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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see the law by Christ fulfill’d,
And hear his pardoning voice,
Changes a slave into a child,
And duty into choice.”
그리스도에 의해 율법이 성취된 것을 보는 것과
그분의 사함의 음성을 듣는 것은
노예를 자녀로 바꾸며
의무를 선택으로 바꾼다.
Our Lord Jesus Christ, in addition to explaining the law and pointing out its spiritual character, also unveiled its living essence, for when one asked him “Which is the great commandment in the law?” he said, “Thou shalt love the Lord thy God with all thy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mind.
This is the first and great commandment. And the second is like unto it; Thou shalt love thy neighbor as thyself. On these two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설명하신데 더하여 지적하시면서 또한 그분은 그것의 살아있는 본질을 드러내셨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그분께 묻기를 “ 율법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 하니까,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 너는 주 너의 하나님을 너의 온 마음과 너의 온 영혼으로 그리고 모든 생각으로 사랑하라 하셨고 38 그 것이 첫째되고 큰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것과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이니 40 이 두 계명들에 온 율법과 선지서들이 달려있느니라.”
In other words, he has told us, “All the law is fulfilled in this: thou shalt love.” There is the pith and marrow of it. Does any man say to me, “You see, then, instead of the ten commandments we have received the two commandments, and these are much easier.” I answer that this reading of the law is not in the least easier. Such a remark implies a want of thought and experience. Those two precepts comprehend the ten at their fullest extent, and cannot be regarded as the erasure of a jot or tittle of them. Whatever difficulties surround the ten commands are equally found in the two, which are their sum and substance.
달리 말하면 그분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 모든 율법은 이것에서 성취되었으니, “ 너는 사랑하라”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그것의 골수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말합니다 “ 그러면 당신은 보시지요, 십계명 대신에 우리는 두 계명들을 받았습니다. 이것들은 훨씬 더 쉽습니다” 율법을 이렇게 읽는 것은 조금도 더 쉽지 않습니다. 그런 말은 생각과 경험의 부족을 의미할 뿐입니다. 저 두가지 교훈들은 십계명을 그것들의 충만한 수준으로 포괄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의 일점 일획이라도 제거해버린 것으로 간주될 수 없습니다. 십계명에 둘러싸인 어떤 어려움들도 동등하게 두 계명들에서 발견될 수 있는데 그것들은 저것들의 요약이요 본질입니다.
If you love God with all your heart you must keep the first table; and if you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you must keep the second table. If any suppose that the law of love is an adaptation of the moral law to man’s fallen condition they greatly err. I can only say that the supposed adaptation is no more adapted to us than the original law.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당신의 온 마음으로 사랑한다면 당신은 첫번째 (십계명?)판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당신의 이웃을 당신처럼 사랑한다면 당신은 두번째 판을 지켜야 합니다. 만일 누가 사랑의 율법이 인간의 타락한 상태에 대한 도덕법의 적합화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크게 잘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이 그러한 상상의 적합화란 원래의 율법보다 우리에게 더 적합화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If there could be conceived to be any difference in difficulty it might be easier to keep the ten than the two; for if we go no deeper than tile letter, the two are the more exacting, since they deal with the heart, and soul, and mind. The ten commands mean all that the two express; but if we forget this, and only look at the wording of them, I say, it is harder for a man to love God with all his heart, with all his soul, with all his mind, and with all his strength, and his neighbor as himself than it would be merely to abstain from killing, stealing, and false witness. Christ has not, therefore, abrogated or at all moderated the law to meet our helplessness; he has left it in all its sublime perfection, as it always must be left, and he has pointed out how deep are its foundations, how elevated are its heights, how measureless are its length and breadth. Like the laws of the Medes and Persians, God’s commands cannot be altered; we are saved by another method.
