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교육 진흥법의 뼈대는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한자에 대한 인식 제고. 둘째, 한자 사용의 확대. 셋째, 우리말의 발전을 촉진. 넷째, 민족 문화 창달이다. 이 네 가지 는 생각이 같고 다름에서 볼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으로 판가름해야 할 일이다.
첫째, 한자에 대한 인식 제고.
이 글귀를 그대로 풀이하면 한문글자의 값어치를 제대로 알게 한다는 뜻이겠는데 한자 교육 추진 총 연합회와 어문 학회 따위에서 이제까지 주장해 온 몇 가지를 살펴 옳고 그름을 따져보면 한문글자는 한갓 중국말을 적는 중국 글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진다. 높을 것도 깊을 것도 없고 숨어 있는 값어치도 없다. 온 세상 여러 나라에서 쓰는 예순 몇 가지 글자 가운데서 한가지 글자일 뿐이다.
1. 한문글자는 우리 겨레가 만들었는가.
글자란 말소리를 담아 두는 그릇인데 한문글자로는 우리 말소리를 담을 수 없다. 우리말을 담을 수 없는 글자라면 우리 글자가 아니다. 한글이 없을 때 한문글자로 우리말을 적어 보려고 '향찰, 이두, 군두목' 따위 갖은 애를 다 써 보았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우리말을 적을 수 없는 글자를 우리 겨레가 만들 까닭이 없다. '집가(家)' 자가 '갓머리( )' 밑에 '돼지시(豕)' 자를 쓴 것이 '제주도 똥 돼지'에서 본 뜬 것이니 한문글자를 우리 한아비(조상)가 만든 증거가 된다지만 온 누리 곳곳에는 아직도 집 안에서 돼지를 기르는 곳이 많다. 그리고, 아무리 오랫동안 우리가 써 왔다 해도 한문글자가 우리 글자로 바뀌는 일은 없다. '개 꼬리 삼 년 묵혀도 족제비 꼬리가 되지는 않는다.'는 속담을 생각할 일이다.
2. 우리는 천 년 동안 한문글자로 글자살이를 했는가.
한문은 중국 옛글이고 우리가 쓰는 한자말은 거의 다 조선 왜말(일본 한자말)인데 중국 한자말도 조금 섞여 있다. 한문글자는 중국말을 적는 중국 글자다. 이렇게 한문과 한자말과 한문글자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먼저 알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
한문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신라 때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천 년 동안 한문글자로 글자살이(문자생활)를 한 것은 아니다. 신라, 고려, 조선에 걸쳐 한문을 쓴 것은 우리말을 한문글자로 적은 것이 아니라 우리말을 한문으로 뒤쳐서(번역하여) 쓴 것이다. 이두, 군두목 따위를 만들어 쓰기도 했지만 온전한 글자살이를 할 수 없었다.
우리말 속에 한자말을 끌어들여서 한문글자로 글살이를 한 것은 일본 말글이 들어온 뒤부터이니 겨우 백 년 남직하다. 한문이나 이두를 쓴 것은 말글살이에 한문글자를 섞어 쓰는 것과 아주 다른 일인데 서로 다른 한문과 한자말과 한문글자를 함께 얼버무려서 마치 천 년 전부터 우리가 한문글자로 글자살이를 한 것처럼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3. 한문글자는 보기만 해도 뜻을 알 수 있는가.
뜻글자인 한문글자의 만듦새는 여섯 가지인데 어쨌든 뜻글자이므로 글자만 보아도 바로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꼴 그림 글자(상형)'인 '메산(山)자'나 '나무목(木)자'도 글자꼴을 보고 뜻을 알기는 어렵다. 하물며 '뜻 모음 글자(회의)'나 '뜻, 소리 모음 글자(형성)'는 아예 짐작도 할 수 없다, '계집녀(女)자'만 알면 '좋을호(好)자', '어미모(母)자'를 저절로 알게 된다는 말은 거짓이다. '江(물강)자', '海(바다해)자'나 '樂(즐거울락, 좋아할요, 풍류악)자'를 글자만 보고 소리나 뜻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모든 한문글자는 글자꼴과 글자 뜻과 글자 소리를 한 자 한 자 외어야 한다. 글자만 보고 뜻을 안다는 것은 거짓이다.
