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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와 미국 나들이
우물 안의 개구리가 마침내 세상 넓은지를 알게 된 것인가. 10여 년을 엎드려 움츠렸다가 이번에는 캐나다와 미국까지 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사실은 10여년을 헛되이 엎드려 있기만 한 것은 아니고 그 우물 안 곳곳의 문화유적지들을 부지런히 돌아다녔었다. 보길도(甫吉島)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세연정(洗然亭)과 해남 연동리의 녹우당(綠雨堂), 강진의 다산초당(茶山草堂)과 김영랑(金永郞)의 고택, 장도의 청해진(靑海鎭) 터를 비롯하여 담양의 소쇄원(掃灑園)과 명옥정(明玉亭), 면앙정(潭仰亭) 등 여러 누정(樓亭)들, 진도의 운림산방(雲林山房)과 남도석성,구례의 운조루(雲鳥樓), 논산의 윤증(尹拯) 고택과 돈암서원(豚巖書院), 노강서원(魯岡書院), 예산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고택 등을 매년 답사 겸 여행하였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세째아들 우철(宇喆)이네 가족들이 캐나다로 삶의 터를 옮겨 떠난지 3년이 지나니 어찌 사는지도 궁금하고 미림이와 용빈이 두 손주들이 자꾸만 눈에 어른거리기도 하여 겸하여 살기 좋다는 캐나다는 어떤 곳인가 구경도 하고 싶어 아내와 벼르고 또 벼르다가 마침내 토론토까지의 왕복 비행기표를 끊어 버린 것이다. 2003년 7월 10일 출발하여 8월 5일 귀국 예정으로 우리 내외와 외손자 현우(賢愚)의 항공료까지 합하여 500만원이 조금 못되는 거금을 지불하였다. 이때 초등학교 2학년인 현우를 데리고 가기로 한 것이다.
내게는 손녀가 4명, 손자가 3명이 있는데 그중 현우는 외손자다. 우리 전래의 속담에 ‘외손자는 경상도 방아꼬’라 하여 마치 아무 소용없는 손자인 것처럼 여기는 듯한 풍습이 있지만 이른바 혈맥으로 보면 외손자 또한 친손자와 다를 것이 조금도 없다. 오히려 가장 확실한 손자일 것이라고도 말한다. 현우와 용빈이는 1995년생 동갑내기로 현우가 2개월쯤 먼저 태어났는데 어미들이 직장생활을 하던 때라서 두 아이 모두 유아시절 한동안 부안에서 우리 내외가 키웠기에 정이 담뿍 들었었다.
아내는 고춧가루, 김, 멸치, 참기름, 깨, 애들의 옷가지며 며느리가 좋아한다며 깻잎에 이르기까지 이것저것 준비한 보따리가 박스를 채우고도 넘쳤다. 미나집에서 자고 7월 10일 새로 개항된 인천 국제공항 밤 8시 45분 발 대한항공을 탔는데 아들, 며느리, 딸, 사위가 모두 나와서 환송하였다. 현우가 좋아서 들떴었는데 막상 개찰구를 통과하면서는 제 어미를 돌아보며 눈물을 짰다.
태백산맥을 넘은 비행기는 동해를 가로질러 일본을 거쳐 태평양에 들어서더니 새벽 4시쯤에는 날짜변경선을 지났었다. 13시간 15분만인 다음 날 밤 8시 50분에 캄캄한 토론토 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에서는 동서남북도 가늠할 수 없어 나가는 승객들의 뒤만 따라가는데 아내는 무릎관절염으로 언제나 맨 꼴찌로 간신히 따라왔다. 이민국 직원의 입국심사를 받는데 깡마른 늙은 여인이 세 사람의 상호관계, 입국목적, 체류지, 아들은 언제 왔으며 무엇을 하는가, 언제 귀국 하려는가 등이었지만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아서 결국 한국말 잘 하는 통역 하나가 와서야 해결이 되어 나왔으며 보따리 중 박스 하나를 흑인 포터의 도움으로 간신히 찾아 나오니 우철이와 며느리 미림이 용빈이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연호하며 반긴다. 어두운 토론토의 여름 밤거리를 20분쯤 달려 우철이가 사는 아파트에 도착하였다.
다음 날 우철이와 며느리는 가게에 나가고 우리는 피로하기도 하고 시차도 극복하기 위하여 집에서 쉬었다. 한국과 캐나다의 시차는 한국이 캐나다보다 한 나절 하고도 한 시간이 빠르다. 우철이네의 아파트는 8층인데 낡고 후졌다. 베란다에서 시내를 굽어보니 집들이 온통 짙은 녹음 속에 묻혀 있다. 인구 200만이 조금 넘는다 하며 서울의 3~4배 넓이라 하여서인지 높은 건물이 거의 없다. 땅이 넓어서 구태여 고층으로 집을 지을 필요가 없기 때문인 듯하다. 나는 매일같이 아침이면 용빈이와 현우를 깨워 집 근처에 있는 소공원 ‘스타포드파크’에 나가 운동을 하였다. 공원의 잔디밭에 갈매기들이 자주 내려앉곤 하여 이상하게 여겼더니 근처에 몬트리올호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토론토는 호수의 도시요 물의 도시였다.
하루를 쉬고 7월 12일 토요일인데 식구들 모두 함께 큰 상가에 들렀으며 애들에게 선물을 사주었는데, 용빈이와 현우는 금방 친해져 잠시도 서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용빈이는 그동안 한국말을 많이 잊어 서툴렀다. 선물을 사주니 좋아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진짜 착하다!”를 연발하여 모두 한바탕 웃었다. 우철이가 경영하는 가게에 들렀는데 미용화장품과 그 재료상으로 흑인들이 사용하는 가발이 주력상품이다. 흑인들 집단촌 근처에 개업한지 1년쯤 되었으며 이제부터 조금씩 흑자로 들어섰다니 다행이다. 어느새 며느리의 영어 구사력이 능하여 둘이서 운영하며 시간제로 흑인 아르바이트 여고학생을 쓰고 있는데 보기에 갑갑할 정도로 뚱보였다. 고객의 70% 이상이 흑인들로 조금만 주의하지 않으면 훔치고 더러는 주인이 보는 데서도 훔쳐 달아나고 한다니 이도 쉬운 일이 아니다. 오후에는 한국인들이 주로 사는 거리와 한인들의 장터에도 들렀는데 한국에 있는 것은 다 있었으며 북한산 ‘삼수갑산’표 쌀을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물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부지런하고 성실한 우철이요 억척스럽고 샘이 많은 며느리니 마음이 놓이긴 하지만 이역만리 이국땅에서 고생하는 것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웠다.