행여나 난이도에 있어서 어떤 차이가 있으리라고 생각되어진다면, 두 계명을 지키는 것보다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 더 쉬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타일 한장의 글자보다 더 깊이 들어가지 않아서도, 그 둘 (두 계명들)은 더 요구하고 계시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마음과 영혼과 생각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은 두 계명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것을 잊고서 그것들의 문자들만 바라본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온 마음과 온 영혼과 온 생각과 온 힘으로 사랑하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단순한 의미의 살인, 절도, 거짓증거를 삼가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취소하시지도 (없애시지도) 않으셨고, 우리의 가련함을 인하여 율법을 완화시키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분은 그것을 그것의 장엄한 완벽성의 상태로 두셨음은, 왼쪽은 항상 왼쪽으로 남아있음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지적하시기를 그것의 (율법의) 기초들이 얼마나 깊은가, 그것의 높이됨이 얼마나 높은지, 그것의 길이와 폭이 얼마나 측량할 수 없는지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메데와 페르시아의 법처럼, 하나님의 계명들도 변개될 수 없었습니다 (단 6:8, 12, 15).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To show that he never meant to abrogate the law, our Lord Jesus has embodied all its commands in his own life. In his own person there was a nature which was perfectly conformed to the law of God; and as was his nature such was his life.
그분께서는 율법을 결코 취소함을 의미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하여, 우리의 주 예수께서는 그것의 모든 계명들을 자신의 생애에 실현하셨습니다. 그분 자신의 인격안에는 하나님의 율법에 완벽하게 일치하는 본성이 있었음은 그분의 생애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분의 본성 또한 그러하셨습니다.
He could say, “Which of you convinceth me of sin?” and again “I have kept my Father’s commandments and abide in his love.” I may not say that he was scrupulously careful to keep the law: I will not put it so, for there was no tendency in him to do otherwise: he was so perfect and pure, so infinitely good, and so complete in his agreement and communion with the Father, that he in all things carried out the Father’s will.
그분은 “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하시고 다시 “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분의 사랑가운데 거하노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들을 지키어 그분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 (요한 15:10) 저는 그분이 율법을 지키느라 꼼꼼히 조심하였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주장하지 않겠는데 이유는 그분안에 다르게 행동하실 경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토록 완벽하시고 순전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무한히 선하시며 아버지와 그분이 동의하시고 교통하심에 있어서 완전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모든 일에 있어서 아버지의 뜻을 수행하셨습니다.
The Father said of him, “This is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 pleased; hear ye him.” Point out, if you possibly can, any way in which Christ has violated the law or left it unfulfilled. There was never an unclean thought or rebellious desire in his soul; he had nothing to regret or to retract: it could not be that he should err. He was thrice tempted in the wilderness, and the enemy had the impertinence even to suggest idolatry, but he instantly overthrew the adversary. The prince of this world came to him, but he found nothing in him.
아버지께서는 그분께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나의 사랑받는 아들이니 그안에서 내가 매우 기뻐하노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지적해주십시오, 만일 당신이 할수만 있다면, 어떤 점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위반하셨거나 그것을 성취하지 못한(않은) 채 남겨두셨습니까? 그분의 영혼안에 부정결한 생각이나 반역의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어느것도 후회할 것이나 취소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분이 실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세번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원수는 우상숭배를 암시하기까지 뻔뻔함을 보였지만, 그분은 즉각적으로 대적을 엎어버리셨습니다. 이 세상의 왕이 그분께 왔습니다만 그는 그분안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My dear Redeemer and my Lord,
I read my duty in thy Word;
But in thy life the law appears
Drawn out in living characters.”
나의 사랑하는 구속자이시며 나의 주님이시여,
내가 당신의 말씀가운데 있는 나의 의무를 읽으오니,
당신의 생명으로 그 율법이 살아 있는 글자들로
뽑아져 나타나나이다.