4. 한문글자를 쓰면 한자말의 뜻이 똑똑하게 드러나는가.
한문글자는 글자 한 자가 지닌 뜻이 적게는 서너 가지에서 많게는 여남은 가지가 넘는다. 이 뜻을 모두 알고 어떤 말에서 어떤 뜻으로 쓰는지 외어야지 말뜻을 풀 수 없다. 그리고 어떤 이야기(고사)에서 어느 한자말이 생겨났는지(성어)도 따로 익혀야 한다. '조삼모사(朝三暮四)'나 '퇴고(推敲)' 따위는 그 말에 얽힌 이야기를 모르고선 한문글자로 뜻을 알 수 없다.
또 '회사, 사회, 두부, 구구단'을 '會社, 社會, 豆腐, 九九段'으로 쓰고 한문글자로 뜻풀이를 하라면 아무도 해낼 사람이 없다. 말이 지닌 뜻은 말살이(언어생활)를 하면서 익히기도 하고 따로 배워서 아는 것이지 한자말이라고 해서 뜻을 익히지 않아도 한문글자를 쓰면 뜻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5. 한문글자를 익히면 머리가 좋아지는가.
사람의 머리(좋고 나쁨)는 타고나는 것이라 하지만 타고난 머리라도 보고 읽고 듣고 말하고 쓰고 느끼고 일하고 생각하는 삶 속에서 더욱더 깨어난다. 이 가운데서 어느 것 하나만 열심히 익힌다면 그 쪽 재주는 뛰어나게 좋아지겠지만 머리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한문글자를 많이 배우면 한문글자는 잘 알겠지만 다른 것을 공부한 것과 견주어 머리가 더 좋아지거나 다른 일도 잘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한문글자를 익혀서 머리가 좋아진다면 다른 것을 공부해도 머리가 좋아지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문글자가 머리를 좋게 만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6. 한문글자는 슬쩍 보기만 해도 사진 찍히듯 한 눈에 바로 들어오는가.
한문글자는 곁눈으로 슬쩍 스치기만 해도 눈에 띄고, 머릿속에 뜻이 바로 들어온다고 한다. 한문글자를 많이 배우고 깊이 익힌 사람에게는 맞는 말일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어를 익힌 사람에게는 영어가 눈에 잘 띄고 한글을 익힌 사람에게는 한글이 눈에 잘 들어온다. 눈에 익은 글자가 눈에 선 글자보다 눈에 잘 띄게 마련이다.
한문글자는 생김새가 아주 비슷한 글자가 많고 획 하나가 더 하고 덜 하는 데 따라 소리도 달라지고 뜻도 달라진다. 더욱이 생긴 꼴이 어지럽고 획수도 많아서 웬만한 돋보기로는 글자 획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기도 어렵다. 모든 것을 제 눈의 잣대로 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한문글자라고 한눈에 바로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7. 한문글자를 익히면 사람 됨됨이가 바르게 되는가.
'충성충(忠)자'를 알면 '충신'이 되고, '효도효(孝)자'를 배우면 '효자'가 된다고 하지만 '충' 자를 몰라서 역적이 되고 '효' 자를 몰라서 불효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한문글자를 모르는 사람들 가운데도 충신과 효자는 많고 한문글자를 배워도 사람답지 못한 사람도 많다.
사람 됨됨이란 집안 어른들과 이웃 사람들과 모둠살이(사회생활)에서 바르고 고운 말을 듣고 바른 생각과 올바른 몸가짐을 보고 생각하고 자라면서 스스로 깨달아 익힐 때 비로소 가슴속에 깊이 자리잡고 몸에 배어 몸가짐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글자란 말을 담아두는 연모에 지나지 않는다. 한문글자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한문글자를 가르쳐서 '명심보감'을 읽게 하면 청소년 문제를 손쉽게 풀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청소년에게 읽힐 책은 '명심보감' 말고도 많다. '탈무드'도 좋은 책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명심보감'을 읽히려고 한문글자를 가르치자는 말은 '탈무드'를 읽히려고 이스라엘 말을 가르치자는 것과 똑같다. 우리말로 뒤친(번역한) '명심보감'도 있고 '탈무드'도 있다. 한문글자를 알아야 '명심보감'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탈무드'를 읽은 사람이라고 모두 됨됨이가 바른 것도 아니다.
