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계엄군 ,너릿재 넘는 차량에 "총격
광주에서 온 시위대 무장 필요성 역설
총기 7백 50정.실탄 1천 6백발 획득
능주.동면.이서면등 대부분 지역 무기.탄약 이미 치워져
시위확산 <1>화순 (상)
광주시내를 피로 물들인 21일 새벽 상황은 흡사 바람을 탄 듯 순식간에 광주 인근 지역으로 퍼져 나간다. [광주역앞에서 사람이 난자 당했다.]
18일 이후 들려 오는 숱한 소문 속에서도 [설마 그럴리가 없다]며 서로를 위로하던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어느 누구의 연락도 없이 군청앞,정류소공터,사거리로 사람들이 집결한다. 광주에서 20여분거리에 있는 화순경찰서 앞 사거리에도 아침일찍부터 사람들이 집결한다.
지난 새벽 시위상황을 목격하고 넘어온 젊은이들이 광주의 처참한 상황을 전달한다.
광주로 출퇴근하거나 물건을 공급하던 사람들이 많았던 탓에 18일 이후 광주 상황을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었던 화순읍민 들이었지만 20일밤과 21일 새벽에 저질러진 만행은 차마 입에 담기조차도 두려울 만큼 잔인한 것이었다.
12시가 넘어서면서 경찰서앞 사거리와 정류소등에는 2천여명의 읍민들이 모여든다. 2천여명. [대도시에서는 대수롭지 않은 숫자일지 모르지만 당시 화순의 상황으로썬 엄청난 인파였다. 경찰서 인근 인도를 거의 사람들 이 메우고 있었다.그당시 누가 나서서 모이자고 연락을 한것도 아니고 방송에서 광주 상황을 자세히 전달해준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모여들었다. 자전거를 타고 1시간 이상을 달려온 면민들도 상당수였다. ]이날 아침부터 화순지역 움직임을 자세히 지켜본 조경남씨(당시 24세.송광교통근무)는 21일 오전에 모인 인파는 근 10여년사이 최대 인파였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모인 이들을 조직적으로 이끌어줄 사람은 나타나지 않는다. 대다수 젊은이들이 18일 이후 공수부대의 만행에 분개하며 광주로 빠져나갔기 때문. 삼삼오오 모여 서로가 들은 정보를 나누고 분노를 표시하며 산발적으로 구호를 지르는 사람이 나타나지만 공식집회로 발전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인파는 좀처럼 줄지 않는다. 비록 광주에서처럼 공식집회를 열고 구호를 외치지는 않았지만 누구 한사람 이를 지루해하거나 자리를 뜨는 사람은 발견되지 않는다.
음료수와 빵을 준비해 나눠주는 사람. 노인들을 안으로 모셔 막걸리를 대접하는 사람. [광주의 안전]을 걱정하는 사이에 그들은 하나가 된다.
오후 2시. 광주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군중들사이에 새로운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공수부대가 총을 쏘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총에 죽었다. ] 잠시 후 진입한 차량시위대에 의해 그같은 소문이 사실임이 드러난다.
이선씨(당시 23세,화순읍 계소리거주)의 증언. [오후2시께 화순역 근처에 있는데 타이탄트럭이 시위대 10명을 싣고 들어왔다. 몹시 흥분해 있었다. [공수부대놈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읍니다. 우리도 무기를 구해서 그들과 싸워야 합니다]라고 열변을 토한후 돌 깨는 공장인 역청공장의 위치를 물었다. 아마 발파작업에 쓰는 다이너마이트를 구하려 했던것 같다. ]
타이탄 트럭을 시작으로 20여대 이상의 차량들이 연속해서 몰려온다 시민들앞에 정차해 광주의 상황을 전하는 차량,보성등 타지역을 향해 달리는 차량, 무기를 구하기 위해 떠나는 차량. 화순경찰서와 역앞까지의 도로는 시위에 합세하려는 젊은이들의 열기와 시민들의 구호등으로 분위기가 돌변한다.
오후 3시께 시위차량에서 내린 청년들중 일부가 광주의 현재 상황과 무기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화순읍내 경찰서등에 보관중인 무기를 광주로 가져가야 한다며 협조를 요청한다.
잠시 머뭇거림이 있었지만 자연스럽게 형성된 시위대는 곧 화순 경찰서와 인근 파출소로 향한다.