13일은 일요일이라 온 가족들이 저 유명한 나이아가라폭포에 갔다. 내가 소학교 시절 지리시간에 나이아가라 폭포를 배웠지만 이렇게 실지로 와보리라고는 꿈엔들 상상이나 했겠는가. 며칠째 빗방울이 오락가락 하였으나 오늘은 햇볕도 찬란하다. 폭포는 토론토에서 미국 쪽으로 120km라 한다. 시내를 벗어나 통행료도 없는 잘 다듬어진 16차선의 고속도로에 들어서 망망한 대평원을 달려 11시 20분쯤에 나이아가라에 도착하였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수 만명의 관광객과 자동차의 홍수가 질서 있게 움직이는 것이 희한할 지경이다. 점심을 먹은 후에 폭포 구경을 하기로 하고 넓은 잔디밭 광장으로 갔는데 거기엔 곳곳에 식탁을 겸한 쉴 곳이 마련되어 있고 갑자기 소나기라도 오면 대피할 수 있게 200여 명씩이 들어갈 수 있는 대피시설이 잘 설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숯불을 일구어 준비하여 온 갈비를 굽고 김치와 밥으로 즐겁게 점심을 먹었는데, 몸은 캐나다 나이아가라 폭포에 와 있지만 음식은 모두 한국 우리집 음식 그대로였다. 현우와 용빈이는 분수대에 설치되어 있는 물놀이터에서 각국의 어린이들과 금방 치해져 뒤섞여 놀기에 정신이 없었다.
나이아가라폭포는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에 맞물려 있는데 미국 쪽의 폭포는 상대적으로 빈약한 편이었으며 그 대부분이 캐나다에 속해 있었다. 지층이 높은 ‘이리호’의 물이 낮은 ‘온타리오호수’로 떨어지면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높이 48m, 폭 750m의 세계 최대의 이 폭포지역 일대는 유명한 관광 명소답게 매일같이 세계 각국에서 찾아오는 수 만명의 관광객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서로 몸을 비집으며 폭포 가까이에 접근하여 굉음을 토하는 물기둥을 보기에 정신이 없으며 물안개에 옷을 적시면서도 그 위에 놓인 아름다운 무지개다리(虹門橋)를 타고 천상의 백옥경(白玉京)을 오르내리는 듯한 기분을 맛본다. 우리 가족도 행여 놓칠세라 서로 손을 잡고 무아의 경에 들어 그 속에 묻혔었다. 강 밑으로 내려가 비옷을 입고 ‘안개 아가씨호’배를 타면 폭포수가 떨어지는 물줄기의 바로 밑에까지 갈수는 있으나 그것까지는 포기하기로 하고 바라보는 것만으로 즐겼다. 승선료도 너무 비쌌지만 용빈이와 현우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코스여서 무리를 않기로 한 것이다. 기념품 센터에 들러 군것질도 하고 나이아가라 메달이 달린 열쇠고리 10개를 44달러를 주고 샀다. 오면서 고속도로주변의 몇 개 농장들에 들렀으며 캐나다의 명물 아이스와인 공장에 들러서는 포도주도 한 잔 맛보고 한 병 사가지고 돌아왔다. 이곳 농장들은 그 농장에서 생산되는 것들을 현장에서 가공 판매하는 시설과 코너가 설치되어 있었다.
캐나다라는 말은 이곳 원주민의 말로 ‘우리집’이라는 뜻의 말이라고 한다. 모든 토지는 국유화 되었으며 세금이 비싸고 엄격하여 분배정책에 중점을 두어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는 나라다. “봉급생활로는 돈을 모으기 어렵다.”며 우철이도 1년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장사를 시작한 것인데 1달러짜리 물건 하나를 팔아도 반드시 영수증을 발급하는 제도가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소득이 있는 곳에 그만큼의 세금을 부과하여 그 돈으로 저소득층, 노약자, 어린이, 교육, 의료보험, 공공시설물 등에 잘 사용하고 있다 하며 65세가 되면 누구나 연금이 나오므로 노년을 편안하게 지내고 있는 사회복지정책이 잘 되어 있는 나라라고 한다.
하루를 집에서 쉬고 다음 날 오후에 며느리와 같이 토론토 로얄관광회사에 들러 캐나다 동부지역 관광계약을 하였다. 아내와 현우, 나 3인의 2박 3일(7. 21~7. 23) 요금이 628불이다. 어린이도 어른요금과 똑같이 받는다. 이 관광회사는 한국사람이 하는 회사다. 계약서를 작성하고 돈을 지불하니 <동부(퀘벡)지역 2박 3일 관광일정표>를 준다. 코스를 보니 토론토 출발, 몬트리올, 퀘벡, 다시 몬트리올, 오타와, 토론토로 되어 있다.
토론토에 이민을 와 살고 있는 한국사람이 7만명 쯤 된다고 한다. 캐나다가 영국으로부터 정식으로 독립된 것은 1867년 7월 1일이지만 지금도 형식적으로는 국가원수는 영국 여왕이고 정부 수반은 캐나다 수상으로 되어 있는 좀 색다른 영연방 정치형태의 나라다. 국토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넓은 나라인데도 인구는 고작 3,200만 명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그 인구의 78%는 도시에 모여 살고 있어서 광활한 국토의 대부분이 오염되지 않은 천연 그대로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청정한 나라다.
나와 아내의 외국 여행은 매우 폐쇄적이고 제한적이다. 그 가장 큰 이유가 외국어를 구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들, 며느리는 가게에 나가야 하므로 방학 중인 손녀 미림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미림이도 과외활동이 있어서 쉽지가 않다. 오늘은 미림이가 시간이 있어서 아내와 두 손자를 앞세우고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라는 로얄온타리오박물관에 갔다. 지하철을 탔는데 튼튼하고 육중하게 생긴 지하철의 깨끗한 내부와 독립된 개개의 좌석이 편리하였으며 티켓 한 장으로 시내버스로 연결 승차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세계적인 박물관답게 규모나 시설이 현대적이고 곳곳에 휴게실이 설치되어 있어서 느긋하게 공부할 수 있는 편안한 학습의 장이었다. 600만여 점의 자료를 보유 전시하고 있다는데 특히 중국의 자료는 중국 다음으로 이 박물관에서 많이 보유하고 있음을 자랑한다. 어떤 연유로 중국의 자료를 그렇게 많이 보유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마침 중국관이 수리 중이어서 볼 수 없음이 애석하였다. 그래서 그리스, 로마, 이집트의 유물관을 집중적으로 보았는데 이집트 관에서는 실물 미라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실물 그대로의 공룡 화석을 조립한 자료들 또한 세계에서 제일 많다고 하는데 이는 공룡 화석이 캐나다에서 제일 많이 발굴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은 주로 공룡과 파충류, 곤충, 다양한 조류와 어류관에서 시간가는 줄을 몰라라 했는데 아내는 별 흥미가 없어 보였으며 다리가 아파서 주로 휴게실의 신세를 지고 있었다.
이곳에서 미국 뉴욕이 가깝다기에 이혜경(李惠卿)에게 전화를 하였다. 남편 정목사와 함께 반가워하며 집사람과 같이 미국으로 오라고 성화다. “아내는 미국 비자가 없어서 갈 수 없다.”고 하자 나만이라도 꼭 와야 한다며 독촉이 성화였다. 우철이가 혜경이와 협의하여 미림이를 동반하여 가기로 하고 일정을 조절하여 7월 28일부터 8월 1일까지로 정하였는데, 이는 이번 내 여행계획에 없는 뜻밖의 덤이어서 비자가 없어서 함께 못가는 아내에게 매우 미안하였다. 다음 날 우철이가 퇴근하면서 뉴욕행의 비행기표 두 장을 사왔는데 1인당 왕복 420불 21센트였다.
