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전라도(全羅道) 본래 백제의 땅이다. 의자왕(義慈王) 19년 경신에【당나라 고종(高宗) 현경(顯慶) 5년.】 신라 태종왕(太宗王)이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과 더불어 백제를 멸하고 드디어 그 땅을 합쳤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전주(全州)·무주(武州) 두 도독부(都督府)로 나누었다. 진성왕(眞聖王) 5년 임자【당나라 소종(昭宗) 경복(景福) 원년.】 에 서면 도통(西面都統) 견훤(甄萱)이 백제의 옛 땅을 모두 차지하여 후백제왕(後百濟王)이라 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19년 병신【후진(後晉) 고조(高祖) 원복(元福) 원년.】 에 친히 후백제를 쳐서 이기고, 성종(成宗) 14년 을미【송나라 태종(太宗) 지도(至道) 원년.】 에 전주(全州)·영주(瀛州)·순주(淳州)·마주(馬州) 등 고을을 강남도(江南道)로 하고, 나주(羅州)·광주(光州)·정주(靜州)·승주(昇州)·패주(貝州)·담주(潭州)·낭주(朗州) 등 고을을 해양도(海陽道)로 하였다가, 현종(縣宗) 9년 무오【송나라 진종(眞宗) 천희(天禧) 2년.】 에 전라도로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도관찰사(都觀察使)의 관청을 두고 있다. 동쪽은 경상도(慶尙道) 함양군(咸陽郡)에 이르고, 서·남쪽은 바다에 닿으며, 북쪽은 충청도(忠淸道) 은진현(恩津縣)에 이르는데, 동·서가 2백 33리요, 남·북이 4백 5리이었다. 관할은 유수(留守)가 1이요, 목(牧)이 2이요, 도호부(都護府)가 4이요, 군(郡)이 12이요, 현(縣)이 39이며, 계수관(界首官)이 4이니, 전주(全州)·나주(羅州)·남원(南原)·장흥(長興)이다. 명산(名山)은 지리산(智異山)【일명 지리(地理), 또는 방장(方丈), 또는 두류(頭流)라 한다.】 인데 남원(南原)에 있으니, 그 동쪽은 진주(晉州)·곤남(昆南)이요, 북쪽은 함양(咸陽)·산음(山陰)이요, 서쪽은 구례(求禮)요, 남쪽은 광양(光陽)이다. 웅장하게 높이 하늘에 우뚝 치솟아, 산허리에 간혹 구름이 머물고, 비가 오고 천둥과 번개가 치는데, 그 위는 맑게 개어 평상시와 같으며, 가을철 서늘하면 매떼[鷹]가 모여들므로 잡아다가 나라에 바친다. 속설에 전하기를, “태을(太乙)이 그 위에 살고, 여러 신선(神仙)이 모이며, 여러 용(龍)이 살고 있다.” 고 한다. 두보(杜甫)의 시에 소위 “방장은 삼한 밖이라.[方文三韓外]” 한 주(註)와 《통감집람(通鑑輯覽)》에 이르기를, “방장(方丈)은 대방군(帶方郡) 남쪽에 있다.” 한 것은 이 산을 말하는 것이다. 신라에서 남악(南嶽), 중사(中祀)로 하였고, 고려와 본조(本朝)에서도 모두 그대로 따라 중사(中祀)로 하여서, 봄·가을에 향·축(香祝)을 내리어 관찰사(觀察使)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한다. 금성산(錦城山)은 나주(羅州)에 있는데, 제례(祭例)는 지리산과 같다. 무등산(無等山)은【일명 무진악(武珍岳), 또는 서석산(瑞石山)이라 한다.】무진(武珍)에 있는데, 풍후하고 높고 커서, 신라에서는 소사(小祀)로 하였고, 고려에서는 나라 제사[國祭]를 지냈고, 본조(本朝)에서는 주(州)의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한다. 천관산(天冠山)은 장흥(長興)에 있는데, 높고 험하고 풍후하여, 가끔 서기(瑞氣)가 흰 연기같이 하늘을 찔러서, 사람들이 자못 이상히 여기며, 제례는 무등산과 같다. 월출산(月出山)은【일명 월내악(月柰岳)이라 한다.】 영암(靈岩)에 있는데, 바위 봉우리가 층층이 치솟아 섰고, 그 가장 높은 봉우리 꼭대기에 바위가 우뚝 솟아 있어, 높이가 두 길이 넘으며, 곁에 한 구멍이 있는데,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하며, 그 구멍을 따라 그 꼭대기에 올라가면 20명이 앉을 만하고, 그 평평한 곳에 오목하게 패어서 물이 담기기를 동이같이 된 것이 아홉이므로, 구정봉(九井峯)이라 하며,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아니하므로, 속설에 전하기를, “아홉 용[九龍]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 아래에 움직이는 돌이 있는데, 홀로 층바위 위에 서서 높이가 한 길이 넘고,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되며, 서쪽으로는 산골에 연하고, 동쪽으로는 밑없는 구렁에 임하였는데, 한 사람이 흔들면 무너질 듯하면서도 무너지지 아니하며, 이 같은 바위가 또 둘이 있었다. 상산(裳山)은 무주(茂朱)에 있는데, 사면(四面)이 벽처럼 서서 층층히 끊어져 사람의 치마처럼 되었으므로, 상산이라 한다. 옛사람이 험한 것을 이용하여 성을 만들었는데, 겨우 두 길이 있어서 올라 다니며, 그 가운데는 평탄하고 넓으며, 샘물이 사방에서 나와 합하여 큰 내가 되어 동쪽 구렁으로 흘러 들어간다. 변산(邊山)은【일명 영주산(瀛洲山)이라 한다.】 부안(扶安)에 있는데, 여러 겹으로 높고 크며, 바위로 된 골짜기가 깊고 으늑하며, 전함(戰艦)의 재목이 많이 이곳에서 난다. 마이산(馬耳山)은 진안(鎭安)에 있는데, 두 봉우리가 우뚝 솟아 동서로 마주 서서 모양이 깎아 세운 듯하며, 높이가 천 길이나 되고, 그 꼭대기에 나무가 울창하며, 속설에 전하기를, “동쪽산 꼭대기에 작은 못이 있다.” 하나, 바라만 보일 뿐이요, 올라갈 수는 없다. 우리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임금이 산 아래에 행차(行次)하여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대천(大川)은 남포진(南浦津)이 나주(羅州)에 있는데, 그 수원이 3이 있으니, 그 하나는 담양(潭陽) 추월산(秋月山)의 물이 창평현(昌平縣)을 지나 무진(茂珍)의 북쪽으로 들어가 창평현(昌平縣)의 남쪽 물과 합하고, 또 무진성(茂珍城) 서쪽 물과 어울려 서쪽으로 흐르고, 그 하나는 장성(長城) 위령(葦嶺)의 물이 진원현(珍原縣) 서쪽과 나주 북쪽 경계를 지나 옛 내상성(內廂城) 남쪽을 거쳐서 생압진(生鴨津)에 이르러 무진 북쪽 경계의 물과 합하여 나주의 동쪽을 지나고, 그 하나는 능성(綾城) 쌍봉(雙峯)의 물이 남평현(南平縣) 북쪽을 지나 또 나주의 동쪽 경계의 물과 합하여 남쪽으로 돌아 서쪽으로 흘러서 남포진(南浦津)이 되어 나룻배로 사람을 건너게 되고, 무안현(務安縣) 동쪽에 이르러 대굴포(大堀浦)가 되고, 또 서쪽으로 흘러서 영암군(靈岩郡) 운적산(雲積山)의 기슭을 지나 목포(木浦)가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하도(下道)의 조운(漕運)이 이곳을 경유하여 서울에 이른다. 잔수진(潺水津)은 구례(求禮)에 있는데, 그 수원이 2가 있으니, 그 하나는 진안(鎭安) 중대산(中臺山)의 물이 서남쪽으로 흘러 임실(任實)·순창(淳昌)을 지나 돌아서 동쪽으로 흘러 남원 남쪽 경계에 이르러 순자진(子津)이 되며, 그 하나는 지리산 서북쪽 여러 골짜기의 물이 남원을 지나 순자진으로 들어가서, 그 하류가 압록진(鴨綠津)이 되며, 또 보성 정자천(寶城亭子川)의 물이 복성(福城) 옛 현(縣)을 지나 북쪽으로 흘러서 낙수진(洛水津)이 되고, 동북쪽으로 흘러 옛 곡성(谷城)을 지나 압록진으로 들어가서 합하여 동쪽으로 흘러, 구례현 남쪽과 순천(順天) 북쪽 경계에 이르러 잔수진이 되고, 지리산 남쪽 기슭을 지나서 경상도 진주(晉州)의 옛 임내(任內) 화개현(花開縣) 서쪽에 이르러 용왕연(龍王淵)이 되는데, 조수가 이르며, 동남쪽으로 흘러 광양현(光陽縣)의 남쪽을 지나 섬진(蟾津)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신창진(新倉津)은 전주(全州)에 있는데, 그 수원이 3이 있으니, 그 하나는 부(府)의 남쪽 여현(礪峴)의 물이 성(城) 남서쪽을 돌아서 북쪽으로 흘러 부(府)의 서남쪽 모산(母山) 여러 골짜기의 물을 합하고, 삼례역(蔘禮驛) 남쪽에 이르러 또 고산(高山)과 운제(雲梯)의 물과 어울려서 서쪽으로 흘러 회포(回浦)가 되고, 비간장진(飛艮藏津)이 되는데, 조수가 이르며, 이성(利城)의 옛 성(城) 북쪽에 이르러 신창진(新倉津)이 되는데, 나룻배가 있으며, 서쪽으로 흘러 만경(萬頃)과 임피(臨陂)를 지나 옥구(沃溝)에 이르러 고사포(古沙浦)가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동진(東津)은 부안현(扶安縣)에 있는데, 태인(泰仁)과 정읍(井邑) 두 현(縣)의 물이 김제(金堤) 벽골(碧骨)의 물과 합하여 서쪽으로 흘러서 흥덕(興德) 동쪽에 이르러 고부(古阜) 눌제(訥堤)의 물과 어울려 동진이 되는데, 조수가 이르므로 다리를 놓아 행인을 다니게 하고, 만경현 서남쪽을 지나 바다에 들어간다. 