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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군에는 보물이 16점 있어요
우선 보물만 먼저 소개 하겠어요...
지정번호 : 보물 제1237호
지 정 일 : 1996. 1. 19
수 량 : 4종17점
소 재 지 : 경북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 773 임호서원
시 대 : 조선선조 - 순조년간
소 유 자 : 밀성박씨 삼우정파종중
이 유물들은 밀성박씨문중의 삼우정 박경신(三友亭 朴慶新)과 그의 두 아들인 지남(智男)·철남(哲男)에게 내린 포상 문서인 선무원종공신록훈인증서(宣武原從功臣錄勳認證書)13매와 박경신에게 내사된 선무원종공신록권1책, 순조년간 박경신부부에게 증직(贈職)된 교지(敎旨)2매, 조선 선조12년(1579년 萬曆7) 박경신의 무과전시장원(武科殿試壯元)을 축하하기 위해 모친 장씨(張氏)가 급여(給與)한 별급문기(別給文記)1매 등이다.
박경신은 조선 중종 34년(1539년) 9월 9일 태어났으며, 자는 중선(仲宣), 호는 삼우정(三友亭)이고 본관은 밀성(密城)이다. 고려조 태사공(太師公)이었던 박언부(朴彦孚)의 후손으로 우당 박융(憂堂 朴融)의 6대손 이다. 31세 때 선조 2년(1569) 무과초시(武科初試)에 합격하고 이듬해 복시(覆試)에 급제했으며 3년후인 35세 때(선조6년 1573년) 전시(殿試)에서 1등으로 장원급제하였다. 이후 여절교위훈련원판관(勵節校尉訓鍊院判官). 선천병마첨절제사(宣川兵馬僉節制使) 정략장군훈련원첨정(定略將軍訓鍊院僉正). 양근병마동첨절제사(楊根兵馬同僉節制使) 등에 제수(除受)되었으며, 임란 때 선조를 호위하여 피난하고, 청도에서 두 아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병을 물리치고 청도를 수비하였다. 임란 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1등,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2등에 책훈(策勳)되었고 임호서원에 배향(配享)되었다. 장남 지남(智男1565∼1626)은 자를 인경(仁卿), 호를 계애(溪崖)라하고 부친의 의병창의에 가담하여 청도·밀양·영천·경주 등지의 전투에 참전했다. 무과에 급제하였고 임란 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2등에 책훈(策勳) 되었으며, 임호서원 경의사(景義祠)에 배향(配享)되고 있다. 철남(哲男1565∼1611)은 지남(智男)의 쌍둥이 동생으로 부친과 함께 청도·밀양 등지에서 3부자가 함께 의병에 참여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사복사 사복(司僕寺 司僕)·금위영 천총(禁衛營 千摠)을 역임하였다. 부친·형과 함께 임란 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2등에 책훈(策勳)되었으며 임호서원에 배향(配享)되고있다.
절지수(節紙受)는 13매 43× 55㎝로 저지(楮紙) 필사본(筆寫本) 낱장이며 발급년대는 만력20년(선조25년1592) 11월 17일∼만력21년(1593년) 3월 12일이다. 이 문서들은 박경신 등 3부자의 전공에 대한 포상(褒賞)으로 박경신의 것이 8매, 아들 지남은 2매, 철남은 3매등 총 13매가 전한다. 문서마다 "형조지인(刑曹之印)"이란 도장이 3곳에 날인되어 있다. 이들 13매의 절지수는 겸순찰사(兼巡察使)의 수결(手決)이 문서마다 동일한 것으로 보아 같은 순찰사에 의해 발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錄券)은 1책(34.3×22cm) 저지(楮紙)로 조선 선조38년(1605)강행된 것으로 총104장(30×18.8cm), 11행 21자, 공신도감(功臣都鑑)에서 편찬되었고 시명지보(施命之寶)가 찍혀있다. 이 녹권(錄券)은 선무원종공신1등인 행부사(行府使) 박경신에게 내린 내사본(內賜本)이다. 교지(敎旨)는 2매(①73×90 ② 64 ×90)로 저지, 필사본, 낱장이다. 이문서는 박경신과 부인예씨(芮氏)에게 내린 증직교지(贈職敎旨)로 순조16년(1816) 8월 발급된 것으로 조선왕조실록 순조16년 7월조에 "故府使朴慶新 故縣監慶傳 故僉正慶胤 等 贈之從之以一門三人 討倭著功也"(고부사박경신 고현감경전 고첨정경윤 등 증지종지이일문삼인 토왜저공야)라 하여 임진왜란 때 공훈이 있어 증직(贈職)하는 기사가 실려있다. 별급기(別級記)는 1매(95 ×55)로 저지, 필사본, 낱장이며 만력7년(선조12:1579) 7月11日에 발급된 문서로 기묘년(선조12년:1579) 7월 11일 모친 장씨(張氏)가 차자(次子)인 박경신(朴慶新)에게 무과에 연거푸 급제한 것을 축하하며 포상하는 별급 문서이다.
