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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도피처
True Refuge
타라 브라크
[5]
레인(RAIN): 어려움에 마음 모으기
자극과 반응 사이에 공백이 있고 그 공백에 우리의 힘과 자유가 있다. -빅터 프랑클
행복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당신한테 있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베르너 에르하드
상상해보자, 당신 아이가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지난 한 달 동안 당신이 애써 만든 보고서를 다시 작성하라는 명령이 사장한테서 떨어졌다. 세 시간 넘도록 컴퓨터로 작업을 했는데 파일 전체가 일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당신 남편/아내가 다른 여자/남자를 사랑한다고 방금 당신한테 자백했다. 이럴 때 당신은 어떻게 하는가?
위기 때마다 우리는 잠시 멈추어 마음을 모으고 싶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으면 당장 반발하거나 도망치거나 감정에 휘말려드는 낡은 버릇이 너무 강해서 그게 잘 되지 않는다.
그렇다, 지금 여기에 현존한다는 것 자체가 도저히 불가능한 미션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오히려 가짜 도피처들이 스트레스를 덜어주고 한숨 돌리게 하고 기분을 전환시켜주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현존에서 오는 선명함과 침착함에 연결되지 않으면 결국 더 큰 오해와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본인과 남들로부터 더욱 멀리 떨어질 따름이다.
12년쯤 전,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마음 모으는 새로운 방법을 몇몇 불교 교사들이 개발해내었다. ‘레인(RAIN, 네 ‘단계’의 머리글자를 모은 것)’이라고 불리는 이 방법은 어떤 자리 어떤 상황에서도 활용할 수 있거니와 혼란스럽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 그것들을 헤치고 나아가는 분명하고 체계적인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 방법은 소나기 뒤의 맑게 갠 하늘처럼 일상생활에서 우리를 열어놓게 해주고 우리 마음을 깨끗하고 고요하게 해준다.
지금 나는 ‘레인(RAIN)’을 여러 학생, 환자, 의사, 교수들과 함께 나누고 있다. ‘레인’의 네 단계는 이렇다.
R ― 일어나는 일을 인식한다(Recognizing).
A ― 삶을 있는 그대로 있게 한다(Allow).
I ― 내면의 경험을 친절하게 탐색한다(Investigate).
N ― 동일화하지 않는다(Non-identification).
‘레인’은 우리가 순간마다 경험하는 것들에 저항하는 묵은 버릇을 해체시킨다. 언짢은 일이 있을 때 술을 마시든 담배를 피우든 터무니없는 망상에 휘말려들든 당신이 저항하는 방식이 무엇이냐는 문제 되지 않는다. 당신은 당신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을 통제해보려고 애쓰지만 실제로는 당신 자신과 현실로부터 자신을 더욱 소외시킬 따름이다. ‘레인’은 첫 단계부터 우리를 이 무의식적 행동패턴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일어나는 일을 인식하기]
‘인식’은 당신 내면의 진실을 보는 것이다. 지금 당장 당신한테 일어나는 모든 생각, 감정, 느낌, 감각들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일단 집중이 가능해지면 당신의 어떤 경험들이 다른 것들보다 좀 더 쉽게 인식된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예컨대, 당신은 당신이 무슨 걱정을 하고 있다는 건 금방 알아차리지만 그 걱정거리에 생각이 사로잡히면 쑤시거나 죄이거나 당겨지는 몸의 감각들을 눈여겨보지 못한다. 거꾸로 당신 마음이 신경과민으로 날카로워져 있으면 그것들이 실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대한 몸의 반응인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당신은 다만 “지금 내 안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물음으로써 당신의 ‘인식’을 일깨울 수 있다. 당신 내면에 집중하면서 본연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켜라. 모든 선입견을 비우고 당신 몸과 마음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
[삶을 있는 그대로 있게 하기]
삶을 있는 그대로 있게 하는 것은 당신의 생각, 감정, 느낌, 감각들을 있는 그대로 놔두는 것이다. 무엇이 싫다는 느낌이 들거나 불쾌한 감정이 일어나면 그것들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거기 그렇게 있는 것(what is)과 더불어 현존하기로 마음먹을 때 당신은 그것을 다른 각도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냥 둠’은 치료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이를 깨달아 알면 그것들을 의도적으로 그냥 놔둘 수 있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속으로 격려의 말을 자기한테 속삭여줌으로써 삶을 있는 그대로 있게 한다. 예를 들어 당신은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나 큰 슬픔에 잠길 때 당신한테 “그래, 좋아”(yes)라고 속삭여줄 수 있다. 당신은 “이것 또한”(this too) 혹은 “동감이다”(I consent)라는 말을 자신에게 해줄 수도 있다. 처음에는 불쾌한 감정을 오히려 돋우는 것 아닌가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수치심에 대하여 “동감이다.”라고 말하며 그것이 마술처럼 사라지기를 바랄 수도 있다. 그래도 우리는 거듭거듭 격려의 말을 속삭여주어야 한다. 당신 안에 있는 ‘아픔’을 향하여 “그래, 좋아.”라고 또는 “동감이다.”라고 말하면 그 말 한 마디로 벌써 당신 아픔이 말랑말랑해진다. 당신의 온몸이 저항군으로 무장하지 않아도 된다. 당신을 격려하는 말(“그래 좋아,” “동감이다.” “이것 또한” 등)을 부드럽게 그리고 끈기 있게 속삭여주어라. 시간이 흐르면 당신의 ‘자기-방어기제’가 느슨해지고 몸의 긴장이 풀어지면서 다양한 경험의 파도에 당신을 열어놓고 내어맡길 수 있을 것이다.