호수[戶]는 2만 4천 73호요, 인구[口]는 9만 4천 2백 48명이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천 1백 67명이요, 영진군(營鎭軍)이 2천 4백 24명이요, 기선군(騎船軍)이 1만 1천 7백 93명이다. 간전(墾田)이 27만 7천 5백 88결(結)이다.【논이 10분의 4이다.】 그 부세(賦稅)는 볍쌀【찹쌀·멥쌀.】 ·콩【누렁콩·팥·녹두.】 ·밀[小麥]·참깨[芝麻]·차조기씨[蘇子]·모시[苧布]요, 그 공물(貢物)은 꿀·밀[黃蠟]·범가죽[虎皮]·표범가죽[豹皮]·곰가죽·쇠가죽·말가죽·이긴 사슴가죽[熟鹿皮]·이긴 노루가죽[熟獐皮]·여우가죽·삵괭이가죽·잘[山獺皮]·물개가죽[水獺皮]·활줄[弓絃]·표범꼬리[豹尾]·여우꼬리[狐尾]·족제비털[黃毛]·사슴·돼지·토끼·산돼지·말린 사슴·말린 노루·말린 돼지·정향(丁香)·포(脯)·사슴꼬리[鹿尾]·돼지털·쇠뿔·녹각(鹿角)·갖풀[阿膠]·힘줄[筋]·잡깃[雜羽]·가뢰[斑猫]·대모(玳瑁)·고니[天鵝]·상어·말린 숭어·전복·생복[生鮑]·말린 홍합·낙지·굴·감합(甘蛤)·대합조개·은어·붉은 큰새우·인포(引鮑)·조포(條鮑)·오징어·옥둥어[玉頭魚]·다시마·부레·칠(漆)·겨자·황밤[黃栗]·대추·곶감·연감[紅枾子]·모과·석류·배[梨]·개암·가시연밥[仁]·유자(柚子)·감자나무열매·비자[榧子]·유감(乳柑)·동정귤(洞庭橘)·금귤(金橘)·푸른귤[靑橘]·산귤(山橘)·마름[菱仁]·분곽(粉藿)·상곽(常藿)·올멱[早藿]·해모(海毛)·우무·해각(海角)·황각(黃角)·매산이(山伊)·김[海衣]·감태(甘笞)·오해자(烏海子)·송이·석이·느타리·표고·새앙·고사리·지초·회화나무꽃·치자·작설차[雀舌茶]·송화(松花)·소나무그을음[松煙]·송진[松脂]·목화·모시·삼[麻]·삼노·각색 종이【표전지(表箋紙)·자문지(咨文紙)·부본단자지(副本單子紙)·주본지(奏本紙)·피봉지(皮封紙)·서계지(書契紙)·축문지(祝文紙)·표지(表紙)·도련지(鍊紙)·중폭지(中幅紙)·상표지(常表紙)·갑의지(甲衣紙)·안지(眼紙)·세화지(歲紙)·백주지(白奏紙)·화약지(火藥紙)·장지(狀紙)·상주지(常奏紙)·유둔지(油芚紙)·유둔(油芚).】 ·자리[席]【별무늬돗자리[別紋踏席]·보통무늬돗자리[常紋踏席]·흰무늬돗자리[白紋席]·왕골 자리[草席].】 ·대껍질방석[竹皮方席]·가는 대[篠]·오죽(烏竹)·화살대[箭竹]·바닷대[海竹]·등상자[土藤箱子]·대껍질[竹皮]·말린 죽순[乾筍]·자기(磁器)·나무그릇[木器]·버들고리[柳器]이다.약재(藥材)는 우황(牛黃)·쇠쓸개[牛膽]·범의 뼈[虎骨]·고슴도치가죽[蝟皮]·곰쓸개[熊膽]·녹용·녹각상(鹿角霜)·토끼머리[兎頭]·녹각(鹿角)·담비쓸개[獺膽]·산양이뿔[羚羊角]·도아조기름[島阿鳥油]·두꺼비[蟾蛛]·뽕나무벌레[桑]·자라껍데기[鼈甲]·오징어뼈[烏魚骨]·말린 잉어[乾鯉]·잉어쓸개[鯉膽]·자네[蜈蚣]·등에[]·매미허물[蟬脫皮]·거북껍데기[龜甲]·결명초[石決明]·인삼(人蔘)·영릉향(零陵香)·곽향(藿香)·박상(舶上)·회향(茴香)·가시연밥[鷄頭實]·연꽃[蓮花蘂]·겨우살이꽃[金銀花]·궁궁이[芎]·나팔꽃씨·으름덩굴[木通]·호라비좆뿌리[天門冬]·겨우살이풀뿌리[麥門冬]·패랭이꽃이삭[瞿麥穗]·수자해좆뿌리[天麻]·택사(澤瀉)·새삼씨[免綠子]·탱알[紫莞]·탱알뿌리·연밥[蓮子]·회초미뿌리[貫衆]·파고지(破古紙)·삽주뿌리[蒼朮]·쪽[藍]·칠[漆]·감제뿌리[虎杖根]·당귀(當歸)·하국[旋覆花]·하눌타리[括婁]·작약(芍藥)·끼무릇뿌리[半夏]·부들꽃[蒲黃]·끼절가리뿌리[升麻]·도라지[桔梗]·꽃창포[馬藺花]·족두리풀뿌리[細辛]·칡꽃[葛花]·버들옷[大戟]·검화뿌리껍질[白蘇皮]·두여머조자기[天南星]·쇠무릎지기[牛膝]·범부채[射干]·쓴너삼뿌리[苦蔘]·구리때뿌리[白芷]·사양채뿌리[前胡]·바곳[草烏頭]·계소(鷄蘇)·병풍나물뿌리[防風]·숭나물[蒿本]·자리공뿌리[商陸]·다시마[昆布]·흰띠[香]·겨우살이덩굴[忍冬草]·아기풀[遠志]·갈뿌리[蘆根]·박새[蘆]·암눈바앗씨[蔚子]·진득찰[稀簽]·꽈리[酸醬]·검산풀뿌리[續斷]·할미씨깨비[白頭翁]·향부자(香附子)·심황[鬱金]·수자해좆씨[赤前子]·난향[蘭香]·지치[紫草]·현삼(玄蔘)·멧미나리[柴胡]·매자기뿌리[京三稜]·흰바곳[白附子]·등대풀싹[澤漆]·가위톱[白]·대왕풀[白]·오미자(五味子)·창이(蒼耳)·외나물뿌리[地楡]·창포(菖蒲)·자주연꽃[紫荷]·개구리밥[水萍]·감국화(甘菊花)·더위지기[茵陳]·절국대[漏蘆]·수뤼나물[靈仙]·영생이[薄荷]·속수자[續隨子]·꼭두서니뿌리[草根]·두루미냉이씨[子]·단너삼[黃耆]·순비기나무열매[蔓荊子]·쥐방울[馬兜]·게로기뿌리[薺]·항가새[大草]·조방가새[小草]·사하(蓑荷)·파초·산해박[徐長卿]·익관초(益貫草)·초결명씨[決明子]·백작약(白芍藥)·모시잎[苧葉]·석골풀[石]·골풀[草]·말오줌나무[]·마뿌리[山藥]·두룹뿌리[獨活]·속수자[蜀有子]·소태나무열매[川練子]·석류껍질[石榴皮]·흰매화[白梅]·매화열매[烏梅]·탱자껍데기[枳殼]·괴좆나무열매[枸杞子]·흰매화열매[鹽梅實]·복령(茯)·모란껍데기[牧丹皮]·닥나무열매[楮實]·솜대속껍질[竹茹]·괴좆나무뿌리껍질[地骨皮]·죽력(竹瀝)·황경나무껍데기[黃蘗皮]·조피나무열매[川椒]·백복령(白茯)·호도(胡桃)·오갈피[五加皮]·솜대잎[淡竹葉]·철쭉꽃[花]·쥐엄나무열매[莢]·쥐엄나무가시[角刺]·산이스랏씨[郁李仁]·말린 모과[乾木瓜]·살구씨[杏仁]·오배자(五倍子)·복숭아씨[桃仁]·삿갓나물[蚤休]·측백나무잎[側栢葉]·아가위[棠]·배[梨]·잣[松子仁]·묵은 귤껍질[陳皮]·엄나무껍질[海桐皮]·푸른 귤껍질[靑皮]·후박(厚朴)·두충(杜)·솔씨[松實]·담배[八角]·복신(茯神)이다. 심는 약[種藥]은 생지황(生地黃)·장군풀[大黃]·건강(乾薑)·백변두(白豆)·검은 변두[黑豆]·우엉[惡實]·심황(深黃)·소야기[香]이었다. 조운창[漕倉]이 2이니, 영산창(榮山倉)이 나주(羅州) 목포(木浦)에 있고,【나주·순천(順天)·장흥(長興)·담양(潭陽)·낙안(樂安)·보성(寶城)·해진(海珍)·영암(靈岩)·영광(靈光)·무진(茂珍)·강진(康津)·고흥(高興)·광양(光陽)·능성(綾城)·남평(南平)·화순(和順)·동복(同福)·곡성(谷城)·옥과(玉菓)·창평(昌平)·진원(珍原)·장성(長城)·흥덕(興德)·무장(茂長)·함평(咸平)·무안(務安) 등의 조세를 이곳에 바친다.】 덕성창(德成倉)이 함열현(咸悅縣) 서피포(西皮浦)에 있다.【함열·전주(全州)·남원(南原)·익산(益山)·고부(古阜)·김제(金堤)·금산(錦山)·진산(珍山)·순창(淳昌)·임피(臨陂)·옥구(沃溝)·만경(萬頃)·부안(扶安)·정읍(井邑)·금구(金溝)·태인(泰仁)·임실(任實)·구례(求禮)·운봉(雲峯)·장수(長水)·진안(鎭安)·용담(龍潭)·무주(茂朱)·고산(高山)·여산(礪山)·용안(龍安) 등의 조세를 이곳에 바친다.】 관방(關防)의 수어(守禦)는 병마 도절제사 영(兵馬都節制使營)이 강진현(康津縣)에 있고,【정군(正軍)이 4백 98명, 수성군(守城軍)이 51명, 조역군(助役軍)이 1백 63명, 장인(匠人)이 1백 41명이다.】 진(鎭)이 4이니, 옥구(沃溝)·부안(扶安)·무장(茂長)·조양(兆陽)이요,【정군이 각각 3백명이다.】 수군 처치사 영(水軍處置使營)이 무안현(務安縣) 대굴포(大堀浦)에 있고,【대선(大船) 8척, 중선(中船) 16척, 군사 1천 8백 95명, 뱃사공[梢工] 21명을 거느린다.】 