지정번호 : 보물 제1212호
수 량 : 2점(교지1매, 교서1축)
지 정 일 : 1994. 10. 17
소 재 지 : 경북 청도군 이서면 금촌리 374
소 유 자 : 재령이씨지암종중
이 공신교서(功臣敎書)는 선조37년(萬曆32년 1604년) 10월에 국왕이 임진왜란(壬辰倭亂)때 특히 옥포해전(玉浦海戰)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식성군 이운용(息城君 李雲龍)에게 선무공신(宣武功臣)3등을 내린 상훈교서(賞勳敎書)이다.
이운용(1562∼1610)의 자는 경명(景明), 호는 동계(東溪), 본관은 재령(載寧), 남해현령(南海縣令) 몽상(夢祥)의 아들이다. 선조18년(1585년) 무과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선조22년(1589년)1월에 옥포만호(玉浦萬戶)로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패전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원균(元均)이 도망하려는 것을 저지하고 전라좌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이순신에게 원병을 청하도록 건의하여 내원(來援)한 수군과 합세하여 옥포해전에서 적함50여척을 격침시켜 임진란 최초의 승전을 거두었다. 선조29년(1596년) 이순신이 천거하여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에 임명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경상도의 수군을 주도하였다.
선조 37년(1604년)에 선무공신(宣武功臣)3등에 책록 되고 식성군(息城君)에 봉해졌으며, 선조 38년(1605년) 내직으로는 도총부 부총관(都摠府 副摠管), 포도대장 겸 화기제조(捕盜大將 兼 火器提調),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지내고, 외직으로는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지냈다. 선조40년(1607년) 함경도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에 임명되어 국가의 중요 군직에서 활동하여 많은 공적을 남겼으며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 되었다.
교지(敎旨)는 선조29년(1596년) 1월 25일에 국왕(國王)이 이운용(李雲龍)에게 절충장군(折衝將軍) 正3品 경상좌도(慶尙左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에 임명하는 사령장(辭令狀)이다. 교서(敎書)의 내용은 이운용 장군이 임란 때 옥포해전(玉浦海戰)에서 왜군과 대적하여 크게 격파하고 승전한 무공을 찬양하면서 선무공신(宣武功臣) 삼등으로 책훈하고 포상으로 도상(圖像)을 그려 후세에 길이 남기고 1계급의 직위를 올리고, 부모 처자도 1계급 올리되 자식이 없을 경우 생질이나 여서(사위)를 1계급 올려준다 하였다. 그리고 적장(嫡長)이 세습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않도록 하여 영세에 걸쳐 도울 것임을 천명하고 이외에 반당4인, 노비7명, 구사2명, 전60결, 은5량, 표리단, 내구마(內廐馬)1필 등을 하사해 주었다. 이 선무공신교서(宣武功臣敎書)는 조선조 공신연구 및 임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식성군 이운용의 전기자료로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지정번호 : 보물 제836호
지 정 일 : 1985. 1. 8
소 재 지 : 경북 청도군 화양읍 송금리 256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대적사
이곳은 신라 헌강왕 2년(憲康王:876년) 보조선사(普照禪師804∼880)가 창건한 사찰로서 고려 초 보양국사(寶壤國師)가 중창하고, 조선 숙종15년(1689년)성해대사(性海大師), 춘해대사(春海大師)등이 주석 한바 있으며,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사원을 다시 중창하는 등 전란 때마다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조선 인조13년(1635년)경 중건된 극락전(極樂殿)은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건물의 평면은 장방형(長方形)으로 정면 3칸(가로6.8m), 측면 2칸(세로4.6m)의 다포계 공포를 갖춘 맞배지붕에 5량 가구로 고주(高柱) 없이 대량과 종량을 걸었으며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앞뒤는 대량에, 가운데는 종량에 층이 지도록 특이한 구성을 하고 있다.