8. 한문글자 문화권에선 같은 한문글자를 쓰는가.
한문글자를 쓰는 나라는 중국과 한국과 일본인데 이 세 나라를 묶어서 '한자 문화권'이라 한다. 그런데 한국에선 '정자(번체자)와 약자'를 쓰고 일본에선 '정자와 약자와 대용자'를 쓰고 중국에선 '정자와 간체자'를 쓴다. 세 나라에서 쓰는 한문글자는 뿌리는 같으나 나라마다 제 나라 글자살이에 알맞도록 글자꼴을 바꾸어서 한문글자의 모양이 아주 다르다.
또, 같은 한문글자를 쓴다고 해도 이 세 나라를 묶어 한자 문화권이라 할 수 없다. '영어 문화권, 프랑스 말 문화권, 스페인 말 문화권'처럼 '말 문화권'은 있어도 '글자 문화권'이란 것은 없다. 영국을 비롯하여 프랑스, 도이칠란트, 러시아, 이탈리아 따위 몇 십 나라에서 로마 글자를 쓰고 있지만 이들 나라를 묶어 '로마 글자 문화권'이라 하지 않는다. 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한문글자 문화권'이란 본디 있을 수 없는 말이다.
9. 한문글자를 알면 세 나라 사람이 '필담'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신문마다 '일본말 배우기'와 '중국말 배우기'가 실리는데, 이들 나라말을 보면 아무리 한문글자를 많이 알아도 뜻은커녕 읽을 수조차 없다. 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베이징 말, 쓰저우 말, 광둥 말'과 그밖에 몇 십 가지 사투리를 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글자 말을 쓰는 일이 있다지만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 사람들은 '글자 말'을 할 수 없다.
'애인(愛人)'이라면 사랑하는 사람인데 중국에선 '남편과 아내'이고 일본에서는 '정부(情婦)'다. 중국에선 '호텔'을 '대반점(大飯店)', '사장(社長)'을 '경리(經理)', '직업'을 '공작(工作)', '계획'을 '타산(打算)'이라 한다. '공부(工夫)'는 중국 무술인 '쿵푸'다. 일본에선 '아동'을 '자공(子供)', '걸인'을 '걸식(乞食)', '계란'을 '옥자(玉子)', '편지'를 '수지(手紙)'라 한다.
세 나라에서 쓰는 한자말이 서로 다르고 읽는 소리도 다르고 한문글자마저 다르니 '글자 말'은 아예 생각도 할 수 없다. 쓸데가 있는 사람은 일본말이나 중국말을 배워야지 한문글자를 배운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짓이다.
10. 한자말은 한국말의 뿌리인가.
'도둑'은 '도적(盜賊)', '김장'은 '침장(沈藏)', 과녁은 '관혁(貫革)'이 뿌리다. 배추는 '백채(白寀)'고 짐승은 '중생(衆生)이다. 하지만, '해'의 뿌리가 '태양(太陽)'이 아니고 '물'의 뿌리가 '수(水)'가 아니듯이 '사람'의 뿌리도 '인간(人間)'이 아니다. 바다는 '해(海)'에서, 하늘은 '천(天)'에서 번져 나온 말이 아니다. 한국말과 한자말은 본디 뿌리가 아주 다른 말이다.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는 오랜 옛날부터 이웃에서 문화를 주고받으며 살았기 때문에 한국말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말로 자리잡은 것도 많고 중국말이나 일본말이 한국말로 뿌리내린 것도 있지만 이들 세 나라의 겨레말은 처음부터 서로 다른 겨레 삶 속에서 제가끔 따로 태어난 말이다. 한자말에서 들어온 몇몇 들온말(외래어)을 내세워 우리말의 뿌리가 한자말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11. 한자말을 쓰면 말과 글이 짧아지는가.