좌도 도만호 선박처(左道都萬戶船泊處)가 보성군(寶城郡) 동쪽 여도량(呂島梁)에 있는데,【중선 6척, 맹선(孟船) 12척과 군사 1천 12명과 뱃사공 19명을 거느린다.】 관내의 만호(萬戶)가 8이니, 내례(內禮)가 순천부(順天府) 남쪽 며포(浦)에 있으며,【중선 6척, 별선(別船) 6척과 군사 7백 66명과 뱃사공 6명을 거느린다.】 돌산(突山)이 순천부 남쪽 용문포(龍門浦)에 있으며,【중선 8척과 군사 5백 18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축두(築頭)가 고흥현(高興縣) 남쪽 고흥포(高興浦)에 있으며,【중선 6척, 별선 2척과 군사 5백 12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녹도(鹿島)가 장흥부(長興府) 북쪽 녹도량(鹿島梁)에 있으며,【중선 6척, 별선 2척과 군사 4백 83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회령포(會寧浦)가 장흥부 남쪽 주포(周浦)에 있으며,【중선 4척, 별선 4척과 군사 4백 72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마도(馬島)가 강진현(康津縣) 남쪽 원포(垣浦)에 있으며,【중선 8척과 군사 5백 10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달량(達梁)이 영암군(靈岩郡) 남쪽에 있으며,【중선 7척, 맹선(孟船) 2척과 군사 5백 19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어란(於蘭)이 해진군(海珍郡) 남쪽 삼촌포(三寸浦)에 있다.【중선 4척과 군사 4백 80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우도 도만호 선박처(右道都萬戶船泊處)는 함평현(咸平縣) 서쪽 원관(垣串)에 있는데,【중선 8척, 별선 10척과 군사 1천 55명과 뱃사공 9명을 거느린다.】 관내 만호(萬戶)가 5이니, 목포(木浦)가 무안현(務安縣) 남쪽에 있으며,【중선 6척, 별선 2척과 군사 4백 98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다경포(多慶浦)가 무안현 서쪽 와포(瓦浦)에 있으며,【중선 4척, 별선 4척과 군사 4백79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법성포(法聖浦)가 영광군(靈光郡) 북쪽에 있으며,【중선 6척, 별선 2척과 군사 4백 93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금모포(黔毛浦)가 부안현(扶安縣) 남쪽 웅연(熊淵)에 있으며,【중선 4척, 별선 4척과 군사 4백 55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군산(群山)이 옥구현(沃溝縣) 북쪽 진포(鎭浦)에 있다.【중선 4척, 별선 4척과 군사 4백 61명과 뱃사공 4명을 거느린다.】 감목관(監牧官)이 3인이요,【도(道)안에 1인이요, 제주(濟州)에 2인이다.】 역승(驛丞)이 7인이니, 창활도(昌活道)의 관할 역(驛)이 11이요,【잔수(潺水)·갈담(葛潭)·오수(獒樹)·은령(銀嶺)·통도(通道)·인월(引月)·익신(益申)·섬거(蟾居)·양률(良栗)·낙수(洛水)·지신(知申).】 앵곡도(鶯谷道)의 관할 역이 5이요,【거산(居山)·천원(川原)·부흥(扶興)·내재(內才)·영원(瀛原).】 제원도(濟原道)의 관할 역이 2이요,【달계(達溪)·소천(所川).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전주부(全州府) 윤(尹) 1인, 판관(判官) 1인, 교수관(敎授官) 1인. 본래 백제의 완산(完山)이었는데,【일명 비사벌(比斯伐) 또는 비자화(比自火)라 한다.】 위덕왕(威德王) 원년 을해에【양(梁)나라 간문제(簡文帝) 승성(承聖) 4년.】 완산주(完山州)로 하였다가, 11년이 지나서 을유에【진(陳)나라 세조(世祖) 천가(天嘉) 6년.】 주(州)가 폐지되었고, 의자왕(義慈王) 22년 경신에【당나라 고종(高宗) 현경(顯慶) 5년.】 신라 사람들이 당(唐)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과 백제를 멸하자, 그 땅이 모두 신라에 들어갔으며, 신문왕(神文王) 4년 을유에【당나라 측천(則天) 수공(垂拱) 원년.】 다시 완산주를 두었다가, 경덕왕(景德王) 15년 정유에【당나라 숙종(肅宗) 원년.】 전주로 고쳤다. 효공왕(孝恭王) 3년 경신에【당나라 소종(昭宗) 광화(光化) 3년.】 견훤(甄萱)이 완산에 도읍하고 후백제(後百濟)라 하였는데, 고려 태조(太祖) 19년 병신에【후진(後晉) 고조(高祖) 천복(天福) 원년.】 친히 백제를 쳐서 이기고 안남 도호부(安南都護府)로 고쳤다가, 23년 경자에【천복(天福) 5년.】 다시 전주로 하였다. 성종(成宗) 12년 계사에【송나라 태종(太宗) 순화(淳化) 4년.】 승화 절도안무사(承化節度安撫使)로 고쳤고, 15년 병신에【송나라 태종(太宗) 지도(至道) 2년.】 전주 순의 군절도사(全州順義軍節度使)로 고쳤고, 현종(顯宗) 9년 무오에【송나라 진종(眞宗) 천희(天禧) 2년.】 안남 대도호부(安南大都護府)로 고쳤고, 13년 임술에【송나라 진종(眞宗) 건흥(乾興) 원년.】 전주목(全州牧)으로 고쳤다. 본조(本朝) 태조(太祖) 원년 임신에【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 홍무(洪武) 25년.】 완산부(完山府)로 승격하니, 이씨(李氏)의 본관인 까닭이다. 태종(太宗) 3년 계사에【명나라 태종(太宗) 영락(永樂) 11년.】 전주부(全州府)로 고쳤다. 별호를 승화(承化)·완산(莞山)【고려 성종(成宗) 10년 신묘에 정한 것이다.】 혹은 견성(甄城)이라고 한다.【순화(淳化) 때 정한 것이다.】 고속현(古屬縣)이 4이니, 이성현(伊城縣)은 본래 백제의 두이현(豆伊縣)이었는데, 신라에서 두성현(杜城縣)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이성현으로 고쳤으며, 이성현(利城縣)은 본래 백제의 내리아현(乃利阿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이성(利城)으로 고쳐서 김제(金堤)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 초에 전주에 내속(來屬)하였으며, 옥야현(沃野縣)은 본래 백제의 소력지현(所力只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옥야(沃野)로 고쳐서 금마군(金馬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 초에 전주에 내속(來屬)하였고, 명종(明宗) 6년 병신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뒤에 다시 전주에 내속(來屬)하였으며, 우주현(紆州縣)은 본래 백제의 우소저현(于召渚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우주(紆州)로 고쳐서 금마군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초에 전주에 내속(來屬)하였다. 향(鄕)이 2이니, 경명(景明)【일명 영명(榮明)이라 한다.】 ·제견(堤見)이요, 소(所)가 2이니, 두모촌(豆毛村)·양량(陽良)이다.【태종(太宗) 9년에 도관찰사(都觀察使) 윤향(尹向)이 아뢰어서 도(都) 안의 현(縣)·향(鄕)·소(所)·부곡(部曲)들을 모두 본고을에 합쳤다. 지금 고속현(古屬縣)을 적는 것은 뒷날에 참고에 이바지하기 위함이다. 뒤에도 모두 이와 같다.】 대천(大川)은 신창진(新倉津)이다.【주의 북쪽에 있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고산(高山)에 이르기 30리, 서쪽으로 금구(金溝)에 이르기 27리, 남쪽으로 임실(任實)에 이르기 31리, 북쪽으로 여산(礪山)에 이르기 46리이다. 태조 강헌 대왕 진전(太宗康憲大王眞殿)【성 안 동남쪽 모퉁이에 있다.】 