내부의 본존불 위 부분에는 닫집을 설치하였고 천장은 연화문과 가상적 오판화(五瓣花)인 보상화문의 단청(丹靑)을하고 화려한 공포의 배치와 용머리 장식 및 구름문양의 조각 등 전각 가구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벽화는 전각을 중수하는 과정에서 많이 훼손되었으나 당초 벽화가 공포사이에 부분적으로 남아 있어 18세기 후반의 벽화를 연구하는 학인 들에게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이 전각의 기단에는 거북, 게 등과 연화문(蓮華紋)이 양각되어 있으며 H 자형 선각(線刻)이 연속되어 있고, 기단측면에 용비어천도(龍飛御天圖)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신앙인 들의 극락정토를 염원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지정번호 : 보물 제835호
지 정 일 : 1985. 1. 8
소 재 지 :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1789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운문사
신라 진흥왕대(眞興王:540∼576) 대작갑사(大鵲岬寺)로 창건된 운문사는 여러 차례 중창을 거쳤다. 현재가람은 조선 숙종44년(1718년)에 네 번째 중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대웅보전은 정면3칸(14.7m) 측면3칸(12.8m)의 팔작지붕으로 외3출, 내4출목 다포계의 공포(拱包)를 구성하고 짜임새도 건실하다. 천장은 1고주 5량가로 4면에 빗천장을 돌리고 중앙에 우물천장을 두었다. 기둥은 민흘림을 사용하였으며 전면에서 보아 모서리 네 기둥을 2치의 귀 솟음을 하여 건물의 상승감을 더하였고 건물안쪽의 고주2개를 합하여 14개이다. 처마는 겹처마로 추녀 끝 부분에 활주를 세워 귀마루의 하중을 받게 하였다. 주초는 자연석을 이용한 관계로 주초면이 평탄하지 않아 기둥 및 부분을 깎아 맞춘 기법을 사용하였고 단청은 금단청(錦丹靑)이다. 창호는 전면 전칸에 꽃살문 분합을 달고 어간(御間)은 넓어 5짝 분합문(分閤門)을 달았는데 꽃잎무늬가 있는 문은 한 짝만이 남아있다.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시는 이 전각은 전체 아홉칸 규모의 법당으로 1988년 실측 조사시 상량 도리 밑에 별도로 설치한 상량문(墨書)에는 『세차순치십년계사구월일(歲次順治十年癸巳九月日)』의 날짜가 기록되어 있어 이를 근거로 효종4년(1653년)에도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운문사 대웅보전은 만세루(萬歲樓)뒤에 있었는데 임진왜란때 소실되고 비로전을 중.개수하여 대웅보전으로 사용하였다고 전해진다.
지정번호 : 보물 제834호
지 정 일 : 1985. 1. 8
소 재 지 : 경북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 794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대비사
운문산 서쪽에 위치하는 대비사는 557년(新羅 眞興王18년)에 신승이 호거산(虎踞山)에 들어와 3년후인 560년(신라 진흥왕 21년)에 절을 짓기 시작하여 7년 걸려 5갑사를 대작갑사(현 雲門寺)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세웠는데, 서쪽의 소작갑사(小鵲岬寺) 또는 대비갑사(大悲岬寺)라고 한 다섯갑사 중의 하나로 신라 진평왕 22년(600년) 원광국사(圓光國師)가 중창한 사찰이다.
이 대웅전은 16세기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 중기의 건축양식을 잘 갖춘 건물로 전체구성은 짜임세가 있고 공포도 건실하게 짜여있다. 불단내부에 조선 숙종11년(1685)에 대웅전의 불탁을 수장하고 이듬해 법당을 단청하였다는 묵서가 발견되어 이 기록을 근거로 이 건물의 중건 년도를 숙종(1674년∼1720년)년간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후불정(後佛幀)은 1695년(康熙34년)에 제작된 것으로 건축시기는 불정 보다 앞서 건축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건물의 구조는 잡석 기단 위에 자연석주초를 깔고 상부에 원주를 세웠으며 기둥머리에는 창방과 평방을 두고 그 위에 다포(多包)를 구성하고 기둥사이에 각각2개의 공간포 간격이 정연하며 천장은 우물 천장이다. 정면3칸, 측면3칸의 규모로 전면의 길이가 34측(10.2m) 측면의 길이가 24측(8.6m)인 전형적인 다포계 맞배지붕이고 공포는 내3출, 외2출목으로 조선중기 다포계 맞배집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기둥은 모두 민 흘림의 원주를 세우고 상승감을 위하여 모서리 귀둥을 조금 높이는 귀 솟음 기법과 안정감을 위한 안 쏠림기법을 사용하였으며 여러번 중수되었으나 그 원형은 변하지 않았다. 단청(丹靑)이 퇴색하여 백골이 드러나있으나 사찰건축 연구에 중요한 전각이다.
