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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리남중12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화구
지금은 추억이 된 전주시 인후동에서의 시절인연 어제는 시골 고향마을 친구 딸아이 예식이 있어 전주에 다녀왔다. 우리 친구들은 전주에서 이런 행사가 있을 때면 항상 많이 모인다. 그리고 친구들이 많이 모이면 우리는 고향의 정을 느끼기 위해 항상 우리 고향인 임실군 인근으로 드라이브를 간다. 그런데 어제는 일상이 바쁘고 먹고 살기 힘들어서 그런지 많이 모이질 못해 식사 후 차 한 잔 마신 후 헤어졌다. 그런데 어제 나는 저녁 7시에 익산에서 옛날 익산 17경비대에 함께 방위병으로 근무했던 친구들 모임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오후에 시간적인 여유가 많아 전주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옛날 생각이 나서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전라고가 있었던 인후동으로 나를 좀 데려다 달라고 부탁해서 인후동 일대에 위치한 학교들을 들려서 사진 몇 장을 담았다. 인후동은 옛날에 용진면 지역에 속했으며 기린봉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인후(麟後)동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여기서 ‘인(麟)’은 기린봉(麒麟峰)의 ‘린(麟)’을 말한다. 기린봉은 전주시내에서 제일 높은 산(고도:306m)이다. 산의 형세가 상서로운 동물인 기린이 여의주, 즉 달을 토해내는 듯한 풍광을 가졌다 하여 기린토월(麒麟吐月)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기린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목이 기다란 ‘기린(Giraffe)’이 아니고 오색찬란한 빛깔의 털을 가지고 이마에는 기다란 뿔이 하나 있는 상상 속의 신성한 동물을 말한다. 어제 나는 동중학교 앞에서 내려서 먼저 예전 전라고(현 전주전라초등학교)를 방문하고 다음에는 동중학교, 전주농고(현 생명과학고), 전주과학관, 전주여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전 전일여중(현 전일중학교) 순서로 답사를 하였다. 어제 나의 동선(動線)을 중심으로 담은 사진들을 올려본다. 【아래 그림】나는 전주로 가는 열차를 타기 위하여 아침 일찍 용산역으로 달려갔다. 나는 강북에 살아서 그런지 용산역보다는 더 가까운 서울역에서 타고 싶은데 전라도로 향하는 호남선 열차는 용산역세서 타야한다. 【아래 그림】달리는 열차 창밖으로 한적한 농촌 풍경이 펼쳐지며 물을 가득 채운 논은 이제 막 모내기를 마친 것 같다, 그런데 옆에 많은 논에 누렇게 익은 이삭은 보리가 아닌가 싶다. 배고팠던 보릿고개 시절이 5∼6월 이었으니 시기적으로 요즘이 보리 이삭이 패고 익어 가는 시기가 맞을 것 같다. 【아래 그림】드디어 3시간 30분을 달려 전주역에 도착하였다. 익산만 같아도 광주로 가는 호남선 열차가 많아 KTX 타기가 수월한데 전주는 열차가 많지 않아 불편하다. 어제도 예매를 미리 못했더니 KTX 열차표가 없어 무궁화호를 타고 내려왔다. 그동안 주로 KTX를 타다가 어제는 무궁화를 탔는데 열차 자리도 넓고 편하며 주로 이용하는 승객들이 친구나 모임에서 단체로 여행하시는 분들이 많아 객차 안이 시끌벅적해서 사람 사는 세상 같아 보였다. 【아래 그림】언제나 내 마음 속에 따뜻한 기억으로 남는 친구들. 우리에겐 잘나고 못나고, 잘살고 못사는 것 같은 세속의 잣대는 필요치 않다. 【아래 그림】세상사 아무리 고달파도 만나면 즐거운 친구들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파란 마음, 하얀 마음으로 함께 했던 순수한 고향의 정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래 그림】예전 전라고가 있던 자리는 전라고가 송천동으로 이전하면서 전주전라초등학교가 들어섰다. 저 교문 언덕길은 우리가 3년 동안 등하교하던 통학로였다. 【아래 그림】우측으로 강당건물이 새로 들어서고 건물이 Remodeling됐지만 학교 운동장과 교사(校舍)는 헐지 않아 그대로 인 것 같다. 