호수는 1천 5백 65호요, 인구는 5천 8백 29명이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77명이요, 진군(鎭軍)이 1백 48명이요, 선군(船軍)이 8백 26명이요, 수성군(守城軍)이 30명이다. 토성(土姓)이 9이니, 이(李)·최(崔)·유(柳)·박(朴)·전(全)·유(庾)·한(韓)·백(白)이요, 내접성(來接姓)이 1이니, 방(房)이요, 속성(續姓)이 4이니, 양(梁)【주계(朱溪)에서 왔다.】 ·장(張)【결성(結城)에서 왔다.】 ·김(金) 2【하나는 모평(牟平)에서 왔고 하나는 온 곳을 모르는데, 모두 향리(鄕吏)가 되었다.】 이다. 이성(伊城)의 성은 5이니, 조(趙)·배(裴)·장(張)·구(仇)·염(廉)이요, 이성(利城)의 성은 5이니, 이(李)·백(白)·정(鄭)·손(孫)·진(陳)이요, 옥야의 성은 4이니, 장(張)·염(廉)·양(梁)·구(仇)·요, 망성(亡姓)이 1이니, 임(林)이다. 우주(紆州)의 성은 5이니, 박(朴)·이(李)·정(鄭)·황(黃)·최(崔)요, 경명(景明)의 성은 4이니, 김(金)·임(林)·배(裵)·인(印)이요, 두모촌(豆毛村)의 성은 3이니, 책(冊)·최(崔)·이(李)요, 양량(陽良)의 성은 4이니, 백(白)·나(羅)·강(康)·유(劉)이다. 인물(人物)은 예부 낭중(禮部郞中) 최균(崔均)이니, 고려 명종(明宗) 때 사람이다.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되며, 민간 풍속이 장사[利]를 좋아한다. 간전(墾田)이 1만 8천 6백 64결이요,【논이 조금 많다.】 토의(土宜)는 오곡·뽕나무·삼[麻]·목화·감·배[梨]·왕대[]이다. 토공(土貢)은 표범가죽·여우가죽·이리가죽·잘[山水獺皮]·종이【표전(表箋)·주본(奏本)·부본(副本)·자문(咨文)·서계(書契) 등의 종이 및 표지(表紙)·도련지(鍊紙)·백주지(白奏紙)·유둔(油芚)·세화(歲)·안지(眼紙)인데, 도(道) 안에 오직 이 고을과 남원(南原)의 것의 품질이 좋다.】 ·모시·무늬있는 자리[有文席]·족제비털[黃毛]·칠(漆)·꿀·대추·석류·새앙[薑]【읍(邑)의 사람들이 업(業)으로 삼는다.】 이요, 약재(藥材)는 인삼·말오줌나무[]·궁궁이[芎]·호라비좆뿌리[天門冬]·겨우살이풀뿌리[麥門冬]·패랭이꽃이삭[瞿麥穗]·흰매화열매[鹽梅實]·복령(茯)이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요,【부의 남쪽 장파곤동(長波昆洞)에 있는데, 중품(中品)이다.】 도기소(陶器所)가 2이다.【부의 서쪽 우림곡(雨林谷)에 있는데 중품(中品)이다.】 읍 석성(邑石城)【둘레가 1천 2백 88보(步)이다.】 고덕산 석성(高德山石成)【둘레가 1천 4백 13보이며, 성안에 샘이 7이 있고, 또 시내가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한다.】 역(驛)이 3이니, 반석(半石)·삼례(蔘禮)·앵곡(谷)이요, 요해(要害)가 1이니, 상관동(上館洞) 여현(礪峴)이다.【주(州) 남쪽에서 임실(任實)로 가는 지로(指路)이다.】 큰 방죽[大堤]이 3이니, 상시제(上屎堤)·하시제(下屎堤)·공덕제(孔德堤)이다. 관할[所領]은 군(郡)이 5이니, 진산(珍山)·금산(錦山)·익산(益山)·고부(古阜)·김제(金堤)요, 현(縣)이 11이니, 금구(金溝)·만경(萬頃)·임피(臨陂)·옥구(沃溝)·함열(咸悅)·용안(龍安)·부안(扶安)·정읍(井邑)·태인(泰仁)·고산(高山)·여산(礪山)이다.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진산군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금산군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익산군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고부군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김제군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금구현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만경현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임피현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옥구현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함열현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용안현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부안현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정읍현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태인현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고산현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여산현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나주목 ⊙ 나주목(羅州牧) 본래 백제의 발라군(發羅郡)이었는데, 신라에서 금산군(錦山郡)으로 고쳤다. 신라 말년에 견훤(甄萱)이 후백제왕(後百濟王)이라 일컫고 모두 그 땅을 차지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금산(錦山) 사람들이 후고려왕(後高麗王) 궁예(弓裔)에게 붙으니,【후량(後梁) 태조(太祖) 건화(乾化) 원년 신미.】 궁예가 명(命)하여 고려 태조(太祖)를 정기 태감(精騎太監)으로 삼고 뱃군사[舟師]를 거느리고 공격하여 빼앗게 하여서 나주(羅州)로 고쳤다. 성종(成宗) 15년 병신【송나라 태종(太宗) 지도(至道) 2년.】 에 새로 10도(道)를 정하고 나주진 해군 절도사(羅州鎭海軍節度使)로 하였다. 현종(顯宗) 원년 경술에 왕이 글안(契丹)의 군사를 피하여 남쪽으로 순행(巡行)하여 이곳에 열흘 동안 머물렀었는데, 글안 군사가 패(敗)하여 물러가므로, 왕이 이에 환도(還都)하였다. 9년 무오에 목(牧)으로 고쳤는데,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별호(別號)는 통의(通義) 금성(錦城)【순화(淳化) 때 정한 것이다.】 이다. 옛 속현(屬縣)이 8이니, 영산(榮山)은 본래 흑산도(黑山島)이었는데, 육지로 나와 주(州)의 남쪽 10리 되는 남포강(南浦江) 가로 옮겼으며【공민왕(恭愍王) 12년 갑진에 군(郡)의 이름을 붙였다.】 압해(押海)는 본래 백제의 아차산현(阿次山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압해군(押海郡)으로 고쳤고, 고려 초에 본주에 내속(來屬)시켰으며, 여황(艅)은 본래 백제의 수천현(水川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여황으로 고쳤으며, 회진(會津)은 본래 백제의 두힐현(豆縣)이었는데, 신라에서 회진으로 고쳤으며, 안로(安老)는 본래 백제의 아로곡현(阿老谷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야로(野老)로 고쳐서 이에 내속시켰으며, 복룡(伏龍)은 본래 백제의 복룡현이었는데, 신라에서 용산(龍山)으로 고쳐서 무주(武州)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다시 복룡이라 하여 이에 내속시켰으며, 반남(潘南)은 본래 백제의 반내부리현(半奈夫里縣)이었는데, 신라에서 반남으로 고쳐서 영암(靈巖)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초에 내속(來屬)시켰으며, 장산(長山)은 본래 백제의 거지산현(居知山縣)【거(居)가 굴(屈)로도 되어 있다.】 이었는데, 신라에서 안파현(安波縣)으로 고쳐서 압해(壓海)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다시 장산이라 하여 본주에 내속시켰다. 