이 사찰은 당초 박곡리 마을에 있었으나 고려시대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고 전해지며 사원의 명칭을 대비사(大悲寺)라고 한 것은 불교의 대자대비라는 뜻으로 붙어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일설에는 당시 신라 왕비가 수양차 이 절에 와서 오랫동안 지냈기 때문에 소작갑사를 대비갑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사찰 입구의 많은 부도가 고승 대덕 분들이 주석(主席) 하였음을 알 수 있다.
◆ 대비사 대웅전(大悲寺 大雄殿) ◆
지정번호 : 보물 제678호
지 정 일 : 1980. 9. 16
소 재 지 :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1789
시 대 : 통일신라시대
소 유 자 : 운문사
930년 보양국사(寶壤國師)가 중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서해용왕이 국사를 용궁으로 맞아들여 금빛 비단가사 한 벌 과 용왕의 아들 이목에게 국사를 모시고 가 작갑(鵲岬)에 절을 짓도록 부탁하였다. 이에 국사는 폐사를 일으키려고 호거산(虎踞山) 금수동에서 내려다보니 까치가 땅을 쪼고 있었다. 국사는 용왕이 작갑(鵲岬)이라 한 말이 생각나서 그곳을 파보니 예전의 전돌이 나오는데 이것을 모아 5층탑을 조성하고 절을 세워 작갑사(鵲岬寺)라 했는데 지금은 작갑사(鵲岬寺)의 전탑(塼塔)은 없어졌다. 대웅보전(현毘盧殿)앞에 쌍탑을 건립한 까닭은 대웅전이 위치한 자리의 지세가 전복하기 쉬운 작은배와 같다하여 지세를 누르기 위해 고려때 세웠다 한다.
이 쌍탑의 상층기단(上層基壇)에는 앉아 있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이 세련되게 조각되어 있으며 한 돌로 된 옥신(屋身)에는 우주(隅柱)가 새겨져 있다. 옥개석(屋蓋石)에는 5단의 받침 층단을 새겼으며 추녀 밑이 수평을 이루어 경쾌하고 날씬한 조형미(造形美)를 보여준다. 상륜부에는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가 남아 있고 기단 일부가 새 돌로 보수되었다. 탑의 전체 높이는 5.4m이고 기단의 탱주가 2개이던 것이 위층에서 1개로 줄어들고 표면이 장식된 점으로 보아 9세기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정번호 : 보물 제677호
지 정 일 : 1980. 9. 16
소 재 지 : 경북 청도군 매전면 장연리 108-1
시 대 : 통일신라시대
소 유 자 : 국유
장연사지(長淵寺址)는 청도 산동지방을 흐르는 동창천(東倉川)을 바라보는 장연리에 평지가람(平地伽藍)의 신라시대 큰 사찰로 미륵불(彌勒佛)을 모시는 흥경사(興景寺)라 전하기도 한다. 이 석탑(石搭)들은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에 조성된 3층 석탑으로 서탑은 도괴(倒壞)되어 하천에 있던 것을 1980년 2월 현 위치로 복원하였고, 동탑은 1984년 12월에 해체 복원하였다.
온전한 동탑은 높이4.8m 기단높이1.56m 기단부는 이중기단이며 옥신(屋身)은 각 면에 기둥모양의 우주(隅柱)가 2개씩 조각되어있다. 1984년 드잡이 공사시 1층 옥신(屋身)상단에서 사리장치가 있었는데, 목재 사리합(11.8cm)속에 푸른빛을 띈 사리병(4.84cm)으로 이 유물들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서탑은 높이4.84m로 하층기단을 지대석(地臺石)과 중석을 함께 붙여서 8석으로 구성하고 각 면에는 우주(隅柱)와 탱주( 柱) 2주씩 이 있으며 갑석은 4매씩이고 위에 각형과 아름다운 활 모양의 호형(弧形)이 2단으로 이루어져 있고 상층기단 중석은 4매석이고 각 면에 우주와 탱주 1주씩이 있으며 갑석(甲石)은 2매석으로 덮고 밑에는 부연(副椽)이 있다. 두 탑은 하층기단의 탱주( 柱)가 하나로 줄어들고 옥개석의 층급 받침이 모두 넷으로 적어진 것으로 보아 9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주변에는 당간지주(幢竿支柱), 수조(水槽), 주초(柱礎), 석등대좌(石燈臺座) 등이 있으며 사지 산기슭에 있던 미륵불(彌勒佛)은 매전 초등학교에 옮겨져 있다.