7월 17일 아침 이곳 기독교방송을 들으니 부안군에 민란 수준에 가까운 데모사태가 났다는 보도다. ‘군수 김종규(金宗奎)씨가 군민들을 속이고 은밀하게 위도(蝟島)에 핵폐기물 저장시설의 설치 신청을 하였다 하여 군민들이 격노하여 방화를 하며 그 철회를 요구하는 반대시위를 벌이고 있다’고 하였다. 내가 떠나올 무렵 몇몇 젊은이들이 그럴 가능성에 대하여 우려하는 것을 듣긴 하였으나 설마 했던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또 ‘새만금 제방의 물막이 공사를 법원이 중지하라고 판결했다’는 소식도 보도하였다. 이역만리 타국 땅에 앉아서 고향의 불행한 소식과 반가운 소식 두 가지를 동시에 듣고 있으려니 마음이 착잡하였다.
다음 날 우리는 역시 미림이의 안내로 토론토의 명물 CN타워를 보러 갔다. 전철을 타고 유니언역에서 내려 사람만 통행하는 스카이워크를 5분쯤 걸으니 553m 높이의 타워가 푸른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이 역시 세계에서 제일 높은 타워라고 한다. 관람료가 비싼 편이어서 노인 우대요금인데도 1인당 18불 18센트. 학생인 미림이는 노인 요금과 같고 어린이도 14불 97센트여서 83불 58센트라 우리나라 돈으로는 7만 5천원이 넘는다. 타워에 오르기까지 두세 곳에서 위험물 소지 여부의 검사가 있었는데 재작년의 미국 9·11테러사건 후 이렇게 강화되었다고 한다.
타워의 위까지 끌어 올리는 데는 1분도 채 안 걸렸다. 훤한 창문으로 보이는 지상의 경관이 아슬아슬한데 351m 지점에 설치된 전망대에서 내려 토론토 시가지와 온타리오 호수가 발아래 내려다보이는 경관을 보니 가히 환상적이다. 수많은 유람선이며 잠자리같은 관광용 경비행기들이 그 위를 한가하게 날고 있고 짙푸른 나무숲에 묻힌 집들, 그 사이를 바둑판 같이 그어 놓은 도로들이며, 그 위를 부지런한 개미처럼 기어가는 자동차들이 가물가물하다. 용빈과 현우는 어우러져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다. 전망대의 바닥이 유리로 되어 있어 그 위를 걷노라면 마치 공중에 떠있는 것 같아서 고소공포증으로 간이 콩알만 하여지고 차마 그 아래 지상을 내려다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두 손주들이 그 유리바닥 위에 눕고 뒹굴고 뛰며 노는 모습을 사진기에 담았다. 기념품 매장에서 애들은 피자, 우리는 햄버거로 점심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며느리의 안내로 토론토 시내의 야경을 보러 나갔다. 토론토시의 황금거리 유니온빌의 눈부신 상가거리는 사람들의 물결로 붐볐는데 비로소 대도시의 중심가답게 고층건물이 즐비하였다. 이 거리의 번화한 중심지 대부분은 중국인들이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의 조상들이 1850년대에 짐승만도 못한 대접을 받으며 막노동자로 이곳 철도공사장에서 일하고 이곳에 그대로 눌러 살았다고 하며 지금은 그 후손들이 토론토의 상권을 쥐고 있는 거부들이라고 하니 저절로 얻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토론토에는 중국인과 인도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우리는 눈요기 쇼핑과 함께 거리의 눈부신 야경만 보고 왔다.
7월 20일 오늘로 캐나다에 온지 열흘이요 일요일이어서 온 가족이 토론토의 명승지 센트럴 아일랜드 공원에 갔다. 가는 도중에 주택가 마을의 거리에서 ‘가라지 쎄일’을 구경하였다. ‘가라지쎄일’이란 각자 자기 집안에서 긴하게 소용되지 않는 물건을 집 앞에 내놓아 싸게 파는 반짝 시장인데, 사는 사람은 싸게 사서 좋고 파는 사람은 불필요한 물건을 처분하여서 서로가 좋은 시장문화다. 헌책, 신발, 의자, 그릇, 옷가지, 골프채 등이 집 앞에 전시되어 있었다. 우철이가 정가 30불짜리 헌책 한 권을 7불에 샀다. 헌책이라지만 약간의 고운 손때가 묻었을 뿐이다.
날씨가 흐리고 빗방울이 떨어지는데도 공원으로 들어가는 여객선 터미널엔 계속하여 사람들이 밀리어 줄을 섰는데 특히 인도인들이 많이 눈에 띄였다. 이 공원은 온타리오호수에 있는 세 섬 워드, 하렌, 센터섬 중 센터섬을 중심 공원으로 조성된 아름다운 공원이다. 온타리오호수는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에 맞물려있는 북미 5대 호수의 하나로 넓이가 18,760㎢에 이르고 최대 수심은 225m로 바다인지 섬인지 분간이 안되는 거대한 호수이다. 호수 안의 공원은 하비프런트의 페리터미널에서 배로 10분 거리인데 드넓은 잔디밭, 곳곳에서 치솟는 분수, 우거진 나무숲, 잘 다듬어진 자전거도로, 1920년대식 오두막 형의 객실을 갖춘 로지 등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
우철이가 공원의 보건소에서 휠체어를 빌려와 관절염으로 잘 걷지 못하는 제 어미를 태워 밀고 다니니 한결 수월하여졌다. 준비하여 간 점심을 갈매기들을 쫓으며 먹고 나니 비가 올듯하여 공원을 방금 빠져나오니 천둥과 함께 비가 쏟아졌다. 토론토시의 중심가라는 영스트리트의 중압감 넘치는 거리를 구경하면서 차이나타운에 이르니 마치 중국의 상해나 북경의 거리인가 착각하게 한다. 중국인 40만이 살고 있으면서 상권을 쥐고 있다고 한다. 차이나타운을 지나 한국사람들이 집단으로 살고 있는 한인거리에 들어오니 그렇게 초라할 수가 없다. 북창동 순두부집이 여기에도 있었다. 한국인들이 가득 들어앉아 시끌벅적 식사중인데 마치 서울의 북창동 순두부식당에 온 것 같았다. 메뉴를 보니 섞어순두부, 해물순두부, 김치순두부, 만두순두부, 된장순두부 등이다. 섞어순두부와 된장순두부로 저녁을 먹었다. 1인분이 6불 95센트다. 밖에 나오니 그 사이 햇볕이 쨍쨍해졌다. 토론토에서 꽤 유명하다는 쇼핑몰에 갔다. 넓은 주차장부터가 압도한다. 엄청난 규모의 마트로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이 안된다. 아내는 며느리의 도움을 받아 선물용 화장품을 샀으며 나는 여름 잠바와 바지 한 벌을 샀다.
7월 21일 오늘부터 2박 3일 동안 캐나다 동부지역의 관광에 나선다. 우철이가 우리 세 사람을 관광회사에 데려다 주고 갔다. 별들이 많이 그려진 우람하게 커다란 관광버스, 한국말은 한마디도 모르는 50대 중반의 호인형 캐나다인 운전사, 인솔과 안내를 맡은 친절하고 달변인 40대의 김경렬씨는 55명의 관광객을 태우고 아침 8시10분 출발하였다. 끝없이 너른 벌판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를 달려 퀘벡주에 들어서 어느 휴게소에서 2박 3일 여행을 같이 할 55명은 간단한 상호 인사를 나누고 김밥 도시락을 먹었다. 모두가 초면인 한국 사람들이다. 오늘부터 3일간 1,800km의 여정이 시작되었는데 방향감각을 잃어버려 동서남북이 전혀 짐작되지 않는다. 그 사이 현우는 캐나다인 운전사와 말은 통하지 않지만 친해졌다.