'모계(母系)'는 '어머니 쪽의 핏줄'이고 '대화(對話)'는 '마주 보고 주고받는 이야기'다. 이렇게 한자말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길어진다. 한자말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말이나 낱말을 우리말로 뜻풀이하면 말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말을 쓰면 말이 길어지고 한자말을 쓰면 말이 짧아진다고 한다. 하지만 겨레말이 있을 때나 우리말로 말할 때는 다르다.
'화훼(花卉)'는 '꽃'이고 태양(太陽)'은 '해'고 '조종타(操縱舵)'는 '키'다. '기도(企圖)하다'는 '꾀하다'이고 '운반(運搬)하다'는 '나르다'이고 '유의의(有意義)하다'는 '뜻있다'이다. 그리고 '17명(名)의 부상자(負傷者)가 발생(發生)하는 사고(事故)가 야기(惹起)되었다.'는 '열일곱 사람이 다쳤다.'로, '최소한(最小限) 3 주(週)는 필요(必要)하다는 게 검찰(檢察)의 예상(豫想)이다.'는 '검찰은 적어도 3주일쯤 걸리겠다고 한다.'라고 우리 말로 고치면 한자말을 쓰는 것보다 말이 훨씬 짧아진다. 우리말을 쓴다고 말이 길어지는 것은 아니다.
12. 한문글자를 섞어 쓰면 책을 많이 읽게 되는가.
책은 왜 읽는가? 책 속에 담긴 속내(내용)가 제가 알고 싶은 일, 재미있는 일, 가슴에 와 닫는 이야기라면 누가 말려도 기를 쓰고 읽는다. 하지만 제 삶과 동뜬 일이거나 재미없는 이야기거나 아무 느낌이 없는 책이라면 아무리 읽으라고 다그쳐도 읽을 사람은 없다.
책이란 지은이의 생각과 뜻과 느낌을 말속에 담아서 글자에 실어 놓은 것이다. 따라서 책을 읽으려면 먼저 글자를 알아야 한다. 글자를 모르면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읽을 길이 없다. 또 책 속에 써 놓은 글이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렵다면 읽을 사람이 드물 것은 뻔하다.
한문글자로 쓴 글은 읽기도 어렵고 뜻풀이는 더욱 어렵다. 게다가 한문글자는 배우기가 매우 까다롭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십 년을 배운다 해도 제대로 글을 읽기가 쉽지 않다. 한문 글자를 섞어 쓰면 책을 많이 읽기는커녕 아예 담을 쌓고 말 것이다.
둘째, 한자 사용의 확대
이 말은 한글과 한문글자를 섞어 쓰되 앞으로 더욱 더 한문글자 쓰기를 늘리자는 뜻이다. 곧 '한자 혼용'을 하겠다는 말이다. '한자 혼용'을 굳이 '한자 사용 확대'라 한 속셈은 밝히지 않더라도 알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하는 까닭으로 내세운 주장 몇 가지를 따져 보면 이 또한 터무니 없음을 알 수 있다.
1. 우리말 가운데는 한자말이 열에 예닐곱이나 되는가.
국어 사전에는 '한문 고전'에 나오는 중국 옛말과 예나 이제나 말살이에서 아예 쓰지 않는 한자말도 실려 있고, 아버지를 가리키는 예순 몇 가지 한자말이나 편지를 나타내는 백 아흔 몇 가지 한자말처럼 뜻이 같은 한자말이 수두룩하게 올라 있다. 겨레말과 뜻이 같은 한자말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 이름, 땅 이름이 모두 한자말로 실려 있다. 게다가 가게를 가가(假家)로, 걸신을 걸신(乞神), 동치미를 '동침(冬沈)', 미안을 '미안(未安)'처럼 우리말을 소리나는 대로 한문글자로 쓴 것도 있다.
옛 한자말은 '한자말 사전'을 따로 만들고 뜻이 같은 한자말은 한두 가지만 들온말로 받아들이고, 겨레말이 있는 한자말을 솎아낸다면 그리고 사람 이름, 땅 이름을 따로 '사람 이름 사전'과 '땅 이름 사전'을 만든다면 우리말로 받아들여야 하는 한자말은 기껏 백에 두세 낱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 한자말이 열에 예닐곱이나 된다는 말은 잘못 만든 사전에 바탕을 두고 하는 말이다.
