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전경. 천년 동안 깊은 산 속을 지키던 절은 그 오랜 세월과 시간이 부질없다 말하는 듯하다.<사진제공·문화재청>
우리의 마음속을 어지럽히는 온갖 삼라만상의 번뇌들이 멈추고, 비로소 우주의 참모습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 우리는 그것을 ‘해인’이라고 부른다. 해인사는 번뇌 속에 가려진 우주의 참 진리, 맑고 청아한 아름다움의 결정체인 인간의 깨달음을 의미하는 유서 깊은 천년고찰이다. 우리에게는 팔만대장경으로 잘 알려져 있는 해인사를 창건한 사람은 신라 의상대사의 법손인 순응, 이정 두 분의 스님이다. 이 두 스님이 신라 제 40대 왕이신 애장왕의 도움으로 해인사를 창건하였으니 그 역사가 천년을 넘는다.
고색창연한 사찰인 만큼 유명한 문화재와 전해오는 이야기들이 많은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몽골군의 침략을 부처님의 힘으로 물리치기 위해 제작한 팔만대장경이 바로 해인사에 있는 장경판전에 보관되어있다. 해인사 고려대장경판전은 현재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록되어있으며, 국보 52호로 지정되어 그 보전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국보 52호 장경판전과 국보 32호 팔만대장경이 살아 숨 쉬는 경남 합천 해인사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해인사 창건설화
신라 40대 애장왕이 식수했다는 해인사 고사목
중국 양무제 때의 일이다. 유명한 스님이었던 지공화상께서 돌아가실 때 제자들에게 [동국답산기]라는 책을 건내 주며, 스님이 돌아가신 후 신라의 스님 두 분이 오셔서 이 책을 찾을 것이니 그 때 드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과연 얼마 후 신라에서 순응과 이정이라는 두 스님이 찾아왔고, 제자들은 지공화상의 유언을 말씀드린 후에 [동국답산기]를 전했다. 순응과 이정스님은 너무나 감격하여 지공화상스님의 탑묘를 찾아가 일주일 밤낮으로 기도를 드렸는데, 순응과 이정스님 앞으로 지공화상스님이 나타나 신라 가야산 서쪽에 불법이 크게 일어날 곳이 있으니 그 곳에 사찰을 세우라는 명을 내리고 탑묘 속으로 다시 사라졌다. 순응과 이정스님은 감사의 뜻으로 다시 한 번 불공을 드리고 신라로 돌아왔다.
두 스님은 가야산 자락 아래 맑은 물이 흐르고 산세가 빼어난 곳에 자리를 깔고 선정에 들었는데 이마에서 밝은 빛이 새어나와 하늘로 뻗어 올라갔다고 한다. 당시 신라의 왕이었던 애장왕은 왕후가 몹시 아파 백방으로 약을 구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가야산 자락 아래에서 두 스님을 만나게 되고 두 스님의 처방에 따랐더니 왕후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에 애장왕은 크게 기뻐하며 친히 두 스님이 계신 곳에 큰 사찰을 창건하니, 그곳이 바로 지금의 합천 해인사라고 전해지고 있다.
해인사를 지나면 해인사 창건 당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신라 40대 애장왕이 식수하였다고 전해지는 나무가 지금까지 남아있다. 1945년을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한 고사목이지만, 고사목의 존재를 통해 우리는 해인사가 얼마나 오래된 역사를 가진 사찰인지 짐작해볼 수 있다. 해인사는 창건설화처럼 산세가 수려하고 아름다운 가야산 자락 아래 위치해있어 맑고 푸르른 숲의 기운이 그대로 전해지는 곳이다.
국보 52호 해인사 고려대장경판전
해인사는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이며, 8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법보사찰이라고도 부른다.<사진제공·문화재청>
국보 52호로 지정된 해인사 고려대장경판전은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진 건물로 해인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장경판전은 건축물의 과학성. 우수성이 인정되어 1995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장경판전은 해인사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문화재의 손실을 막기 위해 사진촬영과 음식물반입 등은 철저히 금지되고 있으니 꼭 원칙을 지켜 관람할 수 있도록 하자.
장경판전은 두 개의 건물이 나란히 서 있으며 숯가루, 소금, 횟가루, 모래 등을 건축에 이용하여 습도를 조절했다고 한다. 또한 독창적인 모양의 창문은 아래로 흘러들어간 바람이 윗 창문을 통해 나오면서 통풍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설계되었는데, 이는 목판이 썩거나 틀어지지 않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직접 가서 보면 아래 위 크기를 달리한 창문과 문살 하나하나가 신비스럽게 느껴지실 것이다.