향(鄕)이 2이니, 종의(從義)·손리(孫利)이요, 소(所)가 1이니, 수타(水墮)이요,【일명 횡산(橫山)이라 한다.】 부곡(部曲)이 6이니, 거평(居平)·임성(任城)·군산(群山)·극포(極浦)·금마(金磨)·평구(平丘)이다. 진산(鎭山)은 금성(錦城)이다. 남해 신사당(南海神祠堂)【주(州)의 남쪽에 있는데, 제례(祭例)는 평사(平祀)이다. 봄·가을에 나라에서 향축(香祝)을 내려서 제사지낸다.】 앙암용진(仰巖龍津)【주의 관원이 제사지낸다.】 남포진(南浦津)【주의 남쪽에 있는데, 배가 있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남평(南平)에 이르기 5리, 서쪽으로 무안(務安)에 이르기 27리, 남쪽으로 영암(靈岩)에 이르기 32리, 북쪽으로 함평(咸平)에 이르기 32리이다. 호수가 1천 89호요, 인구가 4천 26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59명이요, 영진군(營鎭軍)이 1백 55명이요, 선군이 6백 70명이다. 토성(土姓)이 9이니, 김(金)·나(羅)·오(吳)·정(鄭)·진(陳)·손(孫)·남(南)·박(朴)·유(柳)이다. 영산(榮山)의 속성(續姓)이 1이니, 윤(尹)이요, 압해(押海)의 성이 5이니, 박(朴)·주(朱)·정(丁)·강(江)·남(南)이요, 반남(潘南)의 성이 5이니, 홍(洪)·조(曹)·박(朴)·채(蔡)·송(宋)이요, 회진(會津)의 성이 4이니, 양(梁)·임(林)·신(申)·조(曹)요, 안로(安老)의 성이 4이니, 김(金)·서(徐)·차(車)·전(全)이다. 복룡(伏龍)의 성이 5이니, 조(曹)·박(朴)·구(仇)·유(庾)·화(化)요, 속성(續姓)이 1이니, 범(汎)이다. 여황(艅)의 성이 4이니, 조(趙)·조(曹)·화(化)·주(朱)요, 속성이 1이니, 전(全)【향리(鄕吏).】 이다. 장산(長山)의 성이 3이니, 남(南)·김(金)·채(蔡)요, 종남(從南)【예전에는 종의(從義)라고 하였다.】 의 성이 2이니, 박(朴)·홍(洪)이요, 거평(居平)의 성이 3이니, 사마(司馬)·유(柳)·임(林)이요, 극포(極浦)의 성이 1이니, 윤(尹)이다. 임성(任城)의 성이 1이니, 유(兪)요, 망성(亡姓)이 1이니, 윤(尹)이다. 군산(群山)의 성이 1이니, 유(兪)요, 망성(亡姓)이 1이니, 윤(尹)이요, 금마(金磨)의 망성(亡姓)이 1이니, 하(河)요, 손리(孫利)의 망성(亡姓)이 1이니, 오(吳)이었다. 인물은 첨의 중찬 문정공(僉議中贊文靖公) 정가신(鄭可臣)이니 고려 충선왕(忠宣王) 때 사람이요, 문하 평리 경렬공(門下平理景烈公) 정지(鄭地)이니, 고려 공양왕(恭讓王) 때 사람이다. 땅이 기름진 것이 3분의 1이다. 간전(墾田)이 1만 5천 3백 39결이요,【논이 조금 많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뽕나무·삼·왕골·닥나무·왕대이다. 토공(土貢)은 표범가죽·삵괭이가죽·여우가죽·잘·족제비털[黃毛]·표범꼬리·등나무상자·목화·자리·작설다(雀舌茶)·새앙·죽순·대추·감·배[梨]·석류·비자(榧子)요, 약재(藥材)는 연밥[蓮子]·오매실(烏梅實)·염매실(鹽梅實)·겨우살이풀뿌리·패랭이꽃이삭[瞿麥穗]·도아조기름[島阿鳥油]·잉어쓸개[鯉膽]·녹용(鹿茸)이요, 토산(土産)은 절어(節魚)·귤이다. 염소(鹽所)가 35요,【주의 서쪽 여러 섬에 흩어져 있는데, 염창(鹽倉)은 주 남쪽 9리에 있다. 염간(鹽干)이 2백 59명인데, 봄·가을에 공납(貢納)하는 소금이 2천 5백 90석이다. 나주 판관(羅州判官)이 주장하여 민간의 면포(綿布)와 무역해서 국용(國用)에 이바지한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니, 주의 서쪽 대각동(大角洞)에 있고,【중품이다.】 도기소(陶器所)가 1이니, 주의 남쪽 금마리(金磨里)에 있다.【하품이다.】 읍 석성(邑石城)【둘레가 1천 1백 62보(步) 남짓이다.】 금성산 석성(錦城山石城)【둘레가 1천 95보요, 샘이 5가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한다. 또 못이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역(驛)이 2이니, 청암(靑巖)·신안(新安)이요, 목장(牧場)이 1이니, 장산도(長山島)요,【암·수 말 57필을 방목(放牧)한다.】 봉화가 2곳이니, 주의 서쪽에 있는 군산(群山)과【남쪽으로 무안(務安) 유달(鍮達)에 응하고, 북쪽으로 무안 고림(高林)에 응하고, 동남쪽으로 마악산(馬岳山)에 응한다.】 마악산(馬岳山)이다.【서쪽으로 군산(群山)에 응하고, 동남쪽으로 무안(務安) 옥축산(玉軸山)에 응한다.】 월경(越境)은 해진(海珍)의 북촌(北村) 월량지(月良只)의 땅이 종남리(從南里)를 넘어 들어왔다. 관할[所領]은 군(郡)이 3이니, 해진(海珍)·영암(靈巖)·영광(靈光)이요, 현(縣)이 8이니, 강진(康津)·무장(茂長)·함평(咸平)·남평(南平)·무안(務安)·고창(高敞)·흥덕(興德)·장성(長城)이다. 해도(海島)가 4이니, 자은도(慈恩島)·압해도(押海島)·암태도(巖泰島)·흑산도(黑山島)이다.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나주목 / 해진군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나주목 / 영암군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나주목 / 영광군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나주목 / 강진현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나주목 / 무장현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나주목 / 함평현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나주목 / 남평현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나주목 / 무안현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나주목 / 고창현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나주목 / 흥덕현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나주목 / 장성현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남원 도호부 ⊙ 남원 도호부(南原都護府) 사(使) 1인. 본래 백제의 고룡군(古龍郡)이었는데, 후한(後漢) 건안(建安) 때 대방군(帶方郡)이 되었고, 조위(曹魏) 때에 남대방군(南帶方郡)이 되었다. 신라에서 백제를 병합하고 문무왕(文武王) 2년 계해【당나라 용삭(龍朔) 3년.】 에,당(唐)나라 고종(高宗)이 명하여 유인궤(劉仁軌)를 검교 대방주 자사(檢校帶方州刺史)로 삼았고, 신문왕(神文王) 4년 을유【당나라 측천후(則天后) 수공(垂拱) 원년.】 에 소경(小京)을 두었다가 경덕왕(景德王)이 남원 소경(南原小京)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太祖) 23년 경자【후진(後晉) 고조(高祖) 천복(天福) 5년.】 에 남원부(南原府)로 고쳤고, 충선왕(忠宣王) 2년 경술【원나라 무종(武宗) 지대(至大) 3년.】 에 다시 대방군(帶方郡)으로 하였다가 뒤에 남원군으로 고쳤고, 공민왕(恭愍王) 9년 경자【원나라 순제(順帝) 지정(至正) 20년.】 에 남원부(南原府)로 승격하였다. 본조 태종(太宗) 13년 계사【명나라 태종(太宗) 영락(永樂) 11년.】 에 예에 의하여 도호부(都護府)를 삼았다. 옛 속현(屬縣)이 1이니, 거령(居寧)이요,【본래 백제의 거사물현(居斯勿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청웅현(靑雄縣)으로 고쳐서 임실(任實)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에서 거령현(居寧縣)으로 고쳤다.】 