[친절하게 탐색하기]
보통은 ‘레인’의 첫 두 단계만 밟아도 어느 정도 편하게 현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충분치 못할 경우가 있다. 예컨대 당신이 이혼수속 중이거나 직장을 잃게 되었거나 불치병에 걸렸다면 격한 감정들에 휘말리기 쉬울 것이다. 전남편/아내 될 사람한테서 전화가 걸려오고 세금 고지서가 날아오고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그런 감정들이 거듭 일어나기 때문에 당신은 수시로 몸이 굳어질 것이다. 그럴 경우에는 ‘레인’(RAIN)의 ‘친절한 탐색’(‘I’)으로 들어가서 좀 더 마음 모아 깨어있을 필요가 있다.
‘탐색’은 진실을 알고자 하는 본연의 욕망을 일깨워 그것으로 경험의 내용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우선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물어보아 ‘인식’이 되면 적극적이고 친절한 탐색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내 몸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또는 “이 느낌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또는 “나는 무엇을 믿는가?” 그럴 때 당신은 몸이 죄어들거나 떨리는 감각들 밑에 숨어있는 두려움이나 허탈감이 느껴질 수 있다. 그것들이 ‘알아차림’의 표면에 떠오르지 않으면 잠재된 상태로 당신의 생각과 행동을 장악하여 스스로 무능하고 부족한 인간이라는 자아상(像)을 굳혀줄 것이다.
내가 처음 학생들에게 ‘레인’(RAIN)을 소개할 때 많은 학생들이 셋째 단계인 ‘I’(탐색하기)에서 힘들어했다. “두려움이 안에 있을 때 ‘탐색’은 그것이 어떻게 있느냐보다 그것이 왜 있느냐로 나를 데려갑니다.” 또 이렇게 말하는 학생도 있었다. “속에서 감정이 부글거리는데 몸을 탐색할 겨를이 없어요.” 많은 사람들에게 ‘탐색’은 심판의 방아쇠를 당긴다. “질투심을 탐색해야 한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질투심 자체가 싫고 …그걸 품고 있는 내가 미워요.”