안내자의 설명에 의하면 퀘벡주는 남북한을 합한 한국의 10배쯤의 넓이고 인구는 350만이며 중심은 올림픽을 개최했던 몬트리올이라 한다. 원래 프랑스령 이었는데 영국과의 영토전쟁에서 패하여 빼앗긴 후 지금도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하며 공용어는 영어와 불어라고 한다. 얼마 후 몬트리올에 도착. 성 요셉 성당과 노트르담성당을 관광하였다. 이곳은 카톨릭의 교세가 강한 지역이고 이 두 성당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성당으로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성요셉성당은 1900년에 짓기 시작하여 1950년에 준공된 거대한 성당으로 이 또한 세계에서 제일 큰 성당이며 본당을 오르내리는데 고속 엘리베이터를 이용한다. 또 이 성당을 지은 문지기 앙드레 수사의 독실한 신앙심이 병자들을 낫게 하는 기적을 행한 성당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노트르담 성당은 1829년에 세워진 성당인데 네오고직 양식 건축의 뛰어난 예술성과 천정의 둥글게 꾸며진 스테인드 그라스의 장엄함과 화려함은 형언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의 극치이며 7천개의 파이프로 만들어진 파이프 오르간의 연주는 세계적인 연주가가 연주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성당 관람료가 3불씩이었다.
시내는 고풍스런 맛이 나고 최신형의 자동차가 왔다 갔다 하는 사이를 중세풍의 마차를 탄 관광객들이 유유히 지나가는 풍경이 인상적이다. 현우는 즐거운 듯 잘 따라다니고 아내는 무릎 관절염의 통증이 심하여 항시 뒤로 처지고 웬만한 곳은 따라가지 않고 차안에 있는 때가 많아서 매우 속상하고 안타까웠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음식점 설악정에서 된장국에 불고기 상추쌈으로 저녁을 먹고 교외 호숫가에 있는 데스쌩거스호텔 10층 68호실에서 3인 1실로 쉬었는데 방 열쇠가 전자식이라 처음에 열 줄을 몰라 당황하였으나 현우가 어떻게 열었었다.
관광 이틀째, 어제 석양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아침에도 계속 내리고 있었다.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8시에 역사의 도시 퀘백시로 출발하였다. 15세기 초에 프랑스인들이 이곳을 점령 세인트 로렌스 강 유역의 절벽 요새에 성을 쌓고 영국, 미국과 북미대륙을 지배하기 위하여 끊임없는 전쟁을 하였다고 한다. 세인트로렌스강물은 온타리오 호에서 발원, 대서양으로 흐르는데 그 유역에 킹스턴, 몬트리올, 퀘벡시 등이 발달하고 있어 세인트로렌스강을 지배하는 민족이 북미대륙을 지배한다고 할 만큼의 요충지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고속도로를 3시간 쯤 달려 퀘벡시 근처의 몽모랜시폭포에 도착. 폭포 옆 매점에서 비옷 3개를 6불 50센트를 주고 사 입고 10여 분을 걸어 폭포를 구경하였는데 폭포의 높이가 83m로 인공을 가하여 꾸며서 만든 폭포다. 겨울에는 이곳 아이스호텔이 더 유명하다고 한다. 호텔 건물은 물론이요 객실과 창문 창대, 침대와 소파, TV의 받침대며 스텐드까지가 모두 얼음으로 조성되는 호텔이라고 하니 얼음이 곧 건축자재다. 그래서 겨울에 관광객이 더 붐빈다고 한다. 억세게 퍼붓던 비가 서서히 그치면서 올드 퀘벡시의 생루이 성문 안으로 들어섰다. 북미대륙의 유일한 성곽도시인 퀘벡시는 프랑스인들이 1608년에 처음 정착한 도시로 인구는 약 80만이다.
중심가인 생루이에서 뷔페식으로 점심을 먹은 후 옛 중세 유럽의 거리로 꾸며진 골목을 지나 저 유명한 페어몬트 샷토 프롱트닉 호텔의 로얄광장에 내렸다. 거리에는 노부부가 마차를 타고 끄덕끄덕 관광하는 모습이 고풍스러움을 더해주고 있었다. 페어몬트 샷토 프롱트닉 호텔은 예술적인 건축물로 유명하다. 원래 영국 총독의 관저였던 것을 호텔로 개조하였다고 하는데 그 건축양식이 아기자기 절묘하고 아름다워 하나의 덩치 큰 공예작품을 보는 것 같았다. 호텔의 광장 밑 절벽 아래로 푸른 물이 유유히 흐르는 세인트 로랜스강을 굽어보는 정경은 한 폭의 그림이다. 300여 년 전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퀘벡을 차지하기 위하여 이 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고 하는데 강물은 오늘도 말없이 흐르기만 한다. 샷토 프롱트닉 호텔의 아래층은 전부 상가로 개조되어 있어 이리저리 눈요기쇼핑을 하고 일행들이 광장 두 곳에서 순식간에 벌어지고 있는 거리의 1인 써커스를 구경하는 동안 나는 높이 5m, 둘레 4.6km라는 옛 성곽을 찾아가 성문과 성벽을 사진기에 담아 왔다. 걸음걸이가 불편한 아내와 현우를 데리고 골목의 중세 유럽풍의 술집 유흥가 거리와 강변거리를 거닐다 오후 3시 반 출발 다시 몬트리올로 와서 어제의 설악정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교외 호숫가에 있는 프라자호텔에 투숙하였다.
7월 23일(수). 관광 마지막 날이다. 안내자 김씨는 오늘은 일정이 빠듯하다며 서둘렀다. 6시 반에 뷔페식으로 아침식사 후 7시에 오타와로 출발하였다. 오타와는 캐나다 연방정부의 행정수도라고 한다. 수상과 총독이 여기에 살며 연방정부의 청사와 국회의사당이 모두 여기에 있다. 오타와 중심지역인 고딕양식의 청록색 지붕 건물들이 모여 있는 팔러인트힐광장에서 10시 정각에 전통적인 영국 궁궐 근위병 교대식이 거행된다고 하여 그 시간에 맞추어 20분 전에 광장에 도착하였다.
1866년에 지었다는 연방국회의사당 앞 너른 광장의 잔디밭에서 전통적인 파이프악기 군악대를 선두로 125명의 영국군 근위병들이 광장으로 들어선다. 곰털 검은 모자를 뒤집어 쓴 것 같은 전통 군복의 근위병들이 일사불란한 대열로 들어서자 광장 주변을 꽉 메운 관광객들이 일제히 박수로 맞았다. 이 위병 교대식은 영국 버킹검궁의 교대식을 그대로 흉내 낸 것으로 여름철만 아르바이트생을 모집하여 급조 편성과 훈련으로 행하는 관광객을 위한 쇼이기 때문에 행진이나 대오가 썩 매끄럽지는 못한 것 같았다. 이어서 오타와강을 끼고 있는 수상 관저와 총독의 관저 정원을 구경하였는데 이 곳 정문에서도 한 시간마다 근위병의 교대식이 있었다. 이 정원에 들어서니 각종 진귀한 수목들이 울울창창한데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등 우리나라 네 분의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 기념식수한 나무들이 잘 자라고 있었으며 그 앞에는 표지판이 꽂혀 있었다. 두 독재자 대통령을 여기에서도 만나는 것같아 떨떠름 하였다.