지정번호 : 보물 제323호
지 정 일 : 1963. 1. 21
소 재 지 : 경북 청도군 화양면 동천리 285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유
이 빙고는 인위적으로 축조한 것으로 겨울철에 자연 얼음을 저장하였다가 봄 .여름 .가을까지 사용하였다. 청도읍성 동문 동상리 구릉에 위치하고 크기가 길이 14.75m, 넓이 5m 높이 4.4m로 화강암을 지하에서 아치모양으로 틀어 올려 쌓아 올리고 다듬은 돌로 홍예를 올린 후 그 위에 흙을 덮었다
석빙고의 입구는 서쪽에 있으며 입구의 출입문은 지금은 없어 졌고 계단을 따라 안으로 내려가게 되어있다. 바닥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경사가 졌으며, 흙을 단단하게 다진 바닥에 돌을 깔았다. 배수는 양쪽 가장자리에 있는 배수로의 경사를 따라 가운데 배수구에 모여 외부로 흘러나가게 되어 있다.
천정은 아치형으로 된 10개의 돌을 짜서 틀어 올려 4개의 보를 만들었다. 이 보위에다 거대한 판석을 덮어 천정을 만들었는데, 이들 개석(蓋石)은 거의 파괴 또는 없어지고 몇 개만이 앙상하게 남아있으며, 환기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청도 석빙고는 조선 숙종39년(1713년) 2월 11일에 진사 박상고(進士 朴尙古)가 착공하여 같은 해 5월 5일에 준공했다. 빙고 비문에는 『전면 : 始於二月十一日至五月五日而訖盖役衆五千四百五十一皆一日赴役成石梯六百七役二十日石工十三治匠三木手一粮米五三石瓦功錢三百兩正鐵一千四百三十八斤口三百八十四石』『후면 : 癸巳五月初六日立 左監 衝黃亦鳳 進士 朴尙古 左色貢生 崔世哲 幼學 李義孝 都色貢生 朴以載 庫直 金千世 幼學 左色貢生 朴徽碩 右 李胃善 治 朴世 右 判官 金汝俊』로 기록되어 있어 축조당시 석공이 13명, 목수와 치공 등 연인원 6천74명 정철 1,438근이 소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고장의 빙고는 신라초기부터 있었다고 전해지며, 오산지(鰲山誌)에는 당초 청도읍성 북문밖에 있었는데, 토굴로 만들어 협소하고 허물어져 이곳에 다시 축조하였다고 하며,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신라 지증왕 때 얼음을 저장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전국에 보존되고 있는 6기의 석빙고 중 가장 오래된 석빙고이며, 규모도 제일 큰 소중한 유산이다.
◆ 청도 석빙고(淸道 石氷庫) ◆
지정번호 : 보물 제318호
지 정 일 : 1963. 1. 21(1959. 2. 12)
소 재 지 :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1789
시 대 : 통일신라시대
소 유 자 : 운문사
이 사천왕석주들은 신라 진평왕13년(眞平王 591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나 정확한 연혁은 알 수 없으며, 또한 어떤 건축이나 조형물 등에 사용되었는지 분명치 않으나 전탑의 탑신이나 벽면에 봉안된 석주가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온화하고 부드러운 느낌이며 각부의 조각이 매우 사실적이고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다. 몸에는 갑옷을 입고 휘날리는 천의(天衣)를 걸치고 손에는 삼고저, 보탑, 꽃가지, 장검을 들고 있으며 발 밑에 악귀 생령좌(生靈座)를 나타내고 돌에 조각하였으면서도 각부의 조각수법이 매우 정교하고 사실적이다.
사천왕상들은 그 배치나 각 천왕상이 들고있는 지물에 따라 동방 지국천왕 . 남방 증장천왕 . 서방 광목천왕 . 북방 다문천왕으로 구분하는데 제1석주는 높이1.52m의 삼고저를 든 증장천왕상(增長天王像)으로 목에는 영락이 걸려있고 오른팔에는 천의가 늘어져있으며 발밑의 악귀는 머리와 엉덩이가 눌려 신음하고 있다.