이 모든 말이 불편하고 불안한 느낌에 저항하려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향을 반영한다. 머릿속에는 생각들이 우글거리고 우리는 자기 몸을 떠나 자기한테서 일어나는 일을 심판한다. 학생들의 문제는 ‘레인’의 중심 열쇠를 잃었다는 데 있다. 치유와 해방을 위한 탐색을 제대로 하려면 자기가 경험하는 것들에 마음을 열고 다가가야 한다. 겉모양이 어떻든 간에 그것을 부드러이 환영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내가 “친절하게”(with kindness) 탐색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가슴 에너지’(heart energy) 없이는 대상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탐색할 수 없다. 대상과 진정으로 만날 만큼 충분히 안전하지도 않고 열려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당신 아이가 학교에서 집으로 울면서 돌아온다. 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지금 아이가 어떤 상태인지 알려면 친절하고 따뜻하게 아이를 받아들이고 자세히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당신의 내면 또한 그렇게 받아들이고 다가갈 때 탐색이 가능해지고 마침내 치유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동일화하지 않기: 본연의 알아차림 안에서 쉬기]
‘레인’(RAIN)의 ‘R’과 ‘A’와 ‘I’를 통해서 대상에 자기를 열고 접근할 수 있게 되면 저절로 ‘N’(동일화하지 않음)에 이른다. 대상에 동일화하지 않는 데서 오는 자유와 해방, 내가 ‘본연의 알아차림’(natural awareness) 또는 ‘본연의 현존’(natural presence)이라고 부르는 ‘깨달음’(realization)에 도달한다는 말이다. ‘동일화하지 않음’이란 당신의 ‘참 나’에 대한 인식이 당신의 감정, 생각 또는 스스로 만든 이야기 따위로 오염되거나 뒤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기를 ‘작은 자아’에 동일화하기가 느슨해지면 ‘본연의 알아차림’에서 나오는 열림과 사랑의 직관(直觀)으로 살아갈 수 있다. ‘레인’의 처음 세 단계는 우리의 의도적인 행위를 요구한다. 반면에 ‘레인’의 마지막 단계인 ‘N’(동일화하지 않음)은 그 결과를, ‘본연의 알아차림’이 이루어낸 결과를, 나타낸다. ‘레인’의 마지막 단계를 위해서 당신이 할 일은 없다. 깨달음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그저 ‘본연의 알아차림’ 안에서 편안하게 쉴 따름이다.
비난하고 원망하는 나에게 ‘레인’ 적용하기
수년 전 크리스마스 명절에 친정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있는데 나 혼자 약이 올라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한 식구가 점심식사 시간에 아버지의 말허리를 잘랐고 아버지는 화가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연히 다른 사람들 기분도 좋지 않았다. 게다가 설거지를 함께 하기로 약속한 아들 나라얀이 친구 만난다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버지는 당신 손자가 철없는 녀석이라고, 동생들은 음식이 입에 맞지 않다고, 언니는 외출 계획을 자기와 의논하지 않았다고 저마다 투덜거렸다. 개들마저 식탁을 맴돌며 먹을 것 달라고 킁킁거렸다. 내 눈에는 모두들(짐승들조차!) 자기가 희생자요 순교자라는 그래서 부족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꼴이었다. 무엇보다도 참기 힘든 것은 나만의 공간을 가질 수 없는 현실이었다. 맙소사, 가족들 만난 지 겨우 이틀인데 분노와 짜증으로 범벅이 되어 있다니!
명절 모임을 몇 달 앞두고, 평소 잘 판단하는 내 버릇이 발동하여 사람들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지 모르겠다는 예감이 자꾸 들었다. 그래서 영성 수련에 더욱 정진할 것을 자신과 약속하고, 무엇을 비난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에 의도적으로 ‘레인’을 적용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누구를 비난하거나 원망하는 내용으로 ‘이야기’를 만들 때 몸과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눈여겨보았다. 내 안의 판사가 심판을 내릴 때마다 그 아래에 깔려있는 나의 ‘신념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들어보았다. 이렇게 누구를 심판하고 원망하는 나를 지켜보는 동안 내가 얼마나 닫힌 가슴으로 살고 있는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내 서원(誓願)이 더욱 굳어졌다. 거짓 도피처의 아픔이 보이는 그만큼 그 너머에 있는 열린 가슴과 자유가 감지되었다.