광주에서 넘어온 시위대중 일부가 가져온 화염병이 중앙파출소등에 던져지긴 했으나 살짝 그을린 정도에 불과할뿐 큰피해를 내진 않는다.
이성전씨(당시 32세 페인트공)의 증언 [시위대들과 일부 청년들이 합세해 화순경찰서와 중앙파출소,역전파출소등으로 가 무기를 내줄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직접 무기고를 뒤졌다. 화순경찰서에서는 찾지 못하고 중앙파출소에서는 3-4정,역전파출소에서 7백50여정의 총기와 실탄 1천 6백여발이 나와 광주에서 온 시위대들과 일부 청년들이 총기를 휴대 했다. 상황이 급변하면서 시민들은 점차 조직화됐다.] 화순을 목표지로 ,혹은 화순을 거쳐 다른지역으로 시위상황을 전파하기 위한 차량행렬은 이날 밤 7시가 넘도록 계속된다.
무기를 구하려는 시위대 활동은 인근 동면.남면.능주지서로까지 확대된다.
3시부터 본격화된 화순지역 시위 상황은 오후 6시께 상황이 급변한다.
광주와 화순의 지리적 경계인 너릿재를 넘어오던 일부 차랑들이 총격을 받은 사실과 함께 [계엄군이 화순으로 진입한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화순읍내는 돌연 불안감에 휩싸인다. [우리 지역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 [공수부대가 진입할경우 숱한 만행이 저질러질건데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예비군동원령]이 내려진다. [예비군들은 지금 화순 경찰서 앞으로 모이라는 방송이 나가자 마자 20-30대 남자들 수백명이 모여든다.
무기 분배작업에 참여했던 이유표씨 (당시 32세)의 증언 . [이날 오후 늦게 예비군 중대장인 박찬중씨가 나를 찾아와 무기를 무작정 가져가도록 내버려둘게 아니라 화순 사람들에게만 나누어 주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화순경찰서로 가보니 일부 청년들이 무기를 꺼내고 있다. 화순청년들만 즐을 서게 한후 총 1백여정을 나눠주었다. ] 그러나 이때 분배된 무기들은 곧바로 회수된다. 상황을 다시 알아본 결과 계엄군이 화순으로 들어올것 같지 않고 총기를 그대로 내버려 둘경우 총기 안전사고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된다.
곧바로 총기 회수작업이 진행되고 회수된 총기는 4.5t트럭 2대에 실려 인근 만연산 계곡에 숨겨진다. 그러나 일부 청년들은 총기 회수작업에 강력히 반발,총기 반납을 거부하는 한편 실탄을 구하기 위해 면지역으로 떠난다. 해외취업을 준비중 시위에 참여한 오동찬씨(당시 26세)는 당시로선 우리 지역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고 회고한다. [예비군들을 소집한다는 방송을 듣고 화순경찰서 앞으로가 총기를 지급받았으나 실탄이 없었다. 실탄이 없는데 어떻게 방어를 할수 있느냐는 의견이 나와 지금의 화순고등학교쪽에 있던 714예비군관리대대로 찾아가 실탄을 구하기로 했다. 실탄을 요구하자 대대장과 대위한사람이 나와 우리를 설득했다. 좋은일을 하면서 강제로 일을 처리하면 안될것 같은 생각이 들어 714대대에서 나오고 말았다.] 714대대를 나와 능주쪽으로 향하던 시위대들은 만연산계곡에서 총기를 가지고 나오던 시위대들과 만난다.
예비군중대장과 청년회장등 지역유지들의 총기 회수 방침에 반발해 만연사계곡에 숨겨둔 총기를 찾아 가지고 내려오던 사람들이다.
합류한 시위대들은 능주 도곡 사평 이서 북면 순천 송광등지를 돌며 실탄 구하기를 포기하고 화순읍쪽으로 향하던 시위대는 이날밤 9시께 화순군 동면 운풍리 3구 신운마을 앞길에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픽업차량을 만난다. 무기를 구할수 없겠느냐는 질문에 [픽업]트럭에 타고 있던 두사람은 뇌관2백개와 일명 떡밥(떡밥1개는 크레모아 1개 크기의분량) 1백개 도화선 30m를 넘겨준다.
첫댓글 잘읽었습니다.
광주시민들의 희생 이세상 모두가 가슴에 새겨야 함니다.
잊져서는 안될 우리의 불행한 현대사 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 그게, 다 5.18광주민주항쟁 결과물 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