향(鄕)이 10이니, 보유(寶有)·거리(居利)·덕성(德城)·백파(白波)·수도(守道)·아인(阿仁)·도지(道知)·경도(京徒)·남안(南安)·미아(未阿)요, 소(所)가 10이니, 소화척(所火尺)·신내하(申內河)·두가(豆加)·금성(金城)·용봉(龍峯)·웅음(熊陰)·기어천(於淺)·치등보(置等保)·양천(陽川)·흥복(興福)이요, 부곡(部曲)이 4이니, 원천(原川)·금안(金岸)·산동(山洞)·고정(古丁)이다. 진산(鎭山)은 교룡(蛟龍)이요,【부의 서북쪽에 있다.】 명산(名山)은 지리(地異)이다.【부의 동쪽에 있다.】 순자진(子津)【부의 서남쪽에 있는데, 그 남북 언덕에 층루(層樓)가 있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운봉(雲峯)에 이르기 22리, 서쪽으로 순창(淳昌)에 이르기 28리, 남쪽으로 구례(求禮)에 이르기 40리, 북쪽으로 임실(任實)에 이르기 31리이다. 호수가 1천 3백 호요, 인구가 4천 9백 12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1백 17명이요, 진군이 86명이요, 순천 수호군(順天守護軍)이 63명이요, 선군이 5백 67명이다. 토성(土姓)이 11이니, 양(梁)·정(鄭)·진(晉)【아전[人吏]의 성이 되었다.】 ·윤(尹)·양(楊)·견(甄)·황보(皇甫)·염(廉)·배(裵)·유(柳)·황(黃)이요,【백성(百姓)의 성(姓)이다.】 속성(續姓)이 3이니, 이(李)·임(林)·송(宋)이다.【모두 향리(鄕吏)이다.】 거령(居寧)의 성이 5이니, 백(白)·장(張)·한(韓)·이(李)·황(黃)이다. 땅이 10분의 2가 기름지며, 풍속이 경박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숭상한다. 간전(墾田)이 1만 2천 5백 8결이요,【논이 조금 많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뽕나무·삼·목화·닥나무·감·모과·칠(漆)이다. 토공(土貢)은 표범가죽·여우가죽·삵괭이가죽·족제비털[黃毛]·칠·석류·대추·감·배[梨]·지초·표전지(表箋紙)·자리요, 약재(藥材)가 새앙·쥐엄나무열매[莢]·녹각상(鹿角霜)·장군풀[大黃]·복령(茯)·곰쓸개[熊膽]·매화열매[梅實]·당귀(當歸)·밀[黃蠟]·연밥송이[蓮房]·겨우살이풀뿌리[麥門冬]·패랭이꽃이삭[瞿麥穗]·모란뿌리껍질[牧丹皮]·심황(深黃)·인삼(人蔘)이다. 토산(土産)은 은어[銀口魚]다. 자기소가 1이요,【부의 북쪽 아산리(阿山里)에 있는데, 중품이다.】 도기소가 2이다.【하나는 부의 서쪽 초랑리(草狼里)에 있고, 하나는 부의 동쪽 은령리(銀嶺里)에 있다.】 교룡산 석성(蛟龍山石城)【서북쪽에 있는데, 둘레가 1천 1백 25보이며, 성안에 샘이 6이 있고, 또 작은 시내가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한다. 군창이 있다.】 역(驛)이 4이니, 통도(通道)·은령(銀嶺)·오수(獒樹)·창활(昌活)이다. 만복사(萬福寺)【부의 서남쪽에 있다. 그 동쪽에 오층전(五層殿)이 있고, 서쪽에 이층전(二層殿)이 있으며, 전각 안에 철불(鐵佛)이 있는데, 길이 35척, 무게 1만 3천 근이며, 그 전각의 제도가 이상하다. 어느 시대에 창건한 것인지 모른다.】 월경(越境)은 옥과현(玉果縣)의 동성평(東省坪)의 땅이 큰 내를 건너서 부의 서쪽에 들어와 있다. 관할[所領]은 군(郡)이 1이니, 순창(淳昌)이요, 현(縣)이 9이니, 용담(龍潭)·구례(求禮)·임실(任實)·운봉(雲峯)·장수(長水)·무주(茂朱)·진안(鎭安)·곡성(谷城)·광양(光陽)이다.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남원 도호부 / 순창군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남원 도호부 / 용담현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남원 도호부 / 구례현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남원 도호부 / 임실현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남원 도호부 / 운봉현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남원 도호부 / 장수현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남원 도호부 / 무주현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남원 도호부 / 진안현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남원 도호부 / 곡성현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남원 도호부 / 광양현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장흥 도호부 ⊙ 장흥 도호부(長興都護府) 사(使) 1인. 본래 백제의 오차현(烏次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오아현(烏兒縣)으로 고쳐서 보성군(寶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에서 정안현(定安縣)으로 고쳐서 영암(靈巖) 임내(任內)에 속(屬)하게 하였다가 인종(仁宗)이 공예 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의 고향이라 하여 지장흥부사(知長興府事)로 승격시켰고, 원종(元宗) 6년 을축【원나라 세조(世祖) 지원(至元) 2년.】 에 또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시켰다가, 충선왕(忠宣王) 2년 경술【원나라 무종(武宗) 지대(至大) 3년.】 에 다시 장흥부로 강등시켰다. 고려 말에 왜구(倭寇)로 말미암아 임시로 내지(內地)로 옮겼고, 본조 태조(太祖) 원년 임신에 성(城)을 수령현(遂寧縣)의 중령산(中寧山)에 쌓아서 부(府)의 치소(治所)로 삼았고,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도호부(都護府)로 하였는데, 그 이듬해에 성이 좁다 하여 또 읍을 수령현의 옛터에 옮겨서 성을 쌓았다. 별호는 정주(定州)【성종(成宗) 때 정한 것이다.】 또는 관산(冠山)이라고 한다. 옛 속현(屬縣)이 5이니, 회령(會寧)은 본래 백제의 마사량현(馬斯良縣)이었는데, 신라에서 대로현(代勞縣)으로 고쳐서 보성군(寶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회령현으로 고쳐서 그대로 따랐다가 뒤에 내속(來屬)시켰다. 수령(遂寧)은 본래 백제의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이었는데, 신라에서 마읍현(馬邑縣)으로 고쳐서 보성의 영현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수령현으로 고쳐서 영암(靈巖)의 임내(任內)로 하였다가 뒤에 내속(來屬)시켰다. 장택(長澤)은 본래 백제의 계천현(季川縣)이었는데, 신라에서 계수현(季水縣)으로 고쳐서 보성의 영현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장택현으로 고쳤던 것을 그대로 따랐다가, 뒤에 내속시켰다. 두원(荳原)은 본래 백제의 두힐현(豆縣)이었는데, 신라에서 강원현(薑原縣)으로 고쳐서 낙안군(樂安郡)의 영현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두원현으로 고쳤던 것을 그대로 따랐다가 뒤에 내속시켰다. 도양(道陽)은 옛 도량도 부곡(道良道部曲)이다. 향(鄕)이 6이니, 도내산(徒內山)·아서(阿西)·어산(語山)·유치(有恥)·안양(安壤)·가을전(加乙田)이요, 다소(茶所)가 13이니 요량(饒良)·수태(守太)·칠백유(七百乳)·정산(井山)·가을평(加乙坪)·운고(雲高)·정화(丁火)·창거(昌居)·향여(香餘)·웅점(熊岾)·가좌(加佐)·거개(居開)·안칙곡(安則谷)이다. 진산(鎭山)은 수인(修因)이다.【부의 북쪽에 있다.】 