점심 후에는 오타와 국립미술박물관을 관람하였다. 캐나다는 역사가 짧은 나라임에도 인류의 문화유산을 소중하게 보존하는 박물관들이 즐비한데 놀랐다. 그 만큼 문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나라임을 알 수 있다. 바이타운박물관, 자연사박물관, 전쟁박물관, 현대사진박물관, 국립항공박물관, 과학기술박물관, 캐나다문명박물관 등 굵직한 박물관이 오타와에만 8~9개가 있으며 그중 국립미술관은 프랑스의 루블,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과 함께 세계 3대 미술관의 하나라고 한다. 건물의 양식부터가 독특하여 외관 전체가 마치 수정을 깎아 지은 것처럼 유리로 건축되었는데 1988년에 개관하였다고 한다. 오는 도중 녹용 상가에 들러 녹용 중대 4냥 160불, 육포 한 장에 30불을 주고 샀다.
오늘 관광의 마지막은 킹스턴의 천섬(千島)을 구경하는 것이다. 바다인지 호수인지 분간이 안 되는 킹스턴호수에 천개인지 만개인지 알 수 없는 크고 작은 수많은 섬들이 떠 있었는데 기암으로 이루어진 섬들에는 중세 유럽풍 건축양식의 별장들이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수초가 너울거리는 호수의 물은 맑지는 않았다. 구명조끼를 입고 명찰을 달고 유람선을 타고 약 50분쯤 수상유람으로 모든 관광을 마치고 오후 9시쯤에 토론토에 도착하였는데 아직도 해가 한 발 이상 남았었다.
7월 25일에는 1980년대에 이미 이곳에 이민을 와 자리 잡고 사는 4촌 처형과 처제들이 우리 내외를 저녁식사에 초대하여 주었다. 라종한 형의 누님과 두 여동생으로 누님은 라영란(羅英蘭)이고 영교(英嬌), 영기(英綺)는 동생인데 누님인 영란 처형은 제헌국회의원인 남편 민경식(閔庚植)씨가 몇 년 전 서거한 후 아들이 살고 있는 이곳으로 최근에 이주하여 온 것이다. 우리가 캐나다에 온 후 아무리 각자의 일과 형편이 있다고는 하나 40여 년만의 4촌 형제가 전화만 주고받고 하다가 16일만에야 만나게 되니 서로가 조금은 미안하고 아쉬워 하였다. 아무튼 반가웠고 융숭한 저녁식사는 즐거웠다. 뷔페식 대형 식당의 갖가지 이름도 모르는 고급 해산물 요리의 성찬이다. 우리는 부안의 특산 김 두톳씩을 선물로 주었다. 영교 처제는 그동안 재혼을 한 남편 최씨와 함께 나왔는데 평양 사람으로 공병대 소령출신이라고 했으며 부부가 세탁소를 운영하였는데 최근에 연금을 받는 나이가 되어 지금은 편안한 노후를 보낸다고 한다.
이곳은 금요일이 주말이고 토요일과 일요일은 휴무다. 우철이는 토요일이면 아침 일찍 나가 골프를 치고 10시쯤 가게를 열며 일요일은 교회에 나간다. 신앙적 신심이 독실하여서라기보다는 교회에 나가면 비로소 한국 사람들을 만나고 소식도 듣고 서로 사귀게 되어 외롭지 않기 때문이란다. 우리 같은 돈 없는 사람은 한국에서 맛도 못 본 바다가제(랍스타)를 우철이가 한 박스를 사왔다. 캐나다산 백포도주 한 잔에 곁들여 먹으니 돈 많은 부자가 부럽지 않았다. 토론토는 세계 4대 어장의 하나인 북서대서양 어장이 지척이어서 해산물이 흔하고 싸다고 한다.
일요일에는 식구들 모두 사파리 야외동물원에 갔다. 구릉도 있고, 호수도 있고, 끝없이 넓은 초원이며 수목이 우거진 야산도 있는 드넓은 야외동물원의 곳곳에 사자, 호랑이, 표범, 곰 등의 맹수를 비롯한 각종 동물들이 어슬렁거리거나 일광욕을 하고 있는 옆으로 차를 타고 지나며 구경하는데 원숭이들이 극성으로 창문에 매달리며 먹이를 요구한다. 맹수들의 주변 곳곳에는 경호원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용빈이와 현우가 원숭이에 팔려 제일 좋아하였다.
7월 28일 오늘 미국 이혜경 내외의 초대로 미국에 가는 날이다. 미림이와 함께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준비하고 우철이가 비행장까지 태워다 주고 출국수속을 하여주었다. 토론토에서 미국의 뉴악 비행장까지는 1시간 20분쯤의 거리다. 출입국의 수속과 심사가 매우 까다롭고 철저하여 나처럼 영어가 벙어리인 사람은 지루하고 불편하였는데 이는 9·11테러 이후 더 까다로워져서 그런다고 한다. 9월이면 고등학교 1학년이 되는 미림이가 영어와 불어에 능하여 옆에서 통역을 하여 주니 대견하고 든든하였다. 비행기는 숲속에 묻힌 바둑판 같은 토론토의 시가지 위를 지나 동남으로 바다 같은 온타리오호수 위를 날아 이윽고 솜털구름에 감싸이며 미국의 산야 위를 날아갔다. 높고 낮은 산과 들, 계곡과 구불구불한 강줄기며 곳곳의 웅덩이 같이 보이는 호수들과 거미줄 같은 하이웨이들을 내려다보며 내 평생 처음으로 세계에서 제일 부자나라요 그래서 강한 나라며 또 오만방자한 나라로 비난받기도 하는 미국 땅으로 갔다.
8시 10분 쯤 뉴악공항에 도착. 이혜경, 정대만 목사 내외의 영접을 받았으며 곧 고속도로에 진입 워싱턴 DC로 향하였다. 두 내외가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는 나를 위하여 5일간의 짜임새 있는 스케줄을 짠 것 같다. 혜경이와 나는 달리는 차안에서 47~48년 전 혜경이의 단발머리 부안여중 때의 친구들, 선생님들의 소식과 그때의 이야기를 지칠 줄 모르게 나누며 오후 1시경 한국인들이 사는 어느 마을에 들려 롯데프라자라는 쇼핑쎈타에서 순두부 백반으로 점심을 먹었는데 음식 맛이 별로여서 시장이 반찬으로 먹었다. 점심 후 한국인이 경영하는 어느 꽃집에 들러 차 대접을 받았는데 주인은 김제 출신 양국주(梁國柱)씨로 국제적인 봉사단체에서 일을 하고 꽃집은 그 부인이 한다는데 양씨는 마침 외출중이어서 만나지 못했다.