나의 굳은 서원에도 불구하고 그날 오후는 내면을 점검해볼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 속을 뒤집어놓는 가족들에 대한 비난과 원망으로 잔뜩 심술이 난 나를 좋은 책에 파묻어볼 생각이 났지만 내 안에서 비난과 원망이 일어날 때마다 ‘레인’을 적용키로 한 자신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좀 더 평화로이 현존하는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 파카에 부츠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가랑비에 젖어 걸으면서 식구들을 하나씩 떠올렸고 그들을 원망하는 내 마음을 보았다. 내 심판은 정당했다. “아버지는 너무 화를 잘 내고 성질이 괴팍해요. 누가 아버지 말허리 좀 잘랐다고 해서 그게 그토록 엄청난 일이에요? 그리고 너 나라얀, 넌 네가 스스로 한 약속을 어겼어. 그런 무책임이 어디 있니?……” 나는 내 반응을 ‘인식’하는 것으로 ‘레인’을 시작했다. 가족들의 행동을 내가 얼마나 싫어했는지, 그들한테서 내가 어떻게 잘못을 찾아냈는지,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어서 ‘레인’의 두 번째 단계로 들어가 남들을 비난하고 원망하는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그냥 그대로 있게 하였다. 심판하는 내 마음을 심판하는 대신 자신에게 일러주었다. “그래, 일이 그렇게 됐어.” 그러자 가슴에서 긴장된 쓰라림이 느껴졌다. 저절로 ‘레인’의 세 번째 단계인 ‘탐색’으로 들어가졌다. 몸에 의식을 집중하자 가슴을 죄던 쓰라림이 가슴을 압박하는 날카로운 매듭(knot)으로 바뀌는 것을 알게 되었다. 머릿속에 이런저런 불만들이 얽혀 있는데 그것들 모두가 뒤틀리고 짜증스러운 하나의 매듭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매듭한테 물어보았다. “네 눈에 내 인생이 뭣처럼 보이니?” 과거에는 이런 질문이 내 경험 안으로 들어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질문에 대한 답이 깨달아졌다. 나 자신을 안 좋게 본 경험들이 가족들을 향한 내 반응 속에 그대로 들어있었다. 가정의 평화를 지켜야 하는 주부로서의 나, 아들을 길러야 하는 엄마로서의 나, 부모를 모셔야 하는 자식으로서의 나, 언니와 동생들에게 힘이 되어줘야 하는 자매로서의 나, 이런 내가 지니고 있는 온갖 단점들에 대한 불만과 짜증에 그들의 행동이 방아쇠를 당긴 것이었다. ‘탐색’이 원망의 매듭을 조금 느슨하게 풀어주자 나는 무엇이 탈을 쓰고 그 밑에 숨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나 자신의 잘못과 실수에 대한 익숙하고 주눅 들고 병들어 아픈 비난과 원망 바로 그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잘못에 생각이 꽂혀 있을 때는 자기 속에 있는 ‘자기-혐오’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동안의 ‘레인’ 실습이 내게 가르쳐주었다. 그날 나는 다시 한 번 누구를 향한 원망과 비난 밑에 숨어있는, ‘작은 자아’의 혼수(昏睡)에 직결된 익숙하고 고통스러운 주문(呪文), ‘나한테 뭐가 잘못되었어.’를 보았다.
‘레인’을 실천함에 있어 우리 내면의 진실에 얼마나 깊이 닿을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집중의 질(質)이다. 그래서 나는 발걸음을 더욱 느리게 옮기며 내 안에 있는 ‘괜찮지 않은 자아’(not-okay self)가 저를 충분히 표현하도록 부드럽고 친절하게 마음 모아 지켜보았다. 그것이 내 가슴을 압박하여 작고 단단하고 무겁게 만드는 철망처럼 느껴졌다. 마음의 눈으로 볼 때 나는 모든 ‘남들’과 단절되어 있는 완전 혼자였다. 비로소 이 특별한 명절의 경험이 평소 일상생활 속에서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과장된 표출임을 알게 되었다. 왜 일을 좀 더 부지런히 착실하게 못 하느냐고 조직의 멤버들에게 불평을 털어놓곤 했지만 정작 나를 아프게 한 것은 실제로 그러지 못하고 있는 나에 대한 판단과 비난이었다. 아들이 숙제를 잊었다고 책망하지만 그 밑에는 아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어미에 대한 질책이 숨어있었다. 너무 바빠서 언니를 돌봐줄 수 없다고 불평하지만 그 밑에는 언니와 조카한테 토막 시간조차 내주지 못한 데 대한 죄책감이 숨어있었다. 자기를 비난하는 데 사로잡혀 있든지 아니면 남들을 비난하는 데 사로잡혀 있든지 분명한 것은 내가 모든 사람과 단절된 채 닫힌 가슴으로 혼자서 아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안에서 솟아오르는 슬픔이 느껴졌다. 쓰라린 감각이 슬픔으로 바뀌었고 나는 좀 더 친절하고 세밀하게 마음 모아 그것을 지켜보았다. 슬픈 아픔이 파도처럼 밀려와서 내 마음 속의 비난하고 책망하는 ‘생각들’과 함께 내가 스스로 만든 터무니없는 ‘이야기들’을 휩쓸어갔다. 나를 사로잡았던 단단한 격렬함이 차츰차츰 물렁해졌다. 슬픔의 파도들이 잦아들자 나는 ‘고요한 부드러움’(quiet tenderness) 속에서 쉬고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내 안의 날씨를 알고 있다는 듯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비가 쏟아질 것 같아 발길을 집으로 돌렸다. 다시 한 번 식구들을 하나씩 떠올려보았다. 그러자 세찬 빗줄기가 지저분한 내 ‘생각들’을 씻어주는 게 느껴졌다. 더 이상 그들이 “저기 밖에 있는 문제들”로 경험되지 않았다. 오히려 모두가 내 안에 자리를 하나씩 차지하고 있는 독특한 존재들이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몸이 흠뻑 젖어있었다.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것은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는 개들뿐이었다. 식구들은 각자 컴퓨터를 들여다보거나 낮잠을 자거나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모두들 별일 없는 표정이었다. 나도 그들에 대하여 내가 만든 ‘이야기’에 더 이상 묶여있지 않은 나를 보았다.