천관산(天冠山)【부의 남쪽에 있는데, 옛 이름은 천풍(天風)이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보성에 이르기 33리, 서쪽으로 강진(康津)에 이르기 6리, 남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34리, 북쪽으로 능성(綾城)에 이르기 40리이다. 호수가 2백 76호요, 인구가 1천 41명이었다. 군정은 시위군이 21명이요, 영진군(營鎭軍)이 22명이요, 선군이 1백 87명이다. 토성(土姓)이 5이니, 조(曹)·오(吳)·혜()·임(任)·정(丁)이요, 내접성(來接姓)이 3이니, 이(李)【덕은(德恩).】 ·송(宋)【염주(鹽州).】 ·최(崔)【탐진(耽津).】 이요, 망성(亡姓)이 1이니 최(崔)이다.【화순(和順)에서 왔다.】 회령(會寧)의 성이 5이니 마(馬)·형(邢)·이(李)·주(周)·성(成)이요, 내접성(來接姓)이 1이니, 백(白)【직산(稷山).】 이다. 장택(長澤)의 성이 4이니, 임(林)·고(高)·윤(尹)·오(吳)요, 내접성(來接姓)이 1이니, 선(宣)【보성(寶城).】 이다. 수령(遂寧)의 성이 4이니, 위(魏)·박(朴)·조(曹)·함(咸)이요, 두원(荳原)의 성이 5이니, 오(吳)·허(許)·유(庾)·신(申)·종(鐘)이요, 내접성(來接姓)이 3이니, 노(盧)【서경(西京).】 ·박(朴)【보성.】 ·이(李)【남양(南陽).】 이다. 땅이 기름지며, 기후가 따뜻하다. 간전(墾田)이 6천 1백 24결이요,【논이 조금 많다.】 토의(土宜)가 오곡·삼·닥나무·밤·석류·목화이다. 토공(土貢)은 족제비털[黃毛]·칠·꿀·말린 죽순·표고·배·유자(柚子)·전복·말린 홍합·붉은 큰새우·삵괭이가죽·여우가죽·잘[山獺皮]·자리·차·석이·비자·대방석·상곽(常藿)·분곽(粉藿)이요, 약재(藥材)는 호라비좆뿌리[天門冬]·녹용·흰매화[白梅]·겨우살이풀뿌리[麥門冬]·당귀(當歸)·검산풀뿌리[續斷]·암눈비앗씨[荒蔚子]·애기풀[遠志]·방풍(防風)·계소(鷄蘇)요, 토산(土産)은 은어·김·송이다. 자기소가 1이요,【부의 동쪽 20리 소아곡리(所兒谷里)에 있는데, 하품이다.】 도기소가 1이다.【부의 남쪽 10리 묵방리(墨方里)에 있는데, 중품이다.】 읍석성(邑石城)【둘레가 3백 36보(步)이다.】 두원 목책 도니성(荳原木柵塗泥城)【둘레가 80보(步)이다.】 역(驛)이 1이니, 벽사(碧沙)요, 목장(牧場)이 2이니, 도양관(道陽串)【국마(國馬) 4백 21필(匹)을 방목(放牧)한다.】 우슬관(亐瑟串)이다.【말이 1백 34필이다.】 관방(關防)은 녹도(鹿島)·회령포(會寧浦) 등 두 포구다.【병선이 머무른다.】 봉화가 5곳이니, 부의 동쪽 팔전(八)【동쪽으로 순천(順天) 백야 봉화(白也烽火)에 응하고, 서쪽으로 보성(寶城) 천등(天登)에 응한다.】 또 부의 동쪽 장기(場機)【동쪽으로 보성 천등(天登)에 응하고, 서쪽으로 보성 정흥(正興)에 응한다.】 또 부의 동쪽 전내현(全乃峴)【동쪽으로 보성 정흥(正興)에 응하고, 서쪽으로 어불(於佛)에 응한다.】 ·어불(於佛)【동쪽으로 전내현(全乃縣)에 응하고, 서쪽으로 강진(康津) 수인산(修因山)에 응한다.】 부의 남쪽 천관산(天冠山)이다.【북쪽으로 어화(於火)에 응하고, 서쪽으로 강진 원포(垣浦)에 응한다.】 관할[所領]은 도호부(都護府)가 2이니, 담양(潭陽)·순천(順天)이요, 군(郡)이 3이니, 무진(茂珍)·보성·낙안(樂安)이요, 현이 7이니, 고흥(高興)·능성(綾城)·화순(和順)·동복(同福)·옥과(玉果)·진원(珍原)·창평(昌平)이다.【본래 광주목(光州牧)의 관할이었는데 선덕(宣德) 5년 4월 일에 광주(光州)를 무진군(茂珍郡)으로 강등하고, 본부(本府)로써 계수관(界首官)을 삼았다.】 해도(海島)가 3이니 초도(草島)·이매도(伊每島)·내덕도(內德島)이다.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장흥 도호부 / 담양 도호부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장흥 도호부 / 순천 도호부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장흥 도호부 / 무진군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장흥 도호부 / 보성군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장흥 도호부 / 낙안군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장흥 도호부 / 고흥현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장흥 도호부 / 능성현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장흥 도호부 / 창평현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장흥 도호부 / 화순현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장흥 도호부 / 동복현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장흥 도호부 / 옥과현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장흥 도호부 / 진원현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제주목 ⊙ 제주목(濟州牧) 도안무사(都安撫使)【3품(三品)이면 안무사(安撫使)라고 칭한다.】 ·판관(判官)【겸감목관(兼監牧官).】 ·교수관(敎授官)·검률(檢律)·의학 교유(醫學敎諭). 본주(本州)는 전라도의 남쪽 바다 가운데 있다. 그 주(州)의 고기(古記)에 이르기를,“태초(太初)에는 사람과 물건이 없었는데, 신선[神人] 세 사람이 땅으로부터 솟아나왔다. 지금도 주산(主山) 북쪽 기슭에 ‘모흥(毛興)’이라 하는 구멍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곳이다. 맏을 ‘양을나(良乙那)’, 둘째를 ‘고을나(高乙那)’ 세째를 ‘부을나(夫乙那)’라고 하였다. 세 사람은 황량한 땅에서 사냥을 하여서 그 가죽으로 옷을 해 입고 그 고기로 식량을 하였다. 하루는 자주 색깔로 칠하여 봉(封)한 목함(木函)이 두둥실 떠서 동쪽 바닷가에 이르는 것을 보고 가서 열어보니, 목함(木函) 속에 또 석함(石函)이 있었다. 붉은 띠[帶]에 자주색 옥을 입은 사자(使者) 한 사람이 있어서 석함을 열었는데, 푸른 옷을 입은 처녀[靑衣處女] 세 사람과 망아지·송아지와 오곡(五穀)의 종자가 나왔다. 이어 말하기를, ‘나는 바로 일본의 사자입니다. 우리 임금께서 이 세 따님을 낳으시고, 이르시기를, 「서쪽 바다 가운데 있는 산[嶽]에 신선[神子] 세 사람이 내려와서 장차 나라를 세우려고 하나 배필이 없다.」 하시고, 이에 신(臣)에게 명하여, 세 따님을 모시고 오게 하였습니다. 당신들은 마땅히 짝을 이루어서 대업(大業)을 이루도록 하십시요.’ 하고는, 사자(使者)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세 사람이 나이 차례대로 나눠서 혼인하고, 샘이 좋고 땅이 기름진 곳에 나아가서 화살을 쏘아 살 땅을 선택하였는데, 양을나가 사는 데를 ‘제일도(第一都)’, 고을나가 사는 데를 ‘제이도(第二都)’, 부을나가 사는 데를 ‘제삼도(第三都)’라고 하였다. 비로소 오곡(五穀)을 심고, 또 망아지와 송아지를 기르니 날로 부유하고 번창해갔다. 15대 손(孫)에 이르러, 고후(高厚)·고청(高淸)의 형제 세 사람이 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를 건너 탐진(耽津)에 이르렀는데, 대개 신라가 번성할 때였다. 그때 객성(客星)이 남방(南方)에 나타나니,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다른 나라 사람이 내조(來朝)할 징조입니다.’ 하였다. 