꽃집에서 나와 고속도로를 얼마쯤 달려 유명한 루레이 동굴에 도착하였다. 비가 오락가락하는데 우리는 지하 굴로 들어가 거대한 석회암 종유석 동굴을 구경하였다. 크고 작은 형형색색의 종유석 고드름과 기둥들이 지하 동굴에서 갖가지 형태로 장관을 이루어 수많은 관광객들을 지하로 빨아들이고 있었으며 팀마다 안내원의 배치로 재미있게 설명을 하고 있었는데 나는 봉사 씨름구경식으로 남이 웃으면 따라 웃고 남이 아! 하고 감탄하면 따라서 감탄할 뿐이지만 혜경이가 옆에 붙어 서서 열심히 통역을 하여주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하였다. 한 가지 알게 된 것은 종유석이 1.5cm 자라는 데는 120년의 세월이 걸린다니 아름드리 종유석들의 나이는 몇 십 억년일까 하니 아찔할 뿐이었다.
루레이 동굴에서 나오니 비는 더 줄기차게 내리고 있는데 얼마를 달려 우리를 저녁에 초대한 양국주씨 집으로 갔다. 양국주씨가 그 부인과 함께 많은 음식을 정성으로 준비하여 맞았는데 콩국수와 찰밥, 백두산 산삼으로 담근 술이며 북한산 홍삼, 상황버섯차, 갖가지 과일 등이었다. 북한에도 자주 드나든다는데 최근에도 여자들의 브라자를 두 트럭 분쯤 북한에 전달하고 왔다고 하였다. 요즈음에는 주로 아프리카의 빈민들을 돕느라 그쪽을 많이 다닌다고 하였다. 서화와 골동품에도 조예가 깊은 듯 하였으며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의 그림도 꽤 소장하고 있다면서 운보가 그린 성화집 <예수의 생애> 도록(圖錄) 한 권을 주기에 기념 삼아 가지고 왔다. 밤 10시가 넘어 워싱턴 근처의 스프링 힐 호텔에 투숙하였는데 호텔 잡기가 쉽지 않은 것을 발이 넓은 양국주씨의 주선으로 좋은 호텔을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스프링 힐 호텔은 주변의 풍경도 아름답고 호텔의 시설도 훌륭하였으며 우리가 투숙한 212호실과 214호실은 귀빈실이라고 한다. 아침식사는 죽 한공기, 토스트, 빵, 과일로 했는데 양국주씨가 콩물에 우유와 바나나로 만든 음료수를 만들어 들고 찾아와 어제 다하지 못한 우리의 문화, 역사, 자기, 서화 등 폭넓은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는데 양씨는 서화, 골동 등을 6,000여점 쯤을 소장하고 있다 하였지만 시간이 없어서 보고 오지는 못했다.
호텔에서 워싱턴까지는 30분 거리였다. 세계에서 가장 부자며 막강한 힘을 가진 나라여서인지 건물들이 웅장하고 거리는 깨끗하였으며 질서가 잘 잡혀 있었다. 항공박물관과 독일의 나치스들이 유태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자료들을 모아놓은 박물관에 들어가 보고 인간이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음에 나도 인간임을 부끄러워했다. 워싱턴의 푸른 광장, 경비원들이 지시하는 한계선까지 접근하여 백악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으며, TV에 미국을 상징하는 사진으로 자주 나오는 국회의사당 앞에서도 사진을 찍고는 식당을 찾지 못하여 햄버거로 점심을 대신하였다. 네라웨이 강을 지나 뉴저지주 버지니아의 혜경이 내외가 사는 마을에 이르러 한국인의 거리 <돌담> 식당에서 해물 된장찌개 백반으로 저녁을 먹으니 마치 우리나라 어느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것 같이 편안하였다. 저녁을 먹은 후 강가로 가서 강 건너 세계 제일의 대도시 뉴욕시의 눈부신 야경(夜景)을 구경하였다. 뉴욕시의 휘황찬란한 불빛이 강물 위를 수놓아 흐르는 밤경치의 아름다움은 필설이 미치지 못하는 환상적인 경관이었다. 9·11테러로 쌍둥이 빌딩이 불탈 때의 광경도 이곳에 나와서 구경하였다고 한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배경으로 하여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10시가 넘어서 비로소 이혜경 내외가 사는 집으로 왔다. 뉴저지주 크리프톤시 버지니아거리 38호인데 주변이 온통 울창한 수목으로 감싸인 2층짜리 아담한 저택이며 내외가 각기 별도의 교회를 가지고 목회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1남 2녀를 두어 큰딸 애스터는 이미 혼인하였고, 둘째딸은 오는 8월 23일에 혼인할 것이라고 하며, 아들 폴(信一)은 뉴욕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다복한 가정이었다. 밤에 토론토의 아내에게 전화를 하였다. 오늘이 현우의 생일인데 잘 챙겨주었는지 궁금하였기 때문이다. 7월 30일 수요일이어서 두 분 목사님은 새벽같이 교회에 나갔으며 미림이와 나는 피로하여 늦잠을 잤다. 오전은 쉬고 오후에 정목사님이 운전하고 네 사람이 뉴욕으로 갔다.
집에서 20분쯤 가니 허디슨 강이며 강을 건너니 바로 뉴욕이다. 강밑 수중으로 거대한 원통을 묻어 수중터널 도로를 만들어 건너는 시설이었다. 수중터널을 벗어나자 곧 뉴욕의 브로드웨이 맨하탄 환락가였다. 마천루 빌딩숲을 지나서 UN본부에 이르렀다. 정목사가 뉴욕의 지리에 지름길 골목길까지도 잘 알아 수월하였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데 입장료가 성인은 10불, 노인은 7.5불이며 이곳도 경비가 강화되어 몸 검색이 철저하였다. 15명이 모아지면 한 팀으로 하여 안내원이 배당되어 친절하게 설명을 하여 주었으며, 나는 혜경이가 옆에서 통역을 하여 주었다. 안전보장이사회의장을 비롯하여 54개국으로 구성된 경제사회이사국회의장, 총회회의장 등을 구경하고 지구촌의 평화와 전쟁 분쟁의 억제, 그리고 공동의 번영을 목표로 힘쓰는 세계 최대의 국제기구 안에 들어와 있음만으로도 감회가 컸다. 기념품상에 들러 모자 하나를 14불을 주고 샀는데, 그 이득금은 세계 각지의 빈민들 구제금으로 쓴다고 한다.
2001년 9월 11일 오사마 빈라덴에 의하여 비행기 자살테러로 9천여 명의 희생자를 낸 자본주의 경제의 상징적인 건물인 쌍둥이 건물이 불타버린 현장을 방문하였다. 철책으로 현장을 보존하고 있었는데 검은 널빤지에 9천여 명의 희생자 이름을 새겨 철책에 걸어 놓았으며 그 앞에는 꽃다발들이 놓여 있었고 묵념을 올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대단한 불행이요 참극이지만 미국의 자업자득이기도 하다는 평이다.
올 때와는 다른 길 허디슨 강의 터널을 지나 뉴욕을 벗어나 뉴저지주의 시(市) 메디칼쎈터 병원으로 왔다. 40~50여 층짜리 병동이 여러 채 규모의 초대형 병원으로 1970년 초 이혜경이 처음 이 병원의 간호사로 와 근무했던 병원이며 한국의 많은 간호사들이 이 병원을 매개체로 미국으로 건너와 뉴저지주에 한인 타운을 이룩한 근원지라고 한다. 허디슨 강 건너로 자유의 횃불을 높이 들고 우뚝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女神像)을 보면서 지난 날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민초들의 인권이 얼마나 짓밟혔으면 이를 거부하는 절규의 탑이 세워졌을까를 생각케 한다. 세계 최대의 도시 뉴욕은 허디슨 강의 하구 5개의 섬에 형성된 도시라고 하는데 뉴욕의 온갖 애환과 인간의 오욕을 씻은 허디슨의 더럽혀진 강물은 대서양을 오염시키고 있다 할 것이다. 크리프톤 시내의 한인거리 식당 ‘소문난 집’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차림표를 보니 한국음식이 없는 것이 없다. 갈비탕을 먹었는데 12불이었으나 맛은 별로다.
