞에 삶의 비애를 느껴본다.
사람은 어젠가는 늙는다는 숙명적인 사실을 아는지? 인륜을 저버린 자 언젠가는 그 길을 다시 밟는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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