제2석주는 높이1.64m의 탑을 든 다문천왕상(多聞天王像)으로 몸을 약간 비튼 자세지만 거의 정면을 향한 입상으로 오른손은 내려 다섯 손가락을 활짝 펴고 왼손은 어깨까지 들어 탑을 받들고 악귀는 양쪽 어깨가 눌려 입이 찢어질 듯 신음하고 있다.
제3석주는 높이1.63m의 불꽃을 든 광목천왕상(廣目天王像)으로 무릎을 굽혀 악귀의 두 어깨를 밟고 선 자세로 왼손은 들어 불꽃을 잡았으며 오른손은 내렸다.
제4석주는 높이1.53m에 칼을 든 지국천왕상(持國天王像)으로 악귀의 어깨와 엉덩이를 밟고 왼손은 내려 칼 손잡이를 잡고 오른손은 들어 칼 중심을 받치고 있다.
지정번호 : 보물 제317호
지 정 일 : 1963. 1. 21(1959. 2. 12)
소 재 지 :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1789
시 대 : 고려시대
소 유 자 : 운문사
고려시대(高麗時代)에 만들어진 석조여래좌상은 작압전(鵲鴨殿)에 사천왕석주와 같이 모셔져 있는데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모두 갖추고 육계가 뚜렷한 나발(螺髮)의 머리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있다. 법의는 두 어깨를 다 가린 통견의(通肩衣)이며 법의 안 좌측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끼어 입은 승각기(僧脚岐)가 보인다. 불신의 높이는 63cm 대좌 높이 41cm 광배 높이 92cm 이며 광배(光背)는 폭이 넓은 주형광배(舟形光背) 이고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융기선으로 구분하고 두광(頭光) 중심에 연꽃이 있고 외연에는 화염문(火焰紋)이 조각되었다.
좌대는 6각형의 특이한 형태로 하단석은 양쪽이 길며 6각형으로 18엽의 복연(覆蓮)이 조각되어 있다. 하대석 위에 삼단의 고임을 각출하고 그 위에 6각의 중대석이 하대석과 한 돌로 되어 있고 측면에는 조각이 없다. 상대석은 3단의 고임이 모각 되었고 그 위에 14엽의 앙련(仰蓮)이 조각된 평면타원형이다. 불상전체에 호분이 칠해져 있어 각 선이 분명하지 않으나 코가 크고 눈과 입이 적고 상(像) 자체가 나약하게 느껴지고 삼도가 분명하지 않은 점등을 들어 9세기 불상을 답습하려고 한 신라 말에서 고려 초의 불상양식인 중요한 작품이다.
지정번호 : 보물 제203호
지 정 일 : 1963. 1. 21(1939. 10. 18)
소 재 지 : 경북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 653
시 대 : 통일신라시대
소 유 자 : 대비사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높이 약1.35m의 미륵불(彌勒佛)이다. 불상은 전체가 화강암(花崗巖)으로 만들어져 높이 약1.2m의 연화대(蓮花臺)위에 있으며 지금은 불각(佛閣)을 세워 안치하고 있다.
1928년 이 부락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였을 때 피해를 입어 불상의 표면 전부가 크게 파손되었으나 아름다운 면상(面像)과 목에 있는 삼도(三道)는 남아 있다. 또한 대좌(臺坐)는 팔각이나 손상이 많으며 하대석(下臺石)은 팔각 복연(復蓮)으로 복변팔엽(復辨八葉)의 연화문(蓮花紋)을 각 면에 조각하였다. 중대석(中臺石)은 팔각으로 각 모퉁이에 기둥모양(柱形)이 있다. 상대석은 반원형(半圓形)이며 앙연석(仰蓮石)은 있었던 윤곽이 보인다. 당초에는 광배(光背)가 있었으나 파괴되어 두 개의 파편만 남아 있다. 이 파편을 보면 주형광배(舟形光背)에다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나타내었고, 외면에 불꽃무늬(火焰紋)와 연꽃무늬(蓮花紋)을 조각한 웅장하고 화려한 광배였던 것으로 추측이 된다. 얼굴은 풍만하면서도 박력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힘찬 어깨와 당당한 가슴 잘쑥한 허리, 몸에 밀착된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법의 등에서 강건하면서도 긴장감 넘치는 통일신라성기(統一新羅成期)의 걸작불상으로 높이평가 되고 있다.
이 걸작불상은 무진년(戊辰年)에 화재가 발생하여 화강석(花崗石)이 파괴되고 운반대(運般臺)가 파열되어 험상굿게 보이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부근일대에서 사찰용 기구 및 와병(瓦甁)등이 나오는데 신라시대의 소작갑사지(小鵲岬寺地) 혹은 대비갑사지(大悲岬寺地)로 추정하며 예전에 대비사(大悲寺)가 이곳에 있다가 고려초(高麗初)에 현 위치에 옮겼다.