2. 한자말은 한문글자로 써야 하는가.
우리말을 적는 글자는 한글이다. 글자란 말소리를 담는 그릇인데 한글은 우리말을 담으려고 만든 글자고 우리 말소리를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우리 글자다. 일본 글자나 아랍 글자나 로마 글자로는 우리 말소리를 담을 수 없는 것처럼 한문글자로도 우리 말소리를 담을 수 없다. 그러니 우리말은 한글로 적어야 하고 다른 글자로는 적을 수 없다.
일본이나 몽골이나 서양말에 뿌리를 둔 말일지라도 들온말이 되었다면 우리말이므로 마땅히 한글로 적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한자말에서 들어온 말도 한문글자로 써서는 안 된다. 어쩌다, 모든 들온말을 말밑(어원)을 밝혀 본디 나라 글자로 쓴다면 말글살이(언어생활)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두, 가마니'는 일본 글자로, '담배, 텔레비전'은 로마 글자로, '조랑말, 보라매'를 몽골 글자로 쓴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생각해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3. 소리 같은 말을 뜻가름하려면 한문글자로 써야 하는가.
한문글자는 대충 사오 만 글자나 되지만 한국에서 읽는 소리는 팔백 가지 남직하다. 그러니 한자말에는 소리가 같고 뜻이 다른 말이 매우 많다. 소리 같은 말은 한글로 쓰거나 말소리를 듣고선 뜻을 가리기가 어렵다. 그래서 한문 글자로 쓰자는 말이 나온다.
중국에선 글자마다 소리가 다르고 소리가 같더라도 '사성(길고 짧음과 높낮이)'이 있기 때문에 소리 같은 말이 거의 없으니 우리와 다르다. 일본에선 한문글자를 쓰되 '꽃화(花) 자'를 우리말로 치면 '화'로도 읽고 '꽃'으로도 읽어서 뜻을 가리기 때문에 소리 같은 한자말(동음 이의어)에 따른 큰 어려움은 없다.
소리 같은 말을 한문글자를 써서 뜻을 갈래 짓자고 하지만 글월에서는 풀릴지 모르나 말을 할 때는 안 된다. 우리말로 바꾸어 쓰는 길뿐이다. '야로'를 보기로 들면 '야로(冶爐), 야로(夜路), 야로(夜露), 야로(野老). 야로(野路)'를 겨레말로 고쳐서 '풀무, 밤길, 밤이슬, 시골 늙은이, 들길'로 하는 것이다. 한자말을 들온말로 받아들일 때 이처럼 소리 같은 한자말을 겨레말로 바꾼다면 소리 같은 말 때문에 한문글자를 쓰자는 말은 할 수 없게 된다.
4, 한자말도 우리말인가.
어느 나라나 겨레말과 들온말(외래어)을 아울러 나라말로 삼는다. 들온말이란 다른 나라 말 가운데서 쓸모가 있는 말을 가려잡아 나라말로 받아들인 것을 일컫는다. 영어에는 라틴 말에 뿌리를 둔 말이 많지만, 멀고 가까운 여러 나라에서 받아들인 말도 있는데 그 가운데는 '막걸리, 온돌, 양반' 같은 한국말이 있고 '미소(된장), 진셍(인삼)' 따위 일본말도 있다..
우리도 '구두, 냄비, 가마니, 고구마' 따위 일본에서 들어온 말과 '토끼, 조랑말, 송골매, 올가미, 미숫가루' 따위 몽골 말, '사둔, 메주' 같은 만주 말, '지단' 같은 중국말. '담배, 라디오, 텔레비전, 버스' 같은 서양말을 들온말로 받아들여 쓴다. 우리말 속에는 대충 예순 몇 나라의 말이 들온말로 자리잡고 있는데 한자말도 그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한자말을 우리 나라말이라 할 수 없는 것은 영국에서 라틴 말을 영어라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몽골 말에서 들어온 말도 많지만 몽골 말을 우리말이라 하지 않는다. 어느 나라든지 들온말로 쓰는 말만 제 나라말이라 한다. 한자말도 들온말로 받아들인 말만 우리말이고 다른 것은 우리말이 아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한자말은 우리말이 아니다.