그날 저녁식사를 마치고 어머니가 피아노 앞에 앉아 크리스마스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 가사를 거의 까먹었지만 함께 노래했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노래는 계속 이어졌다.
나는 깊은 평화와 안심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가족들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들을 향한 내 마음속의 비난과 책망들은 열린 사랑과 편안함에 자리를 내어주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참된 도피처가 나에게 안겨준 하늘의 축복이었다.
시인 도로시 헌트가 노래했듯이,
판단 없이 받아들이는 지금 이 순간,
이게 평화다, 이게 전부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환영받는 마음속 공간의 지금 이 순간.
‘레인’ 연습 안내
당신은 좋지 않은 감정이 일어날 때 ‘레인’의 단계들을 밟을 수 있다. 또는 내가 그랬듯이 일상생활 속에서 그것을 불러올 수도 있다. 어쨌거나 열쇠는 지금 여기에 있는 것들과 깨어서 함께 현존하겠다는 수련의 목표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잊지 않는 것이다.
여기 학생들과 함께 ‘레인’ 과정을 밟으면서 그들에게 가르쳐준 몇 가지 요령을 적어본다.
[잠시 멈추기]
‘레인’을 시작하기 전에 잠시 멈추는 시간(pause)을 가진다. 바깥의 자극들로부터 당신 몸을 타임-아웃시키는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당신 안에 돌아다니는 ‘생각들’로부터 당신을 타임-아웃시키는 일이다. 잠시 멈추는 시간에 어지러운 생각들을 밀쳐두고 마음을 집중할 수 있는 내면의 공간을 의도적으로 만든다. 틈만 나면 비집고 들어오는 당신의 버릇을 알아차리고 마음을 지금 여기에 모으면 ‘레인’ 연습을 좀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연성 기르기]
당신한테는 특이한 역사와 내력을 가진 당신만의 특이한 몸과 마음이 있다. 아무도 당신의 상황과 마음상태를 조절할 수 있는 ‘틀’(formula)을 당신한테 줄 수 없다. 신선하게 열린 마음으로 내면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때에만 무엇이 당신을 치유하고 해방시킬 것인지를 분별하여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레인’을 연습할 때 순서들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예를 들어, 불안한 느낌이 들려고 할 때 곧장 그것이 변덕스러운 날씨와 같은 것임을 알아차리고 그 느낌을 당신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당신은 ‘레인’의 네 번째 단계인 ‘동일화하지 않기’(‘N’)에 도달한 것이다. 앞의 순서들을 새삼스럽게 밟아야 할 이유가 없다.
당신이 평소에 하던 다른 수련법들을 섞어서 ‘레인’ 연습을 할 수도 있다.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요가를 할 수도 있고 산책을 할 수도 있다. ‘레인’ 과정을 밟는 도중에 감정이 격해지면 잠시 멈추고 호흡명상으로 돌아가기를 권한다.