다만 전라고(全羅高)인들은 떠나고 전라초(全羅初 )인들이 이곳에서 새로운 역사의 금자탑을 쌓아가고 있다. 【아래 그림】왼편으로 등하교 길은 포장이 되었고, 40년 세월이 흘러 교정의 나무들이 자라 가로수길이 되었다. 【아래 그림】우측에 병설유치원이 들어섰다. 아마 저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유치원을 졸업하면 바로 전라초등학교에 다닐 것 같다. 【아래 그림】본관 건물은 예전 그대로인데 초등학교 분위에 맞게 최신 시설로 Remodeling하였다. 【아래 그림】본관 건물 뒤에 있는 교사(校舍)는 우리 때는 3층 건물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마 Remodeling하면서 증축도 한 것 같다. 【아래 그림】2학년, 3학년 때 교실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1학년 때 교실은 기억이 난다. 본관과 연결된 통로 1층 우측에서 첫 번째 교실이 1학년 3반 교실이었다. 【아래 그림】당시 전라고에 들어온 친구들은 대부분 전기시험에서 전주고에 도전하였다가 떨어져서 후기로 전라고에 온 친구들이다. 1975년 광주지역에 고교평균화가 실시된 이후 광주일고나 광주고에 들어갈 우수할 인재들이 대거 전주고로 몰리면서 특히 1976년, 1977년 그리고 1978년 고등학교입시에서는 전주고 커트라인이 급격해 상승하는 바람에 예년 같으면 전주고에 들어갔을 만한 우수한 인재들이 전기시험에 떨어져 전라고에 온 친구들이 많았다. 【아래 그림】이 당시 나는 이리에서 전주까지 통학하느라 힘들고 고달팠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익산에 있는 호남제일의 명문사학 남성고나 갈 걸 괜히 장학금 몇 푼 받는다고 전기에 군산제일고에 갔다가 결국 군산제일고를 포기하고 후기인 전라고에 와서 전주까지 통학하려니 힘들고 고달팠다. 전라고가 비록 후기지만 1학년 때 특수반에 들어갔으니 남성고에 합격이야 하지 않았겠냐 싶다. 당시 나는 통학열차에서 마주치는 전주고생들의 모자에서 빛나는 “노송의 솔방울을 담은 모표”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아래 그림】이 사진은 우리와 같은 기수인 남성고 29회 친구들이 졸업30주년행사 때 찍은 사진인데 이 사진 한 장만 보더러도 남성고의 Force가 느껴진다. 남성고는 역사로 보면 우리 전라고보다 20년 정도 앞선다. 그러기 때문에 그렇게 긴 역사를 가진 학교라 할 수는 없으나, 남성고의 경우 개교를 하자마자 짧은 기간에 기라성 같은 훌륭한 선배 동문들을 많이 배출하여 전통에 빛나는 명문고가 되었다. 【아래 그림】桑田碧海(상전벽해)라 했던가! 당시에는 학교 뒤로 복숭아밭 과수원이었는데 이제는 개발이 되어 아파트단지로 변했다. 당시 복숭아밭이 많아 전라고 응원가도 복사꽃이 나온다.
전라고 응원가/구름재 박병순 작사 ♪♪모악산 정기어린 비사벌 머리~ 힘차게 자라나는 삼천 꽃사내 ~ ♪♬ ♪♪날래고 씩씩함이 우리의 으뜸~ 싸워라!(반복) 싸워라!(반복) 우리 선수들 ~ ♪♬ ♪♪복사꽃 피고 피는 전라야 고교 ~ 월계관은 나의 것(반복) 우리의 자랑! ~ ♪♬ 【아래 그림】우리가 재학시절에 갓 심었던 나무들이 40년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는 아름드리나무가 되었다. 【아래 그림】우리 때는 교정에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동상이 없었다. 벼랑 끝에 등을 구부린 채 웅크리고 앉아 깊은 생각에 잠긴 사람, 손등으로 턱을 바쳐 들고 그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는 걸까? 생각한다는 것은 생명이요 생각하지 않는 건 죽음이라! 서양의 철학자 데카르트의 말처럼 우리는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아래 그림】우리가 당시 다녔던 교정이라 그런지 다시 봐도 정겹다. 【아래 그림】길 건너에 바로 전주동중이 있다. 동중학교는 1951년 개교하여 2만 5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지역의 명문학교로서 국가와 지역을 선도하는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왔다. 【아래 그림】전라고 1학년 당시 우리 3반에 동중학교 출신들이 많았다. 75년도에는 동중에서 전주고를 50여명을 보냈는데 76년도에는 광주에서 수험생들이 몰려와 전주고 커트라인 급격히 올라가는 바람에 전년도에 비해 반밖에 못 들어갔다. 