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적인 독과 정서적인 양분은 종종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섞여 있다. 설령 이 두 요소를 구분할 수 있다 해도, 둘 중 하나를 배제하고 흡수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정서적인 양분을 흡수하려면 정서적인 독소도 함께 흡수할 수 밖에 없다.
만족하지 못하는 삶에서 상당한 양의 독소에 적응하며 살아온 사람들은 정작 오염되지 않은 양분을 흡수할 기회들이 있어도, 그 기회를 피하는 반응양식을 발달시킨다. 상당한 양의 정서적인 독소가 없다면 삶이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심리적인 독소가 섞이지 않은 양분을 아예 흡수하지 못한다.
한 노숙자 다큐멘터리에서 폭력적인 가족으로부터 도망 나와 미국으로 이민을 간 한 여성의 얘기를 다루었다.
마침내 자신을 사랑해 주는 남편을 만나 가장 행복한 순간에 마약 중독에 빠졌다고 했다.
그리고 남편은 자신 때문에 고통에 시달리다가 암으로 사망했다고 여성은 자책했다.
가장 행복한 순간, 왜 불행을 자초 했을까.
여기에는 행복한 순간을 이질적으로 여기고 파괴하고 싶은, 근본적으로 자기 파괴적일 수 밖에 없는 외상이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여성의 어린시절부터 이어온 가정의 폭력, 그로부터 도망친 곳에서 겪여야 했던 성 폭력과 같은 고통스러운 몸의 역사가 마음에도 새겨진 결과는 아닐까
자신은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존재라는 깊은 자기 혐오와 그 행복이 사라질 수 있다는 불안이 그녀를 압도한 게 아닐까
그래서, 차라리 마약이라는 현실을 지울만한 위안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만나 사랑했다는 것은, 와전히 사랑을 증오할 수 없었던, 누군가로부터 사랑 받았던 흔적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때론 사랑의 흔적은 더 깊은 불행으로 빠지게 만드는 도와선이 되기도 한다.
사랑을 믿는다는 것은 배신 당할 위험, 상대를 갑자기 잃을 위험, 버림 받을 위험까지, 감당해야 할 정서적 불안이 어마어마 하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사랑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돈이 없어서, 사람이 없어서, 관심이 없어서, 라고 여러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사랑을 결심하는데 있어 너무 큰 위험을 견뎌야하는 부담을, 우리 사회는 점점 효울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미루는 것 같다.
내가 투자한 에너지를 보상 받지 못할 가능성을 염두해야 하는,
그토올 비효율적인 사랑 앞에서, 우리는 차라리 돈을 버는 것을 주고 받고가 명확한 관계만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 노숙자 여성을 끝내 쉼터로 오게 하고 뒤늦게 나마 단약을 하게 만든건, 전 남편의 그토록 비휴율적 사람이었으리라, 여성은 후회하고 회개하며 죄책감을 부여잡고 현신을 직시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모든게 파괴된 그 현실 앞에서 가족으로부터 버림 받은 자신이 남편에게 사랑 받았음을 기억했다.
우리는 이제 효율적인 세상이 주는 편리함과 이면의 파괴성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우리 삶이 편리해지면 편리할수록 자원은 고갈되어간다.
그렇다면 비효율적인 사랑이 주는 이면의 진정성도 있지 않을까
나는 그걸 믿어보기로 한다.
그리고 두러움에 맞서 믿어보자고 권유한다.
사랑은 주어지는게 아니라 두려움에 맞서 진실을 향햐가는 적극적인 정신적 성장의 증거이다.