셋째, 한자 사용으로 우리말의 발전 촉진
한자를 사용한다는 말은 한자말을 쓴다는 뜻이다. 그런데 한자말을 많이 쓸수록 우리말이 발전하기는커녕 힘을 잃고 죽는다. 일찍이 한자말을 씀으로써 많은 겨레말이 밀려나거나 사라져 갔다. 산이 메를 밀어내고 강이 가람을, 용이 미르를, 은하수가 미리내를, 장인이 가시아버지를 말살이 밖으로 몰아낸 것은 두루 아는 일이다. 이런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오누이가 남매로, 어버이가 부모로 자리바꿈하고 있다. 사람 이름, 땅 이름도 거의 다 한자말로 바뀌었다. 새말도 거의 다 한문글자로 짓는다. 한문글자를 섞어 쓴 뒤끝이다.
1. 한자말을 섞어 쓰면 우리말이 발전할 수 있는가.
무지개의 빛깔을 세 가지로 말할 수밖에 없는 겨레말보다 일곱 가지 빛깔로 나타낼 수 있는 겨레말이 한층 높은 자리에 있는 문명어라 한다. 낱말 수가 많다는 것은 그 만큼 문화의 나비가 넓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영어가 문명어가 된 것은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대폭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라는 말은 맞다. 다만, 여기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수용했다'는 것은 영어 속에 섞어 썼다는 뜻이 아니라 들온말로 받아들였다는 말이다. 한자말을 들온말로 받아들이는 것과 한자말을 섞어 쓰는 것은 아주 다른 일이다.
낱말의 수는 여러 가지 문화, 문명, 일과 몬을 나타내는 낱말의 가짓수를 말하는 것이지 뜻이 같은 말의 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해, 달, 별'은 낱말 수가 셋이지만 '해, 태양, 금오, 선', '달, 월, 옥토, 문', '별, 성, 성신, 스타'를 제가끔 네 가지로 낱말로 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말이 없는 한자말을 들온말로 받아들이면 낱말 수가 늘어나지만 뜻이 같은 말을 들여와 우리말과 함께 쓰는 것은 낱말 수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한자말을 섞어 쓰면 낱말 수가 늘어나 우리말이 발전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2. 한문글자는 남달리 새말을 만드는 힘이 좋은가.
한문글자로 뜻만 얼버무려 놓으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만든 새말에 '미화원(美靴員-구두닦이)', '미화원(美化員-청소부)', '가수주의(假睡注意-졸음 조심), 소주밀식(少株密植-배게 심기)' 따위가 있다. 하지만 이런 말은 제대로 만든 말이 아니다.
우리가 쓰는 갈말(학술, 전문 용어)은 거의 다 조선왜말(일본한자말)인데 일본에서 서양 문화를 받아들일 때 서양말을 뒤쳐서(번역하여) 만든 말을 받아들인 것이다. 문화, 과학, 철학, 문학, 예술, 미술 따위는 일본 사람들이 몇 년에서 몇 십 년 동안 다듬어 만든 새말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힘들여 만든 말이건만 잘못 만든 것도 많다. 한문글자로 쉽게 말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말은 말로써 만드는 것이지 글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쓸데가 있으면 새말은 생겨나게 마련이다. 우리는 몇 만 년 동안 새말을 만들어 쓰면서 모자람 없이 말살이를 해 왔다. '해, 달, 사람, 꿈, 먹다, 자다' 따위나 '도시락, 건널목' 따위, '도우미, 지킴이' 같은 것이 예부터 이제까지 우리 겨레가 만든 겨레말이다. 한문글자라고 남달리 새말을 만드는 힘이 좋은 것은 아니다. 겨레말로도 얼마든지 새말을 만들 수 있다.
3. 한자말은 문명어이고, 한문은 수준 높은 지적 문장인가.