[‘사소한 재료들’로 연습하기]
8세기 불교 스승 산티데바는 “작은 일에 마음 모아 현존하는 것으로 큰일에 대처하는 힘을 기르라”고 했다. 당신이 무슨 일에 곧장 대응하려고 할 때마다 일단 멈추고 ‘레인’을 연습하면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는 힘이 더욱 강화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같은 짓을 되풀이하여 짜증이 날 때, 마켓 계산대 앞의 긴 줄이 답답하고 무료하게 느껴질 때, 쇼핑 목록에 적은 물건을 사지 않아서 황당할 때, 그럴 때 당신은 그 ‘사소한 재료’(small stuff)를 ‘레인’ 연습에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하루에도 몇 번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당신의 습관적인 반응방식을 ‘레인’의 재료로 삼으면 차츰 당신의 삶이 더 자유롭고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도움 받기]
‘레인’ 연습이 당신의 감정을 격화시킬 수 있다. 그럴 때는 ‘레인’을 멈추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최근에 개발된 몇 가지 심리치료술이 당신을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내 경우에는 열린 마음으로 몸의 감각들에 의식을 집중하는 방법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특히 지난날의 정신적 상처 때문에 감정이 격해질 때는 심리치료사나 경험이 많은 명상지도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몸의 감각을 현존으로 들어가는 문턱으로 삼기]
‘레인’ 연습은 당신이 당신 생각들에서 벗어나 당신 몸의 반응을 자세히 살펴볼 때 효능이 살아난다. 일상생활 속에서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기 ‘몸’의 감각에 둔해지는 사람들이 많다. 과거에 받은 상처가 깊거나 스트레스가 심할 경우에도 자기 몸의 감각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다. 두려움이나 수치심이 파도처럼 덮칠 때 그것들이 당신 몸에서 어떻게 자기를 표현하고 있는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러고 있는 당신 안에서 고요한 평화와 자유가 싹틀 수 있다. 그날 오후 산책길에서도 나의 ‘판단’과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만든 ‘이야기들’과 그 결과로 내 안에 생겨난 ‘슬픔’을 열린 가슴으로 친절하게 들여다보는 동안 극적인 ‘전환의 순간’이 나를 찾아왔다.
[‘의심’에 마음 모으기]
‘의심’(doubt)은 ‘레인’의 중심 장애물이다. 넓게 보면 참된 도피처로 가는 모든 길의 장애물이다. 붓다는 의심을 (집착, 탐욕과 함께) 해탈의 보편적인 장애물로 보았다. “나는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내 체질은 영성수련에 맞지 않는 것 같다.” “나한테서 자유와 치유는 이루어질 수 없을 거다.” 이런 생각에 갇혀있는 한, 그 함정에서 나올 수 없다.
두말할 것 없이 어떤 의심은 건강한 것일 수 있다. 예컨대, “이 직장이 과연 내 가치관에 부합되는 걸까?” “저 선생이 다른 선생에 대하여 험담을 늘어놓는데 과연 신뢰해도 될 만한 사람인가?” 이런 의심은 ‘탐색’과 마찬가지로 진실을 알고자 하는 욕망의 산물이다. 반대로 건강치 못한 의심은 두려움과 혐오에서 오는데 본인과 다른 사람의 바탕에 있는 잠재력과 가치를 불신하게 한다.
건강치 못한 의심이 들 때 그것을 ‘레인’의 소재로 삼아보자. 그것이 당신 마음속에 있음을 인식하고 스스로 “이것은 의심이다.”라고 말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의심이 일어날 때 그것을 알아차리고, 그러나 심판하지는 말고, ‘의심’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면 당신의 안목이 넓어지면서 혼수(昏睡)의 끈이 느슨해질 것이다. 의심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있더라도 그것을 친절하고 자세하게 바라보면서 그것과 더불어 깊이 현존할 수 있다. 의심에 지배당하거나 마비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딛고 선명한 현존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다.
[인내]
깨어남으로 가는 길에서 ‘인내’(忍耐, patience)가 마침내 당신을 기쁘게 해준다. 오랜 세월 명상한 사람이 “같은 주제로 십 년째 씨름하고 있다.”고 불평하는 걸 봤다. 자기가 못난 존재라 사회로부터 거절당하는 것이라는 굳어진 생각의 틀에서 헤어나지 못한데다가 그 건강치 못한 생각의 패턴이 끝도 없이 되풀이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자포자기했던 것이다. ‘레인’이 혼수의 끈을 느슨하게 해주기는 하지만 그것을 한 번에 끝장내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여러 번 ‘레인’을 거듭하면서 고통의 패턴들을 주의 깊고 친절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한테 뭐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나의 첫 번째 책 ‘철저한 수용’(Radical Acceptance)의 주제였고 지금도 내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여러 차례 ‘같이 더불어 있음’(현존)으로 그것에 대처하다보니 “나한테 뭐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의 수명이 매우 짧고 그것이 주는 고통에서도 얼마든지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막 나타나려고 할 때 곧장 알아차리고 “음, 또 나타났어?” 한 마디 하면서 그냥 놔버린다. ‘내’가 놔버리는 게 아니라 낡은 생각이 발각됨과 동시에 해체되는 것이다. 그리고 남는 것은 나를 이 모양으로 존재하고 살아있게 하는 ‘중심 공간’(heart space)에 대한 생생한 깨달음과 생각 너머에 살아있는 ‘부드러운 알아차림’에 대한 신뢰다.