지금은 기와지붕이 얹혀 있지만 흔히들 용마루라 불리는 기와 윗부분이 과거에는 온통 청기와로 덮여 있었다고 한다. 청기와는 일반 기와와는 달리 상당한 고온에서 구워지기 때문에 백금과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낙뢰가 떨어져도 청기와가 피뢰침 역할을 했기 때문에 목판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었다. 15세기 건축물이라고는 믿어지기 힘들 정도로 정교하고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장경판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보 52호 해인사 고려대장경판전에는 국보 32호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이 보관되어 있다.
장경판전과 팔만대장경을 구한 사람-김영환 대령
해인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장경판전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8만여장의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다.<사진제공·문화재청>
팔만대장경이 항상 안전하게 보관된 것만은 아니었다. 아무리 훌륭한 건축물이라 할지라도 전쟁의 위기를 비껴나가지 못한다면, 파괴되고 마는 것이 역사이기 때문이다. 해인사가 위치한 경남 합천 가야산 자락은 한국전쟁 당시에 빨치산들이 활동하던 무대였다. 한국전쟁 당시 해인사 인근에서 미군과 격전이 치러지고 있었는데, 당시 김영환 대령은 해인사 일대를 폭격할 것을 명받고 출격하였다. 그러나 김 대령은 해인사에 소중한 문화유산인 장경판전과 팔만대장경이 있음을 알고 있었고 명을 어기고 공격을 멈추었다. 그는 오로지 기관총만을 사용하여 가야산에 숨어있는 무장공비들을 소탕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전쟁당시 명령 불복종인 엄청난 죄에 해당하는 것이었지만, 김영환 대령은 문화재에 대한 식견과 보존의식을 갖춘 군인이었기에 명령을 어겨가며 해인사를 지킬 수 있었다. 김영환 대령이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눈앞에서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해인사 학사대
해인사 학사대. 거꾸로 서있는 듯한 전나무의 모습이 신비롭다.
장경판전을 보고 돌아 나오면 신비하게 생긴 전나무 한그루가 눈에 띈다. 바르고 꼿꼿하게 자라고 있는 일반 나무들과는 달리 거꾸로 박혀있는 듯한, 신비한 느낌을 자아내는 이 소나무에는 신라시대의 대학자 최치원과 관련한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최치원은 한때 가야산 자락에 은거하며 시 짓기에 몰두한 적이 있었는데, 가끔 지금 학사대가 있던 자리에서 가야금을 연주할 때면 수많은 학들이 몰려와 최치원의 가야금소리를 경청하곤 하였다. 이 때 최치원이 전나무 지팡이를 거꾸로 꽂았는데, 그 지팡이가 지금껏 살아 학사대 자리의 전나무로 남아있다는 전설이 전해져온다. 거꾸로 박혀있는 듯한 신비한 전나무의 모습을 놓치지 말고 감상해보자.
해인사 소리길
아름다운 해인사 소리길. 7km에 달하는 길임에도 한걸음이 아쉽다.
걷기여행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꼭 한번쯤은 가보고 싶어 하는 길이 있다. 바로 해인사 소리길이다. 걷기 편안하고 숲이 우거져 있으며 걷는 내내 청아한 계곡 길과 함께하여 눈과 마음이 모두 시원해지는 길이다. 이 해인사 소리 길은 천년고찰 해인사가 코스로 포함되어있어 눈길을 끈다.
논두렁 밭두렁을 지나기도 하고 수려한 계곡을 지나기도 하고 중간에 폭포와 마주칠 수도 있으며 크고 작은 예쁜 다리들과 깨끗하게 단장된 데크길은, 걷기를 시작한 사람들에게 놓칠 수 없는 재미가 되어 줄 것이다. 또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있는 가야산의 절경은 해인사 소리길을 걷는 또 하나의 기쁨이다.
해인사관광호텔
해인사관광호텔에서의 저녁식사. 정갈한 한 끼 밥상이 든든하다.
해인사 국립공원 안에 있으며 맑은 숲의 기운을 듬뿍 느낄 수 있는 관광호텔이다. 오랜 연륜이 느껴지는 시설이긴 하지만,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어서 가족들이 머물기에 좋은 숙소를 찾기 힘든 곳에서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단출한 규모이지만 남녀 사우나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석식과 조식을 묶어 패키지로 판매하고 있는 식사가 훌륭해서 호텔 안에서 온천과 식사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곳이다.
여행정보
해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