옛날 우리나라에선 한문을 얼마나 잘 하느냐에 따라 사람 값어치를 매겼다. 양반들이 한문으로 벼슬도 하고 학문도 하면서 행세하던 때, 한문은 돈과 힘과 자리 높이를 매김하는 연모였다. 그때 한문을 우러러보던 생각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여 한자말은 '품위 있고 고상한 지식 용어'요 '문명어'이고 '수준 높은 지적 문장'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정말로 '품위 있고 고상한 지식 용어'는 글쓴이의 높은 사람됨과 깊은 깨달음이 담긴 말씀이고 '수준 높은 지적 문장'은 어떤 생각과 뜻을 보는 사람들 머리와 가슴에 가 닿도록 얼마나 잘 다듬어 글로 나타내었느냐에 달린 것이지 '한자말이냐 우리말이냐'에 달린 것은 아니다. 한자말에도 상스러운 말이나 수준이 낮은 몹쓸 말이 얼마든지 있다.
영어가 문명어가 된 것은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똑똑히 알아 둘 것은 라틴 말과 그리스말을 섞어 쓴 것이 아니라 들온말로 받아들인 것이다. 한자말을 한문글자로 쓰는 것과는 아주 다른 일이다.
넷째, 한자 혼용으로 민족 문화 창달.
사람은 말로써 생각한다. 말로써 문화와 문명을 짓어내고 받아들이고 꽃피우고 이어준다. 한국말로는 한국다운 생각을 하게 되고 중국말로는 중국다운 생각을 하게 되는 것처럼 한국말로는 한국다운 문화를 지어내고 중국말로는 중국다운 문화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우리 겨레 문화는 우리말로만 만들어낼 수 있지 한자말로는 지어낼 수 없다. 한자말은 우리말도 중국말도 아니기 때문에 이런 말로 만들어낸 문화는 우리 문화도 중국 문화도 아닌 트기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트기 문화는 겨레 문화와 거리가 멀다. '한자 혼용으로 민족 문화를 창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말이다.
1. 한자말을 버리면 전통 문화가 사라지는가.
'중국 고전'은 한문으로 씌어 있고 우리 '고전'도 한문으로 쓴 것이 많다. 고전은 옛 어른들의 삶과 생각과 슬기가 담겨 있는 참으로 값진 보배다. 마땅히 깊이 배우고 이어받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은 책 속에 담긴 옛 어른들의 생각과 정신과 삶이고 겨레 문화지 한문이나 한문글자가 아니다.
히브리말을 몰라도 우리말로 뒤친(번역한) 성경을 읽고 하느님의 뜻을 알 듯이 한문 고전은 우리말로 풀어 쓴 책을 읽고 배우면 된다. 고전을 읽겠다고 모든 겨레가 한문 배우기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한문을 모른다고 전통 문화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한문글자를 쓴다고 전통 문화가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문화는 말과 삶 속에 담겨 있는 것이지 한문글자 속에 담겨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2. 한문글자를 익히면 한문 고전을 읽을 수 있는가.
한문글자는 뜻글자이므로 한자말의 뜻이 예나 이제나 같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한문은 오늘날 한국이나 중국이나 일본 사람이 쓰는 한자말과는 아주 다르다. 한문을 따로 배우지 않고선 한문글자를 아무리 많이 알아도 '한문 고전'을 읽을 수 없다. 더욱이 한문은 짜임새가 어지러워서 한문학자들마저 풀이가 제가끔 다를 때가 많다. 한문글자만 익히면 한문 고전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한문이 어떤 글인지 몰라서 하는 말이다.
'한문 고전'은 중국 옛말로 적은 중국 옛책이다. 따라서 중국 옛글인 '한문'을 알아야지 '한문글자'로는 풀이는커녕 읽을 수도 없다. 한자글자나 한자말로 한문 고전을 읽으려는 것은 로마 글자나 영어를 배워서 라틴 말글로 쓴 서양 고전을 읽으려는 것과 같다.
3. 한자말이 없으면 학문을 할 수 없는가.