세 사람이 드디어 신라에 입조(入朝)하매, 왕이 가상히 여겨서, 맏[長子]을 ‘성주(星主)’라고 하니, 그 움직인 별을 상징한 것이요, 둘째[二子]를 ‘왕자(王子)’라고 하니, 왕이 고청(高淸)으로 하여금 바지가랑이 밑으로 빠져 나가게 하고서 자기 아들같이 사랑하였으므로, 이렇게 이름지은 것이요, 막내[季子]를 ‘도내(都內)’라고 하고, 읍(邑)의 이름을 ‘탐라(耽羅)’라고 하니, 대개 신라 때에 처음으로 탐진(耽津)에 이른 까닭이었다. 각기 보개(寶蓋)와 옷과 띠를 주어서 돌려보냈다. 이로부터 자손이 번성하였고 본국[國家]을 정성껏 섬겼으며, 고(高)를 성주(星主)로, 양(良)을 왕자(王子)로, 부(夫)를 도상(都上)으로 고쳤고, 뒤에 또 양(良)을 양(梁)으로 고쳤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린 해동 안홍기(海東安弘記)에 구한(九韓)을 열거(列擧)하였는데 탁라(羅)가 네 번째에 있다. 백제 문주왕(文周王) 2년 병진【유송(劉宋) 후폐제(後廢帝) 원휘(元徽) 4년.】 에 탐라국 사자(耽羅國使者)에게 은솔(恩率)이란 벼슬을 주었고, 동성왕(東城王) 20년 경신【남제(南齊) 태조(太祖) 건원(健元) 2년.】 에 탐라에서 공부(貢賦)를 바치지 아니한다 하여 왕이 친정(親征)하여 무진주(武珍州)에까지 이르렀는데, 탐라에서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어 죄를 빌었으므로 이에 중지하였다.”하고, 주(註)에 이르기를, “탐라는 곧 탐모라(耽牟羅)이라.”하였다. 백제가 망하니, 신라 문무왕(文武王) 원년 임술【당나라 고종(高宗) 용삭(龍朔) 2년.】 에 탐라국주(耽羅國主) 좌평(佐平)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와서 항복하였다.【좌평은 백제의 벼슬 이름이다.】 고려 숙종(肅宗) 10년 을유【송나라 휘종(徽宗) 숭녕(崇寧) 4년.】 에 탁라(羅)를 고쳐서 탐라군(耽羅郡)으로 하였고, 의종(毅宗) 때 현령관(縣令官)으로 하였다. 충경왕(忠敬王) 11년 경오【송나라 도종(度宗) 함순(咸淳) 6년.】 역적 김동정(金同正)이 삼별초(三別抄)를 거느리고 탐라에 들어가서 난(亂)을 일으켰는데, 4년이 지나 14년 계유【몽고 세조(世祖) 지원(至元) 10년.】 에 시중(侍中) 김방경(金方慶)에게 명하여 토벌하여 평정하게 하였다. 충렬왕(忠烈王) 3년 정축【지원(至元) 14년.】 에 원나라 조정(朝廷)에서 목마장(牧馬場)으로 삼았는데, 21년 갑오에 왕이 원나라에 들어가서 탐라를 돌려주기를 청하니, 원나라 승상(丞相) 등이 상주(上奏)하여, “그 탐라를 고려에 돌려주는 것이 옳겠다.”하는 성지(聖旨)를 받았고, 익년(翌年) 을미【원정(元貞) 원년.】 에 탐라를 고쳐 제주로 하였고, 비로소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 최서(崔瑞)를 목사(牧使)로 삼았으며, 26년 경자【대덕(大德) 4년.】 에 원나라 황태후(皇太后)가 또한 내구마(內廐馬)를 방목(放牧)하였는데, 31년 을사【대덕 9년.】 에 도로 본국(本國)에 환속하였다. 충숙왕(忠肅王) 5년 무오【원나라 인종(仁宗) 연우(延祐) 5년.】 에 초적(草賊) 사용(士用)·엄복(嚴卜)이 군사를 일으켜 난(亂)을 꾸미니, 본토 사람 문공제(文公濟)가 군사를 일으켜 이를 모두 잡아 죽이고 조정에 보고하였으므로, 다시 관리를 두었다. 공민왕(恭愍王) 18년 기유【명(明)나라 홍무(洪武) 2년.】 에 원나라의 목자(牧子) 합치(哈赤)가 발호(跋扈)하여 관리를 살해하였는데, 6년이 지나 23년 갑인 8월에 나라에서 도통사(都統使) 최영(崔瑩)을 보내어 합치(哈赤)를 토벌하여 멸망시키고 다시 관리를 두었다. 본조 태종(太宗) 2년 임오에 성주(星主) 고봉례(高鳳禮)와 왕자(王子) 문충세(文忠世) 등이 성주와 왕자의 호가 너무 참람한 것 같다고 하여, 고치기를 청(請)하였으므로, 성주를 좌도지관(左都知管)으로, 왕자를 우도 지관(右都知管)으로 하였다. 진산(鎭山)은 한라(漢拏)이었다. 주의 남쪽에 있는데, 일명 두무악(頭無岳) 또는 원산(圓山)라 한다. 그 고을 관원이 제사를 지내는데, 둥그스름하고 높고 크며, 그 꼭대기에는 큰 못이 있다. 호수가 5천 2백 7호요, 인구가 8천 3백 24명이요, 군정은 2천 66명이다.【마군(馬軍)이 8백 43명이요, 보군(步軍)이 1천 2백 23명이다.】 토성(土姓)이 고(高)·양(梁)·부(夫)요, 인물은 문하 시랑(門下侍郞) 고조기(高兆基)이니, 의종(毅宗) 때 사람이다. 그 땅의 기후가 따뜻하며, 풍속이 미욱하고 검소하다. 간전(墾田)이 3천 9백 77결이요,【논이 31결이다.】 토의(土宜)가 밭벼[山稻]·기장·피·콩·메밀·보리·밀이다. 토공(土貢)이 대모(玳瑁)·표고·우무[牛毛]·비자·감귤·유자·유감(乳柑)·동정귤(洞庭橘)·금귤(金橘)·청귤(靑橘)·돌귤[山橘]·전복·인포(引鮑)·퇴포(槌鮑)·조포(條鮑)·오징어·옥두어(玉頭魚)·곤포(昆布)·돌유자나무[山柚子木]·이년목(二年木)·비자나무[榧子木]·좋은 말[良馬]이요, 약재는 진피(陳皮)·마뿌리[山藥]·석골풀[石]·초골풀[草]·소태나무열매[川練子]·구리대뿌리[白芷]·팔각(八角)·영릉향(零陵香)·오배자(五倍子)·치자·향부자(香附子)·모과·묏미나리[柴胡]·푸른귤껍질[淸皮]·백변두(白扁頭)·바곳[草烏頭]·엄나무껍질[海東皮]·후박(厚朴)·오징어뼈·두충(杜)·순비기나무열매[蔓荊子]·석결명(石決明)·끼무릇뿌리[半夏]·누른국화[黃菊]·녹용·박상(舶上)·회향(茴香)·탱자껍데기[枳殼]다. 읍석성(邑石城)【둘레가 9백 10보이다.】 봉화가 9곳이니, 주의 동문(東門)【동쪽으로 별도(別刀)에 응한다.】 별도(別刀)【동쪽으로 원당(元堂)에 응한다.】 ·원당(元堂)【동쪽으로 서산(西山)에 응한다.】 ·서산(西山)【동쪽으로 입산(笠山)에 응하고, 또 동쪽으로 정의현(旌義縣) 지말산(只末山)에응한다.】 ·남문(南門)【서쪽으로 도도리산(道道里山)에 응한다.】 ·도도리산(道道里山)【서쪽으로 수산(水山)에 응한다.】 ·수산(水山)【서쪽으로 고내(高內)에 응한다.】 ·고내(高內)【서쪽으로 곽산(郭山)에 응한다.】 ·곽산(郭山)【서쪽으로 판포산(板浦山)에 응하고, 또 서쪽으로 대정현(大靜縣) 차귀산(遮歸山)에 응한다.】 이다. 목장【말이 3천 3백 52필이다.】 이상한 일[靈異]은 고려 목종(穆宗) 5년 임오 6월에 탐라산(耽羅山)에 구멍 네 개가 뚫려서 싯뻘건 물이 치솟아 올랐고, 10년 정미에는 바다 가운데 산 하나가 솟아나왔다. 탐라에서 보고하니, 왕이 태학 박사(太學博士) 전공지(田拱之)를 보내어 가서 조사하게 하였다. 탐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이 솟아나오는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고, 벼락치는 것같이 땅이 움직였습니다. 무릇 7주야(晝夜)가 지나서야 비로소 개었는데, 산에는 풀과 나무가 없고, 연기만이 그 위를 덮고 있습니다. 바라다 보니, 석류황(石流黃) 같기도 하여 사람이 갈 수가 없습니다.”하였으나, 전공지가 몸소 산 아래에까지 나아가 그 모양을 그려서 나라에 바쳤다. 속설(俗說)에 전하기를, “한라산 주신(主神)의 막내 동생[季弟]이 살아서 거룩한 덕(德)이 있었으므로 죽어서 명신(明神)이 되었는데, 마침 호종단(胡宗旦)이 이 땅을 진무(鎭撫)하고 제사를 지낼 때를 당하여 신(神)이 배를 타고 강남(江南)으로 향하였다. 신(神)이 매[鷹]로 화(化)하여 날아서 돛대 꼭대기에 올라 앉았는데, 조금 있다가 북풍이 크게 불어 호종단의 배가 난파[擊碎]되어 서쪽 지경에 침몰하니, 매가 날아서 섬의 암석(巖石) 사이로 올라갔다. 나라에서 그 신령함[靈異]을 포장(褒奬)하여 식읍(食邑)을 하사하고, 광양왕(廣壤王)으로 봉하였는데, 해마다 나라에서 향(香)과 폐백(幣帛)을 내려서 제사를 지낸다.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제주목 / 정의현 ○ 세종 151 지리지 / 전라도 / 제주목 / 대정현 [출처] 세종실록 지리지 / 전라도|작성자 반딧불이 |
출처: 광양향토문화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빈들에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