낡은 감정 패턴에 ‘같이 더불어 있음’으로 대처할 때마다 당신은 진실에 대하여 더 깊이 알게 된다. 스스로 만든 ‘이야기 속의 자아’에 자기를 덜 동일화하게 되고 일어나는 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알아차림’ 안에서 더 많이 쉬게 된다. 더 오래도록 자비에 머물게 되고 당신의 진정한 고향집을 더 자주 기억하며 신뢰하게 된다. 낡은 삶의 패턴을 같은 자리에서 끝없이 반복하는 대신 자유를 향하여 나선형(螺旋形)으로 나아간다.
[진지함]
‘레인’ 수련에 임하는 진지한 태도가 당신의 가슴과 머리를 자유로 향하게 한다. 당신한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거듭거듭 확인하라. 그게 당신의 참 자아를 아는 것, 참사랑을 하는 것, 평화를 일구는 것, 지금 여기에 깨어있는 것 등일 수 있겠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당신의 친절하고 부드러운 가슴으로 명상에 기운을 북돋아주어라. 당신의 진지한 염원이 마침내 당신을 집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대가 숨 쉬면서 “그래”라고 속삭이는,
그 순간 염원하던 모든 것이 그대 앞에 있느니. ―다나 폴드
[명상실습: 어려움에 ‘레인’으로 대처하기]
조용히 앉아 눈 감고 몇 번 심호흡한다. 오래 전이나 최근에 겪은 ‘힘들었던 일’을 머리에 떠올린다. 가족과 다투었거나 직장에서 큰 실수를 저질렀거나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거나 지금 생각하면 후회되는 일, 당신이 분노, 두려움, 증오, 절망 또는 부끄러움을 느꼈던 일을 회상하면서 그 ‘경험’ 속으로 들어가라. 당시의 상황이나 장면을 그려보라. 오가던 말들을 기억하고 수치스럽던 순간들을 떠올려보라. ‘이야기’의 실체와 만나는 것이 ‘레인’의 출발점이다.
R ― 일어나는 일을 인식한다(Recognizing).
스스로 물어보라. 지금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어떤 감각이 어디에서 가장 뚜렷하게 느껴지는가? 감정은 어떤가? 머리는 어떤 생각들로 소용돌이치고 있는가? 당시의 경험이 지금 내 머리와 가슴과 몸에서 어떻게 살아있는지 느껴보라.
A ― 삶을 있는 그대로 있게 한다(Allow).
당신 마음에 메시지를 보내라. “그냥 둬.”(Let it be). 일단 모든 것을 멈추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속삭여주어라. “좋아.” “동의한다.” “있는 건… 있는 거야.” “그냥 둬.”
속에서 “이건 아니야!”라고 외치는 당신한테, 온몸과 마음으로 저항하는 당신한테, “난 너 싫어!”라고 말하는 당신한테 “그래.”(Yes)라고 말해주어라.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판단하지 말고 외면하지 말고 억누르지 말고 묻어버리지 말고 그냥 그대로 놔두어라.
I ― 내면의 경험을 친절하게 탐색한다(Investigate).
지금 당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을 (전에 경험한 것이 아니라) 좀 더 자세히 탐색해보라. 당신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에 열린 마음으로 호기심으로 다가가서 스스로 이렇게 물어볼 수 있겠다. “무엇이 내 눈길을 가장 많이 끌려고 하는가?” “무엇이 가장 나한테 받아들여지고 싶어 하는가?”
당신 몸에서 열, 긴장, 압박, 아픔, 저림 등이 느껴지는가? 그런 느낌과 함께 어떤 감정들이 일어나는가? 두려움? 분노? 증오? 슬픔? 부끄러움?
탐색을 계속하면서 이렇게 물어보라. “나는 무엇이 어떻다고 믿고 있는가?” 이 질문에 너무 많은 생각이 떠오르면 일단 멈추어라. 하지만 대개의 경우 묻자마자 떠오르는 생각이 있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실패했다고, 당신이 무시당했다고, 그렇게 믿고 있는가? 누가 당신을 배반했다고, 더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고, 이제 당신은 깨어진 독과 같다고, 두 번 다시 행복해질 수 없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있는가? 그 ‘믿음’이 당신 몸에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가? 무엇이 감각되는가? 팽팽한 긴장감? 뜨거운 열기? 차가운 냉기? 답답함? 어이없는 허탈감? 뒤틀림? 쓰라림?