우리나라 학문은 보통 사람들과 거리가 멀다. 학문하는 말이 나날말(생활 용어)이 아닌, 한자말과 영어여서 우리 삶과 바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학문에서 찾고 밝혀 낸 바를 온 누리 모든 겨레가 함께 누릴 수 없다면 그 학문은 아무 쓸모가 없다. 삶에 보탬이 되지 않는 학문이라면 죽은 학문이다. 마땅히 우리말로 살아 있는 우리 학문을 일궈 내어 겨레 삶을 가멸게 하고 나아가서 온 누리에 펼쳐 인류 문화를 이끌어 가도록 해야 옳다.
옛날, 한문으로 시작한 우리 학문은 뒤에 일본 한자말 학문으로 이어졌고 이제는 한자말 학문과 아울러 서양말 학문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것은 우리 학문이 나아갈 바른 길이 아니다. 사람은 말로써 생각하므로 우리말을 쓸 때 우리다운 생각을 하게 되고 우리다운 학문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말이 아니면 우리다운 문화와 학문을 지어낼 수 없다.
서양 여러 나라의 학문이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도이칠란트, 이탈리아 같은 서양의 여러 나라도 옛날엔 라틴 말로 학문을 했지만 그 뒤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라틴 말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제 나라 말글로 제 나라 학문을 이룩했고 온 누리에 펼쳤다. 우리도 이제 한자말, 서양말 학문에서 벗어나 우리말로 우리 문화를 짓고 우리 학문을 세우고 우리 학문을 갈고 닦아야 한다. 다른 나라에서 한 일을 우리라고 못할 까닭이 없다.
마무리. 한문글자를 가르쳐서 '한자 사용을 확대한다'는 것은 온갖 한자말을 모조리 한문글자로 써서 '한글과 한문글자를 함께 쓰도록 하겠다는(국한 혼용)' 말이다. 이제 한글만 쓰기가 제 자리를 잡아 가고, 우리말 쓰기가 싹 트는 마당에 다시 한문글자 종살이와 조선왜말 종살이로 되돌리려는 '한자 교육 진흥법안'은 잘못된 생각 바탕에서 만든 것이다.
한문글자를 쓰면 한자말과 조선왜말을 끌어들일 뿐만 아니라 겨레말로 새말 짓는 길을 가로막아서 말글살이가 한자말에 얽매이게 된다. 끝내 한자말이 아니면 말글살이를 할 수 없는 데까지 이른다. 눈이 있어도 글을 읽을 수 없고 귀가 있어도 말을 들을 수도 없게 한다. 한자 교육 진흥법은 우리 삶을 어둠 속으로 몰아넣는 법이다.
한자말과 한문글자를 쓰게 되면 옛날에 우리 한아비(조상)가 겪었던 것처럼 스스로 나를 얕잡아보게 되고 나를 사랑하고 자랑하는 마음이 자라지 못하여 남을 우러르는 생각에 사로잡혀 내가 주인되는 정신을 잃어버린다. 남의 눈치나 보는 겨레, 남을 흉내내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는 겨레, 얼빠진 겨레로 떨어지게 하는 법이다.
겨레 문화와 겨레 학문을 이어받고 갈무리하고 지어내고 꽃피우는 바탕은 우리말이고 우리 글이다. 남의 글자와 남의 말로는 겨레 문화와 겨레 학문을 일구어낼 수 없다. 한문글자와 한자말로는 이제까지 그렇게 해 온 것처럼 남을 흉내내는, 뒤진 나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 문화와 우리 학문의 앞날을 가로막는 '한자 교육진흥법'은 태어나서는 안 되는 법이다.
첫댓글김 선생님 글을 보면 한자말이 많지 않습니다. 모두 이렇게 글을 쓴다면 우리말이 빨리 꽃필 거로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김 선생님이 쓴 글을 두 세번 읽습니다. 저도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김 대표님 글을 한 번만 읽지 말고 여러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김 선생님 글을 보면 한자말이 많지 않습니다. 모두 이렇게 글을 쓴다면 우리말이 빨리 꽃필 거로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김 선생님이 쓴 글을 두 세번 읽습니다. 저도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김 대표님 글을 한 번만 읽지 말고 여러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