그래서 당시 동중 출신 우수한 인재들이 전라고로 많이 왔다. 【아래 그림】전주동중을 들려 예전 전주농고를 향하는 길에서 바라본 인후동 길 저 길로 쭉 내려가면 전주고가 자리한 노송동이 아닐까 싶다. 【아래 그림】과거에 저 건물 자리에는 교복을 맞춰주던 양복점과 모자나 명찰을 달아주던 모자점들이 있었던 것 같다. 【아래 그림】이곳은 옛날 전주농고가 있던 곳으로 학교이름이 전주생명과학고로 바뀌었다. 【아래 그림】당시 전주농고는 역사와 전통이 오래된 학교로서 교정도 엄청 크고 푸른 숲으로 둘러싸인 교정을 가지고 있었다. 저 통학로의 길이가 당시 이 학교의 규모가 얼마나 컸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아래 그림】생명과학고답게 커다란 유리온실도 있다. 【아래 그림】학교 본관 같다. 1910년에 개교하여 100년이 넘는 오랜 역사에 대한 자부심은 있지만 오래된 학교라 그런지 교사(校舍) 건물이 낡아 보인다. 【아래 그림】교정에 세워진 개교 100주년 기념비다. 앞으로 미래 천년의 꿈을 펼쳐 나가길!!! 【아래 그림】교정에서 나의 모습을 담기 위해 거울 앞에 서서 찍었는데 사진 찍을 때는 못 봤는데 사진을 열어보니 거울에 얼룩이 많이 있다. 아마 내 마음이 맑지 못해서 그런가 보다. 내 마음부터 부지런히 털고 닦아야겠다. 【아래 그림】널따란 운동장 뒤로 야산이 있었는데 개발이 되어 이제는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아래 그림】농심의 뜨락에 세워진 100년은 됨직한 커다란 느티나무도 예술이다. 【아래 그림】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농심의 뜨락 전주생명과학고는 개교 이래 100년이 넘게 국가 발전의 초석이 된 농업분야 전문 인력을 꾸준히 양성해 온 오랜 전통을 가진 학교다. 【아래 그림】이곳은 예전에 과학관이 자리하고 있던 곳인데 현재는 전라북도학생과학관이 전라북도과학교육원으로 명칭만 변경된 것 같다. 【아래 그림】전북과학교육원은 전북과학교육을 선도하고, 21세기 글로벌 시대를 이끌어갈 미래지향적이고 창의적인 인재를 육성하는 곳이다. 【아래 그림】우측 건물은 전북교육연구정보원으로 건물이 신축건물인 것을 보니 예전에는 없었던 것 같다. 【아래 그림】이곳은 전주여고 앞으로 저 서점이랑은 예전에도 있었던 것 같다. 【아래 그림】호남지역 여성인재 육성의 요람 명문 전주여고 【아래 그림】학교 교정이 깔끔하고 아담하여 여학교답다. 내가 耳順을 바라보는 나이에 전주여고를 방문할 줄은 생각도 못해봤다. 비록 내발로 내가 걸어왔지만 호남 제일의 명문여고를 방문할 수 있어 개인적으로 참 영광이다. 【아래 그림】우리 고등학교 다닐 때 공부 잘하고 작하고 예쁜 전주여고생들은 당시 모든 남학생들의 로망의 대상이 아니었나 싶다. 【아래 그림】전주여고 본관 건물인 것 같다. 【아래 그림】좌측 건물 ‘영란숙’은 아마 기숙사 같다. 영란꽃은 은방울꽃으로 전주여고 교화다. 【아래 그림】좌측 건물은 강당으로 예전 건물이 그대로 있는 것 같다. 당시 전라고는 인후동으로 이전하여 교사(校舍) 건물만 있고 강당이 없었다. 그래서 학교에 큰 행사가 있으면 전주여고강당을 이용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번은 KBS 라디오 프로그램인 “우리들의 세상”을 전주여고강당에서 녹화했던 것 같다. 당시 이계진 아나운서가 사회를 보고 가수로는 ‘얼굴“을 부른 윤연선 씨가 출연했다. 그리고 또 한 번은 1977년 새마을지도자대회가 전주종합체육관에서 열렸을 때 전라고생들과 전주여고생들이 새마을합창단으로 선발되어 “대통령찬가”와 “새마을노래” 등을 부른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전라고에는 강당이 없어 전주여고 강당에 가서 합창 연습했다. 아마 지금은 강당 없는 학교가 없을 것이다. 【아래 그림】전주여고 운동장엔 초록의 잔디가 깔려있다 【아래 그림】숨 쉬는 백년의 전통! 백년을 담을 영란인! 내가 알기로는 전주여고 출신 중에서 국회위원이 세 분이 계시고, 현재 대법관도 한 분 계신다. 국회의원으로는 김현미(고양시 일산서구) 의원, 전정희(익산시을) 의원, 박주현(국민의당 비례대표) 의원과 박보영 대법관 등이다. 그런데 이분들의 공통점은 모두 전주 출신이 아니다. 김현미 의원은 정읍 출신이고, 전정희 의원도 익산 출신이며, 박주현 의원도 군산 출신이고, 박보영 대법관도 순천 출신이다. 