지정번호 : 보물 제316호
지 정 일 : 1963. 1. 21(1959. 2. 12)
소 재 지 :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1789
시 대 : 고려시대
소 유 자 : 운문사
이 비는 이수( 首)와 귀부(龜趺)는 없어졌고 세 쪽으로 절단된 비신(碑身)만 복원한 비석으로 높이230㎝, 폭91cm 비문은 원응국사(圓應國師:1051∼1144)가 운문사를 중창한 업적과 그 행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원응국사(圓應國師)는 고려 숙종 때의 승려로 성은 이씨(李氏)이며 속명은 학일(學一)이고 자는 봉거(蓬渠), 정읍(井邑:보안)출신 응첨(應瞻)의 아들로서 11세에 진장법사(眞藏法師)에 의해 입산하고 희함선사(喜含禪師)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특히 대반야경에 능통하였다. 1106년에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고 1122년(예종17년) 7월 22일 왕사로 책봉되었다. 1144년(인종22년) 12월 9일 『이 몸은 한 조각구름 남김없이 흩어지지만 둥구렷한 달하나 있어 맑은 빛 허공에 넘치리』라는 임종계를 남기고 나이93세로 입적(入寂)하자 인종(仁宗)은 대사의 업적을 찬양하여 국사로 책봉하였으며 원응(圓應)이란 시호를 내리고 많은 전답과 노비를 하사하고 비를 세워 공덕을 추모케 하였다.
비문은 고려 명장 금강거사 윤언이(1090∼1149)가 지었고 대감(大鑑)국사 묵암 탄연(默庵 坦然:1069∼1158)이 썼다. 편마암에 자경(字經)은 1.5cm의 행서이고 제액(題額)은 10.5cm의 노공체(魯公體) 행서이다.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는 『운문비재청도운문산운문사원응국사비실명윤언이문(雲門碑在淸道雲門山雲門寺圓應國師碑失名尹彦이文)』 이라고 수록되어 있다.
이곳은 통일신라 불교전성기에 평지가람의 천정사지(天井寺地)또는 정전사지이다. 천정사는 국태민안(國泰民安)의 기원전당으로 신라 법흥왕(514∼540년)이 전란을 피해 이 사찰에서 몽진(蒙塵)하였다가 평정(平定)되었다하여 정전사(停戰寺)라 불리어 지기도 했다. 천정사(天井寺)의 3층 석탑은 쌍탑 가람이었으나 동탑은 1930년경 도괴(倒壞)되었고 서탑만 1935년 일제강점기부터 보물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주변 마을이름을 탑동(塔洞:송서2리)으로 쓰고 있다.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3층 석탑으로 높이5.47m에 상륜부는 없어지고 기단부와 탑신부는 잘 보존되어 있으며 신라석탑의 전형양식을 충실하게 계승한 탑으로 하층기단의 지대석과 중석은 하나의 돌로 만들어 8석을 구성하였고, 지붕돌의 경사는 완만하며 각형과 활 모양의 호형(弧形)이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상층기단 중석도 8석으로 구성하였으며 각 면에 우주(宇宙)와 탱주(撑柱)2주를 새겼고 상대갑석(上臺甲石)은 4매 판석으로 덮었고 밑에는 부연(副緣)이 있으며 위에는 경미한 경사가 있는 가운데 각형 2단의 굄이 있고 탑신부의 옥신과 옥개석이 각각 하나의 돌이고 각층 옥신에는 우주가 있다. 옥개석 처마 밑은 수평이고 받침 수는 층 5단이며 위에는 각형 2단의 옥신 받침이 각층에 표현되어 있다. 기단부의 부재 구성이 정연하고 기단의 탱주(撑柱) 수가 상하, 각 면 2주씩인 점 등 한국석탑의 초기양식이 잘 나타나 있으며, 기단이나 옥신의 조각수법에서 힘찬 박력이 나타나 있다.