이 모든 경험들에 당신 메시지를 보내라. “좋아.” “동의한다.” “그냥 둬.” 당신한테 일어나는 일들을 그냥 그대로 두면서 당신 몸을 자세히 살펴보라. 몸과 마음이 좀 느긋해지는 것 같은가? 더욱 넓어진 공간이 느껴지는가? 아니면 더 커진 긴장과 판단과 두려움이 몰려오는가? 신체의 어느 부위(部位)에서 그것이 가장 크게 느껴지는가?
가장 힘들어하는 부위에 대고 물어보라. “네가 나한테서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무엇을 나에게 요구하는 거냐?” 그것이 자기를 알아달라고 당신한테 요구하는 건가? 당신한테 자기가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건가? 용서를? 사랑을? 그것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았을 때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한 마디 지혜로운 말을 들려줄 수도 있고 아니면 부드럽게 껴안아줄 수도 있을 것이다. 가장 격렬하게 반응하는 당신 가슴이나 배에 당신 손을 가볍게 얹어줄 수도 있다. 이렇게 말이나 손길 아니면 따뜻한 기운으로 당신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에 친구가 되어주어라.
N ― 동일화하지 않는다(Non-identification).
당신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조건 없이 친절하게 그것들과 더불어 현존하는 동안, 그 모든 것의 배경에서 그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있는 ‘존재’(Being)를 느껴보라. 쉴 새 없이 파도가 물결치는 바다처럼 당신 자신을 부드럽게 깨어있는 열린 공간으로,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온갖 감각과 감정과 생각들을 가없는 품으로 안고 있는 열린 공간으로 느껴보라. 어느 특별한 두려움이나 분노나 상처의 파도와도 동일화되지 않는, 그럴 수 없는 당신의 ‘참 나’가 느껴지는가? 당신은 온갖 잔잔하고 거친 파도들을 경험하면서 살고 있지만 그것들이 끝없이 깊고 넓은 당신의 ‘참 나’에 상처를 입히거나 그것을 다른 어떤 것으로 바꿔놓을 수도 없음이 느껴지는가? 그 광활한 공간에 원하는 만큼 머물러 쉬면서 당신 몸과 마음에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그냥 두어라.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알아차리는 친절하고 따뜻하게 열린 공간, ‘본연의 알아차림’(natural awareness)이 바로 당신의 ‘참 나’인 것이다.
[명상실습: 축소판 ‘레인’ 과정]
일과 중에 언짢은 일이 생기면 1분 정도 짬을 내어 축소판 ‘레인’을 시도해보라.
1. 언짢은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인식한다.
2. 세 번 심호흡하는 동안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있게 한다.
3. 몸의 감각과 감정을 친절하게 탐색한다.
4. 잠시 그대로 있다가 중단했던 일을 계속한다.
무슨 일로 마음이 불편할 때, 이를테면 누구한테 가벼운 무시를 당했거나 설거지를 하지 않아 지저분한 싱크대를 보았거나 소화불량으로 속이 불편할 때 축소판 ‘레인’을 한다.
마음이 언짢다는 사실이 인식되면 하던 일을 멈추고 세 번 심호흡한다. 그 심호흡이 당신에게 곧장 행동으로 들어가지 않고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틈’을 만들어줄 것이다. 몸에서 무엇이 느껴지는지, 특히 목과 가슴과 배에 집중한다. 몸의 감각들(긴장, 결림, 압박, 저림 등)과 감정들(분노, 두려움, 죄책감 등)에 주목하고 그것들의 친구가 되어준다. 그러면서 호흡에 마음을 모은다.
몸의 반응이 잘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수 있다. 괜찮다. 중요한 것은 일을 멈추고 자기 몸에 주목하는 행위, 당신 자신을 친절하게 대하는 바로 그것이다.
잠시 쉬었다가 중단했던 일을 다시 하는 것으로 축소판 ‘레인’을 마친다. 그리고 그 사이에 뭐가 좀 달라졌는지 살펴본다. 자기 몸이 하는 말을 친절하게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이 본인한테 얼마나 큰 도움을 주는지 곧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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