이분들은 모두 타 지역에서 중학교까지 마치고 명문 전주여고에 진학하기 위하여 전주로 오신 분이며 모두 전주 출신이 아니다. 이런 현상은 명문 전주고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아래 그림】개교 90주년, 비상하라 영란인이여! 전주여고는 1926년 개교하여 현재까지 사회 각 분야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이고 있는 우수한 여성 인재가 많으며, 졸업동문이 3만이 넘는다. 【아래 그림】전주여고 옆으로 완주교육지원청이 있다. 옛날로 하면 완주군교육청인 것 같다. 씨앗은 흙을 만나야 싹이 트고, 고기는 물을 만나야 숨을 쉬고, 학생들은 학교가 있어야 성장하듯이 배움의 기쁨을 누리는 행복한 교육을 구현하기 위해 교육지원청이 있는 것이다. 【아래 그림】다음은 마지막 방문 대상인 1970년 개교한 전일여중이다. 【아래 그림】그런데 예전의 전일여중이 현재는 전일중학교로 개명되었다. 아마 남녀공학이 되면서 교명이 바뀌지 않았나 싶다. 나와 이리초등학교 동창으로 영어선생님을 하고 있는 친구가 전일여중을 나왔다. 【아래 그림】나는 인후동 탐방을 마치고 예전 익산 17경비대 방위병 전우모임이 있어 익산으로 왔다. 남자들에게는 평생 한 번 다니는 고등학교나 대학은 명문고나 명문대학을 나와야 하며 평생 한 번 가는 군대도 해병대나 특전사 아니면 장교로 가거나 최소한 현역으로는 가야 사회에 나와서 평생 동안 complex 없이 살 수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나는 위 세 가지 중 하나도 제대로 못 갖춘 것 같다. 우리가 군대에 입대할 1981년도에는 당시 군사정권에 저항하며 많은 젊은 대학생들의 데모를 하였다, 그러다 보니 대학생들을 우선 현역입영자원으로 징집시키고, 나같이 가방끈이 부실하고 다리마저 짧아 신체검사에서 3급 보충역을 받은 사람들은 방위병에 소집되었다. 우리나라에는 현역을 제대한 후에도 옛 전우들이 모여 해병전우회, 특전사전우회, ROTC동기회 등 많은 전우회를 조직하여 같은 전우끼리 친목을 다지거나 봉사활동 등을 하며 우리사회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 많은 전우회 중에 방위병 전우회는 하나도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방위병 시절에 함께 복무했던 익산 17경비대대 49기 방위병 전우들은 부대를 떠난 후에도 계속해서 모임을 유지하고 있다. 나도 최근에 이 모임에 나가고 있는데 대한민국에 있는 유일한 방위병전우회가 아닌가 싶다. 【아래 그림】저녁에 소주 한잔하면서 1차를 마치고 KTX 출발시간이 남아 익산역 인근에서 친구들과 호프 한잔 하였다. 【마치면서】 전주에 내려갔다가 시간 여유가 있어 옛 시절인연이 있었던 전주시 인후동 일대를 탐방하였다. 내가 다녔던 학교가 지금도 그곳에 있었으면 더욱 좋았을 텐데 그렇질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사실 나이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직도 명문학교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마도 고등학교 졸업 후 제때 대학을 다녔어야 했는데 진학을 포기하고 취업의 길로 들어서다 보니 아직도 학벌이라는 덫에 걸려 허덕이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은행에 들어와 37년이라는 기나긴 세월동안 근무하면서 은행으로부터 퇴출대상에 한 번도 안 들고 무사히 직장생활을 완주한 것만으로도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제때 공부하지 못한 Complex가 나에게는 좋은 선생님이 되어 내가 직장생활하면서 오히려 더 많은 공부를 하며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개인적으로 진학을 포기하고 은행에 온 것이 하늘이 나에게 준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이런 내용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것도 내가 Complex를 다 극복했기 때문이다. 진짜로 가슴속에 Complex로 담고 있는 사람은 아예 이런 얘기를 전혀 말하지 않고 혼자 속으로 가슴앓이를 할지도 모른다.
이화구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