오늘이 7월 31일이다. 미국에 온지도 벌써 4일째다. 아침 5시 반에 일어났는데 혜경이 내외는 새벽 예배를 인도하러 벌써 교회에 나갔다. 나는 아침 걷기운동을 위하여 집을 나서 싱싱한 수목 우거진 마을길을 동서남북도 짐작 못하면서 무작정 걸었다. 집 앞 잔디밭에는 스프링클러가 홀로 내뿜는 물줄기가 마치 비를 내리듯 잔디를 적시고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신데 이름모를 새들이 노래하는 평화로운 아침이다. 얼마를 걸으니 공동묘지가 나왔는데 묘지에는 우리처럼 둥근 봉분은 없고 약간 볼록한 봉분 앞에 크고 작은 비석들만이 검소하게 세워져 있다. 나중에 들으니 우리와는 반대로 공동묘지 주변의 집값이 더 비싸다고 한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공원지역이기 때문이란다. 이곳 사람들의 공동묘지에 대한 개념은 공원이라는 개념이다.
처조카 라각수(羅珏洙)와 통화가 되었는데 내가 첫날 도착하여 구경한 루레이 동굴에서 그리 멀지 않은 버지니아주에 산다고 한다. 서로의 거리가 멀기도 하고 또 내가 내일 캐나다로 가야 하기 때문에 안부만 나누었으나 만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오늘은 목사 내외가 모두 교회 행사가 있어서 정목사가 나와 미림이를 뉴욕의 센트럴파크 옆 자연사박물관까지 데려다 주고 오후에 데리러 오기로 하였다. 센트럴파크는 뉴욕시민에게 맑은 공기를 공급하여 주는 공기 샘이요 휴식처다. 그 규모나 시설이 엄청나 주변만 잠시 지났을 뿐 대부분의 시간을 자연사박물관에서 미림이와 지냈다. 이 박물관은 우선 건물의 규모부터가 나같이 작은 나라에서 온 사람을 압도하였으며 방대한 자료, 철저한 관리, 상업적인 운영, 관리 안내자들의 친절한 안내와 성실한 근무 등이 선진국다웠다. 4층에서부터 1층까지 차례로 대강만 보았는데 약 3시간이 소요되었으나 아쉬웠다. 박물관은 공부하는 곳이다. 자기가 꼭 보고자하는 분야를 정하여 그것을 보고 공부하면 되는 것이며 전부를 다 보려는 것은 무리요 또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혜경이가 아침에 정성스레 싸준 햄버거형의 보리빵 도시락을 휴게실에서 먹고 베트남 식당에서 샌드위치식 베트남 음식을 맛보기 위하여 사먹었는데 입에 맞지 않았다.
오후 3시경 박물관 앞에서 정목사와 만나 허디슨 강의 그 터널을 지나 집으로 왔다. 내가 생선을 좋아한다 하여 혜경이가 싱싱한 광어와 통통한 대하(大蝦) 등을 사와 저녁상을 성찬으로 차렸다. 그리고 나와 미림이를 위한 간곡한 복음의 기도를 올려 주었다. 이럴 때는 술이 한 잔 있어야 하는 것인데 이 분들이 목회자들이라서 손님접대에 술이 얼마나 한국적인 운치를 돋우어내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술을 사오라 할 수도 없고 아쉬운대로 즐거운 환담을 술 삼고, 흐뭇한 정을 안주삼아 만찬을 즐겼다. 두 분이 내게 쏟은 지극한 정성과 따뜻한 사랑은 분에 넘쳐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저녁식사 후 두 목사님이 진지하게 나를 예수의 품안으로 인도하는 기도를 하였는데 나는 많은 고심을 하였으며 쉽게 응낙을 못하였다. 오래 전에 천주교에 입교한 후 10여 년 동안 신앙생활이라고 하여 보았으나 이른바 대가 세어서인지 내게는 신앙의 뿌리가 내리지 않는 경험을 하였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는 두 분의 간절한 마음에 감동하여 마침내 “한국에 돌아가면 교회에 나가 마음 안에 주님(복음)을 모셔 보기로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그리고 부안으로 돌아와 독실한 기독교도인 백산고등학교 정재철 선생님의 인도로 부안제일교회 황진형 목사님을 찾아가 입교를 하고 열심이 교회에 나갔는데, 그때 교회의 원로 교인들이 두 패로 갈라져 예배시간 중에도 서로 헐뜯고 싸우며 고소하고 재판하며 양떼가 아니라 이리떼처럼 으르렁거림을 보고는 교회당의 무용론을 주장한 함석헌 선생을 생각하며 크게 실망하고 그만두어 버렸다. 이 교회는 그 후 끝내 하느님의 뜻과 무관하게 인간의 판결에(대법원의 판결) 따라 두 쪽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나는 지금도 미국의 이혜경, 정대만 목사님 내외분의 간곡한 인도와 약속을 지키지 못한 부끄러움과 함께 끝내 내 마음 안에 하느님을 모시지 못한 것이 죄스럽기 그지없으나 신앙생활과는 인연이 아닌가 싶어 그만 접기로 하였다.
8월 1일 저녁 비행기로 토론토로 돌아가는 날이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아침 운동을 하였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숲길을 다람쥐와 더불어 걷다가 뛰다가를 6km쯤 하는 동안 조깅을 하는 두 쌍의 남녀를 만나 “하이!” 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혜경이가 나를 위하여 단호박에 찹쌀을 넣어 맛있는 호박죽을 끓였기에 두 중발이나 먹었다. 내가 10년 이상 아침식사를 호박죽으로 하고 있음을 안 것이다.
오전 중 미림이는 집에서 쉬고 나는 혜경이에게 부탁하여 크리프톤 시내의 한 서점에 갔다. 1층은 휴게실과 문방구 매점이고 2층이 서점이었는데 내가 읽을 수 없는 엄청난 양의 책들이 잘 분류되어 있었으며 손님은 한가한 편이었다. 내가 볼 수 있는 책은 미술책, 스포츠 책, 요리책 그리고 섹스책이 고작인데 이들 책은 그림으로 대충 볼 수 있기 때문이며 특히 섹스에 관한 책들은 포로노 영화를 보는 것 같았으나 그 내용은 동서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오찬의 시간은 길었으며 송별의 성찬이었다. 현미죽에 광어, 대하, 갈비, 상추, 삼겹살, 미국 살구, 아프리카 감귤, 복숭아, 사과, 메론, 김치, 고추장, 깻잎 등등. 혜경이의 요리솜씨가 놀라웠으며 음식마다 그 정성이 깃들어 있어 더욱 맛이 좋았으나 무엇을 어떻게 먹을지 쉽지가 않았다. 오후 3시경까지 5일간에도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떠날 준비를 하였다. 8월 23일 결혼하는 막내딸 메리가 그 신랑될 분과 같이 보스톤을 출발, 오고 있다기에 메리와 전화로 인사를 나누었는데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엄마와 아빠를 닮아서 상냥하고 예의바르며 한국말도 유창하였다. 혼인 축의금으로 200불을 혜경이에게 맡겼다. 이곳의 풍습은 혼인 축의금을 부모가 챙기지 않고 신랑신부 당사자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고 한다.