Now, if that law had been too high and too hard, Christ would not have exhibited it in his life, but as our exemplar he would have set forth that milder form of law which it is supposed by some theologians he came to introduce. Inasmuch as our Leader and Exemplar has exhibited to us in his life a perfect obedience to the sacred commands in their undiminished grandeur, I gather that he means it to be the model of our conversation.
이제 그 율법이 너무 높고 너무 어렵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그분의 삶가운데서 나타내시지 않으셨을 것이며 대신 우리의 모본이신 그분께서는 일부 신학자들이 그분께서 도입 소개하시고자 오셨다고 생각하는 보다 온화한 형태의 율법을 제시하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지도자이시며 모본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삶을 통해서 거룩한 계명들을 그것들이 조금도 경감되지 않은 장엄함으로 그 거룩한 계명들에 완벽한 순종함을 보여주셨으므로 저는 그분께서 그것이 우리 생활의 모본이 되기를 의미하셨다고 결론짓습니다.
Our Lord has not taken off a single point or pinnacle from that up-towering alp of perfection. He said at the first, “Lo, I come: in the volume of the book it is written of me, I delight to do thy will, O my God; yea, thy law is within my heart,” and well has he justified the writing of the volume of the book. “God sent forth his Son, made of a woman, made under the law”; and being for our sakes under the law he obeyed it to the full, so that now “Christ is the end of the law for righteousness to everyone that believeth.”
우리 주님께서는 완벽함의 산정 정상으로 향하는데서부터 한 점이나 한 꼭대기도 떼어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처음에 말씀하시기를 “ 보소서, 그 책의 권에서 그것이 저에 대하여 쓰여졌아오니, 제가 당신의 뜻을 행하기를 기뻐하나이다, 오 내 하나님이여, 과연, 당신의 율법이 내 마음에 있나이다” (히 10:7) 하시면서 그 책의 권의 기록을 매우 정당하게 여기셨습니다. “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을 보내셨으며, 한 여자로부터 나게 하시고, 율법아래 나게 하셨습니다” (갈 4:4) 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율법 아래 계시고, 그것을 끝까지 순종하셔서 마침내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믿는 자에게 의가 되시기 위하여 율법의 (완성된) 끝(목적)이 되셨습니다.
첫댓글 스펄젼도 율법이 아닌 복음을 강조했다고 생각합니다. 율법을 완성시킨 주 예수님의 복음을 널리 전하기 원합니다.
제가 말하는 바나 요한 웨슬레가 말하는 바나 스펄젼이 말하는 바에 있어서 율법에 관하여 다른 차이를 발견하십니까?
저는 요한웨슬레보다도 슬펄젼보다도 주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해답이 있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으면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짓밟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 그것들을(율법의 계명들을) 행하고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은 천국에서 크게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이 말씀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바로 웨슬레와 스펄젼의 율법에 관한 말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저도 웨슬레와 스펄젼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하토브님이 말하는 바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바르게 정립하는 일은 정말 중요합니다. ^^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스펄젼의 글에서 요 15:10 에서 예수님의 율법 준수를 찾아내고, 히 10 장 7절에서 예수님의 마음에 새겨진 율법을 기억한다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스펄젼은 성경을 매우 정독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스펄젼, 무디, 웨슬레 3인이 모두 율법에 대한 존중과 율법의 영원성, 유용성, 등을 강조하였는데, 그들 모두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로서, 제도권 신학교와는 무관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웨슬레는 옥스포드를 나왔고 성공회 부사제가 되었지만 그것은 그가 모라비아 형제단의 전도를 받고 구원얻었을 때 폐기된 것이었습니다. 무디 또한 어느 신학교도 나오지 않았고, 스펄젼 역시 침례교에서 이사야서 45장 22절을 읽고 거듭났습니다. 그후 강에서 침례받고, 주일할교 교사로 시작하여 설교가로 초빙되고 나중에 목회자로 세워졌습니다. 오늘날 신학교 체제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갔지만, 그의 후계자들은 그를 기념하는 학교를 세웠습니다
스펄젼, 무디, 웨슬레 3인은 모두 형제교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과 형제모임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궁금해졌습니다.