천정사지(天井寺地) 삼층석탑은 8세기전반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풍각 초등학교에는 연꽃무늬가 있는 석등대좌가 남아있는 등 탑동에는 지금도 신라토기 등 사찰에서 사용했던 석조물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지정번호 : 보물 제193호
지 정 일 : 1963. 1. 21(1939. 10. 18)
소 재 지 :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1789
시 대 : 통일신라시대
소 유 자 : 운문사
이 석등은 신라 진평왕13년(591년)에 조성한 것으로 금당 옆 황금탑(黃金塔)을 밝히기 위해 세워진 석등이다. 우리나라 석등의 기본 형태인 팔각형을 띤 석등으로 지대석(地臺石)만이 방형이고 그 위의 부재는 모두 팔각을 이루고 높이는 258cm이다.
지대석(地臺石)과 그 위의 연화석은 하나의 돌로 조성되었는데 연판은 여덟 잎 복연(覆蓮)으로 각 판은 화문이 조각 되어있다. 복연대 상면에는 팔각형으로 2단의 각형 받침을 각출하여 간주를 받고 있으며 간석은 팔각주로 아무런 조각 없이 가늘지도 굵지도 않으며 균형 있는 높이가 부드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상대석은 하면에 일단의 각형 받침을 마련하고 단엽(單葉) 8판의 앙련(仰蓮)을 조각하였으며 각 판내를 화문으로 장식하였고 구조식화문은 하대의 연판내와 같다. 앙련(仰蓮)의 판단부에는 높은 일단의 굽을 8각으로 돌렸으며, 그 상면에는 2단의 각형 받침을 각출하여 화사석을 받치고 사면에 화창이 뚫려있다. 옥개석은 하면에 2단의 괴임이 구성되었고 추녀는 직선으로 경쾌한 감을 주며, 전체적으로 보아 각부에 균형이 잡히고 조각도 우아한 걸작품이다.
이 석등 앞에서면 충렬왕의 명으로 운문사에서 5년간 주석하며 민족의 위대한 문화유산인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집필한 일연(一然1206∼1289)스님과 여러 고승대덕들의 행적을 떠올릴 수 있다.
지정번호 : 보물 제208호
지 정 일 : 1963. 1. 21(1959. 2. 12)
소 재 지 :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1789
시 대 : 고려시대
소 유 자 : 운문사
이 청동호(靑銅壺)는 임란 때 분실된 것을 운문사 우측 계곡인 약야계(若耶溪)에서 1632년(인조10년)에 발견한 것이다. 항아리의 무게는30斤, 높이55cm, 입지름19.5cm로 넓은 어깨와 굽이 달려있다. 항아리 좌우에 달린 굵고 경고한 고리는 손잡이 구실을 하고 뚜껑중앙에는 높직한 꼭지가 달려있다. 그 밑 부분은 둥근 마디가 있는 고복형(鼓腹形)의 지주(支柱)에 연판6엽(蓮瓣六葉)을 얹고 그 위에 화염문(火焰紋) 장식이 있다. 특히 화염문(火焰紋) 장식은 신라말에서 고려조(羅末麗代)에 걸쳐 나타나는 부도(浮屠) 상륜부(相輪部)에서 볼 수 있는 십자형 화염문 보주형과 비슷하다.
동호의 용도는 알 수 없고 전체의 색감은 흑색(黑色)으로 감로준(甘露樽)이라는 이른바 불구(佛具)의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어깨부분에는 21자가 선각(線刻)되어 있는데, 이 명문에 의하면 대덕 성념(大德 成念)이 조성에 관련되었음을 알 수 있고 고려 문종21년(1067)에 다시 만들었음이 나타나므로 제작 년대는 이 보다 앞선 신라말 고려초로 추정된다. 명문은『咸擁三年 六月 日 改進童海重參 拾斥都監大德成念(함옹삼년 육월 일 개진동해중참 십척도감대덕성념)』이다.
전설에 의하면 임란당시 왜적들의 분탕으로 잃어버린 동호를 인담선자(印湛禪子)가 운문사 옆을 흐르는 약야계(若耶溪)부근에서 잠을 자는데, 꿈속에 한 승려가 나타나 약야계를 가르키며 이곳에 보물이 있으니 네가 가지라고 하였다. 꿈에서 깨어난 인담선자가 약야계를 둘러보니 항아리 모양의 동호가 있었고 그 속에는 서하집(西河集)이란 책한 권이 있었는데 후손이 원하여 돌려주었다고 한다.
첫댓글 석등은 외인들인 들어 갈 수 없는 비구니학교 안에 있어서 보기가 좀 힘드는데 아마 단체로 가게 되면 볼 가능성도 있겠네요..청동호는 지금 존재하지 않데요..어떻게 없어진건지는 자세히 모르겠구요...아쉽게도 번개 답사때 보지 못했답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