오후 5시 경 간간이 천둥이 치는 빗길을 출발하여 6시경에 뉴악공항에 도착하였다. 5일 동안 분에 넘치는 환대 속에 내 생애 첫 미국관광을 마치고 공항에서 혜경이 내외와 헤어졌다. 혜경이가 헤어질 때 사모님 드리라며 100불과 비행기 안에서 읽어보라며 편지봉투 하나를 주었는데 기내에서 펴보니 간단한 정담 몇 줄과 한화 50만원이 들어있어 나를 또 한 번 염치없게 하였다.
공항의 탑승자 검사가 매우 까다로워 우리 미림이는 어린 소녀가 무엇이 그리도 의심이 나는 것인지 신발까지 벗어보여야 하였다. 밤 7시 45분발의 비행기는 기상 악화로 10시에야 이륙하여 11시경 토론토에 도착했는데 악천우가 걷힌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토론토의 불빛으로 수놓은 시가지는 금줄을 쳐 놓은 바둑판처럼 찬란하여 가히 환상적이었다. 공항에 내리니 가족들이 모두 나와 반가이 맞았다.
다음 날은 집에서 쉬었는데 미국의 혜경이가 전화를 하였다. 무사히 도착하였는지 안부와 딸과 사위가 와서 즐겁다는 이야기며 딸이 떠나면 내일 정목사와 남아메리카로 10여 일간 복음전도 여행을 떠난다고 한다. 혜경이가 하느님의 은총속에 즐겁게 사는 것을 보고나니 나는 참으로 기뻤다. 그가 부안여중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도 집안이 어려워 고등학교를 못가고 오죽리 가난한 농가에 묻혀 실의에 빠져 지내고 있을 때 그의 재주와 청순한 성품이 너무나 아깝고 안타까워 내가 자전거를 타고 그 아버지 이주일(李柱日)씨를 세 차례 방문, 끈질긴 설득 끝에 간신히 승낙을 받아 부안여고에 입학시킨 것이 어제의 일만 같다. 그는 그때의 그 일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갈림길이어서 지금도 나를 못 잊는다는 것이다. 아내는 그 동안 배탈로 고생을 하여 핼쑥한 몰골이다.
8월 3일 일요일. 아버지 어머니가 모레 귀국한다고 심코 호수에 있는 와사카비치 호수욕장에 갔다. 토론토에서 북으로 약 2시간의 거리에 있는 심코 호수도 온타리오 호수 못지않게 큰 호수로 끝이 보이지 않는 망망한 큰 호수였다. 해수가 아닌 민물의 호수욕장이고 모래도 갯벌 흙이 섞여 있어 썩 좋지 않고 그래서 물도 맑지 않아서 물속에 들어갈 마음이 전혀 나지 않았다. 용빈이와 현우만이 물장구를 치며 신이 났지만 비가 오락가락 하여 와사카비치 주변의 공원에서 준비하여 간 삼계탕으로 점심을 먹었다. 비가 그칠 것 같지 않아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 우철이가 운전하는데 힘들어 하므로 술 전문상가에 들러 폭우가 약해지기를 기다리며 프랑스제 포도주 두 병을 샀는데 한 병은 서울로 가지고 갈 예정이었다.
어제의 폭우가 언제였느냐 싶게 맑게 개인 아침이었다. 스타포드 공원의 잔디밭길을 경쾌하게 걷다가 반바지를 입고 마주 오는 파란 눈의 금발 미녀와 스치는데 그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경쾌한 목소리로 “굿모닝” 하고 인사를 한다. 순간 나는 당황하였으나 엉겁결에 “하이!” 하고는 스쳐 지났지만 어색하고 부끄러웠다. 우리는 모르는 사람과 인사 나눔에 너무도 인색할 뿐만 아니라 상쾌한 아침 생판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당연히 무뚝뚝하게 스쳐 지나치면 그것으로 족하다. 얼마나 멋대가리 없는 인간관계인가. 비록 모르는 사람이라도 마주치면 미소 지으며 명랑한 인사말 한마디 주고 받으며 지나치면 하루의 기분이 좋을 것이며 그러면 하는 일은 또 얼마나 잘 풀리겠는가. 그들은 그것이 생활예절의 한 덕목으로 굳어져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선진이요 문화민족이라 하기에 족하다.
오늘은 캐나다의 민속 마을을 갔다. 1800년대부터 이곳으로 이주하여 살았던 사람들의 주택, 각종 생활용구, 당시의 교회, 학교, 인쇄소, 대장간, 방앗간, 일상의 용구들이 실물 그대로 제자리에 잘 놓여있는 것이 우리나라 민속촌과의 차이였다. 19세기 식의 학교 교실에 들렀는데 당시에 사용한 책걸상에 교편물이며 필기용구 등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그때의 수업을 재현하여 보여주고 있었다. 구내의 아담한 정원의 숲 아래에서 준비하여 온 김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8월 5일 27일 간의 캐나다와 미국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는 날이다. 밤 11시 50분발 대한항공기 편으로 토론토 공항을 이륙하여 한국의 8월 7일 새벽 2시경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짐을 꾸렸다. 외국여행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귀국 때 보따리가 커지나 보다. 친지들에게 나누어 줄 선물꾸러미 때문이다. 앞으로는 어깨에 메는 가방 하나만 메고 다니는 여행을 하여야 겠다고 다짐하였다. 아침 운동을 하였는데 스타포드 공원의 언저리에서 예의 그 파란 눈의 금발 여인과 또 스치게 되어 이번에는 내가 먼저 “굿모닝!” 하고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더니 생긋 웃으며 “하~이”하고 지나간다. 삽상한 공원의 아침길이 더욱 경쾌하였다.
저녁식사를 7시 반에 마치고 불어난 짐 세 개를 싣고 조금 일찍 가족 모두 공항으로 나갔다. 수화물을 송부하고 좌석을 배정받기 위해서였다. 탑승자 검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용빈이와 현우는 그동안 정이 담뿍 들어서 헤어짐이 아쉽고 서운하여 서로 붙들고 울었고 인정이 많은 용빈이는 “현우! 가지마!” 하며 떼를 썼다. 탑승객의 대부분이 한국인들이지만 중국인, 필립핀인, 동남아인들이 꽤 있었으며 한국의 어린이들이 유난히 많았다. 부잣집 아이들이 이른바 해외 어학연수를 하고 돌아가는 것 같았다. 비행기는 8월 6일 12시 20분에야 이륙하여 온타리오 호수와 나이아가라 폭포를 뒤로 밀어내며 8월 6일을 내 생애에서 영원히 어둠 속에서 지워버린다. 내가 한국에 도착하면 8월 7일 새벽 2시 반일 터이니까 8월 6일은 공중에서 소멸되는 꼴이 아닌가? 8월 7일 새벽 2시경 비행기는 독도와 울릉도 사이를 지나고 있었다. 지시마 열도를 지나 사할린과 러시아의 사이를 지나서 온 것이다. 새벽 2시 반쯤 폭우가 쏟아지는 인천의 국제공항에 무사히 내렸다. 긴 여행을 마친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