스펄젼은 고아원 운동을 죠지 뮐러에게서 배워 실행하였는데 그의 고아원은 2차대전때 폭격으로 소실 될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는 중국 내륙 선교회의 허드슨 테일러와 아프리카의 데이빗 리빙스턴 죠지 뮐러 등의 플리머스 형제단과 교제하였고 무디와 교제하였지만 형제모임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그저 침례교 설교가로 지냈습니다. 아마 그는 다비를 싫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플리머스 형제단과 다른 거듭난 그리스도인들과의 만남과 교제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도 알고 싶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알고 있는 것을 말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웨슬레는 형제모임이 생기기 100년 전 사람입니다.그러나 형제모임의 원류인 모라비아 형제단에 의해 전도받고 피터 뵐러의 설교를 듣고 거듭났습니다. 모라비아 형제단의 뿌리는 잔후스 등의 보헤미아 형제단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그들은 보고밀에서 전도되었습니다. 보고밀의 뿌리는 터키 알메니아 지역의 바울 파였다고 생각되는데 그들에 관한 글은 에반스 글이 여기에 올려져 있습니다. 바울파는 바울이 전도하여 세운 많은 모임들을 말합니다. 보고밀이 서진하여 알비파를 형성하였고, 또 그 이전의 카타리와도 합류하였습니다. 알비파와 보도아 형제단은 거의 연결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독일지역의 왈덴지안들로 연결되는데 독일 스위스에 퍼져 있었습니다. 이 왈덴지안들이 율법을 중시했다는 기록은 나옵니다. 왈덴지안들은 로마 카톨릭에 항거하기도 하였고 그들의 무력에 무력으로 맞서 싸워 100 대 1로 격파한 기록도 있었지만 로마 종교의 회유에 넘어가기도 하였습니다. 이들 왈덴지안들은 라인강 유역 연합 형제단, 재침례파 등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빠진 무리들은 많이 있을 것입니다. 위클리프의 롤라드파, 네스토리우스의 네스토리안, 스툰디스트, 메노 시몬의 메노나이트, 등이 있습니다. 플리머스 형제단은 1827년 그로브스, 빌렛, 다비 등 7명의 형제들이 모여 처음 떡을 뗌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모였는데 나중에 플리머스에서 크게 부흥하게 되어 플리머스 형제단으로 불리웠습니다. 그런데 이 플리머스가 그토록 번영한데에는 기반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라비아 형제단이 그 지역에 상당수의 복음의 씨앗을 뿌렸었기 때문입니다. 모라비아 형제단은 요한 웨슬레에게 뿐만 아니라 플리머스 지역에서 많은 전도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큰 시야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교회는 크게 성령의 역사로 곳곳에서 일어났으며 로마 카톨릭 외에 무수한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섬기고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형제모임과 헤른 후트 모라비아 형제단은 비데니스트 성경학교를 통해서 그 연결을
엿볼 수 있습니다. 위에 말한 후스는 보헤미아 여왕의 고해신부 였으면서 프라하 대학 총장으로 유아세례, 연옥설, 교황제도, 화체설에 반대하여 교황이 주관하는 콘스탄자 파티에 신변 보장을 약속받고 소환되었다가 화형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 가지 않으려 하여 거절하였으나 교황은 여러 말들과 문서로 신변을 철저히 보장하겠다고 약속하였었습니다. 그가 화형된 사건은 당시 동유럽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쳐서 후사이트들이 생겨났습니다. 이 모든 그룹들은 연결됩니다. 루터보다 200여년 앞서서 페트로 드 부루시안은 크게 개혁을 외쳤던 사람인데 폭도들에 의해 불태워졌습니다. 그가 마리아 우상을 쪼개워 불태웠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스펄젼이나 웨슬레가 율법만 강조하고 은혜는 가르치지 않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